◈계시록은 시공을 넘나 들어야 보인다 계1:4~8 2023.12.01.
본문은, 계시록을 우리가 본격적으로 그 내용을 접하기 전에
우리의 의식 수준을 오리엔테이션 하는 부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우리의 사고가 아무 장애 없이 넘나 들지 않으면
계시록의 내용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관련글 : 승천하라 rfcdrfcd.tistory.com/15981357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대로, 계시록이 편지의 형식으로 쓰이게 된 취지는
아시아(오늘날 튀르키예 서쪽)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 나오는 일곱 교회만, 이 서신을 읽은 게 아니에요.
그 외에도 그 아시아 지역에서만 골로새 교회도 있었고, 드로아 교회도 있었고,
그 외 다른 교회도 있었지만
'일곱' 이라고 선택을 하신 이유는,
앞으로 이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있던 아시아 지역의 교회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예루살렘이나 로마에 있는 교회까지 다 포함해서
예수님이 재림 할 때까지 이 땅에 있는 하나의 교회,
그 전체 교회를 향하여 기록 되었음을
'일곱' 이라는 완전 숫자를 통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보여질 수 있는 영적인 상태를 일곱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1:4
근데 이렇게 계시록에 소개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여기서 '오실 이'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자꾸 연상 하게 됩니다만, 그보다는
그 뜻은 '미래가 내게 다가오면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을 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각에 계시고,
이 시간 이전에 과거에도 계셨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서 계시는 분,
미래에도 계시지만, 우리가 미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잖아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어느 시간 대에도 계신다' 라는 의미가 우선적으로 와 닿습니다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전혀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분"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라는 시간의 흐름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 흐름 밖에 계신 분이십니다.
시간의 흐름 밖에 계시기 때문에
4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자기의 '지금'에서 만났고,
3천 년 전에 태어난 다윗도 자기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 때, 예수님도 당신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계셨고,
그리고 지금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라는 시간의 흐름 바깥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내려오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시간 바깥에 보좌를 두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차원은 '영원'이라는 차원이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 관계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즉 영원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에 갖춰서 살고 있는 우리가 만나야 된다.. 라는 겁니다.
▲'지금 now' ..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이 얘기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지금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면서
만나는 문제나, 만나는 과제나, 일들이 있잖아요.
이것이 사실은 전부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 되고, 다스려 지고, 이끌려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는 것이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 마음에 큰 불안, 걱정, 두려움을 갖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가야 되는 것이지,
시관과 공간 안에 갇혀 있으면서,
그 문제나, 그 과제나, 그런 인생의 환경을 다르게 바꾸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잘못됐다는 것이에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시간과 공간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영적인 세계와 연결이 되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만드시고 주관 하시는 하나님께로 가서,
우리의 마음은 지금 '영원'으로 연결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는 것은, '영원'과 '시간'의 흐름이 접하는 접점 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접한 접점인 지금의, 이 찰나에서
우리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 영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영영 없습니다.
근데 '지금' 이라는 것은 언제나 지금이잖아요.
20초 뒤의 미래도 결국은 '지금'으로 오는 것이고
또 '지금'으로 왔던 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로 빠져나가고
나는 언제나 '지금'에 있습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는, 이상한 시간인 거예요.
지금은 언제나 지금 이니까요.
왜 이렇게 신비한 '지금'이라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을까요?
이 '지금'이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영원으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는 타이밍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은 흐름이 없어요. 언제나 지금 이고, 항상 지금 이고, 쉬지 않고 '지금'입니다.
이 '지금'은,
과거로 따라 흘러간다든지, 아니면 미래를 향해 갔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근데 '지금'이 얼나나 중요한가 하면,
그렇게 영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지금 밖에 없습니다. 미룰 수가 없습니다.
'내일 영원으로 갈래, 나중에 갈래'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시간과 공간을 빠져 나가지 않는 한
하나님과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관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하지 못 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벌어졌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 문제에 답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싶으십니까?
그럴려면 시간과 공간을 빠져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 하시고 만드신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근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러면 그 시간과 공간 전체를 만드신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언제?
지금!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라는 이 표현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우리가
지금이라는 이 타이밍을 통해서
반드시 시간과 공간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음'을 말하고자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관계 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한 인격(나) 안에서 너무너무 우습게 여겨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 거예요.
언제나 '지금'이라는 타이밍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는 것(영생으로 가는 것)을 과제로 삼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 이고,
이런 의식이 없으면 계시록 의미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4b
그래서 그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을 말해요.
여기서 '일곱' 이라는 것도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완전함을 뜻합니다. 즉 '완전한 영'이에요.
어떤 면에서 완전한 영입니까?
보좌의 앉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보좌 앞에 성령이 계십니다.
근데 일곱 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완전하십니다.
이 얘기는, 아버지의 전능하심 등 모든 속성과 더불어
아버지의 생각과 뜻을 실시간으로 복사된 영이라는 말씀이세요. 똑같다는 거죠.
그러면 보좌 앞에 성령이 위치 하신다는 이 얘기는 무엇일까요?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관계하는 모든 상대 자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얘기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시면,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질 수도 없고,
지속될 수도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상대하고, 하나님이 관계하는 모든 대상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어떻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인데
어떻게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바로 보좌 앞에 계신 성령님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복사된 영으로서... 실시간 복사되십니다.
실시간 복사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생각하고, 지금 뜻하고 계시는 것이
그대로 성령님께 다 복사된 채로 계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성령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에게로 임하지 않으시면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과 단절이 되는 거죠.
근데 그 단절을 극복하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교제와 사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넘어서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관계할 수 있게 해주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해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대상, 귀에 들리는 대상, 만질 수 있는 대상보다 더 뚜렷한 대상으로
우리에게 상대자가 되게 해주시는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에요.
이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해주신다' 는데 포인트가 맞춰져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생각하면
계시록 얘기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 있을 먼, 알 수도 없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의 미래를 말하는 게 아닌 거예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사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음으로써
시간 공간 바깥에 계신 영원 속의 하나님과
마치 몸으로 만나는 가족을 관계하는 것보다
더 뚜렷이 더 쉽게 하나님과 관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 상황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그 예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사탄 마귀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이)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신 하나님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관계를 맺고 있는 나보다
이 우주 속에서 더 큰 사건은 없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미국이 어떻고, 중국이 어떻고, 뭐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이런 정도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우주보다 더 크신, 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개인의 역사를
주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나'라는 미물이 관계를 하기 때문에.. 더 어마어마한 사건인 것입니다.
13억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서
4억 명의 미국에 비해서
2억 명의 일본에 비해서
5천만 명의 대한민국에 비해서
'나 한 사람'이라는 개인의 존재감은 너무 미미 합니다.
근데 그렇게 미미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하나님이 지구 위 2백 개의 모든 나라의 임금과 대통령과 재벌들을 다 모아도
티끌도 안 될 정도인 내가, 크신 그런 하나님을
유일한 상대로 관계하게 된다는 이 사건 자체가.. 어마어마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말해서 '내가 하나님 믿어요'
라고 간단히 말하는 그 사건이
요한계시록 전체가 겨냥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어요!'
'그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 줄 아느냐' 이런 얘기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건이 없어요.
'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창조주를 믿는다.
그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
나같은 미물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딨어요?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일이 없기 때문에
마귀나 귀신 들의 공격은, 바로 이 일에 집중되는 겁니다.
그래서 급한 마음으로 사도요한이
'너희가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과 관계하게 되는 이 일에 대해서,
이제 사탄 마귀들이 어떻게 공격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나 어떤 승리가 일어나게 될 것인가를 기록하겠다...'
한 것이 요한계시록 이라는 거요.
그 일에 대해서 보여주신 대로 기록을 하겠다.. 해서 나타난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지금 딴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내가 무슨 승진을 하느냐, 못 하느냐?
우리 자식들이 어떤 사회적인 위치에 서느냐, 마느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런 상황을 알아야,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1:5
그래서 마지막에 보면, 성령님의 대한 얘기를 하신 다음에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데
'충성된 증인'이란,
시간과 공간이 전부인 줄 알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간과 공간 바깥에 진짜 참된 세계가 있고,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에 대해 증언을 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임금의 머리가 되신다'는 뜻은,
주석책들을 보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대해 주권자 이시다' 그냥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현재
일등 존재감의 대상이 누굽니까? 여러분의 남편이에요?
그럼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임금인 거예요.
여러분에게 존재감이 일등 자리에 누가 있어요? 여러분의 자식이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의 자식이, 여러분의 임금인 거예요.
그러므로 '모든 임금들이 머리가 되신다'는 뜻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내가 느끼게 되는 존재감이 일등 자리에는
이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그 어떤 존재도, 일등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예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존재감의 일등 자리에 서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게 필요해요?
그렇게 예수님이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되심으로만,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관계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셨다는 겁니다.
'임금들 위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임금들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우리 마음 속에 현재 일등의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 공간 속에 어떤 존재보다 위에 있는 분이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의 임금이 되는 존재들,
존재감의 일등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쓸려져 나가고, 죽어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태어 나셨다'는 얘기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으로써 끝이 납니다.
'죽음'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의 끝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죠.
근데 주님은 죽으셨어요.
그 죽음을 뚫고 다시 생명의 세계로 나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한다'는 것은
죽음이 이제 영원히 내게서 사라졌다.는 얘기예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특징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임하신 예수님이, 그 죽음을 뚫고 나와,
생명으로 살아나시는 바람에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면
죽음이 발생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우리 마음이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일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
지금 당장 여러분 몸으로 만나는 일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몸이 아프다, 회사의 일이 생겼다, 가정의 일이 생겼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내 육체로 만나고 있는 모든 상황, 모든 문제에서
이 시간과 공간 바깥 세계와의 연결이, 관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만나는 문제를 붙잡지 말고,
시간과 공간 밖으로 나가라는 거예요.
'죄로 부터 해방해 주셨다' 라는 말씀은,
죄가 뭡니까?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지음받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 마음이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힌다는 게 뭐예요?
내 만족도, 기쁨도, 그리고 존재감도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찾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안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찾고,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고,
이랬으면 좋겠고, 저랬으면 좋겠다 라는 소원을 갖게 되고,
어딜 가면 좋겠다, 무엇을 가지면 좋겠다.. 이런 식의 소원은
전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이게 모두 다 죄악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시간과 공간 밖이에요.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문제는,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가야만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라가 임하게 해 주셨다는 거예요.
나라가 뭐예요?
이 땅에 내 몸이 있어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 위로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임하는 상태예요.
시간과 공간 밖으로 내 마음이 나갈 때에만,
시간과 공간 안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이 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우리 "마음"은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육신'은 여기 속에 있지만요)
이것을 마귀와 귀신들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공략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 묶어 두려고 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나같은 미물이, 지구에 있는 나라와 민족 뿐 아니라
우주의 수많은 별들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쥐시고 이끌어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 꼴을.. 배가 아파서 못 보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라는 미물을 그렇게 사랑하는 그 상황을,
시샘이 나고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보세요, 창조주 하나님이,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그 무한한 우주 보다 독생자가 더 귀해요.
근데 그 독생자를 나 때문에 투입하셨어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보다, 마귀 귀신들이 전력을 다해서 공략해야 될 목표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보다 더 큰 존재나 사건이 없어요.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생겼습니까, 못 생겼습니까? 그런 건 문제가 안 돼요.
내가 지금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위치 입니까?
부자입니까, 가난합니까?
이런 건 문제가 안 돼요.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한 나라가 망하고 흥 하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이 인격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즉 그래서 영원이 일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일상인 상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런 체질이 되어야만, 계시록의 의미를 온전히 흡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짜로 사방이 막힌 상태가
벽이 허물어 지고, 장애가 없어지고, 막힌 것이 뚫리면서
온전한 자유로 내게 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과 공간이 가벼이 여겨지고,
영혼의 세계가 나의 일상의 현장이 되는 놀라운 신비로운 은혜가
계시록을 읽어 나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확인되어
진짜 내 것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