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23. 룻 2 - 그 한 사람 (룻 2:1-4) - YouTube
◈룻, 그 한 사람 (룻2강) 룻2:1~4 데스티니23강 ☞시리즈 보기
◑룻1강 복습
본문은 룻이 보아스를 만나서 오벳을 출산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죠.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룻이 되죠.
룻의 데스티니는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을 낳는 거죠.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즉 데스티니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우연히 만드신 것이 아니고
섬세한 계획 가운데 만드셨습니다...
근데 이 계획 가운데 중요한 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무엇인가를
잉태하고 출산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유업을 남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평생의 삶을 통해서 '믿음이 이런 것이다' 라는 유업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아브라함이 남긴,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 여정을 통해서 잉태하고 출산한
'믿음'이라는 영적인 유업들을 축복으로 누리게 되지요.
또 다윗은 평생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무엇인지'
또 '다윗의 장막'을 통해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자기 평생의 삶을 통해서 잉태하고 출산해서 후대에 남겼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남겼고요.
어쨌든지간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땅 가운데 무엇인가를 잉태하고 낳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데스티니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어 보면, 잉태하고 낳는 것을 큰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자녀들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큰 축복이라 가르치고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굉장한 저주라고 여겼어요.
구약은 신약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 가운데 무엇인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큰 축복이라는 거에요.
반대로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저주지요.
이것은 육신의 자식만이 아니라, 영적인 자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항상 선한 것만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1: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 낳는다'고 했죠.
우리 삶 가운데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꼭 좋은 것만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우리 삶 가운데 전혀 잉태하지 말아야 될 것은 잉태하고
출산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피해가 되고
또 사람들에게 저주가 되지요.
룻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오벳을 잉태하여 낳게 되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출산하게 되는지"
그리고 "오벳을 잉태하는데 있어서 정말 좋은 길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룻의 이야기에서 오벳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해서 출산코자 하는 그 '믿음의 유업들'이에요.
믿음, 능력, 예배, 인내, 성품 등 하여간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평생의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한 평생 인생을 살고 나서 가면
후대 사람들이 평가하는게 있을 거 아니에요.
'와~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런 평가라든지
'와~ 이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고난을 인내하며 통과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사도적인 은사가 있었다'
하여간 무엇이든지 간에, 그 사람의 삶에 대해 평가하는게 있을 거 아니에요.
이것이 믿음의 유업 또는 유산이지요.
오벳은 이것(믿음의 유업)을 상징하고 있어요.
자 그래서 지난번 첫 번째 설교에서
어떻게 오벳을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잉태와 출산의 원리에 대해서
큰 거 두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1) 첫 번째는 <반대의 원리>였어요. ☞룻1강 rfcdrfcd.tistory.com/15981373
그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이잖아요.
예루살렘의 뜻이 뭐냐면 '파운데이션 오브 피스'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평화의 기초란 뜻이에요. *예루 foundation + 살렘 peace
예루살렘을 평화의 땅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곳인데
이 평화의 땅 예루살렘에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어요.
계속 전쟁이었어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이라는 그 땅의 데스티니 자체가 '평화'이기 때문에
사단이 전혀 반대되는 것으로 그 데스티니를 막아 버린다는 거예요. 끊임없는 전쟁으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꼭 좋은 것들, 내가 잘하는 것들만을 통해서
열매 맺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한으로 생각하는 것들,
'난 이것 때문에 안 되고, 난 이게 막혀 있어서 안 되고..'
그런 것들 가운데, 십자가를 통과할 때,
그것이 놀라운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여러분 '반대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룻기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은 막힌 우물에서도 오벳을 출산케 하신다'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인생 가운데 그런 막힌 우물들이 있다면
거기서 좌절하고 주저앉지 마시고요.
거기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하시고,
거기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오벳을 출산하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원리는 <선택의 원리>였어요.
룻이 보아스를 출산하기까지는 나오미를 선택하고,
또 선택한 것을 끝까지 붙좇는 순종을 보아스를 출산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원리를 룻1강에서 살펴봤고요.
오늘은 세 번째 원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 번째 원리는 뭐냐면, 룻이 오벳을 출산하기 위해서는
보아스를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본론 <만남을 통해서> 출산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무엇인가 잉태하게 하시고 낫게 하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만남을 통해서 하신다>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 계획이 잉태, 출산케하신다는 거예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잘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다윗의 데스티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데스티니가 누구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죠?
사무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또 엘리사의 데스티니는 엘리야를 만나면서 이루어졌고요.
선지자의 유업을 남기게 되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룻은 보아스를 만나서 오벳을 낳게 되었습니다.
보이세요?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졌던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들은
항상 통로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어떤 사람과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우리 데스티니를 이룻이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데스티니의 길을 여시는데 사용하시는 방법이 '만남'이라는 거예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거예요.
룻의 이야기가 주고 있는 세 번째 메시지는 바로 이거예요.
우리 각자가 무엇인가를 잉태하고 낳기 위해서는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거예요.
▲룻의 인생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모압에서 태어나서 아무 소망 없이 살다가 죽어갈 여인이
기룐이라고 하는 나오미 아들을 만납니다.
그를 만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큰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기룐의 죽음과 기근으로 인해서
다시 룻의 데스티니가 묻혀 버릴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오미로 붙좇게 (달라붙게, cling to) 하시고,
또 다시 새로운 만남을 주시는데... 보아스를 만나게 하세요.
이게 오늘 본문이죠.
그래서 룻의 인생은,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해서
결국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원래 하시고자 하는...
다윗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시는... 그 놀라운 데스티니를 이루게 하시죠.
그래서 룻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그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고, 잉태케 하시고, 출산하게 하시는지를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여러분의 삶들도 쭉 한번 돌아보세요.
만남들이 있었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을 만나고요.
학교 가서 선생님을 만나고, 또 친구들을 만나고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들을 만나고,
또 영적 동역자들을 만나고...
이런 수많은 만남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오늘까지 온 거죠.
그 만남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과 다음 시간(룻3강)을 통해서
그렇다면 이 만남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되고,
어떤 만남을 선택하고, 어떤 만남을 버려야 되는지..
그리고 만남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
또 원리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깊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큰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고, 저주의 통로가 될 수도 있는 게 사실은 만남이에요.
이 만남이 항상 좋은 것만 잉태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만남은 절대 만나지 말아야 됐어요.
그 잘못된 만남 때문에, 인생이 파괴되고, 데스티니가 망가지는 예들도 보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만남을 어떻게 선택하고 구분해야 되는지,
그리고 만남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우리가 그 받아들여야 되는지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어떤 사람을
여러분 인생 가운데 보내신지를 잘 관찰하시면
그 만남들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실 거고,
그 만남 가운데 여러분은 오벳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남을 소중히 여기시고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거기에 여러분의 데스티니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만남이 꼭 축복을 얻게 되는,
즉 오벳을 낳게 되는 그런 만남은 아닙니다.
어떤 만남은 그야말로 '잘못된 만남'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 보면 크게 세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나오미와 모압 사람들의 만남>이에요.
이 만남은 사망을 잉태케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들이 멋모르고 먹고 살기 위해 모압으로 가서
모압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이들이 잉태하고 낳은 것은 문자 그대로 '사망'이었어요. '죽음'이었어요.
나오미의 남편, 첫째 아들 말론, 둘째 아들 기룐도 다 죽고 말았죠.
이런 만남은, 아예 없었어야 될 만남이라는 거예요.
사망을 잉태하는 만남이었어요.
우리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종류의 만남은
'사망을 잉태하는 만남' 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애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삼손이 들릴라를 만난 거죠.
삼손이 들릴라를 만나는 바람에, 사사 삼손의 데스티니는 완전히 파괴됩니다.
삼손의 인생에 있어서이 여인과의 만남은 아예 없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만남은 물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근데 그건 못지않게 중요한 만남이,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왜냐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당신의 속성과 성품을, 사람들 가운데 물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물론 우리 삶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도,
역시 우리 인생 가운데 (그만큼 크진 않겠지만)
하여간 일정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그것이 선한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만남이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루어 가기도 하고,
우리의 데스티니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된, 정말 하나님을 닮은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의 데스티니를 훨씬 더 열어주는.. 이런 축복된 만남이 되고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죄로 많이 왜곡된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데스티니를 더 많이 망가뜨려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원리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맹모삼천지교 라는 말이 있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그런 거고요.
우리 속담에도 보면, 결국 사람이, 만남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거죠.
이것은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들이 달라진다는 거죠.
△이런 부정적인 만남의 또 하나 대표적인 예가 <아합과 이세벨의 만남>이죠.
이 만남도 만나지 말았어야 되는 만남이에요.
아합 인생의 최대의 비극은 이세벨을 만난 거에요.
이세벨을 만나는 바람에, 아합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구약에서 가장 극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저주의 유업을 낳았습니다.
만약 아합이 이세벨이 아니라, 룻이나 한나 같은 믿음의 여인을 만났다면,
이 아합 왕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랬으면 아합은, 완전히 다른 왕이 됐을 거예요.
아합의 인생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아합의 최대 비극은, 이세벨을 만났다는 거에요.
물론 자기 선택이었지만요.
이것이 아합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갔어요.
여러분, 원래부터 아합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악한 아합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축복이고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는 것이고,
아합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기록되는 그런 삶을 사는 거였지,
저주가 임하는 그런 왕이 되는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합과 이세벨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또 다윗의 모사였다가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했던 아히도벨
그와 압살롬과의 만남도, 만나지 만났어야 했던 만남이었죠.
또 엘리사의 제자였던 게하시와 나아만 장군의 만남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만남이에요.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 만나가지고, 돈 달라 그랬다가,
그 돈 때문에 문둥병 걸려 가지고 결국 비참하게 되잖아요.
이 만남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만남이에요.
이것은 여러분 비단 성경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생 가운데서 늘상 경험하게 되는 그런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만남이 사망을 잉태하는 만남일까요?
예 사망을 잉태하는 만남들의 공통점은, 그건 뭐냐면
자기 욕심을 따라 선택했다는 거예요.
욕심의 종류는 다양할 수 있어요.
삼손이 들릴라를 만났던 건, 금지되어 있는 것,
원래 삼손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이방여인을 얻고자 하는 욕심에서
들릴라를 만난 거죠.
아합이 이세벨을 만난 것은, 여인에 대한 욕심도 물론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안정을 바랬습니다.
근데 금지된 방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이세벨을 만났던 거죠.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선택한 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압살롬을 선택하죠.
게하시 나아만을 만난 것도,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재물,
그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나아만을 만나지요.
위에서 살펴본 모든 예들을 돌아보면
항상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시지 않은 것, 그것을 원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 욕심 때문에 선택한 만남>이었다는 거예요.
그 만남이 자기에게 사망을 주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만남이 사망의 만남입니까?
그건 뭐냐면,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심으로 만나는 만남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허락하시지 않은게 있어요.
근데 그것을 무리해서 얻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선택하는 만남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 욕심이,
이성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고
돈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고
권력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고
성공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고...
종류는 다양할 수도 있는데
하여간 욕심 때문에 만나게 되는 만남,
내게 금지된 것을 욕심내는 것,
거기서 사망을 잉태하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예요.
약1: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결국 죄를 낳고, 사망을 낳는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사망을 낳는다'고 하는 표현은 여기밖에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사망을 잉태하고 낳게 하는 유일한 그 조건은 뭐냐면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욕심내서 얻고자 하는..
그것 때문에 이루어진 만남!
이런 만남들은 여러분 항상 '사망'을 낳게 돼 있습니다. *또는 '사망의 고통'
그러면 여러분, 이런 만남들은 반드시 빨리 벗어나셔야 됩니다.
이건 대처하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요. 빨리 벗어나셔야 돼요.
그 만남은 빨리 정리하셔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장성하여서 사망을 낳게 됩니다.
이 저주에서부터 벗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종류의 만남은 <아무것도 잉태치 못하는 만남>이 있어요.
우리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만남들이
사실은 이 범주에 속하는 만남이죠.
만나거나/ 안 만나거나 별 차이가 없는 만남!
그 만남이 있다고 해도 내 인생 가운데 큰 변화가 없고,
그 만남이 없었어도 별 탈이 없는...
있으나 없으나 하는 만남이 있다는 거예요.
매일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잠깐 몸담았던 직장 동료, 잠시 거쳐갔던 교회 지체들, 뭐 이런 사람들이죠.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이것이 사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만남은, 내 우리 인생 가운데 더해 주는 것도 없고,
손해되는 것도 없고 플라스 제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기회비용'을 지불하잖아요. 시간 낭비, 자원 낭비라는 거죠.
우리의 인생은 딱 제한된 시간을 사는데
이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에 진짜 만났어야 될 중요한 사람들은 못 만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아니고, 손해 보는 만남이라는 거예요.
무의미한 만남에 기회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종류의 만남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번째 종류의 만남은,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다른 종류의 만남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룻과 나오미의 만남"입니다.
룻과 오르바가 나오미와 만나는데,
이 만남은 처음에는 잉태치 못하는 만남이었어요.
저주가 되는 만남도 아니었지만, 잉태치 못하는 만남이었죠.
나오미가 그것을 고백합니다.
룻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얘기합니다.
'너희는 나하고 함께 있으면, 절대로 잉태했지 못한다.
절대로 너희는 남편을 얻을 수 없고,
절대로 너희 인생 가운데 어떤 출산이 없을거다.'
'내가 자녀를 낳아서, 너희에게 주어서, 너희로 잉태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너희에게 사망을 잉태케 하는 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낳게 할 사람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오면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거죠.
말론과 기룐이 죽는 순간,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더 이상 며느리들의 인생에 무언가를 잉태케 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깨달은 오르바가, 나오미의 말을 듣고 돌아가 버리죠.
관계를 정리합니다. 그 결과 오르바는
나오미와의 관계에서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됐습니다.
무의미한 만남이 됐어요.
그런데 룻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해요.
룻은, 그 무의미해 보이는 만남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계속 마음을 두고, 뭔가를 추구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투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결과, 이 의미 없어 보이던 만남은 오벳을 낳게 되는,
롯의 데스티니를 이루는 중요한 만남으로 바뀌었어요.
△여러분,. 이걸 가장 잘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세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아무 의미 없을 만남,
갈릴리 호숫가의 그냥 어부들.. 그 사람들과의 만남,
또는 길거리에서 세금 걷고 있던 세리와의 만남,
또는 뭐 창기들과의 만남,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냥 평범한 만남을,
특별한 만남으로 바꾸시는 능력들이 예수님께는 있었어요.
우리 예수님께서 그냥 매일 스쳐지나가시는 길에서...
여러분이 갈릴리 지방은 어업으로 먹고 사는 지방이에요.
때문에 태반의 사람들이 어부였습니다.
그래서 어부는 길에 차이는게 어부예요.
아주 평범한, 별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늘 날 길을 지나가다 보니까, 고기 잡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근데 이 사람들과의 만남이,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도 괜찮은..
별로 의미 없는..
나에게 플러스도 아니고, 마이너스도 아닌
아무것도 잉태치 않게 하는 그런 만남일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만남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요.
이 사람들을 부르세요. 부르셔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고는,
그리고 실제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어요.
베드로를 위대한 사도로 만드십니다.
이 일을 통해서 첫째는 예수님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진 거 아세요?
제자들을 키우시고, 제자를 남기시는 예수님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고요.
또 선택받은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가 되는 그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우리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예수님의 위대한 일의 시작은 뭐였는지 아세요?
그것은 놀랍게도 그저 매일 만나는 사람들,
갈릴리 호숫가의 그냥 평범한 어부들, 거리에서 세금 걷던 세리,
또 나무 밑에서 토론하던 청년들,
그냥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이 위대함은,
이 평범한, 무의미해 보인 만남을
데스티니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특별한 만남으로 바꾸셨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여러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매일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내 이익 관계나 욕심에 의한.. 첫 번째 부류의 잘못된 만남들 말고,
두 번째로, 그냥 내 주위에 주어지는 만남들...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는 만남들...
즉 룻의 나오미와 만남 같은...
그런데 룻은 나오미같은 이런 사람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있고,
작은 관계에도 충성됨과 신실함을 보이는...
이런 사람들은, 결국 생각지 못했던 만남에서 '오벳'을 출산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이것은 여러분 우리의 선택이에요.
우리는 똑같이 매일매일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고 스치듯 지나가요.
잠깐 있던 직장 동료, 동네의 가게 아저씨, 또는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것은 충분히 우리가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고, 붙잡을 수도 있는 관계예요.
시작 때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 관계죠.
그런데 거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오르바가 나오고 룻이 나와요.
오르바처럼 그 관계를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관계라는 거는 귀찮다. 나는 내 앞에 주어진 것만 그냥 하고,
낯선 사람과 관계 맺는 것도 귀찮고...'
이렇게 해서 오르바처럼 나오미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고요.
그렇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아주 작은 관계라도
별로 나에게 손익을 줄 것 같지 않은 관계라도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고, 그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관심을 가지고 내가 충성됨과 신실함으로 그들을 대할 때,
그것이 놀랍게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처럼 보이던 관계가,
나오미를 통해서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을 낳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데스티니의 통로가 되는 만남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두 번째 만남의 비결이에요.
첫 번째 만남은 무조건 피해야 돼요.
사망을 잉태케 하는 만남이니까요.
그러나 두 번째 만남,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처럼 보이는 만남에서는
여러분이 이 만남을 바꾸셔야 돼요.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만남으로 바꾸셔야 돼요.
그것이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선택이라는 거예요.
마25:34~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룻이 오벳을 낳을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이 말씀처럼 살았기 때문이에요.
나오미는 지극히 작은 자였어요. 나오미가 소망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남편도 없는 과부지요. 자식도 없지요. 돈도 없지요.
어디 한 곳 발 붙일 데도 없는 정말 외톨이.. 아무짝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그런 노인이었어요. '지극히 작은 자'
룻이 나오미하고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그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나오미도 그걸 아니까 오르바한테 '너는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 마라' 했던 거죠.
그런데 룻이, 마25장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자(나오미)가 헐벗었을 때 그를 입히고, 그를 돌보았다는 거죠.
그래서 이어지는 룻기를 계속 읽어 보세요.
제가 이번에 룻기를 묵상하면서, 이 룻의 진가를 보게 됐어요.
그건 뭐냐면, 나오미와 끝까지 함께 있으면서,
친구처럼, 가족처럼, 나오미를 돌보았던 거예요.
지금 나오미는 남편도 죽고, 가족도 아무도 없고, 돌아와서 발 붙일 곳도 없고
이건 완전히 그냥 독거노인, 또는 노숙자 신세인 거예요.
그런데 룻이 그 옆에서 나오미와 함께 하는데, 진짜 마음이 찡할 정도입니다.
룻이 왜 오벳을 낳게 되는지 아세요?
보아스가 왜 룻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아세요? 보아스가 명확하게 얘기해요.
'네가 나오미한테 한 것을 내가 들었다'는 거예요.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리에요.
우리 주변에 매일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냥 흘려보내도 그만, 흘려보내지 않아도 그만..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도 그러셨고, 룻도 그렇고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만남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거죠.
사람을 소중히 볼 줄 알았다는 거죠.
그것은 '그 사람이 내 인생 가운데 무슨 큰 유익을 주고..' 이런게 아니에요.
그런 욕심에 의한 만남이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 자체를 소중하게 본 거예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죠.
그랬을 때 그 만남이, 특별한 만남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생명을 잉태케 되는 만남이 된다는 거예요.
▲3. 세 번째 종류의 만남은 뭐냐면 <운명적인 만남>이 있어요.
룻과 보아스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운명적인 만남이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특별한 종류의 만남이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다윗과 사무엘과의 만남 같은 거죠.
사무엘이 우연히 들에서 양치는 소년이 불쌍해서, 그를 만난 게 아니잖아요.
사무엘은 이미 그때 선지자였고,
근데 사무엘 선지자가 어느 날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다윗의 삶 가운데 찾아와서,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듯이
우리 인생 가운데 뭐 이런 특별한 만남이 있다는 거죠.
이 만남을 디바인 커넥션(신적인 만남)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계획하신 그런 만남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 삶 가운데 만나게 하시는 만남들이 있어요.
근데 이 만남은 분별이 필요해요.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디바인 커넥션인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대하고,
그리고 이 만남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아주 중요한 만남이에요.
△성경에 보면 디바인 커넥션을 통해서 인생들이 열리는 것들을 아주 자주 보게 됩니다.
-다니엘이 믿음의 세 친구를 만난 것
-엘리사가 엘리야를 만난 것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난 것
-디모데가 바울을 만난 것
이건 모두 다 디바인 커넥션이죠.
이 만남이 없었다면, 이들의 인생은 전혀 다른 인생이 됐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그런 디바인 커넥션이죠.
△자 이 '신적인 만남 divine connection'은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육적인 영양에서 일어나는 디바인 커넥션이 있고,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디바인 커넥션이 있어요.
육적인 영향에서 일어나는 디바인 커넥션은 또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①부모와의 만남
②배우자의 만남
③자녀와의 만남
이것은 여러분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 가운데 주신 거예요.
여러분 부모를 여러분이 선택하지 못합니다.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가 주어져 있는 거죠.
자녀를 낳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는 거죠.
하여간, 부모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자식과의 만남은
디바인 컨넥션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만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만남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데스티니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해요.
예를 들어서 뭐 부모가, 꼭 내 마음에 드는 아주 훌륭한 부모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부모를 어떻게 내가 대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데스티니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는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뭐라고 못 박냐 하면, 부모를 공경하라 그랬거든요.
세상에 여러분 좋은 부모, 나쁜 부모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완전한 부모만 있을 뿐이에요.
물론 부모가 부족하고 세상적으로 봤을 때는 안 좋은 조건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부모를 주신 이유는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완전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다듬는 도구로 주신 것일 수 있죠.
또 어떤 부모님들은 정말 훌륭한 부모님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은 축복의 통로로 주신 거고요.
하여간 어떤 만남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최고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것이지,
그래서 그 (부모와의, 자녀와의) 만남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거예요.
△영적인 영역에서도 똑같이
①영적 부모와의 만남
②영적 동료들과의 만남
③영적 자녀와의 만남이 있어요.
영적인 부모, 영적인 아비들이 있다는 거예요.
영적 지도자를 잘 만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앞서 살펴봤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어떤 영적인 멘토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 결정됐잖아요.
다윗이 사무엘을 만나고, 엘리사가 엘리야를 만나고,
디모데가 바울을 만나는 등
어떤 영적인 지도자, 어떤 영적인 멘토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데스티니를 이루는 일은 크게 좌우됩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동료들이 있어요. 영적인 동지들이 있어요.
다윗이 요나단을 만나고, 다니엘이 세 친구들을 만나고...
어떤 영적인 동료들을 만나느냐... 아주 중요하죠.
세 번째는 영적인 자녀들이 있어요.
내가 전도하고 낳아서 키운 사람들!
이 세 가지 만남이 디바인 커넥션(신적인 만남)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육신의 자녀가 없는 것도, 우리에게는 뭐 좋은 것이 아니지만
영적인 자녀가 없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저주입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만약 영적인 자녀들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경각심을 가지셔야 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영적인 자녀들이 나와야 돼요.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의 데스티니가 열리거나 닫힙니다.
이 중요한 디바인 커넥션의 3분의 2를 우리가 딱 잘라 버리고 있다면,
여러분 굉장한 손해죠. 이 내용은 다음 주에 자세하게 할게요.
그래서 우리 인생 가운데 두신 여섯 가지 디바인 커넥션이 있다는 거예요.
육신의 부모, 배우자, 자녀
영적인 부모, 동역자, 자녀들
이들을 여러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거예요.
이 세 번째 만남(운명적인 만남, 신적인 만남)은
두 번째 종류의 만남(±0인 만남)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생명을 잉태케 하거나, 또는 생명의 문(태)을 닫을 수 있는 그런 만남이에요.
그래서 이 만남을 여러분들이 잘 대하셔야 되는데...
△이 세 번째 만남에 대해서, 취해야될 태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와 만남은, 무조건 피하고 빠져 나오셔야 돼요.
두 번째 종류의 만남은, 그 만남을, 예수님 명령대로 소중히 여겨서 바꾸셔야 돼요)
근데 세 번째 종류의 만남에서 여러분들 취하셔야 될 태도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감사하라는 거예요.
디테일한 내용은 다음 주에 다루겠지만, 감사하라는 거예요.
감사가 없다면, 아무리 보아스가 나타나도.. 무의미한 만남이 되어 버려요.
감사가 없다면, 아무리 엘리야가 나타나도.. 엘리사는 없습니다.
디바인 커넥션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은 감사가 있으세요?
부모, 배우자, 자녀와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시고, 이미 다 작정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두신
디바인 커넥션, 디바인 릴레이션쉽이에요.
이 만남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감사함으로 대하시면
여러분의 데스티니의 문이 열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영적인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또 여러분의 영적인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영적인 제자들이 혹시 있다면, 여러분 감사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위를 쭉 한번 둘러보세요.
디바인 커넥션들이 보이지 않으세요?
지금 이 시간, 감사를 표현해 보십시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 번째 종류의 만남을 주세요.
그것은 특별히 계획하신 만남, 디바인 커넥션들을 주세요.
보아스를 주신다는 거예요.
이 보아스는, 감사를 통해서만, 오벳을 낳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룻3강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