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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목회 로드맵

LNCK 2024. 1. 28. 15:14

2018 0514 건강한 목회로드맵 김영봉목사  (youtube.com)

*위 동영상 10:45초부터 녹취, 정리

 

건강한 목회 로드맵          2018.05.14.

◑설교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간다고 했더니, 
제 친척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좋지.. 일주일 하루만 일하고 깨끗하게 살고, 좋지.."  

그 분 눈에는, 목회자는 일주일에 하루 일하고 6일 쉬는 사람으로 보였나 봐요.
'이 오해를 어떻게 불식시켜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그렇게 오해하는 분들이 참 많아요. 

설교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주일 날만 되는 사역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설교자의 삶 전체에 관계된 그런 사역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설교는, 인간의 지정의 모든 영역이 다 포함되는 그런 사역이지요. 

그래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란 자기 책에서  
설득의 3대 요소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말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수사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이었습니다. *말을 설득력있게 하기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는 영어 실력이 그 사람의 전체 실력을 가늠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얼마나 말을 논리있게, 설득력 있게 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실력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세 영역으로 나눠서 설명을 했어요.
에토스Ethos(인품·인격), 파토스Pathos(감성), 로고스Logos(이성)

▲1. 에토스는.. 영어의 Ethics(도덕) 라는 말이 그리스어 에토스 에서 나왔죠. 
한 사람의 성품, 인격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삶 전체, 그 사람의 그 존재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왜 여러분 누굴 만나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지 않는데도,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존재의 파워 같은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지요. 

그래서 존재감, 인격의 힘, 이런 것을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데요. 
쉽게 말해서, 말을 아무리 잘 해도, 에토스가 없으면 설득력이 거의 없게 되죠.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감(에토스)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5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벌써 그걸 간파한 거죠.

▲2. 파토스는 '감정, 정서' 그런 겁니다. 영어에 Passion (열정)이 여기서 나왔죠.
연설가나 설교자는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데, 거기에 열정이 배여 있어야 하죠.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그저 밋밋하게, 싸늘하게 식은 마음으로 전달한다면,
그야말로 수사학(설득)적인 측면에서는 낙제점이죠. 
 
그러니까 설교자,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정서를, 자신이 하는 말에 같이 결합시켜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3. 로고스는 이성, 논리 Logic 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말(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논리나 지식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보다는 먼저 사람의 인격(에토스)이고요.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열정(파토스)이 있어야,
그의 논지(로고스)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일주일>이라고 하는 책에서, 저자인 제가(김영봉 목사)  
위 세 영역으로, 설교자가 자신의 인격과 성품(에토스)을 어떻게 관리해야 되겠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설교자가 어떻게 자신의 정서, 열정를 관리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설교라고 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서를 통해서 걸러져 나오는 거기 때문에 
설교자의 열정, 성령의 충만이 중요한 것이죠.

세 번째로 로고스,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고, 본문을 어떻게 연구하고, 
어떻게 설교문을 작성하는가.. 그 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최측에서 오늘 그 책을 근거해서, 한 2시간 말씀을 준비해 달라고 해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린 자료집에 나와 있는 대로 <영성 목회 그리고 설교> 
이것을 오늘 말씀을 드리고, 

그 다음에 <본문 설교, 본문 읽기, 묵상 설교>라는 두 번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에는 '영성'이 중요합니다

영성이 중요한 이유는, 윌리엄 로렌스 라는 분이 설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특별하게 능력 받은 선포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된 목적에 대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윌리엄 로렌스가 정의하면서 특별히 주안점을 둔 것은 
'설교의 모든 차원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설교는 
▲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사람들, 
교인들이 설교시간에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하늘의 소리를 기대한다고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대한다고요.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말씀이 얼마나 될까요?'
평신도로 살아가는 제 형제들, 친구들을 가끔 만나는데요. 
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큰 고통이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인간의 신변잡기가 묶여져 있는 그런 설교가 거듭될 때, 
그 시간이 고통스럽다'는 거죠. 

어떤 사람은 그런 설교가 들려지면, 차라리 잠언서를 펴서 
설교시간에 잠언서를 읽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꼭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려지는 소리에 귀를 막고, 성경을 펴서 잠언을 읽고 있다고 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설교자들이 얼마나 때로는 무신경할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설교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설교단에 설 때마다 '이분들이 지금 내 얘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회중의 기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고요. 

▲2.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냐?  God's ordained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하게 능력 받은 선포자입니다. 

여기 '능력 받은'이란, 은사 이런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훈련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그 설교자, 
그러한 특별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아서 전할 수 있는 
그런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3.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의도된 목적에 대해서' God's intended purpose
지금이 순간에, 설교를 듣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혹은 우리 교회에 대해서,  
혹은 이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의도의 말씀을 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말씀이
God's inspired word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인가?

물론 성경 66권이 모두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지만, 
본문이 시의적절하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가?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 정의를 통해서 윌리엄 로렌스가 말하는 것은 
설교는 철두철미 영적인 일이라는 거죠. 

영적인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나중에 이제 영성에 대한 그런 definition(정의)도 살펴보겠습니다만,

설교자의 영성이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설교는, 철두철미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철두철미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설교자는 영적인 구도자다> 저는 그렇게 정의를 합니다. 
여기 '구도'라는 말이, 불교나 유교에서 말하는 구도와   *구도 求道 : 도를 구함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도가 다르지요.  ☞rfcdrfcd.tistory.com/15973800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도는, 구원을 얻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고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도'는, 이미 우리가 발견한 구원의 도에 대해서 
더 깊이 우리 자신을 훈련시키고, 구원의 복음의 비밀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우리 기독교는 '구도의 종교가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도 구도의 종교입니다. 

다만 그 말의 의미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그 비밀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그런  과정이,
우리 한국말로 하면 '구도'인 것이고, 다른 표현으로 '성화, 영적 성숙'이죠.

▲그래서 설교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자신의 영성을 관리>하는데 있습니다. 

1) 즉 복음의 진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마르지 않는 탐구심, 

2)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알아감,
예수님이 끊임없이 말씀하신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 얘기를 하셨어요. 
마13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자는 이와 같다' 하는 말씀을 하셨고, 
-바울 사도도 '복음의 비밀'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비밀'이라는 말은 시크릿 secret 가 아니라, 미스터리 mystery 입니다. 
미스터리 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더 알아가고 싶은' 거죠. 
찬양에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라는 그런 찬양이 있지요.  *그 사랑 얼마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알았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 나라를 더 깊이 경험하고자 하는 
그런 끊임없는 영적인 갈증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고요. 

다만 그 갈증은, 목마른 갈증이 아니라, 
이미 내가 맛보았기 때문에 더 맛보기를 원하는.. 그런 갈증이죠. 

3) 자신의 전존재적인 변화에 대한 열망
고후3:18절이라든가, 빌3:12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내가 선 자리를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기독교는 너무도 쉽게 '나는 다 알았다. 나는 다 됐다. 나는 이미 다 됐다'고 하는 
이러한 근거 없는 완료형의 사고방식의 빠지기가 참 쉽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빌리 그레함 전도 집회'가 있었죠.
그때 TV에 그 전도 집회에 대한 선전이 나왔는데 
그때 캐치프레이즈가 "난 알았네" 이거 였습니다. "난 찾았네"라는 말이죠.

이 말은 당연히 맞죠. 그렇지만 오해하면
'이미 다 알았고, 이미 다 찾았고, 이미 다 됐다'고 생각하기 쉽죠. 

특별히 설교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기가 참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구원(칭의)의 관점에서는, 내가 이미 다 알았고, 이미 다 찾았지만, 

성화와 완전의 관점에서는, 나는 아직도 도상에 있는, 만들어져가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비추어서, 내가 그 영광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그것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그런 (구도자의) 마음이, 설교자들에게 있어야 됩니다.

4)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몸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활, 영성 훈련은 
영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 우리의 전인적인 노력인데요. 
그 과정에서도 '몸'은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보니까, 몸처럼 정확한게 없구요. 몸처럼 믿을만한게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는 몸을 좀 학대하고, 몸을 좀 무시하고, 
육신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을 더 강조하는... 그런 경향이 좀 있는데요. 

알고 보니까, 이게 우리의 육신이 영과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을 어떻게 잘 보존하고 잘 케어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내 영적 훈련을 위해서, 몸을 훈련시키는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경건을 위해서 '몸의 훈련을 하라'고 말씀하죠.
내 몸을 훈련시키는 것,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매일, 계속해서 영적인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목회자들, 설교자들의 매일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설교자의 이미지를 좀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기존의 이미지'는, 이미 완제품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설교자의 이미지와, 

'새로운 이미지'는 도상의 존재, 구도자로서의

설교자가 자기를 생각하는 태도와 이미지인데, 둘을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설교자 이미지 새로운 설교자 이미지
이미 다 아는 사람 계속 알아가고, 배워가는 사람
혼자 가르치는 사람 성도와 함께 배워가는 사람
말로만 가르침 삶으로 가르침
앞에 선 사람 같은 자리(회중석)에 선 사람
교회성장이 목표 자신과 회중 영적 성장이 목표

 

▲1. 기존의 설교자의 이미지는 
'이미 나는 복음을 다 알고, 성경을 다 알고, 영성의 최고점에 도달한 사람'

그래서 어떤 설교 비평가는 이런 표현을 썼죠. 
'뻔한 구원의 진리를 무한 반복하는 설교' 
새로운 얘기가 전혀 없는 거죠. 

뻔한 구원의 진리를 무한 반복하는 이유는, 
자기는 '이미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이상 구도, 연구가 없게 되죠.

그러나 '내가 구원의 비밀을 알아가는 (구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똑같은 구원의 진리를 얘기하더라도, 

즉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문장도 '구도자'로서 설교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으로, 끊임없이 '이 진리가 어떻게 회중에게 와 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새로운 표현을 끌어낼 수 있겠죠. 

그렇지 않고 그냥 '(내가 복음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냥 그렇게 반복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도 그 거기에 대해서 무뎌지게 되고요. 
가장 치명적인 것은, 설교자 자신이 자기가 선포하는 복음에 무뎌지게 됩니다. 

내가 선포하는 그 복음에 대해서 
내 자신, 설교자 자신이 늘 새로워져야 되고, 신선한 그런 설렘이 있어야 되는데 
그 설레임 없이 그냥 무한 반복 고장난 레코드처럼 되어버리는 것이죠. 

▲2. 또 기존의 이미지는 '나는 가르치는 사람, 나는 다 알고 있고, 당신들은 모르고 있고...'
제가 사는 미국 VA 지역에도,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있어서 
운전하면서 길을 오갈 때, 그 라디오 방송을 틀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 지역 목사님들의 설교가 차량 라디오로 흘러 나오는데, 
제가 그 설교를 들으면서, 가끔 속으로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분들의 어투나, 그 내용이나, 준비된 상태가, 
회중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듯한... 
회중에 대한 정성, 회중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설교를 제가 들을 때...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 그건 두 번째 문제고요. 
교인들에게서 든는 가장 무서운 얘기가 뭔지 아십니까? 
'나는 설교 한 번 들으면, 목회자가 몇 시간 준비한 건지 알아' 
뭐 이런 얘기할 때가 제일 두려워요. 
그런데 사실 다들 느낍니다. '아~ 대충 준비했구나' 

▲3. 가르치는 사람 vs 함께 배우는 사람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주입시켜준 진리'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느끼게 만들어주고, 그 사람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도록 만들어 줘야 돼요. 
그래서 과거처럼, 설교 말미에 '이렇게 하십시오!' 하고 윽박지르는 설교보다는, 

설교 과정을 통해서 회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갈등하게 만들어서 
마지막에 이러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호소할 때, 

회중이 스스로 거기에 대해서 '맞아, 그래야 되지...' 이렇게 스스로 결단하도록 해야지, 

설교자가 '그렇게 못 살았네' 하고 느끼도록 만들어 주면서,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되겠네!' 하고 스스로 결단하게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설교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 알고 있고,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는 식으로 
회중들을 얕보면서 주입식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여러분과 함께 (구도자로서) 알아가고 있고,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설교 사역을 하면서 때때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냐면 
해소감을 느끼거나, 혹은 '아 설교 잘 했다' 하고 느낄 때가 언제냐면, 
설교 끝나고 나서, 제가 가끔 그런 얘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그냥 '은혜 받았습니다!'가 아니라,
'목사님, 제가 지난 한 주간 내내 그거 가지고 고민했어요.' 

또는 '오늘 제 고민의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 제일 교육 수준이 낮은 분이 이제 중학교 나오고, 
한국에서 이런저런 노동을 하다가, 지금 미국에서 페인트 공을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은 하루 종일 페인트만 칠하는데, 
그런 육체적인 노동이 자기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대요. 

이분이 이제 신앙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 처음 신앙생활 하니까 
수만가지 질문들이 생기죠. 이분이 그 얘기를 제게 가장 많이 하십니다.

예배 끝나고 나면 "목사님, 지난주 내내 그 (설교 내용) 생각을 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믿어야 되는가, 왜 이게 진리인가 라고 고민을 했는데, 
아휴 목사님, 이제 좀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제가 해답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저도 붙들고 씨름하는 과정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그분에게 공감이 되었던 것이지요. 

▲4. 말로만 가르침 vs 삶을 통해 가르침 
기존의 이미지는 입을 통해서 가르치는 이미지라면, 
새로운 이미지는 삶을 통해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공감하고,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설교를 확인하는 설교

▲5. 앞에 선 사람 vs 같은 자리에 선 사람 
기성의 이미지는, 앞에 선 사람이 깃발을 들고 '나를 따라오라'고 외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이미지에서는 '같은 자리에 선 사람'입니다. 

듀크대학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토머스 루블롱 설교가, 
요즘 설교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분인데 

그분이 설교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기존의 설교자는, 강단에만 앉아 있지만, 
새로운 설교자는,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서 
(평신도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묵상하고,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서 말씀을 전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flat world(편평해진 세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6. 교회 성장이 목표 vs 신앙 성장이 목표 

기존의 이미지는 교회 성장이 목표라면, 
새로운 이미지는 자신과 회중의 삶의 변화가 목표, 신앙 성장이 목표가 되어야 된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의 이미지가 이제 앞으로 좀 바뀌어져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세팅, '목회자 라는 자리'

제 경험으로 볼 때,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세팅이 목회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목회자들은, 가장 영적으로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1. 첫째는, '나는 늘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요. 

전혀 하루종일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목회 일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면서도 
'나는 목사니까, 나는 교인들과 함께 하고, 
나는 목회를 하니까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하는 
그런 착각을 할 때가 많다는 거죠.

중요한 거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에서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죠. 

목회자는 '늘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목회자들이 늘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일들을 할 때는, 정말 그게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라고 그렇게 설명을 하지요. 
하지만 '정말 그러냐?' 는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저도 때때로 한국에 나갈 때, 이쪽 저쪽에서 와 달라고 하는 그런 초청을 받는데요. 
그런 초청을, '하나님을 위한 일',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라고 하면서 
바쁘게 불려다니다 보면, 
저는 영적으로 텅 비어 버리고, 제 건강과 모든 것이 깨져 버리겠죠. 

과연 어디까지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어디까지가 내 욕심인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불러주는 것, 
그것이 좋아서 불려다니다 보면... 결국 자신은 파국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종종 그런 생각을 하지요.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지'
그래서 교회마다 선교지에 대한 소개하고, 선교를 굉장히 많이 독려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선교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도 자신도 선교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어떤 경우를 보면, 목회자가 자기 돈을 하나도 안 쓰고, 
교회 돈을 계속해서 쓰면서 그 선교지를 돌면서, 
'나는 선교를 많이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해요. 그런 것들을 교인들이 봅니다. 
그러면서 일부 교인은 '아 이게 완전히 이율배반적이구나' 한다는 거죠.

선교를 위해서 막 엄청난 드라이브(몰고감)를 하는 교회의 성도님 얘기입니다. 
그분은 담임 목사님과 함께 여러 선교지를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굉장히 많이 하셨던 분이에요. 

그래서 선교지를 다니면서, 교회의 예산을 어마어마하게 쓰는데, 
그 많은 선교 여행 중에, 목회자는 자기 돈을 하나도 쓰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분은 자기 돈을 내서 선교지를 돌았나 봅니다. 요즘은 장로님들도 안 내는 분이 있다는데..) 
'이건 아니구나...' 하고 교회를 떠나는 거죠. 

내가, 나의 삶과 교회의 사역을 아이덴티파이(동일시) 시켜서 
'그것이 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일들이 많이 있고요.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착각도 있습니다. 
설교에도, 기도에도 나는 없습니다. 교인만 있지요. 

물론 목회자가 교인을 위해서 헌신하고, 늘 교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자신이 있어야 하죠. 

그래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도, 설교를 위해서 써먹기 위해서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그 말씀 앞에서는 시간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목사'라고 하는 그런 그 가운을 입고 하나님 앞에 늘 서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서는 시간, 한 개인으로서 기도하는 시간, 
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놓고, 그걸 내어놓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2. 그 다음에는 실적에 붙들리는 유혹이죠. 
여러분 중에도 지금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고, 
지원하는 교회에서 실적을 보고하라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매주 예배 끝나고 나서 통계 수치를 붙들고 
씨름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목회 현장이라는 것이, 늘 누가 그렇게 얘기하지 않더라도, 
본인 자신이 실적에 붙들리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내실은 없고, 외적 실적에만 붙들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처음에 어려운 상황에서만 그렇게 될 것 같지만,
제가 개척도 해보고, 작은 교회 목회도 해보고, 큰 교회 목회도 해봤는데요.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실적에 붙들리는 유혹은 더 커집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작을 때부터, 그러한 실적에 붙들리는.. 실적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붙들고 씨름하느냐가... 목회자의 영적 실험 중에, 가장 큰 실험이예요.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죠. 저도 매주 예배가 끝나면, 
헌금이 어떻게 들어왔고, 누가 빠졌고, 몇 명이 왔고... 다 체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목회의 성패를 가늠해 주는,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더 큰 것을 볼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그런 것(실적)에 붙들리게 되지요. 

▲3. 분주함의 유혹 
우리 한국 교회의 현장만큼 분주하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다. 

분주함이라고 하는 건 부지런한 거랑은 다릅니다. 
분주함이라는 것은, 허둥대면서 하루 종일 지내는 것이죠. 

뭐 하나에도 마음 다해 정성을 다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되는... 

유진 피터슨이 '분주함은 목회자의 가장 큰 직무유기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비지 busy 한 것, 그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직무유기라고 얘기를 하지요. 

어찌보면 모순적인 말이에요. 왜냐하면 분주함이라고 하는 건 
목회자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근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직무유기라고 하는 이유는, 
그 분주함이 목회자의 영성을 고갈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고, 

목회자의 영성이 고갈되면, 
그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영혼구원과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부지런한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정성을 다해서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거고요. 
분주함이라는 것은, 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먼지만 일으키며 좇아다는 거죠.

중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하는 아이와, 잘하는 아이의 차이와 비슷한 거죠.
근데 알고 보면 우리가 그렇게 삽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앉아 있으면서도
이 다음에 있을 어떤 일 때문에, 그거 구상하느라고
머리가 복잡하고 집중 안 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톨스토이가 남긴 아주 유명한 우화에 나오는 말이 있지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제게 있어서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은, 이 시간 강의로 여러분을 위해 섬기는 일이고요. 
제게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여러분이죠. 

이거 끝나고 나서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제일 중요한 거고, 
그러므로 저는 에브리타임 나에게 주어진 그 시간에,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전심을 다하면, 
그렇게 하면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다 할 수 있는데,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분산시켜서, 분주하게 만들죠.
그리고 심방, 회의.. 이런 일에 분주하게 뛰어다니다 보면, 
말씀 연구, 개인 기도.. 이런 일을 못하게 되면서, 영성이 점점 시들어가게 되죠.
그런데도 자신은 주의 일에 바쁘니까... 아무 문제가 없는 줄로 압니다.

▲4. 인정받고자 하는 유혹 
목회자만큼 인정받는 것에 대한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또 없겠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인정해 주는가?' 
인정 못 받을 때는, 인정받기 위해서 목말라 하고요. 
인정받고 나서는, 계속 인정받으려고 휘둘리면서 또 어려움을 당합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번은 목사님들 한 30여 명과 함께
목회학 박사 과정을 인도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을 다 끝내고 부부동반해서 미국에 잠시 여행을 하게 됐는데, 
그때 한 사모님에게서 들은 얘기가 잊혀지질 않아요. 

그 교회는 1년에 부흥회를 서너 차례 할 정도로, 그렇게 부흥회를 많이 하는 교회이고, 
그러다 보니까 웬만한 부흥사들은 지난 20년 동안 다 자기 교회를 다녀갔다는 거예요. 

근데 그 사모님이 옆에서 지켜본 결과가 뭐냐면, 
부흥사들 10명 중의 9명에, 식사 한 다음에 
한 주먹의 약을 털어넣는 사람들이랍니다. 
부흥사들 중에 건강한 사람을 거의 못 보았다는 거예요. 

물론 제가 이걸 일반화시킬 수가 없지요. 
어떤 분들은 타고 나면서 몸이 약한 분도 계시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부흥사로)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인정받고 있는 이 추세를 떨어뜨릴 수 없기 때문에 
불러주는 대로 다니다보니, 과로해서 자기 건강을 망가뜨린 거죠. 

여기에 젊은 목회자들이 많이 계신데요.
이 인정의 욕구를 잘 관리하셔서, 은퇴할 때까지 건강하게 목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영적 매너리즘의 위험이에요. 
영적 매너리즘의 위협은, 우리 말로 번역된 <위험한 소명>이라는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쓴 <설교자의 일주일>이라는 책에도, 그 책을 추천해 놓았습니다. 
폴 데이비드 트림 이라는 분이 신학교 총장으로 은퇴하신 분인데, 
그분이 '데인저러스 콜링'이라는 책에서, 영적 메너리즘의 유혹을 너무도 잘 설명해 놨어요. 

'매일매일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니까, 
머지않아서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설레임이 없어지는 것, 

처음에 강단에 설 때에 그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고, 
예배라는 것이, 내가 지금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릴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내가 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그 큰 비전을 잃어버리고, 
그냥 맨날 만나는 그 사람들과 함께 계속되는 예배...'

저도 미국 이민교회 현장에서 작은 소도시에서, 
기껏해야 40명, 20명, 또 어떤 경우에는 열 댓명,
이런 교인들과 늘 맞대고, 
같은 사람, 같은 얼굴을 20년~30년 같이 보면서 목회하는 분들의 그 애환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큰 도전인지 알아요. 
그 깊은 상처를 가지고,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과연 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구원해 낸 사람인가?' 
'나도 내 생명을 바쳐서 섬겨야 될 사람인가?' 이런 질문이 생겨요. 

그런 것에 그냥 빠져 버리면, 결국 우리는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서 
강단에서 설레임도 없고, 패션(열정)도 없고, 
사람을 만나도, 교인들을 만나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안 생기고,
예배 때마다 예배에 앞서서 오는 그런 거룩한 마음의 설레임도 없고요...

제가 사는 지역에 있는 백인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이렇게 정기적으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데 
한번은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가 최근에 어느 교인으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었는데, 너무 자기가 행복했대요. 
무슨 얘기냐 그랬더니, 백인 목사인데, 
버지니아 지역에서 목회를 아주 잘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 교인이 자기보고 그러더래요. 
"나는 예배 설교단에 다녀 올라가기 전에, 당신의 표정을 보는게 너무 좋습니다. 
당신의 표정을 보면, 뭔가 오늘도 꼭 전하고 싶은 그런 말씀이 있어서, 
그 설교시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설레임이, 목사님 표정에 보입니다"

그런 얘기를 듣는데, 자기가 너무 기뻤다는 거예요. 
그 성도님이 정확하게 잘 봤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걸 짐짓 드러내지 않고 있는데도,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벌써 목사님 표정만 봐도, 환하게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의 말씀에 대한 그런 열정과 그런 패션이 
성도에게 느껴졌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영적 매너리즘의 큰 위험, 
제가 지금 신학교 강의사역을 내려놓고, 설교 사역을 한 16~17년 해 오고 있는데,
아, 이게 정말 위험한 일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물 흘리며, 회개하며, 복음에 대해서 감격하고 응답했던 그 감격이 
어느새 사라지고 
정말 풍월처럼 읊는 그런 설교가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냐 하는 거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영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내 영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과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저의 고민을 나눈다면 

▲1. 첫째는 목회의 목표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지요. 
이거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목회가 뭐냐, 목회와 설교를 연관지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 두 번째는 매일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행위보다 존재가 먼저입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내 영적 상태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해요. 

그리고 목회적인 활동보다, 영성이 더 중요합니다. 먼저입니다. 
그래서 목회적인 활동하기 전에, 먼저 충분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고, 
말씀을 묵상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이런 시간이 우선적으로 먼저 필요하고요. 

▲3. 우리의 과제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거예요. 

'얼마나 교회를 확장시키느냐'의 이슈가 아니라 
'얼마나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 거냐' 

자신의 영적인 삶을 위한 시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주로 목회자들에게는 새벽 시간이죠. 

그런데 그 새벽시간조차도 소홀히 하게 되면, 
목회자는 저녁에 피곤해져서 잠잘 때까지, 
자신의 영적 삶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4. 자신만의 리추얼을 만들라.  *ritual : 의식, 정기적인 종교적 행사
매일매일 하는 리추얼도 좋고요, 혹은 계절별로 
'이때가 오면 나는 일주일 동안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한다' 

혹은 저의 리추얼 중의 하나는, 
아침에 예배당에 출근하면, 먼저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는 겁니다.
바로 제 오피스로 들어가지 않고요. 

새벽에 와서 기도했다 해도, 항상 먼저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사무실로 가고, 
또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쉴 때가 되면, 또 예배당에 가서 묵상하면서 쉬고요...
그것이 제일 큰 휴식이 되는 것을 경험을 합니다. 

이런 리추얼을, 나대로 항상 이렇게 하는 리추얼이 만들어지면, 
아까 말씀드렸죠. 가장 믿을 만한 건 몸입니다. 
우리 몸이 길들여지면, 그 다음에는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거기로 가게 돼요. 

그렇게 돼서 몸의 훈련을 하게 되면, 그게 리추얼이 되면,
그래서 교회에서 행하는 이 리추얼이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정기적으로 성찬을 나눈다든가, 예배 시간에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이런 리추얼들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5. 그리고 모든 활동에 있어서 영성에 집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