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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중심의 성령충만

LNCK 2024. 2. 2. 15:04

'예수 중심 성령 충만'  설교(2024.01.28) - YouTube

예수 중심의 성령충만      행2:22~36     2024.01.28.  ☞ 사도행전 < 66권 인덱스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다 보면, 행2장의 본문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2장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긴 설교입니다.

 

사도행전에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길게 나오는 부분이, 글쎄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면을 많이 할애한 것을 보면, 뭔가 중대한 내용임에는 틀림 없는데,

그 베드로의 설교를 두 세 번 반복해서 읽어봐도,

도대체 뭔 말을 하시는 것인지.. 그 주제와 내용을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통 건너뛰어 가는 본문이지요.

아래 설교는, 그 만만치 않은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주해,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크랩, 녹취해 보았습니다. 자꾸 시도하면 결국 뭔가 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

 

▲도입       

테드 강연 Ted Talks 에서 어떤 강사가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religious

청중 중에 극소수가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요?’  spiritual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종교는 거부하지만, 영적인 것은 좋아하는 게 오늘날 우리 시대의 특징입니다.

분야에 상관없이 ‘영적인 spiritual’ 이라는 수식어가 참 많이 사용됩니다.

 

특히 예술분야에서 spirit 혹은 spirituality 이런 표현이라 표현은

’영감이 풍부하다‘는 극찬입니다.

 

최근에는 이 ’영성 지능 spiritual intelligence‘ 이라는 말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영성 지능’은 하버드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주장한 다중 지능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삶의 근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능력’을 의미하는데요.

마더 테레사,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을, 영성 지수가 높은 사람으로 꼽습니다.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삶의 질이 더 나아진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청년들을 낚시질 할 때도

‘영성 지능을 높여야 된다’ 그러면서 ‘성경공부 같이 하자’

그래서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영성’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은,

우리 시대가 정말 영적인 갈증이 크다는 것을 오히려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그 영성과는 다른,

즉 성령을 말씀하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께서 최초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임하신

오순절 사건 직후에 베드로가 했던 설교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성령을 말씀할 때

소속이 불분명한 모호한 그런 영, 이런 것들이 아니라

분명한 표현을 쓰는데요.

 

-성령은, 예수께서 보내신 영이시다.  ◑1

-예수님을 주 Lord 로 증거하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확인, 확정하는 영이다 ◑2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빼면, 참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오늘 베드로가 설교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 중심의 성령충만>을 사모함으로

참된 영성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님은 예수님이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또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영이십니다.

 

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순절 성령충만의 출발점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

요엘서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가 되는데요.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언하는

그런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행2:17

 

그런데 지금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이 오순절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 그의 설교(본문)의 주제입니다. 행2:14~36

 

▲그런데 그 (오순절 사건, 성령의) 출발 지점이 어디인가요?

22절에 보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의 사역이 그 출발 지점입니다.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성령님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했다.)

 

근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많은 기사 wonder 와 표적 sign 과 권능 power 들을 행하셨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뭐 당연히 압니다.

:22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런 놀라운 권능, 기사, 표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렸을까요? 바로 십자가 때문이죠.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능력 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능력도 행했고, 기사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말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가 메시아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수 없다.’

더욱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았다고 했는데,

저주받아 십자가에 못 박힌 그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진 판단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실패도 아니고 우발적인 사건도 아니고,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였다.. 그렇게 23절에서 증언합니다.

 

23절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3절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죽으신 것이지, 저주가 아니었다는 거죠.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라는 증거는 부활입니다. ↙

 

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유대인들은 의인들의 부활을 100% 믿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시고, (저주받은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결과라는 거죠.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명이 굉장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이해에서부터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갑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때 행하신 표적, 기사, 능력도 알고 있었고,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어쨌든 알고 있었어요.

 

△이제 막상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알고 있는 사실을 넘어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종의 ’빛‘입니다. *일루미네이션

다시 말해 성령의 감화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오신 겁니다)

 

영적으로 눈이 닫혀서,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고 함께하셨고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셔서

가장 먼저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이런 의미였구나

예수님의 부활이 이런 의미였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서로 연결해서 그 의미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 베드로는 일어나서 설교를 하면서,

그 의미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우리의 경험이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을 하나의 실로 꿰뚫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의 조명 illumination 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고

우리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1)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그 한량없는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탁월한 교사시며, 탁월한 안내자가 되셔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더 아는 일에 더 힘써 자라도록

그리고 진정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나요?

 

성령의 역사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합니다.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힘입고, 사람들을 각성시킬 때

시16편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25~28절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 16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 다윗의 시편입니다.

 

당시에 랍비들의 주석이 미드라쉬는

이 시16편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예언이다'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이 시16편을 다 알고 있죠.

그런데 메시아 시편인 줄은 알았지만,

이 시편이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된다고 보지는 못했습니다. 눈이 닫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이 시편 말씀이 주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증거한다고,

지금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베드로의 논리입니다.

다윗이 죽어서 그의 무덤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덤은, 실로암 연못 주변에 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하면서, 예루살렘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을 방문했는데요.

바로 그 옆에 다윗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설교하던 당시에도, 바로 옥외 설교하던 장소 바로 앞에

혹은 그 주위에 다윗 왕의 묘소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인용이 더 생생하게 들렸겠지요.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아니하게 하신다' :27, 시16:10

이 말은, 다윗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왜냐면 다윗은 무덤이 있기 때문에,

'바로 자기의 후손인 메시아를 가리켜서 예언한 것이다'라고.. 베드로가 설교했죠.

 

다윗이 시16편에서 예언한 메시아,

바로 예수님은 그 예언 그대로, 그 무덤에서 썩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흥미롭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이란게 예루살렘에서 공공연한 사실로

다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2,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36

 

다만 예루살렘 거민들은, 이 빈무덤 (부활)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설교를 하면서

그 의미를 밝혀주자, 이들이 이제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지금 설교를 할 때,

성령께서 조명하고(깨달음의 빛을 비춰주고) 계십니다.

 

성령의 조명 속에서, 구약의 성경 말씀과

지금 내 옆에 벌어진 경험적인 증거가 같이 한다는 의입니다.   중략 주2)

 

오늘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굉장히 논리적이면서도, 또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으로)

이 양날을 다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논리와 경험의 한계로 막혀 있던 부분을 뚫어(초월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새로운 논리로, 구약의 성경과 또 빈무덤이라는 그 현실을 같이 연결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밝히 드러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text 을 읽을 때

또 성경을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 context 과 어떻게 연결해야 될 것인가

고민하면서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성령

 

성경 말씀(텍스트)을 읽어야 하고, 우리 삶의 컨텍스트를 같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는가’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래서 내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특히 구약을 읽을 때는, 신약의 조명 속에서 읽어야 하고,

구약의 풍부한 광맥 속에서, 우리가 신약을 더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도움 속에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현실을 더 밝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실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우리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깨닫고 그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2. 성령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주권자가 되심>을 증거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기에 가능했다... 이것을 논증합니다.  ◑1

 

오늘 본문, 베드로가 말씀을 전개하는 것이

우리가 읽어보면 좀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핵심이 이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수여자가 되신다!>

 

지금 구약성경의 증거, 그리고 현실 속에서 있는 빈무덤이

일치해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이것을 이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지금 납득을 시켰죠. 설교가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근데 그걸로는 조금 불충분합니다. 하나 더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베드로가 주장했습니다.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 맞다’ 이렇게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메시아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게 당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논리라는 말입니다.

 

뭐냐면 ‘의인들이 부활한다’ 이것은 그들이 다 믿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의인이 될 수는 있지만, 메시아가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메시아는 온 우주를 회복시키시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의인을뿐 아니라

어떻게 온 우주의 왕이시고, 주권자가 되실 되실 수가 있는가를

지금부터 논증하는 겁니다.  ◑2

 

(지금 여러분이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신데요.

제가 양해를 좀 구해야 되겠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베드로가 설교를 주해하면서 여러분에게 설교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이론적이고, 조금 복잡한 이유는

제가 복잡하게 설명해서가 아니라

원래 베드로가 복잡하게 설교를 했기 때문에,

제가 지금 본문을 좇아가다 보니까, 조금 이론적일 수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온 우주의 주 Lord 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베드로가 세 가지를 전개합니다.

 

1) 주되심의 첫번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33a절을 보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보좌 우편 자리로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 어디입니까?

온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 온 우주의 권력의 실세 자리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으로 등극하셨다... :33a

그게 바로 “승천”입니다.

 

그런데 승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뭡니까? 성령님을 보내주신 일입니다.

 

2) 두 번째 증거 :33b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렇게 말을 해도 되지만,

33b절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그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어요

 

그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왜 이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할까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창조의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실 때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며 창조하셨습니다. 창1:2

 

그런데 그 창조의 영이신 성령님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님은 예수의 영으로서

이제 예수님을 통해 온 우주를 새롭게 재창조하고 회복하는 그 일에 가장 중심의 계시다.’

이것을 지금 베드로가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가 되신다’는 거죠.

우주의 창조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시는 분이니까.

 

3) 세 번째 증거는 구약 성경의 성취입니다.

시편 110:1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우주적 메시아가 되심을 확정하고 있는데요.

 

34~35절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분명히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이 자기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주’라고 부르시고

바로 그 주를 하나님이 자기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그래서 원수를 포함한 모든 우주가 그에게 굴복하게 하셨다.

 

‘이 예언이 바로 지금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통해서 확정되었다. 바로 구약이 성취되었다.’

라고 베드로가 설교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위 구절(시110:1)을 공생애 때 인용해서 설교하신 적이 있죠. (마22:44, 막12:36)

아마 베드로가 그때 예수님께 듣고 배웠나 봅니다.

베드로는 이 시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언급했습니다.

 

종합하면, 예수님의 주되심이 어떻게 증명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하나님 우편에 높이신 “승천”  : 33a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우리들에게 내려주신 “오순절 사건”  : 33b

-구약에서부터 쭉 이어오던 그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  :34~35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Lordship 을 지금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설교의 마지막 결론이 36절입니다.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주권자 되심을 지금 논증하고 증거합니다.

근데 저희가 그의 설교를 살펴보면,

‘이거 뭐 이렇게 복잡하나? 성령충만 받았으면 그걸로 됐지,

그냥 불 받았다.. 이렇게 짧게 끝내면 되지, 왜 이렇게 설교가 길게 이어지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데요.

오늘날 우리가 성령충만을 정말 얕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사건을 ‘그냥 불 받은 감성적인 사건’ 정도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성령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도구’

또는 ‘성령은 교회 성장의 도구’

그게 바로 성령충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물론 지금 전 세계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다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1970~80년대에 급속한 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한편에는 말씀운동, 또 한편에는 성령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양대 산맥이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과 더불어,

오순절 운동이 참 너무나 큰 기여를 했습니다.

 

지금도 사실 유럽의 기독교가 쇠퇴했지만

그곳에서도 지금 교회가 성장하는 계통은 다 오순절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런 외형적인 성장만 보고,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살리시고, 성장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수여자가 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예수님이 온 우주의 왕 되심을 증거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왕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초대교회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

각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이들이 무엇을 주목합니까?

그 기적을, 현상을 주목합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수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주목하고 있습니다. :36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생애가 새롭게 조명됩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증거됩니다.

 

성령충만은 단순한 종교 체험도 아니고,

내 욕망을 채우는 방편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 깨어진 온 만물의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성도들에게 밝히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통해서

성도 자신이 유익을 입을뿐 아니라,

그 성도가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무장되어서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성취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의 성령 역사,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성과는 너무나 대조되지 않습니까!

 

◑적용

 

오늘날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한계를 느끼고

어쨌든 초월적인 것에 자꾸 눈을 돌립니다.

 

그래서 ‘영적’이라는 말을 쓰면, ‘물질적’인 것에는 좀 반대되는

또 ‘영적’이라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 ‘영적’이다 그러면, ‘우주와 깊이 연결된다’는 것, 소위 도 닦는 사람들이 그러죠.

또 ‘영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좀 더 잘 가꾼다’

이런 것들로 ‘영적이다 spiritual’ 라는 말을 쓰지요.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영적 spiritual’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무조건 다 좋아하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게 있습니다.

 

거기에서 영적인 것은 좋지만 ‘예수님’은 쏙 빼버립니다.

영적인 것은 환영하는데, 예수님이 들어가면 싫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만약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이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수여하는 분’이라면

그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것, 만유의 주권자가 되시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주와 만물의 주권자가 되신다면

내가 그분의 통치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내 삶의 왕이 되고 싶은데,

나를 포기하고 나를 복종시켜야 하는데...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느니, 그냥 빼버리자..

그러면서 예수님은 빼고, ‘영적이라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이런 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삶의 왕좌에, 여전히 내가 앉아 있어야 되고

그러면서 겉으로는 내가 좀 더 고상하고 멋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

이런 것을 꼭 잡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신앙이 변질되는 거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변질되어서 자기 욕망의 포로가 되고,

썩은 냄새를 진동시키는 이게.. 그 결과입니다.

성령운동에 ‘예수님’이 빠졌기 때문에, 성령운동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주의 주권자요,

성령의 수여자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기 삶의 왕좌의 예수님을 모십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죠. 또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참된 성령운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가기 때문에

참된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더욱 모시는 길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반지의 제왕>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봤던 것 같아요.

 

<반지의 제왕>은 J R R 톨킨이 쓴 소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참 흥미롭습니다.

그러면서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오히려 더 잘 빛을 비춰 줍니다.

 

영화의 주인공 중에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가 나오죠.

그는 반지 원정대를 이끌고,

악의 근원이 되는이 절대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모르도르 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 지나가는 길에 수많은 방해가 있어서

어떤 길을 갈까? 고민하다가,

반지원정대가 어쨌든 모리아 광산이라는 지하를 통과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근데 간달프가, 모리아 광산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화염 악마’라는 존재가 있는데

 

자기가 거기에 가면, 화염 악마하고 이제는 싸워야 되는데

그게 두려워 가지고 다른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결국 안 돼서 그 길로 들어갑니다.

 

가서 ‘화염 악마’와 싸우다가, 같이 낭떠러지에 추락해 버립니다.

모든 원정대 사람들이 ‘간달프가 이제는 죽었다’

그러면 인도자가 죽어버린 거니까, 이제 원정대는 산산조각이 나 버리지요.

 

그런데 나중에 2편에 가면, 간달프가 죽지 않았습니다.

‘화염 악마’와 싸워서 이기고,

더 큰 힘을 가진, ‘회색의 마법사’가 아니라

‘백색의 마법사’로 돌아옵니다.

 

제가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과 맞닥뜨릴 수 있고,

악의 유혹에 맞서 이길 수 있는지’

원작자 톨킨의 깊은 통찰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거기를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싸워야 하고,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을 맞닥뜨리기 때문에,

그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화염 악마와 맞붙어서

끝까지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싸워서 이기고 난 다음에

회색의 마법사가 아니라 백색의 마법사라는 한 단계 더 올라간...

 

우리로 말하자면, 덜 인간다운 사람이

진짜 인간다운 사람으로 한 단계 점프하는 길이 여기에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톨킨이

‘십자가로 악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길을’

이 스토리 안에 암시해 두었던 겁니다. 또한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야한다는 거죠.

 

우리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지만, 온전한 사람이 되셨는데,

온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와 음부까지 내려가시는 그 일을 하시자,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시고, 보좌 우편에 앉히시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야 되는 삶의 길을 비추어줍니다.

만약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 스스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셔서 주님이 되시면,

그제야 우리는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없어질 것 같은데..

그게 세상의 논리 아닙니까.

 

그래서 어쨌든 이것저것 다 좋은 것은 끌어들여서,

나를 삶의 왕좌의 중심에 딱 두고, 나를 보호하려는 것,

이게 인간의 본성이죠. 근데 성경은 아닙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왕좌에 계실 때,

내가 진짜 나다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에 계실 때,

내 인생이 진짜 나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이 되실 때,

진짜 내가 살아나고, 선한 능력으로 내가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범 인물이 바로 베드로 아닙니까.

베드로가 성령충만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죠? 허세가 많았어요.

 

‘내가 죽을지 언적 주를 떠나지 않겠다’

허세가 많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마음에 두려움을 감추는 거죠.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사람들이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자,

‘지금이 오전 9시인데, 누가 이 시간에 단체로 술에 취하냐? 헛소리 하지 마라!’

굉장히 논리적이죠. 그러면서 요엘서와 시편 성경을 인용합니다.

주저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변죽만 눌리는게 아니라, ‘너희들 구약의 다윗의 시편 알지? *시16편

메시아의 통치를 예언하는 시편도 알지?’ *시110편

 

‘그 시편에 예언된 일이

지금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확정되었어!’

 

그의 설교가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던 성경이, 이제 자기들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사람들 앞에서

지금 베드로는 두려움 없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라고 당당하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36

 

이런 담대한 말, 그리고 용기, 그리고 또 불타는 논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뿐 아니라 오늘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베드로에게 주신 성령충만의 은혜를

하나님은 똑같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께서는 권능을 주시고,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소망과 기대가 다 무너져갈 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외쳤지 않습니까?

 

그럼 오늘 우리는 무엇을 외쳐야 할까요?

‘예수님께로 돌아가자!’

 

성도가 성도 되는 길,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길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갈 때, 하늘에서부터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내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서 길을 잃고 힘을 잃었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께로 돌이키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 충만하게 하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세상 속에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 뭐 명상가라든지, 도인들이라든지

겉으로 폼잡는 사람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왕좌에서 앉아서

스스로 신령한 척하면서

사람들에게 참 마치 뭔가 자신이 참된 영성으로 인도하는 듯 포장하고,

그러나 결국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그 가짜 영성들,

 

그들이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는 그 가짜 영성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성령충만을 힘입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 중심적인 성령님을 통해

나의 중심과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로 세상 속으로 더 뻗어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중심의 성령충만’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내 안에, 그리고 세상 속에 아름답게 이루고 수종 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같은 본문의 다른 설교 https://rfcdrfcd.tistory.com/15976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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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된 부분

오늘날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 중에, 신앙적인 지식은 많은데

그 지식이 그냥 파편처럼 조각 나 있고, 진주목걸이처럼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수년을 다녔는데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자기 말로 설명을 못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 앞에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왜 이 사람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했을까요.

 

옥스포드 교수였고 기독교 변증가 있던 C S 루이스가 했던

유명했던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문학 작품을 대할 때 우리가 처음으로 해야 될 임무는

항복하는 것이다. 즉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독자는, 모든 작품을 온 마음을 다해 읽고, 최대한 수용적 자세를 취한다.”

 

읽고, 듣고, 보는 것에 집중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것을 진짜 이해하고, 내 것이 되는 겁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고 믿지 않았는가요?

제대로 집중해서 보거나, 주의 깊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선입견에 빠져서, 아예 처음부터 인식의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고,

우리 인식의 문, 즉 영적인 눈을 활짝 열어 주셔야 합니다.

 

오늘날이 현대 사회가 과학, 의학, 심리학이 눈부시게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깊이를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티벳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서구 사람들을 크게 한방 먹인 일이 있습니다.

“당신들 서구인들이 바깥 세계를 탐험하느라 분주한 동안에

우리들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열심히 탐험해 왔다.”

 

그렇게 말했는데 ’인간의 그 내면 세계가 우주보다 크다‘ 이런 말이지요.

근데 이 말을 듣고 서구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격은 무슨 충격입니다.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시편 139:1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창조하셨고

나를 기묘하고 놀랍게 지으셨다‘

옛날 번역에서는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그 한 인간이라도 그 자체가 놀라운 우주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신묘막측한데)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얼마나 크신 분이십니까.

 

 

주2) 중략된 부분

오늘날에 온갖 영들이 다 활동하는 시대를 저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들도 열심히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현상들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고,

그러면서 ’성령님 성령님‘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요일4:2~3

 

참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이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기 중심적으로, 자의적으로 읽지 않고

예수 중심으로 읽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계시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해

바로 이 성경과 역사적 사실이 일치하는 지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성경이 이해하기 어렵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별 이상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예 처음부터 이거는 가짜라고 옆으로 제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 우리가 살면서,

성경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고 증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령님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