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6

부활의 증인들

LNCK 2016. 8. 13. 13:02

부활의 증인들                     2:22-36                     16.07.10. 출처

     

의인의 고난, 십자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1절까지 첫 부분은 성령의 임재가 뜻하는 바를 전했습니다.

곧 요엘 서 말씀을 인용하여 새로운 시대의 시작임을 알렸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입니다.

이를 달리 신학적 용어로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는 단어 그대로 선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초대교회가 선포했던 케리그마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포의 내용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주님이며 그리스도이시다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좀 난해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는 십자가의 신학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많은 설교에서는 십자가에 큰 의미를 담지 않고 있습니다.

 

십자가 신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대속의 신학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이 십자가의 대속 사상이

베드로의 설교나 사도행전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좀 의아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이

꼭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선포는 부활의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인류를 향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행전에서 십자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서 십자가는 단지 의인이 받았던 고난의 일종이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23절과 36절이 대표적입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3장에서 계속되는 베드로의 성전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3:14-16)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7:52)

 

바울의 안디옥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13:27-29)

 

하나같이 십자가를, 대속 사상의 성취가 아니라

의인이 불의한 자들에게 받았던 고난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보다 결정적인 장면은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났을 때 일어났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53장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를 대속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대속사상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기 힘들어 했던 것은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잠잠했던 어린 양이 누구였느냐는

고난 받는 자의 정체였습니다. 내시가 빌립에게 묻습니다.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8:34)

 

십자가는 의인이 당하는 불의한 고난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를 불의하게 죽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에게 십자가는 비참함이나 피해야 될 고난이나 인간이 행했던 불의의 산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죽을 때인데 영화롭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오르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를

들린다’ ‘오르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3-1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겟세마네 기도가 없습니다.

겟세마네는 인간적 고뇌를 보여줍니다.

 

요한은 죽음의 잔을 회피하려는 예수님의 모습보다

그 잔을 영광스럽게 마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다 이루었다는 영광의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대속의 의미보다는 영광이며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입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하시는 어린 양의 제사를 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처럼 교회당에 내걸고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실상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선뜻 십자가를 자랑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정치범들에게 주어지는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십자가는 예전에 의인들과 선지자들이 당했던

고난을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에게 몹쓸 짓을 행했습니다.

명백한 인간의 잘못이며 불의입니다.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의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무어라 설명합니까? 23절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었고, 하나님이 미리 아셨습니다.

이는 성경으로 미리 예고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팔았던 유다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어라 말씀합니까?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16)

 

인간의 완악함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인간은 온갖 불의를 행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 인생 또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음을 믿음으로 압니다.

 

우리 인생 속에 당한 어려움이나 고난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음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분별한 불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서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속절없이 십자가에게 돌아가시던 날

제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그 날 그들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음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악인들이 악들 도모하지만 그것은 허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베드로의 설교의 초점은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을 예언의 말씀으로 해석하며,

이미 성경에 예고된 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취되었음을 설명합니다.

자신들이 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임을 증언합니다.

 

31절과 32절입니다.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이유를 27절에서 또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가장 비참한 곳에 버려둘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이유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가 더러움과 비참함 가운데 있는 것을 견딜 수 없기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6)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부활시키겠다는 성경의 약속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져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 거룩한 자를 절망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는 그 결국이 선하게 될 것입니다.

우주가 붕괴나 절망으로 가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과는 어긋납니다.

 

우리는 그래서 부활을 소망할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재판석 상에서 외쳤던 바이기도 합니다.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24:21)

 

로마 사회를 격동시켰던 것은 바로 이 부활의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마쳤을 때 소위 철학하는 자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내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17:32)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또한 우리 자신들 또한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종교이고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며 다녔습니다.

 

우리 또한 사도들의 바통을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증언을 통해서만 예수님의 부활을 압니다.

 

부활의 소식은 무엇보다 우리의 증언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를 오랜 동안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제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그 부활의 증언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날은 말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이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말로는 다 천사요 애국자입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말의 성찬은 무력합니다.

 

당신은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까?

절망이 아니라 희망 속에 살고 있습니까?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까?

위협과 유혹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의 길을 굳건히 가고 있습니까?

 

일시적인 이 세상의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주와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도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메시야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보좌 우편이란 것은 방향이나 서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주권이 예수님에게로 넘어갔음을 말합니다.

 

고대의 신화들을 보면 아버지 신보다 아들 신이 더 강력한 것을 봅니다.

바벨론에서는 아버지 압수 신보다 마르둑이 더 강하고,

가나안에서는 아버지 엘 신보다 바알이 더 강합니다.

 

헬라 사회에서도 크로노스보다는 아들인 제우스 신이 만신전의 수장입니다.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무력하게 되는 일은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며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강력한 능력과 권위에 오르셨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최고의 주님이십니다.

소위 모든 신이라 불리는 것들과 모든 만물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이 소망했던 메시야입니다.

초대교회를 전후에서 수많은 메시야가 탄생을 했지만

진정한 메시야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메시야 됨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현대 유태인들은 기독교를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메시아닉 쥬(유태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메시야란 위험한 존재입니다. 유대 지역에서는 메시야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고

그래서 로마 제국은 메시야 운동을 불온시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도, 세상을 어지럽히고 로마의 통치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많은 메시야 운동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4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애굽인이 있었습니다(21:38).

4백 명을 이끌던 드다의 운동도 있었고,

갈릴리 유다의 폭동도 있었습니다(5:36-37).

메시야 운동은 로마 제국을 긴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를 신처럼 숭상했던 로마제국 종교와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곳곳에는 황제를 위한 신전들이 세워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은화에는 황제를 신이라 명백히 새기고 있습니다.

황제는 주님이었습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칭송하는 한 석상(Priene Inscription, BC 9)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은 그를(아우구스투스) 구세주(savior)로 보내셔서

인류와 우리 자손들에게 은덕을 베풀도록 하셨다...

신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의 날은 세상을 위한 복음(유앙겔리온)의 시작이었다.”

복음이란 말은 황제 제의에서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이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이라 하여

복음의 시작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2:1)

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비교합니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진정한 주님이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 숭배를 끝까지 거부하였고 이것이 순교의 이유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어떤 신이라도 섬겨도 좋지만

다만 황제 숭배를 겸하여 섬기라고 하였지만, 기독교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우상숭배일뿐만 아니라 유일한 주님이 계신데, 어찌 다른 신을 섬기겠습니까?

 

사도행전 곳곳에서는 기독교를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집단이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우리는 누가가 썼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어디에도 누가가 기록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두 성경은 다른 성경과는 달리 매우 역사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두 성경은 엄밀히 따지면 익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겸손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 메시지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로마 정치 체제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진 위험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요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정치 체제나 어떤 인간이 우리의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히틀러 시대에는 정치적 이념이나 인간이 주님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고백교회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고 하며

이 이념을 분연히 거부하였습니다.

 

현대에는 국가나 민족이 주님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가치도 주님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우상은 맘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좇아 살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돈을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는 바벨론 포로기와 같습니다.

맘몬의 가치가 교회 안팎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맘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해방의 복음은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울려 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을 마음 판에 새기고 날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맘몬과 세상의 신은 그만큼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굴종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가장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의 궁극적 실체이십니다.

그가 참이요 다른 것은 거짓이며 그림자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주님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님이시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참된 기쁨과 생명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