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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원리가 막힐 때

LNCK 2024. 2. 5. 02:50

긍휼의 원리가 막힐 때        히4:14~16, 롬9:30~32           설교일부녹취

 

※‘공의’에 대해 말할 때는, '공의'만 말하지 말고,

그 말미에는 ‘긍휼’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

 

보통 ‘회개’를 논할 때도,

그 말미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을 같이 언급하듯이...

만약 그렇지 못하면, 맞는 말이지만, 극단에 치우칠 수 있다는 권고.

 

..............................

 

우리가 아무리 신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경험을 갖고 있어도

'긍휼의 원리'로 살지 않으면, 긍휼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 신앙의 연륜, 경험, 지식, 직분...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다.

 

긍휼이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전의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가시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긍휼의 원리'가 막힐 때가 있다.

 

그런데 긍휼이 언제 막히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내가 벌떡 일어나서, 살아서 돌아다닐 때이다.

 

그때 긍휼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통로가 막히니.. 긍휼이 내게 공급될 수 없다.

 

즉, 내 자아/육신/옛 사람이 살아나면,

'긍휼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원리, 옳고 그름의 원리가 작동한다.

시시비비를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은혜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는 롬9:30~32절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어리석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롬9:30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 justice 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이방인들은, 자기 부정이 있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이 ‘여겨주시는 의’를 간절히 사모해서.. 그걸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자기 부정이 없었다. 자기가 의롭다는 것이다.

자기 행위로.. 자기는 의롭다고 자처하다가.. 실패한 것이다.

 

내 자아, 내 옛사람이 살아나면..

'긍휼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심판의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부하셨다. ‘너희들이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긍휼의 원리'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긍휼의 원리'로 살아갈 때, 은혜가 우리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긍휼의 원리'가 작동할 때, 은혜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때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이 고백이 우리 삶에서 실제로 있게 된다.

 

▲야고보가 깨달은 진리 -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야고보 사도는, ‘경건’이란 주제로 야고보서를 쓰셨는데,

이 분이 남긴 아주 중요한 말이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말씀이다.

 

저는 아래 말씀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고 했다.

긍휼은 정의를 이긴다.

 

야고보는 경건을 추구하다가 깨달은 말씀이 있다.

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구나

그렇지, 하나님이 나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재었으면, 내가 남아있을 수 있었겠나?

 

욥기에도 보면, 옳고 그름의 문제로 하니까 자기의 순전함을 항변하다가,

욥이 죽을 맛이었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답은 ‘긍휼’이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가 중요하다.

'긍휼의 원리'로 살아가는 삶,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히4:14~16인데, 우리가 어떻게 '긍휼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동정)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긍휼히 여길 때, 마음만으로 긍휼히 여길 수 있다.

환우를 보고 ‘너무 아프겠다. 빨리 나아서 퇴원하게’ 입술로만 위로할 수 있다.

 

그런데 진짜 똑같이 아파본 사람은, 말은 안 해도 마음이 통한다.

그냥 옆에만 있어도, 왠지 난로 곁에 있는 것처럼, 따뜻함이 오고 간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그 긍휼히 여기심은,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아픔을 당하시고, 똑같은 죄의 짐을 지셨기 때문에,

주님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가 안다. 그게 주님의 긍휼의 의미이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온 것만 해도,

주님과 우리는 마음이 (긍휼로) 통해야 한다.

 

▲현실에서, 신자는 긍휼을 버리고 산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긍휼의 원리'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고,

‘주님 이것이 옳지 않습니까? 주님 제 의견이 맞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으면.. 주님과 우리가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옳고 그름으로 대하시기 이전에,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내가 긍휼히 여겨줄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긍휼의 원리'가 우리에게 작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아~ 기가 막힌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삶을, 그렇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삶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긍휼의 원리'로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말이 ‘의’를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둘은 항상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죄의 통치 아래, 사망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에서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저 같으면, 그냥 ‘우리가 죄짓지 않게 해 주세요.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것 같다.

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대목을 넣을 필요가 없다.

 

실제로 저는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대목을 넣지 않고,

그냥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죄지은 자를 (먼저) 용서해 주옵소서. 저도 그를 용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의 원리'가, 막 내게 소낙비 부어지듯이 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죄는 쉽게 용서 받는다.

내가 '긍휼의 원리'의 소낙비를 맞고 있으니까!

 

내가, 내게 죄 지은 사람을 먼저, 기꺼이 용서할 때,

그런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라.

‘하나님, 제가 죄 짓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깨끗하게 살게 해 주세요!’

그게 아니라,

 

주님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저도 용서하오니, 주님, 그를 먼저 사하여 주소서’

‘그와 같이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야 내 죄가, 쉽게 용서 받는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타인의 죄를 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죄도 사해주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막히면서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이다.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라.

여러분이 사는 게 아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의 주체이시다.

 

주님은 내 삶을 체휼하신다. 그 분이 내 안 에 계시는데,

내가 상대방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건 내 속에, 내가 살아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 '긍휼의 원리'로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면서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누리고 살아가시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 정말 내가 예수님과 세례 받은 줄 믿습니다. 하나된 줄 믿습니다.

이제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되게 해 주시고,

또 내가 그러므로 말미암아 '긍휼의 원리'로 은혜의 통치아래 살아가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성화도 이루어진 사실 에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