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8I_qUMOOnc
*위 동영상 46:30초 ~ 1:26:40초까지 녹취, 정리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P1
2014 대학부 집회 셋째날 저녁집회 설교 ☞첫째 날, 둘째 날 설교 보기
◑말세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이냐?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전3:5
여러분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무성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무성한데
경건의 능력을 그들은 부인하고 상실하게 됩니다.
세상을 어둠 가운데서 건져줄 유일한 빛이 되는 교회 공동체까지도
그 어둠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여기 나오는 '경건의 능력'은 뭘까요?
여러분이 '경건의 모양'은 아시겠죠?
우리가 외적인 종교적 활동으로 모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고, 수련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는 것.. 이것은 경건의 능력이 아니고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면 '경건의 능력'은 무엇이겠습니까?
문맥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자기와, 돈과, 쾌락을 사랑하려고 하는 내 마음, 내 의지를 굴복시키고,
우리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되는 것,
즉 내가 진실한 제자가 되는 것, 이것이 '경건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수련회 와서, 여러분들이 이루어야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기를 사랑'합니다. 딤후3:2
지금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잖아요. 이 시대이 시대는 뭔가 하면,
모든 것을 다 자기 속에 빨아들여 버립니다. '자기 중심 시대'죠.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가 죽는' 신앙인데 말이죠.
그래서 '경건의 능력'을 다시 회복하려면,
우리가 이렇게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는 의지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기를 부인하는'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려면,
특별히 산상수훈을 추천드립니다.
제가 청년 시기를 살면서 '도대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자기 삶의 구세주와 주인 Lord 으로 모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모습인가?
그걸 고민하다가, 제가 로이드존스의 책들을 읽다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이 팔복 속에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처럼 대학을 다닐 때,
졸업할 때부터 저는 거의 매일 팔복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1) 하나님 저로 하여금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마5:3
그럼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나는 창조주가 아니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영성신학의 모토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십시오. Let God be God
사람을 사람 되게 하십시오 Let man be man'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가 뒤틀려서 어떻게 됐느냐?
하나님을 사람처럼 만들어 버리고, 우리가 길들일 수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대신에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Let man be God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시대의 모든 고통들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해야 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 가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비조물입니다...'
2) 두 번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나는 누구냐? 거기(5:3)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죄인입니다.
이 세상 속에 있는 어떤 아름다운 것을 통해서도 고쳐질 수 없는 죄인이 바로 저입니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요? 자기 자신이 피조물이니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누구냐?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죄인이요, 죄 덩어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울 수밖에 없어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울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3) 세 번째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는 뭐겠습니까?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지는 것!
여러분 우리 인간은 야생마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광기가 있어요.
그리고 짐승의 기운들, 맹수의 기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하여지고 애통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이 광기가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속에 광기가 있어요...
저는 대학생들이 지금 신앙 좋은 것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지금 뭐 이렇게 성령 충만한 거.. 믿지 않아요.
왜냐면 아직도 여러분 속에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광기가 속에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 하나님 앞에서 씨름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
여러분 속에 있는, 여러분도 모르는 그 광기들을, 하나님 앞에서 빼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빼버려야 돼요.
세상은 우리 속에 있는 이 광기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무엇을 아느냐? 내 속에 광기가 드러납니다.
통제되지 않는 그 야생마와 같은 광기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애통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온유로 옷 입다 보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광기가 빠져나가서,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이 됩니다.
마치 80대의 모세처럼 길들여지게 돼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복을 약속하셨나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차지합니다.
이거는 부동산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승자가 되고 주인공이 되는 그 복은 누가 누리느냐?
온유한 자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6
전에는 물질을, 자기 성공에 목마르게 살았다면,
이제는 '의'를 목말라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배부를 것임이요' .. 그때 진정한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 올바른 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때 인생의 참 만족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갈망이 있나요?
정말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를 추구하며 살고 싶어요.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요.
물론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런데 진정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 후로 점점 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도 아닙니다.
지금 <경건의 능력>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버리고, '경건의 능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저는 대학시절에, 팔복을 묵상하며, 팔복의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성공과 출세를 지향한 게 아니라요.
5)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7
지금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모습은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인데, 딤후3:3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 말세의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나요?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만나게 될 때,
그들에게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거죠.
이거는 은혜가 아니면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어요.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제 경쟁상대였어요.
그래서 토마스 홉스가 이야기했잖아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The war of all against all
어쩌면 현대사회는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일 수 있죠.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일어나는 놀라운 일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더 이상 경쟁상대, 투쟁상대가 아닙니다.
왜냐면, 나의 절망 나의 모순이 유독 나에게만 있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내가 고통하는 것처럼 상대방도 절망하고 있고, 모순 때문에 고통 받고 있어요.
사람들은 (의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병원에 갔을 때, 다른 병원은 다 멀쩡하다 그러는데,
어떤 병원에 가니까 저한테 암 덩어리가 있다는 거죠.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다른 모든 의사들이 저보고 '건강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 의사들이 정말 저를 사랑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목사님, 건강하신 것 같지만 당신 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거 보여준 의사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성경이 그런다는 거죠. 인간의 죄성을, 인간의 타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불쌍히 여기죠.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긍휼의 원리가 막힐 때
여러분 세상은 여러분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머리 좋고, 남들이 볼 때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 속에 괴물들이 자라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후에도, 그 죄성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죠.
자기 속에 정작 괴물이 있고, 광기가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타인을 볼 때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타인은 야수인 것처럼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죠.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8
자기 마음이 오직 한 가지에, 하나님 한 분에 집중되어져 있는 거죠.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 하나님의 지근거리에서 수종드는 것.. 그것이
성도에게는 참 영광이요, 복인 것입니다.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요' 5:9
이렇게 신앙이 점점 성숙하게 된 성도는, 피스메이커가 됩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칭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0
팔복을, 신앙의 점진적 성숙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의 최고 성숙 단계는, 의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자원해서 핍박을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천적인 의로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가운데 펼쳐갈 때,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은 살아갑니다.
천국은 이들의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위에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 통치가, 그 영광이, 그 능력이, 그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서
그는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게 되죠.
제가 이것을 소개해 드린 것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 인간의 모습과 딤후3:1~6
주님이 비추어 주신 성도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마5:3~10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타인을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무정합니다.
그리고 또 정말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쾌락에 지배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과 뒤엉켜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까지 그 영향을 받아서,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여러분 예배 횟수가 줄어들었다, 헌금이 줄어들었다... 그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경건의 능력'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들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으로
그들을 높이고 대접하는 사람으로 우리 자신을 세우는 것.. 이게 바로 경건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말세가 될수록, 교회에 이것이 사라지게 될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말세의 특징은.. 왜곡된 사랑, 왜곡된 인격, 왜곡된 신앙, 왜곡된 열심을 보여줍니다.
▲딤후3: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것은 '영지주의 등 이단 사상으로 여인들을 유혹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뭐죠? 말세에는 사랑과 인격과 신앙이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단이 왜곡된 신앙과 인격을 널리 홍보하며,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죠.
누가 더 큰 열심을 내느냐? 오늘날에도 이단들이 더 큰 열심을 냅니다.
여러분 언제나 세상이 그나마 사람이 숨쉴 만한 곳이 되려면
진리를 가진 사람,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살아가면,
세상은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고... 대신에 누가 난리를 치느냐,
누가 가장 열심히 살아가느냐? 이단들이 가장 열심히 살아가는 시대가 되고,
그때는 고통하는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애가 이제 대학을 다니니까 가끔 뭐 이야기를 해요.
지하철을 타면, 그 속에서 자기한테 전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누구겠습니까? 신천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 아니면 구원파입니다.
캠퍼스는, 저도 지금 대구 학원복음화협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데,
간사님들이 이야기합니다. 청년 사역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우리 대학선교단체가, 이단의 열심을 따라 잡을 수가 없어요.'
△오늘 여러분들이 낮에 캠퍼스 단위로 모임을 가졌는데,
저는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생각해 보면
그때는 예수님을 믿는 젊은이들, 대학생들이 가장 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젊은이들이 그때는 새벽이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되잖아요. 그래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도서관에 가면 항상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그 선배들이 앉아서 공부를 해요.
근데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게, 제가 도서관에 가니까
그분이 귀를 막고 이렇게 속에서 중얼중얼 하고 있어요.
무엇 하시는가 가서 보니까, 바로 앞에 찬송가를 펴 놓고,
귀 막고 속으로 웅얼웅얼 거리며 찬송가를 한 곡씩 부르고 계셨어요.
저는 아마 그 모습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멋있었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에, 찬송가를 남들 귀에 안 들리게 혼자서 부르는 것입니다.
'나 구주 위에 살리라. 내 기쁨 한량 없으리' 제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멋있었어요!
그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 과목 중에 가장 유명한게 <광인론>이잖아요.
정말 남들로부터, 또한 자기 스스로도 미쳤다고 할만큼.. 그렇게 살아가셨잖아요.
과거에 우리 주님을 믿는 젊은이들, 정말 열심히 살아갔고
많은 경건 서적들을 읽었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격려했고,
가장 공부 열심히 했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캠퍼스의 주도권을
우리 기독 청년들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어떻죠? 그 주도권을 이단들이 다 갖고 있어요...
저도 우리 교회 바로 옆에 계명대학교가 있습니다.
가 보면 정말 신천지들이, 그 전도하고 포교하는 방법들이
제가 한 번씩 보면 입이 딱 벌어지도록 정말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대학부 학생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대학생들은
전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본문 6절처럼, 지금도 정말 이단들이
집집마다 들어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들에게 거짓된 복음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곡된 열심으로 부지런한 거예요...
▲3:8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었을 때
바로 왕 앞에서 흉내 내었던 두 명의 술사들입니다. 출 7:11, 22, 8:7,
그들이 처음에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따라 했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들이 나자빠져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단들의 거짓 교리와 포교는, 반드시 나중에 실체가 드러나고 만다는 거죠.
이단들이, 약간의 이적도 행할 거예요.
▲정리하면,
여러분, 딤후3:1절부터 시작해서 9절까지
바울이 이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건데
첫 번째는 사랑의 대상이 뒤틀립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 대신에
자기와 돈과 쾌락을 사랑합니다.
두 번째는 인격이 뒤틀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던 그 아름다운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짐승이 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2~3
세 번째는 교회까지도 경건의 모양의 압도되어져서 경건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4~5
다른 말로 하면, 신자들도 결국은 자기와 돈과 쾌락 앞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왜곡된 열심, 누가 가장 열심히 살아가느냐?
이단들과 거짓을 가진 자들이 가장 열심히 살아가기 때문에
말세는 고통의 때가 될 거라는 겁니다. :6~9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로 네가 이런 시대에 부딪히고
이런 시대를 살아갈 거라는 거죠.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죠.
그런데 이제 10절부터는, 그러면 우리가 이런 시대를 어떻게 극복해야 되는가?
바울은 이제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3:14
'그러나 너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수 데'라고 해서, '너는'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보통 인칭대명사는 동사에 포함되어 쓰지만, 따로 '수 (너)'를 쓰는 것은,
강조적 표현이죠.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까지도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바로 이 집회에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주는 메시지죠.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몸담고 사는 세상은 이런 모습이지만,
"그러나 너는" 즉, 여러분들은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왜 달라야 하는지, 그 이유가 다음 구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주제
그러면서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첫 번째 이것을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따라왔지 않느냐?
그러나 너는 내게 배우지 않았느냐?'
:10~11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거기에서 당한 일, 그리고 어떤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다...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던 것을, 너는 보지 않았느냐?'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는 달라야 되는데, 그 첫 번째 이유가 뭐냐?'
'너는 나를 따라왔지 않느냐, 내가 살아왔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너는 생생히 보지 않았느냐? 너는 두 가지를 봤다.
-경건하게 사는 자는 언제나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 주신다.'
너는 나를 따라오면서 봤으니까, 너도 나를 뒤따라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 대학부 리더들이 많으실 텐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겨울입니다.
대학 2학년 11월 달에 제가 주님을 만났는데
그 전까지는, 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쳤어요.
왜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쳤느냐?
저는 주님은 아직 인격적으로 만나질 못했지만,
먼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렸던 선배들,
그 선배들을 저는 따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거죠.
저는 참 대학교 1학년 2학년 때는, 너무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 선배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소위 좌파던 우파던,
이 세상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성경 속에 있다'라는 것을
우리 선배들이 가르쳐줬어요. 몸으로 보여줬어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여줬듯이
예를 들어 우리가 화목사님 같은 분들은,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저보다 2년 선배인데, 어떻게 나보다 두 살 많은 분이,
저렇게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가질 수 있을까?' 놀랐습니다.
제가 화목사님과 꽤 오래 살았습니다. 그 당시엔 2년 선배였죠.
정말 그때는 그분과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
저분과 내가 같이 자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게,
어떻게 나한테 정말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질 수 있나!
그래서 정말 당시에 보잘 것 없는 그런 자취방이었지만,
거기에 8명이 이렇게 모여서 밥해 먹고 살았지만요.
밥을 먹고 나면 다같이 앉아서, 식탁에서 정말 난상토론을 했어요.
대학에서 부딪치고 고민하는 수많은 문제들도 대화를 나누고,
그러면 또 이제 화목사님이나 또 우리 선배들이
그 주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들을 가르쳐주고, 또 행동으로 보여주고
정말 그 공동체에서 함께 식사하고 생활하면서 저희들은
'아, 이런 분이면 내가 따라갈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많은 청년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누구를 만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원래 순서가 이래요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후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우리 대학 청년 시기는 대부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누구를 만나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후배들이 그들을 만나서, 그들 선배들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에 그들 후배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본문에 청년 디모데가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되었던 것과 같죠)
그래서 대학부는, 우리 선배들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해요
여러분이 바로 후배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그들이 정말 따르고 싶은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셔야 돼요.
△저는 모태교인으로서 수련회를 많이 다녔죠.
대학교 2학년 때 수련회 때, 작은 공동체였어요.
모이면 한 30~40명 정도 였죠.
우리가 그때 대학생 성경공부하는 그룹이었는데
그때 우리들이 대구에 내려가서 수련회를 가졌어요.
한 30명 정도 수련을 했는데 마지막 날에
저희들의 리더로 섬겼던 형님들, 선배들이 앞에 나와서 마지막 날 특송을 했습니다.
그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 대학생 선배들이 앞에 나와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특송으로 불렀어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습니다. 이 세상 부귀도 명예도 행복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찬양을 하는데요.
저는 그때까지 아직도 신앙 속에 깊이 뿌리를 못 내리고 있었어요.
저 구석에 제가 앉아서 그 특송을 듣고 있다가
그 선배들이 이 찬양을 부를 때,
제가 지금도 제 기억에도 남을만큼, 제가 앉아서 듣다가 대성통곡을 했어요.
왜 통곡을 했느냐?
우리 형님들, 선배들이 나와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드리는데
제가 뒤에서 그 찬양을 들으면서, 제 마음에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하나님 저 사람들의 고백은 진실입니다.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들은 우리한테 보여줬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다고.
이 세상의 부요도, 이 세상의 명예도, 행복도.. 주님과는 바꿀 수 없다!
저들의 고백은 진실입니다'
이게 막 사무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통곡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만약에 제가 목회자로서 제가 만약에 우리 성도들 앞에서
제가 사역을 마무리할 때 즈음에
제가 이렇게 나가서 찬양을 부르는 거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에 부도 명예도 행복도
주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찬양을 했을 때
그때 그 찬양을 듣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아이고 목사님 별 농담을 다 하시는군요.
아니 목사님을 보니까, 돈이 더 좋아 보이시던데...
그리고 목사님 살아가는 거 보니까, 명예가 더 좋아 보이시던데...
그리고 목사님 사는 것 보니까, 본인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 같아 보였는데...
아이고 목사님, 은퇴하실 때쯤 되니까 별 농담을, 쑥스러운 이야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여러분 만약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남들이 볼 때 아무리 화려한 것 같아도
내 삶은 실패로 끝나겠지요.
그런데 제가 찬양을 부를 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습니다' 하고 찬양을 부를 때
우리 성도들이 정말 그때 눈물을 글썽이면서
'맞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목사님의 그 고백은 진실입니다.'
만약에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반응해 줄 수 있다면
저는 아마 제 삶이 너무나도 감사할 것 같아요.
△여러분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따라갈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장과 미래의 불투명한 삶 때문에
이렇게 두렵고 정신없이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가 가장 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정말 그들이 닮아가고 싶은, 따라가고 싶은 사람들을
청년들은 찾고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여러분 여러분 대학부 선배들, 리더들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도전했던 것처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왔다.
사람들도, 교인들도 다 세상에 순응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너는 달라야 된다.
왜냐면, 너는 나를 따랐던 사람이니까!
너는 나를 따라왔고, 내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경건하게 사는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확인했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너는 달라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오늘날의 바울들이,
청년 리더들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어딘가에는 이런 리더들이 지금 길러지고 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저는 교회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제게 확인시켜 주었던 어른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렇게 사소한 일 때문에 싸우는구나,
저렇게 속이 좁구나' 하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렇게 그들 속에 하늘의 영광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세상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 들어 와서, 우리 대학부 선배들을 통해서
비로소 저는 봤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다르게 살아가는지,
그들의 삶의 목적이 얼마나 다르고,
그들의 삶의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우리 대학부 선배들이, 그것을 제게 보여 줬어요.
저는 그들을 믿고 따라가고 그들을 따라가다가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다가
어느 순간 저는 그들 속에 있는 예수님을
저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
저는 다시 한번 우리 사랑의 교회 대학부가 *2014년 대학부 여름수련회
물론 안밖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떤 외적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면
모든 어두운 이야기들,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돼요...
P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