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 가운데 거하는 삶ㅣ신년 특별 새벽기도회ㅣ2023-01-11 (03) - YouTube
◈참 빛 가운데 거하는 삶 눅11:33~36 2023-01-11 ☞ <빛>관련글 모음
※눅11:33~36절도, 거의 설교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아주 희소가치가 높은 설교입니다.
◑도입
여러분들, 아마 이런 질문을 해보기도 하고, 받아보기도 하셨을 거예요.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묻죠.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
좀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질문은 별로 없겠지만,
여기 우리 청년들도 계시니까, 여자친구가 이런 질문하는 거 받아본 적 있으세요?
"자기 엄마랑 나랑 물놀이 하다가 동시에 빠졌어, 누구 먼저 구할 거야?"
이런 질문들은 좋지 않은 질문입니다. 왜 좋지 않은 질문일까요?
관계의 온전함을 깨뜨릴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답을 해도,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런데 아마 이런 질문도 있을 것 같아요.
자녀가 자라나면서, 엄마 아빠를 사랑하니까,
청소년 자녀가 엄마 아빠에게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아빠는, 엄마를 더 사랑해, 아니면 나를 더 사랑해?"
자녀가 묻는 이 질문은 진지한 질문이죠.
제가 정답을 알려 드릴게요.
저도 이런 질문을 받게 될 때, 어떻게 대답해야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정답은요. "아빠는, 엄마를 제일 사랑해, 그리고 널 사랑해!"
여러분, 이 질문이 왜 정답이 될까요?
아이가 처음에는 되게 서운해 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대답을 듣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아이가 마음에 평안을 누린다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아빠 엄마가 서로 사랑하니까, 그 사랑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는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고,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핵심을 봐야 되는 겁니다.
아빠와 엄마의 연합이, 아이에게는 사랑의 밑바탕이 된다는 거예요.
그 핵심을 놓치면, 엉뚱한 답을 하게 되는 거지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아래에 나오는데,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하나님이 제일 높이 영광 받으심이,
자녀인 우리에게 안정을 준다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품고,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해 가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삶에 대하여 핵심적인 질문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이 질문 앞에 서 보세요.
-내 기쁨의 가장 기쁜 기초가, 오로지 하나님으로 인한 것인가? (정답)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또는 복)을 바라보기 때문에 기쁜가?' (오답)
☞우상이 주는 즐거움을 끊어내야 https://rfcdrfcd.tistory.com/15981466
비슷한 질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만족하는가? (정답)
-아니면 하나님께 칭찬 받을 때 만족하는가? (오답)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이유가,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리기 위해서인가? (정답)
-아니면 그 모든 것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나의 가치를 높여 주시기 때문인가? (오답)
나 스스로 질문해 보는 거예요.
-여러분 내게 천국이란, 하나님을 보고 만나는 것인가? (정답)
-아니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인가? (오답)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모든 신앙생활의 초점이, 하나님 중심으로 가고 있는지,
나의 삶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지... 여러분 우리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위에서 부모가 중심이 될 때, 아이가 안정을 갖게 된다고 했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겉모습을 잘 갖추어 가면서도
내 삶의 주인이 끝까지 나라고 주장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점검해 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습니다.
이 말이 좀 이상하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시지 않고,
하나님 당신께서 최고의 가치로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거예요.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아빠가 엄마를 최고로 사랑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하는 사람이 많은 거예요.
▲갈라디아서를 읽다 보면, 갈라디아 교회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뭐냐면, 거짓 교사들이 교묘하게 그 교회로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갈4:17~18절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거짓교사)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번역
거짓교사들이 '열심을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높여줍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다해 섬겼어요.
그리고 그들을 설득해서, 자기들을 따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교회봉사를 열심히 했는데,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신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열심히 봉사를 했던 것이죠.
여러분, 거짓된 일에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 바라보는 눈을 가리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 자신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분별하고, 정말 미혹을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거죠.
▲요즘 우리가 살면서,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근데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기가 진짜 어려울까요?
진짜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하는게 정말 어려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즐겨 행하는지를 잘 살펴보고,
또 무엇을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지를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고,
어떤 생각과 말을 주로 즐겨하는지를 잘 살펴보면...
다시 말해서 그의 생활 습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왜 이게 분별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저도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그 가짜의 삶이 부럽고,
그 가짜처럼 살고 싶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가짜가 진짜였으면..'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는 거예요. *일례로 스타 OO
그들이 가짜인 것을 믿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 사람이 가짜라는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럴까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
그래서 그 모습이 진짜였으면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교회의 거짓교사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삶도
정말 십자가의 빛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높임을 받아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여러분들은 열심을 낸다',
또는 다른 일로 나를 칭찬한다면,
이런 경우에, 그 칭찬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하는 칭찬이 되려면,
우리를 보고,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입니다.
칭찬 하는 자기나, 칭찬 받는 우리를 높이려고 하는 칭찬은... 사람 중심적 신앙으로 잘못된 거죠.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막 여러분에게 관심을 갖고, 여러분을 높이고 칭찬합니다.
근데 그 초점이 우리 자신에 있으면, 그것은 정말 정말 두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그 초점이, 우리를 통하여, 그분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는다면,
여러분이 정말 믿음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람을 높이는 칭찬으로 끝난다면, 쌍방간에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높아지려는 것, 우리 스스로가 높아지는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복 받은 삶이 되는 거예요.
▲고전11:1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히 이야기를 할까요?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만 드러나기를' 그가 늘 기도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 같이, 너희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대신에 뭐라고 얘기를 해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게 뭡니까?
'나를 통하여 주님이 하신 일만 너희가 보기를 원한다' 이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따르는 자로 굳건히 서기를 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면 담대하세요.
'나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오기를 원합니다.'
이게 바울의 소원이고, 또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받는다고 느낀다면,
그건 정말 복된 일이고 감사한 일이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만족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귀하고 놀라운 선물이
여러분에게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그분'이신 거예요.
하나님 그분이, 우리 삶에 가장 최고의 선물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선물, 이 놀라운 선물을 누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우리에게 그것을 바라보고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참 우리가 어리석어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쳐다볼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보려고 하다 보면,
우리가 진짜 엉뚱하게 잘못 보게 되는 거에요.
군대에서 경계를 설 때, 어떤 것을 가르치냐 하면
'너무 한 곳만을 뚫어지게 보지 않게' 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야를 다른 데로 옮기도록 해요.
그리고 너무 작은 부분만 뚫어지게 보는게 아니라, 산 전체를 보고,
시야를 자꾸 옮겨 가도록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너무 한 곳만 바라보며 보초를 서다가는,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두운데 저 멀리 어느 한 지점만 보다가, 거기에 꼭 뭐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밤에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가 이상하게 다른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거죠.
우리가 정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똘히 쳐다보는,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는 삶을
매일매일 훈련하고 그 삶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핵심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라보기 원하느냐?'는 거예요.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며, 그분을 따르기를 진정 원하느냐?' 라는 겁니다.
◑본문 해석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두 가지 등불에 관해서 말씀해 주세요.
11:33절에는, 첫번째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
34절에는, 두번째 등불인 우리 각자 ... 이렇게 두 가지 등불이 나오는데요.
눅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첫 번째 등불 빛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세요.
솔로몬의 지혜보다 크고, 요나 보다 큰 분, :31~32
참 등불이신 분, 참 빛이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어요.
등불이 등경 위에 위치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예수께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항시 생명의 빛을 비추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1~32
요1장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니까 참 빛이 계신데도, 그 빛을 거절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게
참 비극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면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으로 우리가 부름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참 등불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등불은 34절에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이게 본문에서 말하는 두 번째 등불인데, 나의 등불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근데 이 말씀은, 좀 풀어서 보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
근데 그것은 나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기도 해요.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볼 때, 비로소 나 자신도 올바로 볼 수 있게 돼죠.
즉,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4b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면, 온 몸(온 신앙인격)도 밝을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다 보면,
우리의 삶은 온통 어둠의 삶으로 이끌려진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35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이게 정말 중요한 말씀이에요.
여러분 속에 있는 빛이, (또는 등불의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31~32절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의 예가 나오죠.
빛이 아닌데도, 빛으로 여기며 사는 어두운 눈이 문제인 거예요.
빛이 아닌데... 세상의 화려함이 빛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본문에, 유일한 명령문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는 말씀이에요.
여러분의 눈이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즘 워낙 영상이 막 범람하는 시대라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았다, 음란한 장면, 탐욕적인 장면 등 강한 이미지를 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떠세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아요.
눈에 보여지는 것에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이나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확확 바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홈쇼핑 보다가 어떻게 하세요?
'이제 마감 5분밖에 안 남았다'고 하면, 갑자기 막 전화하십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의 삶을 마구 움직여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가려지고,
세상 바라보는 눈이 활짝 열려졌다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의 삶은 온통 어두움으로 빠져드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이 안 계시겠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의 빛이 좋아, 세상의 화려한 빛이 좋아!' 이런 마음 드시는 분 계십니까?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아침이 밝아 와서 태양이 비추면요,
그때는 소위 세상에 빛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도 그렇고, 저 천국에 가면 반드시 그렇죠)
정말로 빛의 근원 앞에 서게 되면, 진짜와 가짜는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빛이 드러나면, 어두움은 빛의 속도로 물러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빛과 어둠의 싸움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죠. 빛과 어둠의 싸움은 절대 성립이 안 돼요. 어둠이 힘을 얻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우리가 자꾸 어둠 가운데 빠집니까?'
우리 스스로가 어두움을 빛이라 여기며 살고 있으면,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니까 '참 빛에 거하라'
그리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믿음의 눈을 들어서, 나 자신이 어두움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36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완전히 열어서 드려야 하는 거예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완전히 드리면,
우리의 삶이 빛으로 온전해지고,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36절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둠에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면서, 빛을 드러내는 삶으로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마 '근데 그 삶을 어떻게 사는 거지?'
아마 그런 마음이 드실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주께 온전히 내어드리고,
생명의 빛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1) 첫 번째, 우리가 정말 연약한 질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질그릇이다' 이렇게 말씀했거든요.
질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렇지,
내가 질그릇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달라져요.
그런데 많은 경우, 세상에서 '내가 참 멋진 그릇이지, 멋진 황금 그릇이지'
이렇게 인정받기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겉으로 모든 것을 내세우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우리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2) 그런데 '내가 질그릇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한데 참 놀라운 것은,
내 안에 귀하신 보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나의 능력이 나에게 있는 것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이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고후4:7절에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의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능력의 원천이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께 여쭙는다는 거예요.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내가 가야 할 길을 매 순간 여쭈며 행하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것만 번지르하게 가꾸다 보면, 내 안에 계신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질그릇이니까, 쓰임 받다가 깨어지고 갈라지고 상처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그거 가리고 싶어서
덕지덕지 떡칠을 합니다. 근데 떡칠을 할 때 좀 잘 보이고 싶으니까 황금빛 떡칠을 해요.
여러분 떡칠이 얼마나 보기 싫은지 아시죠? 떡칠하고 또 떡칠하고...
그런데 내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해서 깨어지고 갈라진 틈을,
다 인정하고 나니까, 그 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연약해 보였는데, 그 질그릇이 환하게 밝혀지는 겁니다.
'내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나에게 있지 않다' 이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목회를 막 다시 시작했을 때,
늦은 밤에 제가 전화 한 통화를 받게 됐어요. '이 시간에 웬 전화지?'
당시에 제가 부목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밤늦게 담임목사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담임 목사님에게 갑자기 발등을 좀 다쳐서, 지금 응급실에 가서 몇 바늘 꿰맸는데,
그런데 내일 오전에 담임목사님이, 외부 집회에 말씀을 전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는데,
거동이 어려울 것 같으니까, 제가 대신 갈 수 있는지?' 물어보시는 전화였어요.
늦은 밤인데, 몇 시간 후에 내일 오전 집회에, 당장 가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그래서 제가 일단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안 간다고 말씀드릴 형편이 아니잖아요.
그때가 신년에 특별새벽기도 말씀을 제가 전하고 있던터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도 있고 해서 '가서 말씀을 전해야겠다'
그런데 쉽지가 않죠. 외부집회라서.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에게, '또 강사대신 부목사가 대신 왔다고 실망할 텐데...'
'아까 전화 받을 때, 그냥 못 간다고 말씀드릴 걸 그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겁니다.
제가 인천 마가의 다락방 신년집회에, 제가 하루 맡아서 가게 된 상황이었어요.
다음날 아침에, 제가 일찍 준비해서 갔습니다.
갔더니 예상대로 상황이 심상치 않았어요.
왜냐하면 신년특별집회에다, 특별한 강사님 오신다고 해서, 성도님들이 엄청 많이 모이셨어요.
아 그래서 설교 전에,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제 마음에 좀 눌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담대히 선포해야겠다' 다짐하고 강단에 올랐는데,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저 사람은 누구야? 특별집회 라서 왔는데, 전혀 못 보던 사람이 왔네?'
뭐 이런 분위기예요.
근데 제 마음에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어서,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은혜 받기에 너무 좋은 조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최적화된 조건인 것 같습니다.
강사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너무 좋은 조건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누군지 모르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날 설교 가운데 주님이 은혜를 주셨고, 다함께 뜨겁게 기도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그저 나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나면, 주님께 완전히 맡기고 나면,
하나님이 이끄세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나에게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딱 한 가지,
주님 앞에서 나의 깨어짐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낙심하고 포기할 그런 상황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주의 빛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끄시는 거예요.
왜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님을 드러내고
그리고 남을 섬기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창조의 이유가 분명한데, 엉뚱하게 살려고 하니까
삶이 꼬이고 낙심되고 어려운 거예요.
고후4:10~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써 있잖아요.
예수 생명으로 충만한 삶, 이게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내가 쓰러진 것 같고, 내가 넘어진 것 같아서... 그게 참 아쉬운 거죠.
근데 말씀은,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는 예수 생명으로 충만한 삶으로 부름 받았다... 이게 놀라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삶이야말로, 우리가 참 빛에 거하면서, 참 빛을 드러내는 삶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빛이신 주님을 우리가 함께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또 그분께 여쭙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여러분이 함께 기도하면 좋겠어요.
우리는 늘 연약해서 깨어지기 쉽습니다. 깨어지는게 정상이에요.
근데 문제는 우리가 깨어질 때, 주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그 깨어짐을 인정할 때, 참 빛이 그 (깨어진 질그릇) 틈으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연약하고 깨어진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십시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는 거예요. 그리고 담을 뛰어넘는 겁니다.
생명의 빛을 발하시는 그분께서, 그 빛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주님 제가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깊은 기도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