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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정체성은 ‘기도하는 사람'

LNCK 2024. 2. 24. 21:07

https://blog.naver.com/kaikk/60011227046 정리

 

성도의 정체성은 ‘기도하는 사람'           엡1:15~19          ☞ ▣ 기도

 

◑1. 성도의 첫 번째 정체성은, ‘기도하는 사람’

 

오늘 본문 엡1:15~19절에 기도문이 있습니다. 엡3장에도 또 나옵니다.

저는 ‘바울이 어째서 그의 편지 중에 기도문을 썼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늘 반복되는 기도의 내용을 편지 중에 쓰고 있습니다.

그 깊은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게 누굽니까?’ 하고 누가 물으면,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의 종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주의 종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듯이요.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겨났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또는 성도가)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또 ’신앙 생활이라는 게 뭐냐?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도 ‘기도 생활이다1’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 생활을 윤리 생활, 사회 생활, 도덕 생활에다가 기준을 두고

평가하려고 할 때가 많아요.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늘 문이 열려 있는 사람’이에요.

늘 기도하면서, 수시로 기도의 응답을 들으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마르틴 루터의 말대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것이 신앙이고, 신앙 생활이올시다.

 

그 다음에 이 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선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하고, 정직하기도 하고... 그건 그 다음 예기죠.

그 자체가 신앙생활은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역시 기도예요. 그게 근본입니다.

 

또 ‘잘 믿는다는 것이 뭐냐?’ 하고 묻는다면

마찬가지로 ‘바른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에요.

기도의 자세가 바로 된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 번 들어보세요.

'너희가 기도할 때 이방 사람처럼 중언부언하지 마라'

이것을 보면 이방사람도 기도하거든요. 나름대로 중얼중얼하거든요.

 

‘이방 사람들은 이것을 구하지만, 너희는 그런 것 구하지 말아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그거 다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인데

그런 정도로서는 내 제자가 아니다’ 그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돈주세요, 학비 주세요, 병 고쳐 주세요’

이 정도 수준이라면 예수님께서 평가하신다면, 아직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요.

 

그러니까 기도의 자세, 기도의 수준, 기도의 격,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 말씀하실 때에도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랬어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에요. 이 성전 안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에요.

이 기도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 아닙니다!’

이 문장을 슬로건으로 만들어서, 교인들로 매일 선포하도록 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교회’로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요!

 

가장 잘 믿는 사람은

-기도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

-기도의 맛을 본 사람,

-기도 안하고는 못 사는 사람, 이 사람이 기독교인이에요.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 

바울 서신 중에 보면 종종 편지 내용 가운데 기도문이 나와요.

이건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는 것인데 왜 기도문을 썼느냐?

 

여러분도 좀 그러세요. 남편이 멀리 가 있다면 편지할 때 거기다 기도문을 쓰세요.

아들에게 편지 보낼 때 잘 있느냐?’ 그런 소리만 하지 말고,

나는 이렇게 기도하노라하고 기도문을 편지나 메일 속에 쓰세요.
왜요? 기도문을 썼다는 것은 신령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에요.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이에요.

 

 

◑2. 기도가 하나 되기를 바랬던 바울

 

두 번째는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건 뭐냐 하면 이렇게 소원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기도하니까. 너희도 (이같은 기도를) 힘써라!' 그것이에요.

바울은 자기 기도가, 에베소교인들의 기도와 일치되기를 원했던 거죠.

 

이건 바울의 목회 목적, 방향이기도 했어요.

기도하는 내용과, 목회로 힘쓰는 내용과 방향이 정반대가 되면 안 되지요.

같은 방향으로 가야지요. 그 방향으로 교인들이 따라와야지요.

 

그래서 ‘이것이 내 소원이니까 너희들도 이런 방향으로 힘쓰며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거지요.

 

엡1: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예배 중간에, 뭐 축도 전이라든지, 목회기도 전이라든지,

꼭 ‘바울의 기도’를 교대로 돌아가면서 (성경에 여러 편 나오니까) 목회자가 낭독하며 기도합니다.

그걸 교인들이 반년, 1년, 3년 계속 들으면... 뇌리에 딱 박히게 되는 거예요.

‘아~ 우리 목사님의 목회 방향은, 저 기도대로 가고 있구나...’

 

▲여러분 가정에서도 가끔 보면 그런 경우가 있을 거예요.

저희 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제가 자랄 때 어머니는 목사가 되어야 된다고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는 날더러 기술자가 되라고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아들이 기술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 어머니가 '아들이 목사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느 쪽을 들어 주셔야 하나요?

 

이러면 안돼요. 기도가 하나로 모아져야 되요. 그래야 힘이 있는 거예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돼요.

아버지 기도, 어머니 기도, 아들의 기도, 딸의 기도가 하나가 돼야지,

따로 따로 밤 새워가면서 간절히 기도해도... 기도해 봤자 응답 안돼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한다.

그런고로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

그래서 서로의 기도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의 내용을 알리고 있는 것이올시다.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기도하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기도는 감사로 아뢰는 것

 

또한 여기 기도하는 마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요.

기도하는 마음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면,

본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15~16

 

기도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이 기도라는 것은 답답한 삶에 있어서 죽을 지경이 되어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는 것, 하나님께서 그것도 들으시지만, 그렇게 큰 힘이 없어요.

가장 위대한 기도는, 감사로 기도하는 거예요.

 

빌4;6~7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넘치는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한다'고 그랬어요.

 

‘너희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 사람에 대한 사랑, 믿음 사랑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 마음이 기쁘다, 그래서 내가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마음이 있다’

이게 기도의 분위기예요. 그의 자세예요.

감사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이고요.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 오늘 특별한 말을 본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1:17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실 엄격히 따져 말한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예요.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서열로 따지면 예수님 만이 진짜 아들이고 우리는 다 양자예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 공로를 믿고 그 의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의 아버지, 예수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여기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께 기도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리고 기도의 제목을 보십시다. 오늘 기도 제목을 가만히 보면 특별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무엇을 달라는 얘기가 없어요.

또 이렇게 해주세요 라는 것도 없어요. 물리적인 것도 없고 환경적인 것도 없어요.

환경을 바꾸어주세요, 이거 못마땅합니다, 세상을 바꾸어 주세요, 그런 예기가 없어요.

 

오늘 성경을 보면 총체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나를 움직여주십시오, 나에게 알리게 해 주십시오‘ 그런 내용이에요.

나 자신의 변화를 달라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성령의 별명을 ’지혜의 영, 계시의 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표현은 두 가지로 했지만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혜의 영이 우리에게 와야 비로소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계시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므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뭡니까? 그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요새 흔히 쓰는 말로 말하면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런 내용이올시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있거든요.

 

로마서 8장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랬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많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소용없어요.

영이 감동할 때만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러니까 사도행전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어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왜요?

하나님을 알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하나님을 알면,

나도 알게 되고, 세상도 알게 되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알고, 다 알게 될 것이니까요.

 

▲또 하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그랬어요. 1:18

여기서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그랬지, ‘열어 주십시오’ 그러지 않았어요.

 

사람이 본다고 할 때 눈을 뜨면 보는 거지요. 눈을 감으면 못 봐요.

눈 뜬다고 보나요. 빛이 있어야 보지요. 빛이 없으면 못 봐요.

 

그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는 ‘빛을 비춰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요. '그래서 하나님이여 우리 마음에 빛을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 눈을 떠서 만물을 밝히 보게 해주십시오'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의 눈은 무효입니다.

우리의 지혜도 소용없어요. 우리의 많은 지식도 아무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은혜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셔야만

비로소 우리가 밝히 만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자 하느냐는 것이지요. 보는데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욕과 시기와 질투로 다 어두워졌지요.

주께서 성령의 빛을 비추어 줄 때 비로소 우리가 밝히 보게 되는데

오늘 이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빛을 비추어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어서

나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안다’는 말하고 ‘본다’는 말의 의미가 헬라어에서는 같아요.

영어도 그런 것이 있지요. 뭐라고 물으면 'I see' 그렇지요.

이 see라는 말이 본다는 말도 되고, 안다는 말도 되지요.

 

그러니까 ‘마음의 눈을 밝혀서보게 해 주십시오, 알게 해 주십시오’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게 해달라느냐 하면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 주세요. 밝히 보게 해 주세요’

이건 마음의 눈이 밝아야 볼 수 있어요. 여러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알아요.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사랑하는 마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여요.

마음이 어두워지면 다 캄캄하게 보여요.

 

우리가 분간할 수 없잖아요. 마음에 빛이 있어서 사랑으로 충만하고 은혜로 충만하면

모든 것이 밝아요. 모든 것이 아름다워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거예요.

 

헬렌 켈러 여사가 얼마나 불행한 처지였습니까?

한평생이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로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는데

마지막 세상 떠날 때 '나의 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고 갔어요.

그 마음에 빛이 있으니까 마음이 밝으니까 한평생이 아름다웠던 거예요.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세 가지를 말하고 있어요.

소망, 기업, 능력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어요.

‘이걸 보게 해 주세요, 이걸 알게 해주세요’ 하고 말합니다.

 

‘부르심의 소망’, 이건 미래입니다. 여러분, 미래를 볼 줄 알아야 되요. :18

다음이 뭡니까? 다음에 있는 일이 뭡니까? 시대를 볼 줄 알아야 되요.

 

또 두 번째는 '성도의 기업',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의 풍성한 기업입니다.

스데반을 보세요. 그는 돌에 맞아 죽지만 하늘의 기업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니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문제가 되었느냐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의 땅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똑바로 바라보고 눈앞에 환히 바라보고 살면 오늘 좀 고생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게 없잖아요. 영광의 기업 이걸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또 있어요. 능력, 어떤 능력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힘의 강력’입니다. :19~20

그리스도께 능력이 있어요. 그리스도께 강력한 능력이 있고

그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

그리스도의 엄청난 강력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능력이에요.

 

예수님의 그 베푸시는 능력에 따라서 제자들이 능력의 사람이 되요.

또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그런 간증을 가지고 살아야 되요.

 

내게 주어진 능력을 내가 알고 있어야 되요. 보고 있어야 되요.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하나도 문제가 될 게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마음의 눈을 밝혀서 우리 앞에 있는 소망, 기업, 능력을 알게 해 주십시오!'

거기까지만 기도했어요. 이것만되면 나머지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

 

▲소소한 기도의 재미를 아십니까?

우리는 보통 기도를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거창하게 기도하기는... 글쎄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기도는... 보통 소소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매일 호텔 뷔페나, 30첩 반상을 먹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음식은 가끔씩 먹고요,

매일 먹는 음식은... 김치에, 된장에, 나물에, 김과 계란찜 등 매우 소소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도, 엘리야의 갈멜산 기도를.. 매일 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간 것도, 매일 그렇게 결사적인 목숨 건 기도를 드리지는 못했을 거고요.

매일 드리는 기도는... ‘소소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거를 한 번 해 보십시오. 재미가 쏠쏠 합니다.

 

소소한 기도란, 부모와 자녀의 대화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내 삶을 이끄시는 완전한 부모님이 되시니까,

그때그때 필요한 소소한 말씀을 주세요.

 

일상의 관계 가운데서, 육신의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아침에 '너 일어나라, 밥 먹어라'

학교 갔다 오면 '너 학교에서 어땠니,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니?'

 

청년들은 '직장에서 어려운 일 없었니, 밥은 먹고 다니니?'

어머니 아버지가 늘 하시는 일상적인 소소한 말씀들이 있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매일 묵상하거나 기도할 땐 어떨까요?

엄청난 어떤 말씀을 그것만 특별히 구별해서 주실까요? No

그럴 때도 간혹 있지만, 일상적인 부모와 자녀의 대화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오늘 정말 말씀대로 사는데 힘이 되는

일상적인 소소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실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아주 친밀해지는 거죠.

 

‘주님, 오늘 저녁에 왕성한 식욕을 주셔서, 몇 가지 반찬이지만 맛있게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오후에 일을 할 때, 저를 도와주셔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업무을 잘 처리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 자녀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저까지 마음이 밝아지니 가정이 천국같네요!’

‘오늘도 하루 일을 무사히 마치고, 다들 집에 잘 귀가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도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또 ‘무시로 기도한다’는 말씀도 있죠.

거창한 기도를 드린다면... 그거 계속 기도 못합니다.

아니면 똑같은 기도제목을, 5번~10번 반복해서 (중언부언) 하게 되고요. 계속 기도하려면 말이죠.

 

그런데 소소한 기도는, 정말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루에 내가 만나는 환경이, 매 시간마다 계속 바뀌거든요.

그러니 똑같은 기도제목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늘 새로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겁니다.

그 내용은, 거창하지 않고, 아주 소소한 거죠. ‘밝은 햇살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등등

 

많은 분들이 이러한 관계를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정말 주님과 소소하게 교제하며 사는 거죠.

근데 이게 즐거움과 행복이 상당합니다. 정말 주님이 친밀하게 밀착된 분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주님이 매일 주시는 새로운 말씀이 (큐티)

내 마음에 심겨지고, 날마다 묵상하게 되니까

말씀과 기도가, 레일과 기관차처럼, 둘이 같이 가게 되지요.

말씀이 기도를 돕고, 기도가 말씀을 더욱 깨닫게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도 계속 기도하는 거죠... 주님과 소소하게 대화나누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