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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 그리고 구원

LNCK 2024. 2. 26. 10:22

착한 일, 그리고 구원 - YouTube

 

◈착한 일, 그리고 구원     행4:1~22        2024.02.18.  ☞ 사도행전

 

◑사순절에 힘쓸 일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에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과 절제에 힘쓰는 기간입니다. 

경건과 절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무엇을 가까이 할까, 또 무엇을 멀리 할까?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가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 말을 좀 줄이는 것도 훈련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금식, 절식을 사순절 때 중요한 훈련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이게 좀 힘들기도 했는데, 요즘에는 정말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몸보신한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 요즘 그런 말 잘 안 하죠. 
과거에는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많이 먹어야 건강해질거다'.. 했는데 
요즘에는 사실 어떤 좋은 음식을 많이 먹는 것보다, 
안 좋은 음식을 많이 안 먹는게, 줄이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뿐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에 좋지 않은 정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TV를 너무 많이 보는 것,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유튜브도 자꾸 보다 보면요, 자꾸 더 보게 되고, 
보다 보면 자꾸 더 자극적인 쪽으로 기울게 되고... 결국 정신이 탁해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음식을 금식하는 것 못지않게 
미디어를 잘 절제해서 우리의 정신을 보호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사순절 동안에 날짜를 정해서 TV 보지 않기, 혹은 최소한으로 보기, 
이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요, 매일 뭐 1시간만 보겠다. 2시간만 보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거가 더욱 다가오는데 사순절을 맞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치에 건강한 관심을 갖고,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 정치 뉴스에 과몰입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역시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금식, 미디어 금식은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하시고요. 

 

▲올해는 교회가 다함께 '탄소금식'을 합니다.   주1)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환경에 부담을 주잖아요. 
이것을 좀 줄여 보자 하는게 탄소 금식입니다. 

이것을 사순절에 하는 이유는요. 이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공공의 선을 위한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관심 없이 그냥 살면 편해요. 
그냥 뭐 일회용 막 쓰고, 모르고 그냥 삶을 살면 편한데 
이걸 절제하고 신경 쓰려면 불편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라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죠. 

맞습니다. 하기 싫어요. 귀찮고 불편해요.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희생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이 사순절에, 
우리를 위해서, 또 후세들을 위해서, 조금만 희생하는 것.. 참 좋은 실천입니다. 

'그러면 왜 사순절에만 합니까? 계속 늘 하는 게 좋잖아요?' 누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물론 늘 상시적으로 탄소금식을 하면 좋은데요, 
교회가 늘 이 이야기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순절에만 얘기하는 겁니다)

이 '40일' 이라는 기간은, 성경에도 자주 나오는데 
현대의 과학으로도 증명된 바입니다. 

뭐든지 한 40일 동안 꾸준히 하면요. 그게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미디어 금식이든, 탄소 금식이든, 기도하는 습관이든 
40일 동안 훈련하고 몸에 배이게 하는 것, 

그래서 교회에서 '하라'고 말 안 해도, 스스로 하는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기도도, 규티도, 훈련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는 '해라'고 해서 하는 단계가 있으면, 
그 다음에는 알아서 하는 단계죠. 그 다음에는 뭡니까?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하는 단계입니다. 

좋아서 하는 기도, 좋아하는 예배, 좋아서 하는 섬김과 전도가 돼야 됩니다. 
우리가 사순절 동안에 우리의 습관이 바뀌고, 성향이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탄소금식은 공공선에 대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 공공선과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본문의 해석, 줄거리

행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착한 일'
여러분,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고침 받았습니다. 
뛰어다닙니다. 찬양합니다. 이건 다 좋은 일이잖아요. 그 자체로 선한 일이잖아요. 
기쁜 일이잖아요.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에 불만을 품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탄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락을 보십시다. 

4:1~2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인 그룹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양대 산맥은, 사두개인 또 바리새인 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충 보기 때문에 '둘 다 똑같이 나쁜 놈이야' 생각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리고 배경 역사를 공부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두 그룹 다 예수님께 야단받았지만, 둘은 상당히 달라요.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탄압은 사두개인이 주도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염원했고, 
그 기대의 핵심에는 '부활 사상'이 있었어요. 

물론 예수를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복음의 핵심이 '예수 안에 부활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최소한 그 절반, 부활은 인정하고 사모하고 기다렸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요, 부활 사상은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은 무슨 부활이야?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리고 예수도 싫허했습니다. 

4:2절에 보면 '예수 전(도)함을 싫어하여' 라고 하는.. 감정적 반응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한 것은, 감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비해서 사도들의 대응은, 사도들이 말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우리는 '신앙, 믿음' 그러면 덮어 놓고 믿는 것, 뭔가 비합리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에, 인간의 논리와 합리를 넘어서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요. 

그리고 오늘까지 복음이 전해져 온 역사를 잘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은 그 시대에 맞는 합리성으로 다가온 적이 훨씬 강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아주 비논리적인, 말도 안 되는 미신들이 다 사라지잖아요. 
4:13절을 보세요. '그들(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이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사도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볼 때도 말이 된다는 거죠. 
이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박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의 권력자(사도개인, 제사장 그룹)들이 
처음에는 이렇게 추궁하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

4:6~7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두개인들, 제사장 그룹은 문중, 친족모임이죠. 가족 모임입니다. :6
물론 제사장들이 가족끼리 하는 직임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지금 국가에 일을 논하는데, 이게 사법적인 일인데요, 문중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상한 일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20세기 한국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차기 대통령을 결정하는데, 
어떤 대통령의 가족 회의에서 '우리 차기에 누구 시킬까?' 의논해서 정했다 그래요. 

물론 나중에 당내 경선도 하고, 국민투표도 했지만 
사실상 그 가족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설이 대단히 유력합니다. 
대통령 되는 게 패밀리 비즈니스입니까? No

여러분 당시에 정치적인 지형은, 대제사장 가문이 사실상 예루살렘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2절에서 '예수 전함을 싫어하여' 이렇게 사적인 감정이 동기가 되어서 탄압했고,
또 6절에서 '문중' 회의라고 하는 대단히 사적인 모임에서 이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7 

그들의 말은, 굉장히 공적인 권위로 공익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포장을 합니다. 
아주 큰 모순이죠. 적반하장이죠. 

여기서 '누구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이름'이라고 하는 이 대목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베드로의 눈이 반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베드로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거든요.
이 병자를 낫게 할 때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3:6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름의 권세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옛날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이름을 담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는게 
지금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골자예요. (이름은 곧 권세를 뜻하죠)

그래서 베드로의 대답이 쭉 이어져서 10절에 가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사람이 온전하게 되었다' 이게 여러분 구원이에요. 
다른 이로서는 변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예수 이름으로만,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는 것입니다. 4:12 

이렇게 베드로는, 그들의 질문(:7)을 계기로, 예수의 이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할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결론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사도들의 맨 처음 대답이 이렇습니다. ↓

 

◑교훈 및 적용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유에르게시아)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 '질문한다면' 
사도들이 질문을 받았잖아요. 근데 그 질문을 받았는데, 
그 질문을 그대로 대답하는게 아니고, '자기 말로 바꾸어서 그 질문을 표현'합니다. 
리포뮬레이트 reformulate 하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수사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접근이에요. 
사람이 문제를 잘 풀려면, 질문을 잘해야 됩니다. 
엉뚱한 질문을 하면, 엉뚱한 곳에 가 있게 됩니다. 

예전에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주인공(최민식)이 어느 날 갑자기 납치돼 가지고, 15년 동안 갇혀 있습니다. 
밥도 매일 만두만 줍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납치 구금되어 있는 이유를 모릅니다. 
그리고 15년 후에 그냥 풀어줘요. 

주인공이 사회에 나와서 '내가 왜 갇혔지, 누가 가두었지?'
기가 막히잖아요. 답을 찾아 헤맵니다. 아무리 찾아도 실마리가 없어요. 
헤매다가 헤매다가 결국 다시 덫에 걸립니다. 

이때 덫을 놓은 사람, 범인이 주인공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나를 못 찾은 이유가 있어, 질문이 잘못되었어! 
'왜 나를 15년 동안 가두었지?'를 묻지 말고, 
'왜 나를 지금 풀어 주었을까?' 그걸 물어봐야지..." 

자기가 탈출한 거 아니잖아요. 풀어 주었으면 거기에도 의도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거기서 풀면 답이 나올 거라는 거죠. 

여러분, 질문이 중요합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인생 설계를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허술한 질문은 허술한 인생을 가져옵니다. 

여러분 똑부러진 질문을 하면, 밝은 미래가 올 것입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챗GPT, 생성형 AI, 뭐 얼마나 거센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적응해야 될까요?

그 답이 딱 하나로 모아져요. 
결국에는 머리 속에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이제는 '질문 잘하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검색도구는 많으니까, 지금 챗GPT가 놀라운 대답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니 관건은 '질문'에 달려있는 거예요.

'훌륭한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앞으로 세대를 주도할거다' 라고 봅니다. 
여러분 질문이 실력이에요. 질문이 인격이에요. 질문이 비전이에요. 

국회의원 선거 이제 하는데요. 어떤 질문을 갖고 후보들이 임합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금뱃지 달까? 어떻게 하면 좀 출세해 볼까? 
내가 우리 가문에 영광이 될까?' 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 중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국가에 보탬이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지역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길이 갈립니다. 

여러분, 인생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라면 노후 계획에 어떤 질문이 있습니까? 
덮어놓고 그냥 좋아 보이는 거 하기 전에
'나는 어떤 관점으로 내 노후를 설계할 것인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관점으로 자기 인생을 설계하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돈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내가 기 안 죽고 살까?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까?' 그럴 수 있잖아요. 

요즘 아이들은 중고등학생들 중에 꽤 그런 친구들이 많다고 합니다. 
학원 폭력이 심해서 '어떻게 하면 학교에 가서 왕따 당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도 안 얻어맞고 하루 지날까?' 기막힌 현실이죠. 

이게 불쌍할뿐 아니라, 질문이 거기서 막히면요, 
인생이 그 너머의 꿈을 꾸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시절이 됩니다. 

△여러분, 질문에도 트렌드가 있어요. 
그래도 옛날에는 젊은이들이 어쨌거나 국가의 장래,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축소된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그냥 개인적인 질문만 던지죠. 그냥 안정된 생활... 이해는 됩니다. 
사회가 하도 불안하니까요. 
내가 어떤 질문을 하는 가에 의해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2. 착한 일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유에르게시아)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착한 일'과 '구원'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착한 일'
'유에르게시아'라는 말은, 선한 일, 은덕, 기부.. 이런 뜻이에요. 
이 말은, 당시 사회를 이끌어가는 굉장히 중요한 밸류(가치)였습니다. 

요즘은 도로를 짓는다, 다리를 놓는다, 경기장을 짓는다, 학교를 세운다 그러면
대부분 세금으로 짓잖아요. 
당시에는 스폰서들이 다 있었습니다. 큰 손들이 그런 토목공사를 주도했습니다. 

로마 제국 초기에 엄청나게 많은 도로가 닦이고, 야외 극장, 경기장, 목욕탕, 
신전들이 세워졌는데, 대부분 다 어떤 실력자들이 기부해서 한 거예요. 
그게 유에르게시아(착한 일)입니다. :8

로마의 수도 시설을 보신 분 계시죠? 수십 KM 밖에서 물을 끌어옵니다. 
모터도 없던 시대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물을 올려놓고 중력을 이용해서 아주 미세하게 기울기를 줘 가지고 
수십 KM 밖에서 깨끗한 물을 끌어 오거든요. 
그게 보면 기술력도 기가 막히지만, 도대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스페인에 가면, 샘 끝에 이런 비석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런 비석이 로마세계 도처에 많았습니다. 
'아쿠아 아우구스타' 즉 아우구스투스의 수도 시설이란 말인데, 
그 비석 맨 밑에 D.S.P.F. 라는 아주 유명한 글자를 비석에 새겨넣었습니다. 

 

D.S.P.F. (De Sua Pecunia Fecit) '자신의 돈으로 완료'
지금도 로마에 가보면, 로마 제국의 유적에 D.S.P.F. 라는 표식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물을 길어 마시는데 
'그분 덕분에 우리가 이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래서 유에르게시아를 '착한 일, 선한 일, 은택' 뭐 이런 말로 번역됩니다. 

당시에 이게 얼마나 강력한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역사학에서는 '유에르게티즘'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Euergetism
서양 문화에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말이 있죠. '공공선을 위한 가진 자들의 헌신'을 뜻하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유에르게티즘에서 시작되었다 라고들 분석합니다.

로마제국 초기에는 이게 (착한 일) 최고 전성기였어요.
그래서 막 도시마다 그냥 로마 도시를 카피한 작은 로마도시가 마구 생기는 거예요.
전부 다 그 지역 부자, 유력자들이 돈을 내서 건축을 해서
박수 받고, 인기가 올라가고
사회적 인프라 뿐만 아니라, 지역 축제도 스폰서했습니다.

검투사 시합, 전차 경주 등 그런 큰 행사의 돈을 누가 댔겠습니까?
당연히 로마시대에 최고의 물주는 황제였죠. 그가 '착한 일'을 제일 많이 했죠.
 
그럼 지금부터 로마사회에서 유대사회로 범위를 좁혀서 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최고로 선한 일(유에르게시아)에 유명했던 사람이 
헤롯 대왕이었어요. Herod the great

그는 '건축 왕'으로 불릴 정도로, 대형 토목공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태어나실 때 아기들을 죽인 그 악한 왕이, 
군중들의 환심을 사려고, 그들에게 칭송받을 만한 일들을 골라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라는 도시도 만들고, 
특별히 성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세상 사람들이 쓰는 '착한 일, 유에르게시아'이란 말을,
여기서 가져다 쓴 거 예요.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유에르게시아)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7절에 '너희가 뉘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라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진짜로 착한 일, 선한 일이 무엇인가?' 라고 설명하는 거죠. :9

△9절에 '구원'이란 말이 나오죠. ↑
여러분 여기서 '구원'은 무슨 의미의 구원일까요? 

예수 믿고 천국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혼구원 일까요?
아니면 그냥 병 고침 받았다는 걸 '구원'으로 표현했을까요? 

눅8장에 12년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여기서 구원이 무슨 뜻일까요? 영생을 받았다는 말인지요, 병이 나았다는 말인지요?

행27장에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는 '구원'이란 말의 뜻이 아주 분명합니다. 
풍랑을 만났어요. 배가 난파되게 생겼습니다. 거기서 물에 빠져 죽지 않고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구원'이란 말을 굉장히 다양하고 폭넓게 쓰고 있습니다.  
-구원은 '삶의 문제 해결'입니다. 
삶속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거예요. 

내 병이 낫는 것, 가정이 불화가 생겨서 깨지게 생겼는데 화해하는 것, 
여러분 그것도 구원입니다. *소테리아
당시 세상 사람들이 '구원'이란 말을 그런 뜻으로 썼다는 거죠.
굶어죽는 사람이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그것도 '구원받았다'라는 말을 썼어요.

-전쟁에서 포위되어 이제 죽게 생겼는데, 기적적으로 승리하는 것.. 그때 '구원'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 구조받는다'는 뜻이죠.

*과거 세월호 인양할 때 '상하이 샐비지' 회사가 와서 인양했습니다.
샐비지 salvage 라는 말도, salvation 이란 말과 비슷한 '구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혼구원'이란 말을 쓸 때,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구원' (동사로 소조, 명사로 소테이라)이란 말을 
혼용해서 쓴 거죠.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이란 말이 나오면, 무슨 뜻인지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은, 
1차적으로는 '병고침'을 뜻합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영혼구원'을 뜻할 수도 있겠죠.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란 말을, 
무조건 전부 다 '영혼구원'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거죠.

본문 9절에 나오는 '구원'도, 일차적으로는 병고침을 뜻합니다.
이차적으로는 영혼구원도 되겠죠.

정리하면, 베드로가 '착한 일'과 '구원'을 연결시키는데, 
'착한 일' 해봐야, 그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병고침 받고도 몇 년 있으면 죽습니다. 
헤롯이 토목공사, 건축을 많이 해서 큰 건물을 지어줘도,
여러분 그것 가지고 생기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헤롯을 비롯한 세상의 유력자들이 하는 '착한 일'이
진정 착한 일이 아니며, 
'예수 이름으로 이 병자를 낫게 한 일이야 말로 진정 착한 일이다' 라는 것을 
설교하는 중입니다.

헤롯 같은 독재자도 착한 일, 선한 일을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걸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9절에 나오는 '착한 일'이, 그가 고침 받은 일이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병자의 고침은, 만물을 회복하시는 구원 역사의 표적이다'고 베드로가 3장에서 설교했죠)
rfcdrfcd.tistory.com/15981512
 
그 모든 일에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혼의 구원의 역사가
진정 '착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착한 일'을 궁극적인 구원하고 연결시키는 거죠. ↙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만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시는 우리 영혼의 구원, 
성경은 분명히 이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세계의 변화를 말합니다.      주2)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1

▲3.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된 논지

13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옛날에는 어땠습니까?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들을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람은, 그들을 우르러 보고, 뭐 근처도 못 갈 사람이에요. 
근데 이게 완전히 역전이 돼 가지고요. 
저 제사상들이 베드로를 우르러 보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게 바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에 머릿돌이 된 그 변화에 따라오는 변화에요
이 모든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학문 없는 범인'
이는 랍비들의 학교 수료증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잘못 본 거죠.

그런 평범한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수준의 수사학으로, 
대중을 한 마디로 사로잡는 그 엄청난 설득력 있는 연설을 말했다는 겁니다.

'담대하게 말함' 과거 성경엔 '기탄없이 말함'으로 번역했죠.    
헬라어로 이 말은 '모두 쏟아붓다'는 뜻인데,   
말을 에둘러, 돌려서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쏟아붓든 말했다는 뜻입니다.

'담대함 boldness'은 원어로 '파레시아' 란 말이에요.           주3)
이 파레시아 라는 담대함은, 당시 지식인들, 당시 모든 사람들이 
특별히 철학자 지식인들이 가장 우르러 보던 덕목이었어요. 

과거 그리스에 연설만 잘하는, 말은 기가 막히게 잘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걸로 돈도 많이 벌고요.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들인, 소피스트 들이었어요.

그 반대 진영에 소크라테스가 있어요. 

이분은 진리를 말하고, 진리에 헌신하고, 진리를 위해서 담대히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죠. 
파레시아(담대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 시대 그 이후까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지성 세계에서
이 파레시아(담대함)는 대단히 중요한 민주정치에서 필수적 핵심적인 가치였습니다. 

정말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 
진리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고,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미셸 푸코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굉장히 유명하죠. 
이분이 다양하게 뭐 이것저것 많이 말했는데, 말년에 가서는 전적으로 한 가지 주제에만 집중했습니다. 

파레시아에 꽂혀 가지고... 그의 책이 <담론과 진실-파레시아>란 제목으로 번역도 됐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이 미셸 푸코의 철학에 전부 다 동의하진 않습니다. 무신론자이고요.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철학자가 말년에 전적으로 집중했다는 의미에서
이 '파레시아(담대함)'이란 주제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인류 지성사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주제고요. 

인간의 어떤 진리와 인간의 자유, 인간다운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주제이고, 
이것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 성경에 나온다 (행4:13)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될 진리입니다. 

본문 행4:13절의 '담대함'은 인문학과 신학이 제대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파레시아, 무엇이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을 주는가요? 

이 권력자들이 놀랐던 것은, 단순히 사도들의 지식, 말재주가 아닙니다. 
여러분 아무리 말솜씨가 뛰어나도, 확신이 없으면 설득력 없습니다.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근데 이 사도들은 담대했고요. 또한 겸손했습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담대함과 겸손을 동시에 갖춘 사람들!

여러분, 정말 자신감 있는 사람은 겸손해요. 사람이 왜 교만합니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자기 스스로 우쭐거리고 나대는 거예요. 
혹시 무시당하지 않을까 해서, 자꾸 자기 이야기를 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정말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정말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진리를 가졌기에 담대한 사람,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 문제가 많다 그러지만 
이때까지 한국의 기성세대가 이뤄 놓은 것 중에 하나는요. 
우리 다음 세대들, 젊은 세대들이 세계의 무대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나이 좀 드신 분들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릴 때는요. 
우리나라 제품, 국산은 무조건 못났고, 조잡하고, 허술하고 그랬습니다.

학용품을 보더라도, 일제, 미제는 너무 품질이 좋은데,
국산은 너무 품질이 낮았습니다. 그래서 외제라면 무조건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습니까.
그래서 한국 사람도 오랫동안 무슨 일만 있으면 
'외국에서는 이렇게 한다더라' 그런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근데 지금은요. 많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이렇게 한다더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 다음 세대들이 세계를 활보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미 경제도요. 한나라 안에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어쨌거나 세계로 나가야 됩니다. 
모든 부분이 그렇습니다. 자신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드리는 중입니다. 
위축되지 않는 자신감,
이전 세대가 그 토대는 마련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자신감이, 교만이나 방종으로 나아가지 않고 
진정한 자부심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됩니다.  

결국 여러분, 미래 사회를 이끌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겸손하면서도 자부심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성령 충만한 사람들, 담대하게 외치는 사람들! 

우리가 '성령충만과 담대함' 이런 말을 하면,
감정적으로 고양이 되어서, 업 돼 가지고, 소리를 내지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과 다릅니다. 진리를 내적으로 확신함으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진중하고 겸손한 담대함이죠.

성령이 임하시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설교를 보시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의 제 1번은,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그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이 복음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에요.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은사 뭐 이런 것 이전에 
복음을 아는, 복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토대입니다. 
어떤 사람이 건강한 자존심을 가질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잘 생긴 사람? 집안 좋은 사람? 아니에요. 
그런 것 골고루 다 가지고도, 열등감에 쩔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떻게 해야 열등감을 지울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예뻐지면 그 열등감이 극복될까요? 그래서 성형수술 하잖아요. 

할 수 있으면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물어보고 싶어요. 
그래서 해결되던가요? 안 되잖아요. 

한 번 하면 또 하고, 또 하고.. 그런다면서요. 계속 자기 얼굴에 만족이 안 되는 거죠.
해결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좀 더 많이 벌면, 조금 더 성공하고 유명해지면, 여러분 해결될까요? 아닙니다. 택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열등감에서 헤어나오려는 사람은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것과 똑같아요. 
그릴수록 더 발버둥칠수록 더 빠져 갑니다.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의 외로움, 그 깊이는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사랑은 멸망 받을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할뿐 아니라 
당당하게 하고, 담대하게 만들어서 (파레시아), 그래서 멋진 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겸손할 수 있다고요? 네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복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는 존귀한 존재다'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내가 죄인이다'라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알면 우리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10절 말씀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너희가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 말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이 유대의 지도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았지만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엄청난 권력을 가졌지만, 담대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이들도 용서하시고, 이들도 사랑하시고, 
이들도 당당하게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뭐가 필요합니까? 

지식, 재산, 재능, 노력.. 그 모든 것 이전에.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예수님 품에 안기는 거예요. 
그럴 때에 내가 가진 것, 나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세울 줄 믿습니다. 

내 능력이 아닌,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세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담대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십자가의 은혜에 의지하는 이번 사순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혹시 위축되어 있습니까, 기가 죽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당하게 세우실 줄 믿습니다. 

혹시 교만해져 있습니까? 내 마음에 경고가 지금 들릴지도 몰라요. 
'내가 이렇게만 하면 안 되는데...' 
겸손하려고 노력하지 마시고요.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주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사람,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사람, 
진정으로 창조적인 사람, 그리고이 세대를 축복하는 사람으로 세워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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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탄소금식’은 평소보다 조금 더 걷고, 전자제품 사용은 자제하고, 물을 아껴쓰는 등

작은 생활 실천을 통해 지구를 파괴하는 탄소 배출을 줄여보자는 것입니다.  

 

집안 조명 중 전구 한 개를 빼놓고 지내고, 시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를 가져가며

사용하지 않는 전기제품은 플러그를 뽑는 등

TV 플러그만 제대로 뽑아도 일년에 이산화탄소 20킬로그램을 줄일 수 있는 실천입니다.


주2) 그리고 그 복음은, 세계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무슨 말이에요? 

'이 돌은 쓸모 없어, 저리 갖다 버려! 했던 돌이, 가장 중요한 돌이 됐다는 거죠. 
이 사람 예수는 죽여야 될 사람이야, 사형감이야' 했는데, 
그 분이 가장 선한 분이었고,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버린 돌이 모퉁이에 머리 돌이 되었다. 기준이 되었다는 말이죠. 
사람을 보는 세상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겁니다. 
세상 자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계시를 드러내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 한 사람만 딱 믿는게 아니고 
'나만 이 악한 세상에서 핀셋처럼 딱 뽑아가지고 천국 간다' 그게 아니고, 
이 세상 전체가 다시 재배치, 제 형성되었음을, remapping 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나에게는 이제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떤 인생이 잘 사는 것인지, 
내가 노력하고, 공부하고, 사업하고, 자녀 키우고 하는 그 모든 의미가 다 바뀌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우리 인생이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주3) 행4:13 '담대하게, 파레시아' 가 쓰인 다른 구절

막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요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