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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하나된 교회가 소망이다

LNCK 2024. 3. 10. 05:46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교회가 소망이다ㅣ2024-03-03 (youtube.com)

성령안에서 하나된 교회가 소망이다     행4:32~37     2024.03.03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무엇을 믿느냐... 이것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실천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 
이것에 따라서 내 인생의 방향도 달라지고, 내 선택과 결정도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여러분이 믿고 살았던 그것에 따라, 여기까지 이끌려 온 삶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진짜 온전한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예수님 온전히 믿는 그 믿음을 통해서 
여러분이 온전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 믿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첫째되는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잖아요.

 

야고보서 말씀도 이에 관해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데요.
약2: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진짜 믿느냐에 따라 삶의 실천이 달라지고 
우리의 삶의 실천을 보면,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가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된 성도들이, 본문 말씀을 보니까 하나의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였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선물로 주신 것이 교회이고,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는 이미 주님이 이루셔서한 몸 된 공동체로 이루셔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한 몸됨을 이미 주님이 이루셨으니,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누려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인간이 연약하기에,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 연약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한 몸 된 공동체 못 이루나 보다..' 그게 아니에요. 
이미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우리의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걸 믿음으로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이미 한 몸 공동체인 것이죠.

오늘 말씀 본문을 보면 한 몸된 공동체인 교회가 실제로 행한 일들이 정말 놀랍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 재물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과거에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행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여기서 정말 분명해야 할 것이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 자세히 보시면 
성경이 뭐라고 기록하고 있냐 '믿는 무리가 그렇게 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변화시킵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이것은 자기의 소유도,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도, 심지어 자기의 삶도 
모두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거죠. 이게 진정 '주님 Lordship'을 인정하는 삶이죠.

이 사실 Lordship 을 진짜 믿고 인정하는 사람의 삶이 자유롭습니다. 세상에 묶여 살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자의 삶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 교회 안에 이런 놀라운 일들이 사도행전 말씀 속에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지금의 시대에 교회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너무 놀라운 일이라고 여기게 되죠. 
그러나 그 당시 성도들에게는, 이런 삶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초대교회 그 공동체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첫째,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모두가 그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대적인 박탈감, 상대적인 빈곤에 빠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있었어요. 

오늘 성경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증언은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도전해 줍니다. 

먼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기 욕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과 
자기 삶을 건강하게 지탱해 줄 수 있는 기본적인 필요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이 있었어요. 
욕심 따라 원하고 있는 것과, 삶의 정말 필요한 것을 분별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 
스스로 가난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 참 차고도 넘치는데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상의 눈으로 멋있어 보이는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의 삶이 가난하다 여기며 사는 거죠. 

여러분 그러나 정말 가난한 사람이 누굽니까? 
자신만의 필요를 채우려고, 자기 삶만을 위해서 달려가는 자가 정말 가난한 자 아닙니까? 
자기 수고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채우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는 눈에 보일 겨를이 전혀 없는 자, 
그가 가난한 자가 아닙니까.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한량없이 부어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채 사니까,
그 은혜를 나누고 사는 삶은 생각도 못하는 삶,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 삶입니까? 

신15:4~5절 '내가 만일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내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내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말씀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어요. 은혜를 아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복을 누리게 돼요. 
은혜로 받은 복이라는게 너무 분명하니까 
서로를 세우고, 나누고, 그리고 서로를 지탱해 주는 삶을 삽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신명기에 이미 기록되어진 말씀이 
사도행전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삶이, 힘이 있습니다. 진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또 어떤 일이 도대체 벌어진 겁니까? 
두 번째로 보니까 교회 공동체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성도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행4:35절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들을 당시 성도들이 참 신뢰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한국 사회, 한국 교회를 보면 
목회자, 사역자들 또 교회에 중직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 당시에 초대교회에 성도들이 
'사도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리고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건 진짜 놀라운 일인 것이죠. 
재정을 맡긴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요.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그 재정이 필요에 따라 흘러가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직접 어려운 사람 도울 수 있죠. 자기가 직접 필요가 있는 사람 챙길 수 있죠. 

그러나 '도움 받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도록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만약 개인적으로 도운다면,

누군가는 도움을 주는 자의 위치에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쉽지 않은 관계가 될 수도 있겠죠. (부담스러운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니까 자신들, 개인을 결코 내세우질 않아요. 
자기가 무언가를 헌신했다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성도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기를 그저 바랬을 뿐이에요. 
그래서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섬주섬 프로젝트

제가 예전에 목회하던 젊은이 교회에서 재정 팀장을 맡았던 청년이, 하루는 이런 마음을 나눴어요. 
요즘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기라, 식사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청년들, 혼자 사는 청년들이 많고

그러니 정말 그들을 도울 방법을 교회가 찾아보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까, 여러 곳에서 취업준비 때문에 자취하며 홀로 사는 청년들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놓고 기획위원들이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 주신 마음을 붙잡고 <주섬주섬 프로젝트>라는 것을 시작하게 됐어요.

 

주섬주섬이란, '님을 기고 위를 기자'는 의미죠.

'참 이름을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섬주섬 프로젝트 톡방'을 개설하고, 기획위원 중에 한 명이 운영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요청되어지는 그 톡(문자)을 볼 수 있는 것은, 운영자만 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기획위원들이 점검(감사)하는 시스템으로 했죠.

 

누구나 한 끼의 식사가 필요하고, 차 한잔의 교제가 필요한 경우에

아무 조건 없이 요청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차 한잔'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 청년들 중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커피 한 잔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청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교제하다 보면, 친구들과 성도의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기가 누군가를 커피 대접으로 섬기기도 해야 할 텐데, 그러기 어려운 청년이 많은 겁니다.

 

그래서 그냥 조건 없이 톡으로 요청을 하면

주섬주섬 프로젝트에선 아무 조건 달지 않고 식사나 차 한잔 할 수 있는 기프티콘을 보내줬습니다.

 

이를 도울 마음이 있는 청년들은, 목적 헌금을 했고, 그 기금으로 운영이 됐어요.

근데 그중에 그렇게 하다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때로 익명으로 하다 보니, 좀 남용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재정적인 필요나 도움이 필요 없는 지체도, 이걸 좀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청년 리더십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마음으로 결론을 삼았냐?

'아무리 남용하는 사례가 혹 있더라 하더라도, 진짜 필요가 있는 급박한 청년 지체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이거 그대로 합시다. 누가 잘했냐 못했냐 따지지 말고 하여간 도웁시다.'

그래서 계속 이 일을 해왔습니다.

 

아주 많은 인원이 신청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때를 따라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이

아무 부담 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교회는 흘려보냈어요.

 

제가 매주 교회의 재정을 결제하다 보면 참 놀라운게,

아주 작은 헌금, 소액이더라도, 이 주섬주섬 프로젝트를 위한 헌금이 끊이지를 않는 겁니다.

 

누군가가 이름 없이 이 일에 자기 재정을 계속 흘려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누군가를 아무 조건 없이 도울 수 있는 그곳에, 재정이 마르지를 않는 겁니다.

 

너무나 감사했어요. 주님이 서로 돕고 섬기도록 지혜도 주시고

그 마음을 품고 서로 섬기게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각 사람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서 있었어요.

초대교회 안에는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성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갈망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던 겁니다.

'진짜 교회가 놀랍구나 주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교회공동체가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로 초대교회는 재정을 성도들이 교회에 맡길 때 

말씀을 보니까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5

 

사도들의 권위를 강조하려는게 아니라

이 말은 성도들이 전적인 헌신을 올려 드렸다는 거예요.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자기 삶이 쓰임 받기를 원하는 헌신, 그 헌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거예요. 

오로지 주님 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에 제 자신을 드립니다. 이게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결단이었던 거예요. 

여러분 이처럼 성령으로 하나되어 시작된 공동체 안에 놀라운 일이 계속됐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 채워주고 자신의 것을내어 팔아 
온 성도의 필요를 사도들을 중심으로 채워 나갈 수 있도록, 어떻게 이렇게 헌신하며 살 수 있었을까요?  

말씀을 보면 진짜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요 믿음이 있었어요. 
임박한 종말에 관한 믿음이 있었어요.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 때가 분명히 온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개인적인 종말도 그렇죠

하루를 살아도 마지막 날처럼 산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는 그런 성도들이

또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성도들이었어요.

 

그러니 그 믿음이 있었으니까,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 수가 있었던 겁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야 해 그게 최고야' 그렇게 가르치는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의 방식대로 나누고 베풀고 섬기며 사는 삶을 초대교의 성도들이 산 겁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우리가 살 때, '내 생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그렇게 여기며 산다고 하면, 오늘을 어떻게 우리가 보낼까요?

 

오늘 이 시간을 짜증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지는 않을 겁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오늘이 어떤 날입니까? 주의 날이고 주님이 허락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만약에 주님께서 여러분의 생명을 오늘 거두신다고 하면,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죠.

생명을 주신 분이 우리 생명을 오늘 거두신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는 거죠.

 

그런데 허락하신 시간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온 사람은

오늘 주님이 내 생명을 거두신다고 할 때 당황하지 않는 거죠.

허락하신 시간을 마지막 날처럼 매일매일 살아가는 거죠.

그게 진짜 믿음의 지혜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 그렇습니다.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하는 거죠. 그러면 삶이 바뀝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교회는 초대 교회는, 온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한 것이 있었어요.

그 고백은 무엇이냐? 이제 주인이 바뀐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당신이십니다. 이 고백으로 다 바뀐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아주 대표적으로 증언합니다.

 

갈2:20a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 생기니까, 그저 나누고 사는 삶이 기쁨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니, 내가 지금 나눌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건 그냥 은혜인 거죠.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아주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32절을 한번 다시 한번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이가 하나도 없더라' 놀라운 일이죠.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교회가 정말 한 몸 공동체 그대로 누린 겁니다.

여러분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 구분 없는 겁니다.

 

어떤 형편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지체일지라도 끝까지 함께 품고 데려가는 거예요.

한 몸은 그냥 잘라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누가 조금만이라도 부족하고, 뒤쳐지고, 성과를 못 내면

구분해서 뒤에 있으라고 합니다. 잘하고 인정받는 사람들만 앞에 내세우려고 하죠.

 

근데 교회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를 통해서 주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는 공동체,

이게 진짜 교회 주님께서 이루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교회요, 그런 모습인 거예요.

 

▲기도한 대로 응답되었습니다

근데 정말 어떻게 이런 교회가 이런 삶이 가능한 걸까요?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직전에, 감금되었다가 놓임을 받은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와서

함께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었어요. 4:24~31

 

그 기도 내용이 뭐였냐면, '담대하게 주의 이름을 높이면서 말씀을 증거하게 힘을 달라,

그리고 치유의 권능을 구했어요. 또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드러나기를'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응답이 삶의 증거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주 예수의 부활의 복음을 전했고

성도들은 큰 은혜 가운데 거했습니다.

이게 33절 내용인데, 제가 33절을 여러 성경 버전으로 비교해서 살펴보니까

공통되는 아주 강조점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사도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지속해서 주 예수 부활의 복음을 계속 전했다는 거예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3

 

지속해서 전했다는 거예요. 쉬지 않고 전했다는 거예요.

바로 그때 성도들은 큰 은혜 가운데 계속 거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게 진짜 중요한 거예요.

 

공동체 안에 주의 말씀이 분명하게 증거가 되니까, 삶이 변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치유의 권능을 구하였더니, 각자의 삶의 필요들이 채워져 삶이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표적과 기사를 예수의 이름으로 구했더니 기도했더니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여길만한게 '가난한 자가 공동체 안에 한 사람도 없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한 대로 한 몸된 공동체 안에 말씀의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을 한 거예요.

 

진짜 놀랍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안에 여전히 그런 공동체적인 삶이 가능할까?

교회와 성도가 진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을까?

그런 의심 섞인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아' 그런 세상의 소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 울려 퍼질지 모르죠.

그러나 여러분 사람은 믿음 안에서 변합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변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고 싶어해요.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이들이, 그렇게 그렇게 도망쳤던 제자들이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은혜 안에 거하며 서로의 형편을 먼저 살피는 교회와 성도로 선 것을 봅니다.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며 그 말씀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니까

삶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여러분 교회는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의 수가 부흥하는 것, 주님이 허락하시면 그렇게 하시겠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말씀 앞에 정직한 공동체가 돼야, 서로의 필요와 아픔을 보듬고 채워주는 일,

우리가 성령 안에 이미 한 몸임을 믿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날 오늘 그런 주일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

이걸 인정하고 나면 그저 순종하고 사는 겁니다. 그저 순종하고 사는 거예요. 그러면 달라집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정말 주의 말씀 앞에서 변화된 공동체의 증인이 소개가 됩니다.

바나바라고 소개가 되고 있어요. 그의 이름의 뜻이 참 도전이 됩니다.

사도행전 4:36~37절을 보니까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의 삶, 바나바의 삶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된 거예요.

바나바의 삶, 그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가 된 겁니다.

그는 성경이 '위로의 아들' 즉 위로의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바나바가 과연 처음부터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말씀을 준비하며 질문해 봤어요.

'지금 변화된 삶의 증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바나바는 처음에는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너무나 분명한 것은, '바나바는 살아계신 주,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만났구나

성도들과 한마음으로 연합하여 기도하면서 그는 분명히 성령 충만함을 입었구나.

자기 뜻대로만 사는 삶이 최고인 줄 알고 살던 삶에서,

이제 내 삶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취한 삶을 살게 되었구나' 이게 믿어지더라고요.

 

여러분 그는 그의 삶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다 내어 놓았어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겁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하나 된 한 몸된 공동체를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십니다.

바나바를 봐도 그렇고, 성도들의 변화된 삶을 봐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런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고, 이런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통로가 되고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모두가 교회이고, 우리 모두가 한 몸된 공동체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변화된 삶을 증거하는 증인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시편 133:1~3절을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아멘!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 하나된 공동체 안에서 한 몸을 누리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섬기고 세워주며 사랑하는 관계를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이냐?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 이전에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 하나되게 하신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교회가 왜 중요하고 놀라운 것인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가 세상에 소망이 되고, 복음을 증거하는 통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삶으로 다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

 

아닙니다. 말씀에 거하고 성령 안에 이미 하나되게 하신 그 놀라운 선물을 믿음으로 취하는 겁니다.

여러분 진짜 교회 된 삶,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증거하는 성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이 시간 우리가 매달 첫째 주 성찬으로 나아가는데

성찬을 받기 전에 오늘 말씀 붙잡고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의 제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하나님 나라 맛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주의 백성으로 담대히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의 제목을 붙잡고 주의 이름 한번 간절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