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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기도2

LNCK 2024. 3. 14. 14:39

https://www.youtube.com/watch?v=ErJxZTjs3Hg

◈사도 바울의 기도2     엡1:18~19         에베소서11강      ☞ <소망>

 

※ '복음적 주제를 설교한다는 말이 있는데, '소망'이 그 중 한 가지입니다.

엡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도입 / 본문은 사도바울의 기도입니다. 엡1:17~1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1:3~14

그러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1:15~19
이 기도의 내용은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주님 선물을 다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고, 
아무리 많은 선물을 주시기 원하셔도, 
그 선물이 우리 삶 가운데 누려지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선물들이 실제로 우리 삶 가운데 누려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자 이 기도는 크게 4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1) 첫째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7
이 내용은 지난 엡10강에서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님이시죠.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이거 첫 번째 간구였고요.                       ☞ 엡10강 

그 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는 거예요. 
우리 안에 마음의 눈을 밝히사 3가지를 보게 해 달라고 하는데, 

2) 부르심의 소망을 보게 해 달라고 하고 
3)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해 달라 
4)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해달라... 

이렇게 총 4가지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 본문 바울의 기도 엡1:15~19절에
수식어들이 길게 붙어 있어서, 이 내용이 딱하고 눈에 잘 안 들어오는데 
핵심단어 3개를 딱 꼽으면, 소망기업과 능력을 알게 해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게 해 주시고, 
또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또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얼마나 크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18~19

사실은 에베소서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에센스 들을 모아 놓은 거라고 얘기했지요. 

그래서 짧은 책이긴 하지만, 우리가 알고 믿어야 되고, 
또 우리가 살아야 되는 우리 신앙의 모든 것들을 압축해 놓은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에도 특별히 이 4가지는, 그 에센스 중에 에센스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되고, 반드시 누려야 되는 것을 
바울이 아주 압축해서.. 기도로 하나님한테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예요?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고, 
둘째 우리가 누군지를 아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게 해 주시고, 
또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또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얼마나 크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바울의 이 기도가, 
이루어지고 누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도 역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밝힌다'는 enlighten, 우리 말로 '조명하신다' 이렇게 번역이 되는데 

내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뭘 깨닫게 되는게 아니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셔야, 빛을 비춰서 알게 해 주셔야... 우리가 알게 된다는 거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시는 것이 있는데, 

즉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게 있는데,
그 세 가지는, 위에서 소망과 유업(기업)과 능력입니다.  

(오늘  11강은, 그 중에서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 주 12강에서  기업과 능력을 살펴봅니다)

▲소망

소망은, 믿음 소망 사랑할 때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3대 가치 중의 하나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의 하나이죠.  고전13:13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교회 다니는 건 뭘 믿는 거야?' 그러면서
많이들 얘기하는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얘기하죠. 
그래서 과거에 양로원 이름도 '신망애'가 많았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한자어죠.

그런데 제가 "소망"에 대한 말씀을 이번 주 내내 이제 묵상하고 준비하면서 
제 안에 조금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옛날에 비해서 '소망에 대한 메시지'가 교회에서 별로 선포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이 '소망'을 주제로 한 메시지를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했지요? 
'믿음'이나 '사랑'에 대한 메시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선포되는 메시지가 소망입니다. 

왜 그럴까요? 
소망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대라서? 
꼭 그렇지는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소망에 대한 메시지는, 과거 교회 역사를 보면, 
소망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선포됐던 때는, 굉장히 어둡고 힘든 시대였어요. 

예를 들어서 '소망' 하면 가장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위르겐 몰트만입니다. 
그는 '소망의 신학자'라고 알려졌는데, 
그의 메시지가 한창 강력하게 선포될 때가, 독일이 2차대전으로 완전히 패망하고 다 무너졌을 때예요. 

그때 몰트만이 등장해서 '소망의 신학'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신학자 중 한 명이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이런 교회 역사들을 보면, 망하고, 힘들고, 전쟁 직후 이런 때에 
항상 '소망에 대한 메시지'들이 선포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왜 '소망에 대한 메시지'가 점점 희미해져 갈까요?
힘든 시대가 아니라서?

그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마음의 눈이 열려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의 눈이 소망을 볼 수 있도록 밝아져 있어야, 열려 있어야 되는데, (성령이 조명해 주셔야 되는데)
마음의 눈이 뭔가에 가려져 있게 되면, 소망을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볼 유업이나 능력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되는데 
특별히 소망은.. 내 마음 눈이 밝혀져서, 내가 눈을 들어서 소망을 바라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 '마음의 눈'(:18)이 어두워져서 다른 것에 가 있으면, 
우리 마음에 있는 관심, 우리 마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우리 마음이 따라가는 것.. 그게 '마음의 눈'인데      

우리 '마음의 눈'이 '소망'에 가 있지 않고, 
'마음의 눈'이 다른 것에 가 있게 되면,
소망을 볼 수 없습니다. 
눈이 가려져있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소망을 가리고 있을까요? 
저는이 소망을 가리고 있는 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철저히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가 우리 앞에 굉장히 무겁고 크게 다가와 있으면, 미래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죠. 

요즘 현대인들, 특별히 한국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의 삶을 보면, 굉장히 바빠요. 
미래고 뭐고 생각할 짬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것도 너무너무 바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들도 너무너무 바쁘고.. 
또 무겁고 지치고...  그러니 현재의 바쁨과 무거움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뭐 미래에 대한 소망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미래 행하실 일이라든지.. 
이런 거를 생각하기에는 삶이 너무 바쁘고, 현재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거예요.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미래는 무슨 미래? 
당장 취업 문제로 코가 석잔데, 미래는 무슨? 
당장 다음 주까지 갚아야 될 돈이 얼만데, 미래는 무슨?
이런 현실의 무게가, 미래를 향한 눈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의해, 현실에 지배당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여러분 모든 것이 힘들고 절망적이면, (100%절망이면) 소망이 역사할 텐데... 
전쟁 직후의 한국이나, 전쟁 직후에 독일처럼 
다 망하고, 다 같이 힘들면.. 차라리 미래를 향한 눈이 열려요. 

그런데 지금은 '뭔가 하면 될 것 같아' 
또 된 (성공한) 사람들도 극소수가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하면 그게 쉽지는 않아요. 이게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같이 어렵고, 다 같이 힘들면 
여기서 우리가 뭐 한다고 해도 어차피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데, 
보면 주변에서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공하는 사람도 있어 보여요. 

 

그걸 보면 '나도 하면 될 거 같아'
이 현실의 유혹, 현재의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거예요. 여유를 없게 하는 거예요. 
나도 조금만 하면 될 거 같아요. 나도 조금만 노력하면 저기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만만치는 않아요. 그것이 우리의 모든 마음의 눈들을 가리고 있는 거죠. 
모든 마음들을 사로잡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소망의 종교예요.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의 눈을 현실 또는 현재에서부터 돌려서 
미래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눈을 현재에서부터 돌려서, 미래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에 두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좀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미래에 소망을 둘 때 
우리는 계속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돼요. 
이게 소망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소망 단계에서부터 눈이 가려지게 되면, 즉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복음은 힘을 잃습니다. 

믿음하고 소망은 항상 같이 다녀요. 잘 생각해 보세요. 믿음하고 소망은 항상 같이 다녀요. 
왜냐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믿음이고, 소망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래서 소망이 가려져 버리면... 믿음도 없어지게 됩니다. 적어도 약해지게 됩니다.
소망은 뭐예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미래에 분명히 이루어질 거야. 
지금은 내가 어렵고 힘들고, 지금은 내가 연약하고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언젠간 우리를 이렇게 하실 거야' 라는 소망이 있을 때, 
그 소망으로, 믿음의 길을 걷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소망이라는게 없으면, 걸 수 있는 믿음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소망이 가리워지게 되면, 
'내가 무엇을 향해 가는 거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미래는 뭐지?' 
여기에 대한 소망을 보지 못하면, 그 소망의 눈이 가리워지면, 
결국 복음은 힘을 잃게 됩니다

소망의 눈이 가려워지게 되면, 우리 마음은 현실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잘 기억하세요. 여러분, 소망의 눈이 딱 가려지면, 우리 마음은 현실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 뿐이기 때문에 그래요. 

'현실에 지배 당한다'고 하는 말은,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에 지배당하면서 살게 된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거 뭐예요?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직장 문제, 돈 문제... 
하여간 눈에 보이는 것들에, 내 마음이 지배당한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고... 그렇게 살게 된다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세상의 현실적 것들에 마음이 끌려다니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게 다 현실의 문제, 현재의 문제죠. 
이것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는 거에요. 

이거는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것에 자기 마음이 끌려다니면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자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 열쇠가 바로 소망입니다. 

자 성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롬8:21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새번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 바라는 것'    주1)

이게 원어로는 '엘피스' 소망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소망'이라 그럴 때는 항상 이 단어를 씁니다. '엘피스'

'바라는 것은, 즉 소망은,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는' 거라는 거예요. 이게 소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소망이 있을 때, 결국 어떤 일을 하게 되냐면 
그 소망에 믿음이 더해지면서 
결국 우리를 속박하고 있던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등 
'피조물들의 썩어질 것에 종노릇하는' 문제에서, 해방된다는 거예요.

그런 현실적 문제에서 끌려다니는 것, 이걸 '종노릇'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썩어짐의 종노릇' .. 
종노릇도 힘든데, 그 대상이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갑절로 힘든 거죠.
마치 다 망해서 빚만 가득한 회사에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소망은 뭐냐면, 여기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서
이 매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야 되는 그 자유,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소망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소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의 눈이 소망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소망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가 매여 있고, 묶여 있던 것들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거예요. 아멘! 

▲주의하십시오, 여러분! 현실로부터 눈을 들어서 소망을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건 뒤에서 조금 더 살펴볼 텐데, 
현실을 도피한다는게 아니에요. 

그럼 뭐예요? 현실을 돌파한다는 거예요. 
현실을 초월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실을 초월하는 것과,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그런데 참된 소망은, 헛 소망 말고요... 
헛된 소망과 참 소망의 차이는 뭐냐면, 
-이루어질 소망은 산 소망이고, 
-절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헛소망이죠. 

헛소망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참 소망, 산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이루어질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들을 계속 돌파하면서, 결국 거기 소망이 이루어지는 지점까지 가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소망의 능력'은, 우리가 현실에 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계속 돌파하게 하는, 초월하게 하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초월한다'는 것은 뭐냐면, 
어떤 현실도 나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거예요. 

현실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현실에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겨도 
우리 마음과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게 현실을 초월하는 거예요. 

잘 기억하시고 분별하십시오. '현실을 초월한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무시하고, 현실을 무시한 채 그냥 이상만 추구하며
둥둥둥 떠다니는 그런 삶을 얘기하는게 아니에요. 그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삶이죠.

'현실을 초월했다'는 것은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과, 어려움과, 역경과, 환란 등 모든 문제들이 있지만 
그것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현실을 초월하는 거예요.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계속 가던 길을 굳건히 간다는 거예요. 
그 결과, 현실을 돌파하게 되는 거예요. 
이 소망이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것이 소망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충만한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에요. 
언젠가 완전해지는 날이 오겠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약속된 소망입니다. already not yet
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수많은 죄, 부조리, 고통, 아픔, 죽음, 역경, 환란... 
뭐 이런 것들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소망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있단 말이에요. 
약속하신 것이 약속된 미래를 소망할 때 
우리는 현재 기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의 기초에서 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약속된 소망은 아니지만, 일반적 소망에 관한 예입니다.
제가 2013년도에 처음으로 안식년을 갖게 됐는데, 6개월쯤 했지요. 

제가 안식년을 계획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처음에 몇 개월을 좀 보내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제가 마일리지를 쌓아둔게 있어서, 마일리지로 비행기표를 알아봤어요. 
놀랍게도 이스라엘까지 직항으로 가나, 중간에 몇 번을 거쳐가나 똑같은 마일리지인 거예요.

그래가지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정말 가장 가보고 싶었던 스위스를 들러서 가자... 
뭐 어차피 비행기도 공짜인데...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이제 마음이 들뜬 거지요. 소망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제 안식년을 떠나려고 하다 보니까, 사전에 해놓아야 될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거 처리하고, 저거 처리하고... 몸이 한 10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산더미같은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는데...
놀랍게도 제 마음은 현실의 낙심과 절망으로 우울해 하지 않고,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찼어요.

왜요? 어릴적부터 꿈꾸었던 스위스 여행이라는 약속된 소망이 바로 앞에 있잖아요. 
약속된 소망이 코앞에 있잖아요. 이게 여러분, 소망이 주는 능력이라는 거예요. 

약속된 소망은 뭐예요? 분명히 이루어지는 소망이에요.
분명히 현재는 굉장히 힘들고, 잠도 충분히 못 자고, 해야될 일들이 너무 많아 가지고 허덕이는데,
그 현실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내 마음이 약속된 소망의 의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괜찮아, 조금만 참고 가면 돼. 한 달만 견디면 돼!' 
이렇게 소망은.. 현실을 돌파하게 하는 능력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소망에 기초해서 살아야 됩니다. 
현실에 기초해서 사는 게 아니라 
약속된 미래에 기초해서, 우리가 현실을 초월해서 사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다 소망 가운데 살았어요. 
행6장에 보면 스데판이 등장합니다.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 배경이 뭐냐면 지금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이 사람들로부터 둘에 맞아 지금 죽기 직전인 거예요. 
그런데 그의 얼굴이 천사 같았다는 거에요. 이게 뭐겠습니까?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에요. 

지금 현실은, 두려움과, 좌절과, 슬픔과, 우울인데,
소망으로 인해, 스데반이 굉장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와, 은혜 가운데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거예요.

바로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이게 어디서부터 온 능력일까요? 
소망에서부터 온 능력이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지금 스데반은 지금 약속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는 거에요.
내가 비록 여기서 끝나는 거 같아 보여도,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께서 보여주신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지금 주위에 일어나는 현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거에요. 

▲바울이 '마음 눈을 밝히사, 즉 마음의 눈을 여시사, 소망을 보게 하십시오' 엡1:18
라고 하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마음에 눈이, 현실을 계속 보고 있을 때는
이 현실에 의해서 마음이 지배당하는 거에요. 

두려운 일이 오면 두려워하고, 어려운 일이 오면 힘들어하고, 
일이 안 풀리면 낙심하고... 우리 마음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거예요? 
계속 현실을 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이, 우리 마음의 눈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멈추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의 눈이 소망(:18)과, 기업(:18b)과, 하나님의 능력(:19)을 바라보는 거예요. 
오늘은 이제 소망만 살펴보고 있는데, 
하여간 소망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러면 현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거예요. 
현실이 주는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원한 소망, 영원한 약속,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영생, 
거기에 우리의 눈이 딱 가 있으면, 결국 그것에 반응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믿는 자들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소망에는 여러분, 능력이 있어요. 
왜 우리가 현재의 매이게 되는 줄 아십니까? 
왜 현실에 작은 문제에도 고통스러워하고, 작은 상처에도 분노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낙심하는 줄 아십니까? 

현재의 매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마음의 눈이 모두 현재,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을 초월한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보게 하여 주십시오' :18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존재도 아니며,
이 타락한 육체에 영원히 갇혀 살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 무엇인지 보게 하여 주십시오. 
'부르심의 소망이 우리 마음을 덮게 하여 주십시오' 이게 바울의 기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바울의 기도해요.
이 기도대로, 우리의 마음이 소망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소망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현실을 보고 계십니까? 

이 말을 제가 쓰면서도, 조심스러운 말이긴 해요. 
현실을 보지 말라니까,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얘기는 아니거든요. 

나는 현실이 주는 즐거움, 현실이 주는 어려움.. 그것에 반응합니까? 
아니면 약속된 소망에 반응합니까? 

소망을 보지 못하는 성도는, 이 땅에 묶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것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땅에 속박과 현실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이 무슨 신앙에요? 

땅에 속박과 현실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결국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 속박을 뛰어넘게 하는 능력이잖아요. 
믿음과 신앙의 가장 큰 능력은, 현실의 속박을 뛰어넘게 하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소망을 가질 때, 비로소 복음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그 소망이 진짜로 이루어질 소망이라는 거에요. 

마르크스하고 레닌은 종교를 마약이라 그랬어요. 
종교는 현실을 초월하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마약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냥 마약 한번 하고 헤롱헤롱 하고 있으면은 
그냥 마냥 행복해 하죠.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현실의 어려움들을 잠깐 동안은 초월하게 해주는 능력이 마약에 있죠.

그래서 1950~60년대에 미국의 히피 문화가 처음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마약이 막 퍼지기 시작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약을 찬양했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유일한 구원은 마약에게 있다고 정말로 믿었어요. 

그래서 나왔던 그 수많은 노래들, 그때 비틀즈가 나왔는데,
이 사람들이 이제 마약예찬론자들인 것을 여러분 아세요?

비틀즈 노래가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지만, 아름다운게 아니라 
사실은 가사를 들어보면 전혀 아름다운게 아니고, 마약을 찬양하는 노래들이에요.

'Hey Jude... under your skin' 이게 뭐나면, 
피부 밑에다 바늘을 찌르면 행복해진다는 거예요. 그런 내용들이거든요. 
'그녀를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마약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라고 하죠.

제가 왜 잘 아냐 하면, 제가 워낙 비틀즈를 좋아했어요. 

래서 그 노래를 계속 중얼거리고 다녔는데, 나중에 이제 영어가 좀 되고 나서 가사를 보니까 
그런 내용이 마약 은유적으로 예찬하는 노래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죠.

19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당시 마약이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많이 퍼지지 않았는데 
서구 사회에는 마약이 만연하면서, 정말 인생의 해답이라고 믿었습니다. 

근데 그 만약의 기능이, 소망의 기능하고 사실은 굉장히 비슷하다는 거예요. 
현실을 잊게 만드는 거죠.

이 마약이 주는, 현실을 뛰어넘게 하는 능력과 
복음의 소망이 주는, 현실을 뛰어넘게 하는 능력의 제일 큰 차이는 뭔지 아십니까? 
그게 산소망이냐, 헛소망이냐의 차이예요.  

산소망은, 진짜로 미래에 이루어질 소망이라는 거에요.
만약 복음이 산소망이 아니면, 그것은 마약이랑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마르크스, 레닌이 종교를 마약이라고 얘기했던 것은, 한편으로 사실이에요. 
성도가 가진 소망이, 진짜로 이루어질 소망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마약 같은 역할밖에 못할 거라는 거예요. 잠깐 위안을 주는 것으로 끝나버리죠.
(사실 다른 나라에 가면, 설교시간에 잠시 위로받고 끝나버리는.. 그런 교회들도 있다고들 하죠)

▲그렇게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야 되는지는 어디서부터 찾아야 돼요? 
성경에서부터 찾아야 돼요.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거든요. 아멘! 

그렇기에 우리가 소망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냐면, 
아무거나 소망으로 붙드는게 아니에요. 

그냥 무턱대고 '잘 될 거야' 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서 무엇을 약속했는가?' 이것을 소망으로 붙잡아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소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는지를 쭉 찾아보면서 
이 소망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소망 (엘피스)'이 나오는 구절을 성경에서 다 찾아보았어요.

① 약속하신 것을 소망함 

행26: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바라는 까닭이니'
여기 '바라는'이 엘피스(소망) 입니다. 

바울은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소망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거나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 될 거야, 모든 것이 잘 풀릴 거야' 이런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소망한다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것이, 기독교의 '소망' 입니다. 
그것을 소망할 때 우리가 현실을 초월하고 돌파하는 능력이 생겨요.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아닌, 그냥 내가 생각 wish 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거예요. 성경의 약속을 소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② 성도가 완전해진다는 소망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위 구절에는 '소망-엘피스'가 안 나오지만, 원어, 새번역에는 나옵니다. ↙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새번역)

그 '소망'의 내용이 뭐냐면, 이어지는 구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첫째 약속은 뭐냐면, 우리가 언젠가 완전해질 거라는 약속이에요. 
저와 여러분이 언젠가는 완전해질 거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소망하라는 거예요.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지금은 비록 넘어져도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완전해질 것입니다. 
즉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의 연약함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죠. 
실수하고 나면 마음에 자책감이 있고, 죄책감이 들고 그러는데 
그런 실수도 한두 번이지, 반복적으로 계속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패하면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게 돼요. 

그 실패와 실수, 나의 죄, 나의 연약함은.. 우리를 낙망과 절망으로 끌고 가려고 해요. 
근데 성경은 다르게 얘기해요. 그것에 끌려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엡1:18 본문

'성령님, 오셔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우리의 연약함, 그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결과들, 그 현실에 주목하지 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거에요. 
아직 완성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반복적으로 넘어지고, 반복적으로 실수하는 거...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서 의도적인 반역의 마음을 갖는 것'은, 둘은 다른 얘기입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 중에 
-우리가 의도적으로 반역하고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죄는.. 그건 심각한 죄죠.
-그런데 진짜 잘 하고 싶은데, 내 연약함 때문에 계속 넘어지고 실수하고 나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 마음은 전자와는 다르죠.

우리는 아직 완전함에 이런 자들이 아니에요.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넘어질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그러므로 그것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때 약속된 소망은 뭐에요? 
언젠가 너희는 완전해질 거라는 거에요. 
언젠가 너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를 거라는 거에요.  롬8:21

언젠가 너희는, 더 이상 부족함도 없고, 넘어지지도 않고, 실수하지도 않는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거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것에 여러분의 소망의 눈을 두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나의 연약함 때문에 일어나는 현실에, 계속 우리의 눈을 주게 되면, 
결국 우리는 소망의 눈이 닫혀 버려요. 그리고 그 현실에 매여 버리게 돼요. 

그래서 결국 절망과, 좌절과, '나는 안 된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죠.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비록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소망은 뭐냐면, 
'언젠가 너희는 완전해질 거라'는 거에요.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연약함에 계속 포커스 맞추지 마시고, 
소망의 눈을 들어서 위에 다 두세요. '언젠가 나는 완전하게 될 거야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들을 넘어서게 하실 거야' 

그랬을 때, 결국 우리 마음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소망을 바라보는 자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 소망을 바라보는 자는, 역경에도 낙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 소망을 바라보는 자는, 실패해도 결코 신앙 여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후3:11~12 '없어질 것(율법)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복음)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만 시한부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뿐(롬 10:4) 
천국에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것입니다. (막13:31).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것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같은 소망' 
바울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복음의 불변성과 절대 탁월성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3:12
바울은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솔직하고 두려움 없었던 것입니다. 


③ 세 번째 약속하신 것은, 구원의 소망,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입니다. 
아마 소망 중 가장 강력한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살전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행23:6 '...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딛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3: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____소망

소망은.. 죄와 사망을 초월하게 하는 위대한 게 소망이에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구원의 소망,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 영원히 주와 함께하는 그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고요? 
벌써 나이가 중년이 넘어가고, 만회할 시간도 없고, 내 인생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요? 영생의 소망이 있어서 그래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에요. 

이 땅에서 사람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든지간에 
영원한 삶에서는 전혀 다르게 평가하실 거라는 거예요. 

성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후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 영생 가운데 허락되어진 우리에 대한 평가입니다. 
주를 위한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 그랬어요.

이 땅에서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든지 간에 
주를 위해 한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라면 
영생에서는 전혀 다른 평가가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이 소망을 여러분의 마음에 두시고, 계속 전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④ 헛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소망이예요. 
그래서 복된 소망이라는 거죠.  딛2:13

죽은 소망, 복되지 않은 소망은 뭔 줄 아십니까?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이죠. 선거에 빗대어 말하면 '헛 공약'이죠.

하나님의 소망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살아있는 소망이고, 복된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복된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그 소망에 여러분의 눈을 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⑤ 재림의 소망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행1: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마지막으로 살펴볼 소망은 뭐냐면,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거예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될 때가 온다는 거예요. 아멘! 
이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 되는 거예요. 

이 소망이 저와 여러분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이 소망이 저와 여러분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마치는 말
소망의 반대말은 절망입니다. 소망의 반대말은 낙심입니다. 
절망과 낙심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아무리 우리 현재가, 아무리 우리 현실이 우리를 어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유혹해도 
사실은 보장된 미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으면, 즉 소망을 가지면, 
우리 마음은 결코 낙심과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실 낙심과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은, 현실 때문이 아니에요. 
그것은 소망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소망을 바라보는 우리 눈이 가리워지면,
결국 내 마음은 현실만을 바라보게 되고 
현실을 보게 되면.. 결국 우리는 절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 주님이 제게 주셨던 마음은 
'너희 가운데 소망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소망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우리가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수고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헛수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헛수고로 끝나지 않아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이제 기도할 때, 우리 안에 혹시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또는 현실에 풀리지 않는 어떤 환경,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어떤 이유에서든지 여러분 안에 소망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그래서 우울과 낙담과 절망 가운데 있는 분이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성령님 밖에 없으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본문에 바울사도가 기도하기를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18 

사람의 설득이나,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셔야 돼요. 
우리 각자가 소망을 볼 수 있도록, 이 시간 우리가 한번 기도할텐데요. 

오늘 기도할 때 '주님, 내 안에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소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소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현실이 아니라 소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과거가 아니라 소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연약함이 아니라 소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실패하고 열매 없어 보이는 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소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성령님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한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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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 바라는 것'

이게 원래는 롬8:20절 끝에 있는 구 phrase 인데, 개역은 21절 서두에 배치했네요.

말을 부드럽게 다듬다보니, 그렇게 배치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