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행1:12~26 2024.01.14.
◑제자는 기다림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은,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물었습니다.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 기다리지 마'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맡기라..' 하셨는데,
기다림을 거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는 거죠)
그 전에 이런 말씀 하셨어요. '사도와 함께 모의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14
여러분 '기다린다'는 것은, 구약에서부터 영성의 핵심이었습니다.
시42:11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다윗)는, 지금은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는 거죠.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나타나셔서 도우실 것을 기다리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기다림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었어요.
눅2:25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기다리는 사람'이란 말이 나란히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 꽤 여럿 나옵니다.
예수님을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나름의 기대와 기다림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은 전부 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에도 소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나섰고요. 부활 후 드디어 이때가 왔는가 했는데
예수님은 승천하셨죠.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온 것입니다.
시간표를 보면, 십자가가 유월절 즈음이고, 오순절에 즉 50일 후에 성령강림이 일어납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이 40일 정도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승천하시고 나서, 성령은 아직 오지 않은 시기가 한 일주일 가량 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도 그럽니다. 기존의 것은 사라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
그게 (기다림의 시기) 뭔가 위기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따로 또 누가복음서를, '처음부터 되어진 일을 자세하게 쓴' 이유가 있습니다. 눅1:2~3
그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누가복음 19장에 나옵니다.
눅19: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굉장히 중요한 강조점입니다.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조급증,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이다' 라고 하는 조급증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도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3:21 기다림이 필요한 거죠.
그렇죠. 그리스도교 신앙은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사모하는' 신앙입니다.
지금 혹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지금 이 시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행하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어서
요즘에 젊은 사람들 중에 예수 믿든, 안 믿든 '버틴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요.
신앙은 무조건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행1장 말씀에 제자들은 기다리면서
-첫째로 기도했고요.
-둘째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열둘 중에 한 명을 다시 뽑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결정적 잘못
여러분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돈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동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모두 처음에는 뭔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예수님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부터 출세하려고, 성공하려고, 돈 벌려고 하는.. 그런 엠비션 때문에 따라 나선 것은 아닙니다.
'꿈에도 소원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그렇죠. 개인적인 야망이 아니라, 민족의 회복이라는 대의에
자기 한 몸 바치리라는 각오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나선 사람들이에요.
가룟 유다 역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간절히 원했고
'어떻게 해야 회복될까?'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예수님이 내 생각과는 다른 길로 간다는 거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가룟 유다도 나름 자기 생각이 있었다는 거죠. 그저 돈 몇 푼에 예수님을 파는 잡범은 아니었다는 거죠.
(유다의 생각) '예수님이 로마를 뒤집던지 해야 되는데,
예수님 정도면, 이 정도 인기와 군중 동원 능력이면,
거기에 보태서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이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겠다'
예수님이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안 하니까... 예수님을 압박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코너로 모는 것입니다.
'정말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예수님이 자기 능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면 그 순간에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고...'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 합리화 해보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냥 죽을까? 순순히 죽을까?
아니겠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그렇게 미루고 있던 능력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일어나고.. 세상의 뒤집히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새 세상이 올 것이다'
또한 '만약에 그가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냥 허무맹랑한 사기꾼이라면.. 그냥 죽겠지...'
아마 유다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자기 나름대로, 자기 수준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룟 유다는, 베드로 또는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막8:32~34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중에 '그 훌륭한 베드로를, 어떻게 가룟 유다와 비교하십니까?' 하겠지만,
아니요. 베드로도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말까지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물러가라'는 말이 재밌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이 말은 go away, '썩 꺼져 가 버려. 다시는 오지 마!' 이 말이 아니고,
Get behind me 입니다. 영어 성경들도 대부분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 뒤로 가라'는 거죠.
여러분 재밌습니다. '저기로 가버려라, 꺼져버려라'가 아니고요.
'내 뒤에 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을 이끌어 가려고 하면, 그는 사탄이에요.
예수님 뒤에 가서 예수님을 따라가면... 제자가 되는 겁니다.
제자가 뭡니까? '팔로우워 follower, 따라가는 사람'이에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대목에서 어릴 때 하던 말이 생각났어요.
'앞에 가면 도둑놈, 뒤에 가면 순경'
옛날 아이들이 막 달리기 하다가, 못 따라가면 샘이 나서 그랬던 거 같아요.
앞에 가면 1등이 아니라 도둑놈이고, 뒤에 가면 순경이다... 그랬는데,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을 이끌려고 하면,
베드로처럼 '주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제 말을 좀 따르셔야 됩니다!'
그럼 그 사람이 사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 뒤에서, 내 마음에 좀 안 들어도 묵묵히 따라가면, 그가 제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베드로를 혼을 내신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바로 이게 (뒤따라가는 것) 부인인 거예요.
▲가룟유다에 대해서 이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
기가 막히는 말입니다.
'길잡이 guide' 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5번 나옵니다. 모두가 부정적인 맥락에서 입니다.
예를 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 guide 한다' 할 때 쓰였죠. 마15:14
여러분, 소경됨이 문제가 아니에요. 소경이 나서서, 앞서 인도하려 하는게 문제예요.
인생을 살다 보면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모르는게 비극이 아니고요. 안다고 착각하는게, 비극의 시작이에요.
(가룟유다, 베드로처럼) 자기 길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하는
길잡이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됩니다.
'나는 길잡이인가 제자인가?'
가룟 유다가 '길잡이'가 되었다는 것은 1:16
'성 목요일 밤에 예수를 체포하는 일들을 안내했다'는 말도 되지만,
'역사의 흐름을 내가 이끌고 가겠다. 예수님도 이 길로 오셔야 된다!' 그 자세를 유지했던 겁니다.
여러분,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깨어지는 거예요.
'메시아는 이래야 된다'라는 기대,
'신앙생활은 이래야 된다'는 내 고집,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꿈,
본회퍼 목사님이 그런 말씀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꿈을, 공동체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사람이라 해도
결국 모든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맙니다.'
현실의 교회는 늘 부족하거든요. 부족한 사람들 투성이거든요.
'내 꿈, 내 기대' .. 그것 가지고 늘 판단하는 거죠. 그래서 파괴자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하며 자괴하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의 성장은요. 미래에 대한 자신의 그림이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행복한 가정' 여러분이 결혼하기 전에, 그런 그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대로 유지하고 계십니까? 유지하고 있으면 큰일납니다. 결코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자녀 양육은 이런 것이야' 아기를 갖기 때문에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뜻대로 되나요. No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목회는 이런 것이어야 돼, 나는 이런 교회를 세우고 싶어!'
그대로 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때로 내 기대가 깨어지는 것이 유익입니다. 왜 그런가요?
행4장:11절에, 베드로의 설교에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에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당시는 집을 지을 때, 똑같은 규격의 벽돌이 아니라, 돌을 썼기 때문에 모양이 다 달랐어요.
그리고 건축자가 하는 일이, 돌을 고르는 일입니다.
아주 좋은 돌, 예쁜들, 멋지고 튼튼한 돌은.. 아주 중요한 부분에 배치하고,
좀 못생긴 돌은 뒤에 잘 안 보이는데 두고...
여기에도 저기에도 못 쓰겠다 하면, 내다 버리죠.
여러분, 돌을 힘들게 운반해 왔는데, 어디라도 갖다 쓰는게 쉬워요, 버리는게 쉬워요?
버리려면 또 들고 나가야 되잖아요.
돌이 오죽 못났으면,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갖다 버리겠습니까?
그런데 건축자들이, 즉 인간이 판단해서
'이거는 진짜 쓸모없다. 갖다 버려야 돼!' 그랬던 인간이 예수님이고, 그게 십자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예수님이 정말로 인간이어야 할 인간, 참다운 인간이었다는 거죠.
그 말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에 머릿돌, 코너스톤, 기준, 세상의 기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게 부활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이 세상이 사람을 평가하는 그 기준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셨는데
엡4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이 머릿돌되시고, 기준 되신 그 플랜, 그 디자인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이 기준으로 서 계신 큰 역사의 큰 그림 속에, 내 인생도 들어가 있다는 거죠.
여러분 '사람을 평가하는, 인생을 평가하는 내 기준이 엉터리구나' 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내가 있어야 될 위치, 나의 삶의 방향, 나의 삶의 의미가 다 바뀝니다.
'내 생각에는, 그 전체 그림에서 나는 요 정도에는 내가 가 있어야 될 것 같아'
근데 하나님은 다른데 갖다 놓으시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나는 이 방향이 예뻐요. 요렇게 얼굴 내밀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돌려 놓으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거 아닌데요?' 항의하고 싶어요. 가룟 유다가 그랬다는 거죠!
▲행2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고, 땅도 흔들립니다.
이런 찬송이 있죠.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땅이 흔들린다'는 말은, 기반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가 깨어지고 흔들리게 된다는 거죠.
그렇게 깨어지고 나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꿈이 자라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와, 청년들과, 노인들이 예언하는... 하나님의 꿈을 꾸는 시대가 된다는 겁니다. 2:17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인생의 목표를 바꾸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룟 유다처럼) 자기 확신과 자기의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와, 그 방법은 이래야 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생각이 워낙 강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자기 확신과 자기 의가 지독하게 강했던 사람이 또 한 사람 더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죠. 그러니까 막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하면서 다니잖아요. 그게 깨어지는 거예요.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도 깨어지고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법으로 조급해서 이스마엘도 낳고요.. 그래서 가정도 힘들고요..
그러면서 창피 당하고, 헛발질을 하고요, 눈물 흘리고요.. 그러면서 믿음이 자라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신 후에, 공동체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바나바 이야기입니다.
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헌금을 하면서요. 재물을 드리면서요.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교회 답지 못한 교회, 세상처럼 돌아가는 교회는요.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목소리도 큰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요. 헌금을 많이 할수록
더 겸손해지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인 줄 믿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거예요.
내가 드린 헌물이지만, 내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유롭게 하나님 뜻대로 하실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여러분 물질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헌금하는 거 쉽지 않습니다.
드리면서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고집을 꺾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어 가는 거예요.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 주소서.
주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여러분 소유를 드린다는게 무슨 말입니까?
소유를 드리면서, 결국에는 내가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영광 위하여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게 되는
이렇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방편인 줄 믿습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 발 앞에 내 인생을 '뜻대로 하시옵소서' 가져다 놓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이 계시면,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종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게 '기다림'입니다. *설교 주제, 제목
가룟 유다의 잘못은, 제자, 팔로워가 돼야 될 사람이, 길잡이가 되려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을 좌지우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참 제자가 되었을 때,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기다릴 줄 알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제야 진정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앞장서려 할 때는, 사람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자기도 길을 잃었어요.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생기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리더십보다 팔로우심을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직분, 자리는 영원히 존귀합니다
본문에 맛디아라는 제자를 뽑는데, 12 라는 상징성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회복을 상징하는 거예요.
'할 일이 많으니까 인원 한 명 더 뽑아서 보충하자' 이런 뜻이 아니에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물어봅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보선했는데,
행12장에 가면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행1장과 똑같이, 죽었으면 또 한 명 더 채워야 되지 않나요?'
여러분, 가룟 유다가 탈락한 것은,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12문이 있고, 12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입니다. 천국에 있다는 거죠. 계21:12
계21:14절에 '그 성의 성곽에는 12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12 사도의 12 이름이 있더라'
위 두 구절을 합쳐서 보면, 12지파와 12사도가 함께 합쳐져서
구약과 신약의 교회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사도들이 세움 받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임직'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인 거죠.
죽음으로 끝나서, 이 땅에서 대체할 다른 사람이 필요 하고.. 그런게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한 계획 안에서, 그게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걸 알아야 우리가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뼈빠지게 일이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죽음에 이를지라도 even to the point of death' 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다가, 혹시 예수 믿는 그 신앙 때문에 나의 생명을 바쳐야 된 날이 온다 하더라도,
주님께 be faithful 신실하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목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어떻게 내놓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천국에, 하나님께서 내 자리,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께 신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순교의 역사가 나옵니다. 핍박을 이겨낸 역사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 말씀 1:8절 다 같이 읽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투스 입니다.
근데 이게 영어로 와서는 martyr 순교자가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예수 이름을 증거하다가가 죽었거든요. 순교했거든요.
그래서 증인(마르투스)이, 영어로 순교자(마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각오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역사가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파리에 가면 몽마르뜨라고 있잖아요.
지금은 예술과 낭만의 거리로 알려져있죠.
이게 사실은 Mt. of martyr '순교자의 언덕'이란 뜻이에요.
예수 이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처형 당했던 그 자리가 몽마르뜨 입니다.
파리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죠.
마르투스, 순교자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핍박받고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 신앙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금년 9월에 한국에서 로잔대회가 모이면, 이런 교회들도 다 함께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언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세계 선교의 방향을 모색할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회에서도, 목숨 내놓는 것은 아니어도,
예수 믿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과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우리가 계속 신실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영광이,
이 현재 세상만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1:25절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라고 번역하는데,
'제 곳'
to take the place in this ministry and apostleship
from which Judas turned aside to go to his own place. <ESV>
위 ESB 성경을 보면, place 단어가 두 번 나오지요.
그러니까 앞에 '직무'와 '제 곳'이 사실은 같은 말이에요.
같은 절 안에, 같은 단어가 나오면 같이 번역하는게 원칙입니다.
좀 아쉬운 번역이에요.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봉사와 및 사도의 자리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그 자리를) 버리고, 제 자리로 갔나이다.'
여러분 계시록에 12 진주문에, 그 이름이 쓰여져 있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그 크신 계획 가운데, 나의 자리가 있는 거예요.
본래 12 사도가 부름 받은 자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 자리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갔어요.
여러분 유다가 가버렸던 '제 자리(제 곳)가 뭐예요?
자기 생각으로, 자기 계획으로, 자기 능력으로 힘을 다해서 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뭐 멸망의 자리가 따로 있는게 아니고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발버둥 치고 노력하다가.. 자기 머리로 판단하다가..
결국에는 갈 수밖에 없는 멸망의 자리가 '자기 자리'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그 자리에서 뽑으셔서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리로 세워 주신 것인 줄 믿습니다.
그 자리의 영광을 알면요. 놓칠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선거가 아닌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래서 이 말씀을 보고서 '제비뽑기가 좀 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거와 제비뽑기를 비교하면,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선거가 훨씬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다' 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은 선거도, 제비뽑기도..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공직자를 임명할 때에, 제비뽑기로 하는 것은 민주적 democratic 이라 여겨진다.
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것은, 소수에 의한 정치 oligarchic 이라 할 수 있다.'
놀라운 말이죠. 여러분, 선거가 민주적인 것 같은데
선거를 해보면, 결국에는 소수의 엘리트 계층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똑똑한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집안 배경 좋은 사람... 그렇죠.
이 사람들이 말도 잘하고요. 동창들, 학맥, 경제계 인맥도 서로 얽혀서 권력을 독점해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로는 대다수 서민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선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특권층으로 권력이 몰릴 수밖에 없다.'
여러분 이게 25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에요.
당시에 민주주의의 요람, 세계 민주주의가 아테네에서 출발했다는데,
아테네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걸 알고 있었어요.
선거가 계속되면요. 선거는 '능력주의' 라는 문제,
그리고 '파벌주의' 라는 문제, 이렇게 심각한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합니다.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선거하는데 파벌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냈죠.
영어로 보면 <tyranny of merit> 이에요. 즉 '능력 독재'입니다.
선거가 완벽한 제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제비뽑기가 더 낫다. 이게 성경적인 제도다.' 이 말은 아니에요.
제도는 모두가 허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성경적인 조직이 뭔지, 제도가 뭔지...
이걸 뽑아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조직의 원리와 태도를 배울 수 있을뿐입니다.
교회들이 다 제도가 달라요.
로마 가톨릭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라는
그 하나님의 권위,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죠. 그게 필요.하죠.
그런데 여러분 그게 또 타락하기 쉬운, 권위주의가 돼 버리는 단점이 있어요.
그래서 개신교는 그걸 무너뜨렸어요. 그거 자체는 잘한 겁니다.
근데 권위 자체가 없어졌어요. 모두가 자기가 주인이 되어 버렸어요.
모두가 교만해지고요. 이단이 남발하고요.
이 개신교의 교회정치 체제가 얼마나 허술한지
최근 몇 년 동안 코로나 국면 때 뭐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제도는 모두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시스템이 아니라 에티튜드입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여러분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이거를 선고로 하던, 투표로 하든
'우리가 지혜를 모아서 정하겠습니다' .. 가 아니라
'하나님,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옵소서!'
이런 태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 앞에서, 내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보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보여주시옵소서!' 하면서 하나님 발 앞에 엎드리는 거예요.
교회의 제도는요. 인간끼리 똑똑한 인간을 뽑아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그들이 선거했다. 제비뽑기했다. 우리도 이렇게 하자'
이게 아니고요.. 제도는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어요. 바뀌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성실하게 진지하게 구했다..는
그 태도를 배워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
'주님 보여 주시옵소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렇게 겸손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결론을 다 정해 놓고 '하나님이 요거 해 주셔야 돼요.
요 부분을 요렇게 도와주세요. 언제까지' 그게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갸룟유다가 자살을 결심하기 직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정말 잘못했다. 이제 나는 끝났다. 내가 이렇게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다니...'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내가 할 일을 보여 주시옵소서' 물어야 돼요.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엄청난 잘못을 했어도
회개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너는 끝이야, 죽어버려!' 그렇게 하실까요? No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히 '은혜의 하나님' 이 되십니다.
인자하시고,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진실로 죄 사함을 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은혜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러분 자녀의 삶에도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도 심각한 어려움에, 곤란에 처해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내 인생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고 탄식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이거 어떡하나, 이거 어떡하나?' 답답해 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기도하십시오. '주님, 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내 인생이 위기인 이 때가, 길을 잃었다 싶은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이고,
그래서 특별한 은혜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한없는 인자하심 높으신 지혜를 의지하고
주님의 뜻을 물으며 <기다림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