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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살기

LNCK 2024. 3. 24. 08:33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살기         계22:1~5          펀글 정리

 

본문은 계시록의 마지막 장으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집, 가족, 직장, 시장, 일가친척, 친구,

이런저런 세상일, 앞날에 관한 것 등을 의식 안에 담고 살았습니다.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담기’라는 제목은

이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의 환경이 되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이 죽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고,

백 보좌 심판이 있고 난 뒤에,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모든 성도가 어우러지는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다만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육체가 죽은 다음에, 백 보좌 심판을 거쳐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고 보게 된 계시를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새로운 삶의 터전입니다.

 

이러한 계시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이 땅에서 일상을 사는 우리의 의식 안에 담으라는 의도입니다. *현재천국을 살라

 

벧후3:12~13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시점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동안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의식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을

지금 연결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의식 속에 삶의 터전이 될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미래에 재림 후에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게 있지만, 그 미래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만 염두에 두지 말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오늘 현실에서도 살아내야 한다.. 는 것이 이 설교의 주제인 듯합니다.

 

‘이중 예언, 이중 성취’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하게

새 하늘과 새 땅은, 오늘 현실에서도 ‘현재 천국’으로서 주어지고,

앞으로 미래에서도 성취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흔히 천국을 말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내가 살아야 될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내가 의식 안에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담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습니다.

 

그 열매 맺는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계속 비치고, 사람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계21:4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자는

육체로 살면서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울 일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살아있는 동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 의식 안에 담을 때, 일어나는 일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내 몸이 살아있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백 보좌 심판이 끝나면

실제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신령한 몸을 입고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식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담으면

지금 살아있는 동안 생명수 강은 길 한가운데로 흐르게 됩니다.

생명나무는 열두 달 동안 계속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게 됩니다.

 

▲여기서 ‘만국을 치료한다’는 부분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산다면,

아예 병에 걸린다거나, 만국을 치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천사들과 같이 신령한 몸을 입고 살 때,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생명나무 잎사귀를 따서 꼭꼭 씹어 먹으라는 것일까요?

 

여기서 ‘만국’은, 구약 때부터 종종 ‘이방나라’를 뜻하는 말이었죠. *에스노스

이 말의 의미는, ‘나라들’도 되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 떼로 모여있는 사람들’이란 뜻도 됩니다.

a multitude associated or living together, a company, troop, swarm

 

그러므로 ‘만국을 치료한다’는 뜻은, 질병을 치료한다는 뜻 이외에도

‘관계에 대한 치료’를 뜻합니다.

 

현재천국을 사는 성도들, 또는 회복된 에덴동산을 사는 성도들,

또는 ‘새하늘과 새땅을 사는 성도들’은.. 질병도 치료되지만, 관계도 치료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는, 완성된 천국이 아닌 미완성의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의 질병이 완전히 100% 치료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는 이미 성취되었죠.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많은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본문에는 생명나무가 많습니다.

그 생명나무에서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 (불신자) 사람들은 가정을 의식 안에 담습니다. 직장을 의식 안에 담습니다.

이런저런 세상일들을 의식 안에 담고 삽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게 되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 좌우로 흐르는 생명나무에 열두 가지 열매가 맺히고,

그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한다는 것은

내 주위의 수많은 관계들이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앞서 계7:13~17절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대답이 이어집니다.

14~17절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은 반복진행형으로 7번 반복되어 진행되어 나아가므로,

천국의 모습이 7장에도 나오고, 20~22장에도 반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계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일은, 특별히 육체로 사는 동안에 의미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우리가 눈물을 닦아주시고 곡하는 일이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물이나 애통이 없다’는 것을 본문이 강조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말씀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이요,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현재 천국)을 내 의식 안에 담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21장과 22장에 나오는 내용들을

신령한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갔을 때의 일로만 해석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얼마든지 에덴을 살 수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말씀을

비록 미완성이지만, 이 땅의 현재 천국에서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전체 주제는, 극심한 로마시대의 핍박 가운데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현실을 인내로 견디라’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그것은 장차 세상 끝에만 벌어질 일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의 강림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천국’으로요.

 

본문 계22:1~2절에 나오는 ‘생명수의 강’은, 여기서 처음 나온게 아니라

겔47장에 나온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계21:1절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66:22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럼 에스겔과 이사야가 ‘생명수의 강’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한 것은,

언제를 가리킨 것일까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중에 어느 때를 가리킨 것일까요?

 

에스겔과 이사야가 ‘생명수의 강’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한 것은,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초림과 재림’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냥 장차 오실 <메시야 시대>만 내다보고, 예언했지

그게 초림과 재림으로 나눠진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봅니다.

 

그게 초림과 재림으로 나눠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신약시대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드러난 것이지요.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에스겔과 이사야가 ‘생명수의 강’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한 것은,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것은 초림과 재림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들은,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를 살고 있고요.

이런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생명수의 강, 새하늘과 새땅은

사도요한이 에스겔의 예언, 이사야의 예언을 빌려와서 쓴 것인데,

(사도요한이 무슨 환상 중에 본 것이 아니라요)

 

그게 꼭 재림 이후에 일어날 일만 의미하지 않고,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는 거죠.

 

에스겔,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루어질 현실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면,

에스겔, 이사야의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이죠.

현재 천국으로, 현재에 누리는 새하늘과 새땅으로요!

 

물론 그것은 미래에 재림 후에 완성될 천국

완성될 새하늘과 새땅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만, 이 설교의 주제는,

오늘날 현재 우리가

생명수의 강의 은총과, 새하늘과 새땅의 은총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이고,

진정 거듭나고 회심한 성도는,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살기를 추구한다기 보다면, 저절로 그렇게 누리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꼭 미래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우리의 모든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에 담으라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의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고, 21장에서도 묘사되었던 것처럼

육체로 사는 이 세상 안에서도 울 일이 없어집니다.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본문에서 묘사된 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 내려오는 생명수의 강을 떠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만국을 치료하는 잎사귀를 먹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치료되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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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새하늘과 새땅을 살게 된 성도 (펀 글)

저는 며칠 전에,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 속에서 자기의 생을 마감한 한 성도의 임종을 함께 했습니다.

 

지난주에 그 분을 심방했을 때, 그 분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분노 속에서 내뱉었던 말이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40년 이상 예수를 믿었는데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두 시간여 동안,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했고 예수님을 꼭 붙잡았습니다.

 

그 분이 임종 직전에 저를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서둘러 나갔는데,

제가 도착했을 때 그 분은 이미 코마상태였습니다. 의사들이 아직 청각은 살아있으니

마지막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해서, 제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자매님, 이제 천국 가셔서 좋으시겠어요, 무섭지 않지요?

제 말을 알아듣고 계시면 손가락을 움직여 보세요.’

그 분의 검지가 ‘까딱’하고 살짝 제 손바닥을 스쳤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 이제 이런 질병도, 아픔도, 슬픔도, 가난도, 억지도,

업신여김도 없는 하나님나라에 가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정말 자매님이 부럽습니다.’

했더니 다시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그리고는 숨이 멎었습니다.

 

어떤 이가 제 손을 잡은 채로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그 영광스러운 상황이

제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 분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 분을 덥석 끌어안으셨을 것입니다.

 

‘내 자식 고생 많았다, 이제 넌 영원한 나라에 온 거야, 이제 진짜 안식 속에서 편히 쉬어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제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 분과 하나님과의 역사적 상봉 장면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손을 잡고 저도 그냥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요.

 

그 분은 분명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만나러 가니 참 좋다’는 말씀을 하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이 느끼시기에 그 분의 인생은 고난과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지금 지병으로 고생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왜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분들의 삶에도 그런 고난이 사라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