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MwqdG17b_kI
◈용서의 기적 행7:58~60 2024.03.26. ☞▣십자가
2024 고난주간 새벽집회
여러분, 하나님은 모호한 존재가 아니십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위험한 것 중에 하나는, 신앙을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호한, 막연한 존재로 믿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막연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십자가 때문이에요.
추상적인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고통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추상적일 수 있습니까? No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신학을 너무 학문화시켜 버린 사람들은
자꾸 이걸 개념화 시켜 버리고, 추상화 시켜 버리고... 그래서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죠.
핏기 없는 철학적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그리스도는 구름 위에 떠 계신 분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 몸을 입고 오셨고,
그 몸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아들이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십자가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그 전후 인류의 역사가 달라진 것이죠.
◑십작가는.. 용서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가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는가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다른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에요.
내 죄 때문에, 인류의 죄 때문에!
그러니까 십자가를, 우리는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죄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죄를, 죄로 제대로 다루어야 돼요.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시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는게 뭐죠?
그건 십자가죠.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해결할 수 밖에 없으니까,
죄가 그만큼 심각하고, 십자가가 그만큼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합니까?
죄를 지어 놓고도 실수했다 그러고요.
내가 모르고 그랬다고.. 둘러대고, 변명하고, 합리화 시킵니다.
가끔 여러분, 희한한 뉴스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 술에 취해서 그랬다고... 변명합니다.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박약해서 그런 죄를 지었다...
성장 환경이 안 좋아서 실수한거다...
어떤 중독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만 치료하면 해결될거다...
심리 상담을 받으면 정상적으로 돌아갈거다...
여러분, 이런 접근의 문제점은, 죄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거죠. 죄를 둘러대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자존감 수업을 하면 자존감이 막 올라갑니까?
그 자존감의 내면의 깊은 곳으로 가면 죄의 문제가 있는데,
그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그저 자존감을 높이려는 시도는.. 별 효과 없습니다.
열등감도, 깊이 들어가면 다 죄의 문제인데.. 그게 그저 심리적인 문제입니까? 감정적인 문제입니까?
아무리 감정적으로 다뤄도, 열등감이 해결이 안 돼요. 왜요?
열등감도, 인간의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면,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죄 없으신 분이,
인류의 가장 처참한 사형틀에, 그 십자가에 달려 죽는단 말입니까?
근데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면, 죄가 드러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만큼,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근데 인간은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죄를 자꾸 작아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죄인 됨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인문학으로 들어가 봐도, 인간은 인간을 포장하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굉장히 멋있게 포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는 얼마나 인간을 처참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것을 심각한 거죠. 하나님과 대립 관계입니다.
오늘날 모든 세상의 문화, 그 반anti 하나님 문화 안에는...
딴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원수 되고, 하나님과 대립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문화거든요.
그러니까 동성애를, 그냥 동성애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됨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고 있죠.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 전체의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고,
그 죄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심각하게 손상을 입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라는 장애물을 거둬 내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문제는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빚으로 말하자면, 일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거예요.
채무자의 편에서는 해결 능력이 제로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의 편에서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관한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예요.
만약에 다른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실 리가 없었겠죠.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이,
그 지혜와 그 능력으로,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길 외에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만약 있었다면, 그 일을 하시고도 남았죠.
근데 그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길 외에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와 사랑이 입맞춤한 이 십자가가,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고,
그래서 이 십자가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게 되는 거죠.
▲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제공하고
십자가는 그 아들의 죽으심이 화목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안에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5: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십자가로.. 하나님과의 전쟁이 끝이 나게 하신 거예요.
적대감을 다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가 주어졌다는 거죠. 완전한 용서!
완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불완전한 그런 제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의 제물,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요!
◑기독교 신앙생활의 기본 베이스에는 ‘죄사함의 용서’가 있어야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밑바닥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의 피로 인하여,
내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용서의 확신,
그리고 그 확신으로 인한 기쁨이 있어야 돼요. 이 기쁨이 성도의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돼요.
이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과, 죄의 용서에 대한 기쁨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야 되는 거에요.
이게 없으면... 신앙생활이 헛바퀴 돌고 있는 거예요.
그 기쁨이 없으면, 십자가를 경험한 적이 없을지도 몰라요.
진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죄 사함의 기쁨이 있어요.
죄 사함의 기쁨은 누가 있어요?
이 용서받은 자의 기쁨, 그런 거 있잖아요.
빚도 많이 졌던 사람이 탕감 받으면, 그 기쁨이 크잖아요.
뭐 10~20만원 탕감받은 사람은, 그 기쁨이 별로겠지만
한 1~2억 안 갚아도 돼, 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그 기쁨이 아주 크죠.
그런데 성도는, 평생 못 갚을 빛을 탕감받는 사람이잖아요.
경범죄가 용서 받은 게 아니라, 사형수가 사면 받은 것과 같죠.
그러니까 내 죄의 깊이를 얼마나 깨달았느냐에 따라, 십자가의 은혜의 강도가 달라지는 거죠.
내가 죄가 없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죄를 덜 지어서,
내가 용서 받아야 될 죄가 작은 게 아니라,
내 죄를 미처 못 깨달아서, 그 실체를 몰라서,
그 죄의 파괴력, 그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자기에게 와 닿지 않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깨달으면, 십자가는 다른 강도로 감동적으로 다가와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예요.
모태신앙으로 이렇게 그냥 쭉 살아온 사람들은,
십자가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건이 없었을 가능성이 커요.
그러나 죄의 심각성을 깨닫는 사람은,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유리한 점이 있어요.
근데 자기 죄를 못 깨달으니까, 십자가 확 와닿지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 보니까, 죽을 죄를 지은 놈들이 많았는가 보다'
그저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거죠.
▲인간은 죄를 자꾸 축소시켜 버리잖아요.
우리는 죄를 감추는 데는, 아주 몸에 익어 있어요.
다른 사람은 다 죄인이라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렇게 심각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 몸을 매여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죄가 들키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를 숨기는 것, 죄를 합리화하는, 변명하는 것이 우리 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실체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다 덮으며 살아왔어요. 내 열심으로 덮고, 내 의로 덮고... 그냥 다 덮어 버렸어요.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부딪힘이 없었기 때문에... 복음의 부딪힘이 없었던 거예요.
여러분 '내가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이 용서에 대한 기쁨,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탕감 받았을 때의 그 기쁨이
우리의 신앙의 밑바닥에, 기저에 깔려있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그 은혜의 강도는, 죄의식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는 고백을 하잖아요.
여러분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그 죄 용서에 그 기쁨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가 범죄한 이후에 그 기쁨을 다 잃어버렸어요. 구원의 감격도 다 잃어버렸어요.
근데 회개함으로 그것을 다시 되찾게 해달라고 바울이 기도하죠.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51:12
바울이 그토록 십자가를 붙들고 자랑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신앙의 전반에, 이 죄 용서의 은총이 깔려져 있었기 때문이죠.
이번 고난 주간에,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내 죄의 실체를 보고 몸서리치며,
그 죄의 문제 앞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내 죄를 용서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에, 그 깊은 세계안에 담금질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기쁨이 말로 다 알 수 없는 거예요.
내 죄가 완전히 용서 받았다는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릴 때,
우리의 신앙은 활력이 일어나고, 또 예배가 살아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뻥 뚫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받으면,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죄가 주는 음울한, 으시시한 기분,
죄가 만들어낸 우울함이... 우리의 이전의 삶이었어요.
그 죄의 찌꺼기가 해결되지 않고, 그 죄의 압박감,
그 죄가 주는 어떤 세력이, 능력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니까
그것이 내 삶의 전반을 휘감고 있는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도 뭔가 막혀 있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지도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고 뭔가 소극적이고,
뭔가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뭔가 가로막고 있는 것(죄)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이 뭔가 무거운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 속에는, 저들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용서와 구원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용서를 받았고,
용서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 용서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열어서,
그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의 가로막고 있는 모든 담을 걷어내시고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
화목 제물로 죽으신 그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회복은,
그 회복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용서 받은 자의 삶에 일어나는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용서를 베풀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묶여 있던 관계들이 풀리기 시작하고,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고...
여러분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오늘날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요?
깨어진 관계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사람들과 원수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분열이 일어납니다.
고통의 대부분은 '깨어진 관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은 깨어진 관계로 가득합니다. 온통 다 꼬여있습니다. 삶이 파괴되어 있습니다.
가정 안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요, 직장 안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요.
이웃 관계 안에도 마찬가지요, 노사관계, 인종관계, 남녀 관계, 종교 관계, 나라와 나라 관계...
온 세상이 다 불화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 엄청난 메시지들이 풀어져 나옵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용서를 구합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복음으로 들어가면, 이건 어마어마한 전폭적 삶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자신을 향하여 못을 박고, 조롱하고, 자기를 죽이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복음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를 굉장히 위험한 세계로 이끌어들여요.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고 하고, 죽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용서를 해 달라고
성부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어요. 십자가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용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요?
그냥 용서를 구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자기에게 심각한 학대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 시점에,
그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죠.
당신이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가해자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 십자가를 붙는다는 것은 굉장히 래디컬한 거예요.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강력한 빛들이 분사되어 나옵니다.
고통 당하는 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죄인들에 대한 용서인 거죠.
그 치욕스러운.. 그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은 '저들의 죄를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용서를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절실한 게, 죄인들에 대한 용서였습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런고로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간다..
십자가와 함께 일상을 살아간다는 말은, 여러분 엄청난 얘기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기 중심적입니까?
내가 무슨 상처를 한번 받으면, 거기서 못 헤어나옵니다.
누가 나에게 좀 피해를 주면 못 견뎌 합니다.
그리고 받은만큼 되돌려주려고 합니다.
'내가 이 정도 고통을 받았으니, 너도 고통을 당해야 돼!'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 몰라요. 아주 뼛속 깊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근데 그 자기중심성이, 바로 죄로부터 출발한 것이고,
그 자기 중심성의 결국은, 나와 이웃을 모두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고통을 받는 가운데, 가해자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어요.
여러분 세상은, 앙갚음, 보복, 되갚아줌,
정의의 이름으로 또 불의를 행하는 일이 습관처럼 관행이 되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원수가 늘어나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인류 역사는 보복의 악순환의 반복이에요.
여러분, 지금 하마스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만 아니라,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만이 아니에요.
보복의 악순환, 인류의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거죠. 거기만 있는게 아니에요.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늘 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은 철저히 본능적입니다.
여러분 전쟁이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나요?
지금 전쟁은 온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도 전쟁터입니다. 가정도 전쟁터입니다.
때로는 복음이 없거나 약해지먄, 교회도 전쟁터가 언제든지 될 수 있습니다.
싸우는 교회가 뭐 별난교회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이 약해지면 어느 교회든 전쟁터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사라지면, 누구든지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용서보다 전쟁하는게 더 쉬워요. 그래서 세상은 온통 폭력으로 가득합니다.
용서 없는 세상은 전쟁터에요.
여러분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보세요. 내 마음에 얼마나 힘든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막을 능력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사는 마음, 과거의 상처를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래서 내가 당한 고통에 내가 스스로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인생...
여러분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쉬우면 벌써 다 용서했을 거예요. 용서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용서를 쉽게 생각하고 접근하면 실패합니다. 더 복잡하게 꼬여버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능욕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폭력을 가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저들에게 하신 일은 용서를 구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용서의 복음입니다.
용서받을 자의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용서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셨습니다.
용서를 하시되, 용서의 대가를 주님 당신이 직접 담당하셨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세상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혜죠!
예수님은 부활 이후에,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힘들 때 나와 함께 해 주지 않으면 진짜 얄밉죠. 얄미운 정도가 아니라 진짜 밉죠.
근데 주님은 베드로를 용서해 주시죠. 용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어요.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어요. 3은 완전수입니다. 완전한 배신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완전한 배신을 한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주님의 용서로, 사도행전에서 제자로 다시 일어나 재기합니다.
용서는 회복만이 아니고, 새롭게 시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로 증명해 내셨고,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용서로 이어지죠.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너무 크고, 그 안에 안기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이 용서가, 온 세상을 바꾸어 놓는 지각 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용서는 기적을 일으키고, 용서는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용서에 눈을 뜹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받은 이 확신, 이 경험, 이 기쁨이 신앙의 밑자리 깔려 있어야 된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용서 받았다'는 이 확신이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이게 없으면, 지금 이 용서에 대한 얘기를 풀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용서를 받았는가에 대한 그 용서의 기쁨이 없으면,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힘들어지는 거죠.
그 십자가의 용서의 강도를 내가 얼마나 경험했느냐...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복음의 실체를 정확하게 경험했느냐? 이것이 우리 신앙의 밑자리에 깔려 있지 않으면, 진도가 안 나가요.
십자가의 메시지가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신앙이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안 되는 거거든요.
용서를 정말 경험한 사람은, 십자가와 정면으로 부딪힌 사람은,
자신의 삶의 무게 중심이, 자기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게 돼 있어요.
십자가를 정말 경험한 사람은,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으로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서 → 우리로, 우리에서 → 공동체로,
그러니까 십자가는 용서와 화해 눈을 열어주는 거죠.
이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용서를 받은 사람은 부드러워져요. 공격성이 사라져요. 날카롭지 않아요.
남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요.
여러분 남을 비난하는 거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비난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나 자신의 상처에만 멈춰 있지 않게 합니다.
십자가는 이타적 존재로 바꿔 놓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자신을 향해 욕하는 자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는 한없이 우리의 마음을 넓혀 줍니다.
단순히 용서를 베푼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그 성품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용서를 받았고
내가 그 용서를 받음으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배우게 되었고
내가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삶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반영해야 돼요.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적용
자 십자가의 예수님의 기도를, 오늘 읽었던 본문에서 스데반 집사가 그대로 따라 하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는데, 군중들이 분노하고 막 돌을 던져요.
피투성이가 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데도, 명설교를 해요. 기가 막힌 설교를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제가 주일날 설교하는데, 나를 딱 째려보고 있는 분이 있어요.
그러면 제가 설교하다가 멈칫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데 어떻게 놀라운 설교를 하는지요.
놀라운 것은, 그 청중들을 향하여 기도를 하는 거예요.
행7: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구절을 묵상을 많이 해보세요.
이런 거는 그냥 막 읽어 넘어가면 안 돼요.
'제 정신인가?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거지?'
아들 예수가 성부에게 드린 기도를, 스데반이 이제 그리스도께 똑같이 드리고 있어요.
용서의 기도죠. 그러니까 스데반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 있는 거죠.
예수님의 기도 방식을 따르고 있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고 있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이 기도에서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본보기이에요.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용서라는 거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롤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길을 스데반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게 용서를 통하여 나타나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가셨던 십자가의 길인데,
하루아침에 도달할 목표는 아니죠.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그 목표를 향해 가야 돼요.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용서할 만한 행동을 하면 용서하겠다고 말해요. 그냥은 용서 안 된다고 그래요.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여러분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들죠.
일상 속에 살아가다보면,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그 대상을 바라보면
내가 그저 용서하기가 어려워요.
그때 여러분, 내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하는 거죠.
그 십자가 앞에 가서, 왜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지셨습니까?
내가 용서를 받을 만한 상황이었나요?
내가 내 죄를 위해 조금이라도 대가를 지불한 무엇이 있었습니까?
내가 주의 용서를 받을 만한...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뭐를, 내가 행한게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주님께 원수되었던 내가, 반역한 것, 죄지은 것 밖에 없었어요.
근데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어요.
우리는 용서를 베풀고 할 때, 상대에게 뭔가를 요구해요. 사과 같은 거요.
십자가에서는 그게 없어요. 그냥 용서하십니다.
▲요셉의 스토리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흉년이 들어 요셉의 형들이 애굽의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게 되죠. 형들을 요셉으로 인해 부들부들 떱니다.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요.
총리가 된 동생의 그 보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애굽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총리,
당연히 자신들이 한 행동으로 인하여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죠.
창50: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하는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심판이나 보복은, 자신의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요.
여러분 신앙은,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의 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겁니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이 따로 있어요. 뒤섞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려고 하면, 큰일납니다. 다칩니다.
우리는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해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이미 요셉의 인생은 정리가 돼 있어요.
20절도 마찬가지예요. '당신들은 나를 헤아려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 맡겼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 맡기는 거죠.
하나님을 알아가니까 마음의 폭이 넓어지잖아요.
하나님을 알아가면, 우리도 모르게 마음의 폭이 넓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을 연구한다고,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면,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거거든요.
심리학 한다고 사람을 알 수가 있습니까? 아뇨,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의 심리를 알게 됩니다.
내 마음이 좁아지면, 인간관계도 좁아지는 겁니다.
내가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 늘어나는 겁니다.
요셉의 마음이 좁아지고 좁아졌으면, 애굽의 총리 자리에 갈 수도 없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자비를 베풀죠. 이미 그의 마음이 넓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면요. 그 앵글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고, 얼마나 넓은지 몰라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관계의 아픔이 생기면, 사람이 점점 더 좁아져요.
자기 감정에 자기가 빠져들어요. 그래서 세상에 미워하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어떤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요.
이 넓은 세상에 그 인간하고 나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매일 그 원수를 주목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는 거죠.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니까, 아무 일을 못해요.
왕이 그냥 그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일에 시간 다 보내고 마는 거죠.
그 미움의 감정에 포로가 되어서, 완전히 자기 삶이 스스로 파괴되는 거죠.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지만, 형들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몽을 꿉니다. 증오심에 불타입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 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인생이 점점 망한다는 걸 모르는 거죠.
요셉은 이미 정리가 다 되어 있습니다. 형들을 보복하는게 아니죠. 형들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나아가 애굽의 주변 나라들까지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용서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용서를 베푸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먼저 베푸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많이 베풀수록 삶은 더 풍성해집니다.
▲여러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스데반은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실, 죄를 용서할 능력이 없습니다. 용서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왜요? 이건 기적이에요.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용서의 능력입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건 능력입니다.
그거보다 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그 본능을 뛰어넘는 능력, 본능을 이기는 능력은
십자가 안에서 가능한 거예요.
십자가에서 사로잡혀서,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용서를 실천할 때
우리의 삶에 회복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회복은, 인간성의 회복부터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 내면의 쓴 뿌리들이 다 사라지고
이제 내 삶에서 쓴 물이 나오지 않고
내 마음 안에 부드러운 마음이 일어나 옥토가 되고,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심겨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 원수를 해결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딱딱한 돌밭이 돼요.
그러면 말씀이 안 들어가요.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감옥이 되는 거죠.
그 감옥안에, 자기 원수하고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는, 그 감옥 안에서 우리를 끄집어 내 주는 거죠.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합니다. 자유!
용서를 베풀 때 자유가 주어지고, 억압해서 풀려나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우리가 붙들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내가 피해자이면서, 나를 가해하는 가해자가 돼요.
나를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그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을 때
또 2차 가해는 내가 나에게 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힘들게 몰아붙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용서는 새로운 능력이요.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감쌀 때, 용서의 용기가 생기게 되고,
용서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사랑에 내가 사로잡힐 때 일어나는 거예요.
사랑이 뭐예요? 여러분 사랑은 관대함입니다.
그 관대함에서 용서함이 나오는 거예요.
용서를 하면서 삶의 지경이 넓혀지는 거예요.
▲여러분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십자가와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난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십자가를 가져와야 돼요. 액세서리가 아니라는 거죠.
십자가를 본받는 삶이라는 말은, 십자가를 우리의 삶의 중심부에 가져오고
그래서 매일의 삶 속에 그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중심축이 돼야 되고,
그 십자가를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앞에 오래 머물러 있어 보세요. 머물러 있어 보세요. 묵상을 많이 해 보세요.
십자가에 두 팔 벌려 매달려 계신 그 주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두 팔 벌리고 계신 그 주님의 모습은, 어쩌면 모든 인류를 품고자 하는 환대,
끌어앉으심, 배제가 아니라 포용... 그게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합니다. 복수에서 복수로!
무질서, 혼란과 분열,
오늘날 갈수록 폭력적인 세상이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세요. 뉴스를 보세요. 온 세상이 지금 폭력적이에요.
무시무시해요. 온 세상이 화약고예요.
지금 북한도 마찬가지예요. 막 그냥 분노의 화약고예요.
그들 지도자의 분노와 함께, 그냥 미국이든 한국이든 자기들을 공격하면,
막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겠다... 이런 겁니다.
분노가 들끓고, 희생양을 찾고,
우리 사이에도 집단적 광기적 문화, 문화 문화 속에 폭력성이 가득해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답이 없어요. 십자가에만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뭔지 아세요? 무장해제 예요. 아무것도 가지고 있잖아요.
폭력에 맞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장해제 였어요.
그 폭력을 사랑으로 끌어안으신 거예요.
여러분 힘으로는 힘을 이기지 못해요. 사랑으로만 이겨요.
화해의 복음, 용서의 복음...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고난 주간, 우리가 십자가와 함께 하는 일상을 산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십자가의 은혜에 내가 담금질 되면... 용서하게, 십자가를 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 즉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이타적 삶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원수를 향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신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는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믿음 생활이 좀 더 진지해져야 돼요.
우리가 쉽게 용서하려고 하는 것도 위험해요.
여러분, 십자가를 좀 더 충분히 경험하시고, 그 안에 깊이 담금질 되시고,
십자가의 능력에, 내가 깊이 스며들면
그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십자가 안에 푹 담금질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완전히 내 심장에 녹아지고
그 피로 내가 뜨거워지면
주님이 우리의 미래를 인도해 데리고 가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충분히 그 일을 하도록 이끄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은
우리가 뭘 할 거냐, 내가 누구를 감동시킬 건가?
내가 이 일을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할 거냐? 그런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십자가가 돼야 돼요.
그 십자가가 내 삶의 기준이 되고,
내가 그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따르기만 한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