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겟세마네의 진실

LNCK 2024. 3. 28. 20:22

2024년 고난주간특새(01)’겟세마네의 진실’ (youtube.com)
겟세마네의 진실          막14:32-42, 슥13:7           ☞▣십자가

 

◑도입 : 예수님의 고뇌에 찬 기도가 선뜻 납득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겟세마네 동산의 이야기는, 저도 여러 차례 설교를 했고, 여러분도 익히 잘 아시는 바입니다. 
근데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사실은 한 대목이 굉장히 막연해요.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허물어지는 모습,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가 대면할 때, 
'과연 예수님의 이 흔들림이, 이 당혹스러움이 뭘까?'에 대해서 
정확하게 캐치하기가, 독자 입장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저와 비슷한 경험을, 이 본문을 읽을 때 하실 겁니다. 
아마 이 본문만큼 예수님의 그 정서를, 다각도로 설명한 본문이 성경에 이렇게 흔치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 구절입니다. 
막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위 본문의 '예수님의 심정'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심히 놀라셨어요. 슬퍼하셨어요. 
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그 심적인 압박감이 어느 정도라는 겁니까?
죽을 지경까지 되었다는 거예요.
이 정도로 예수님의 고뇌에 찬 심정을, 상세하게 소개한 본문이 복음서에 또 있을까요? No

그러면 이 예수님의 심정을 바라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좀 의아스러워요
평소에 담대한 사자의 모습을 늘 보이시다가.. 겟세마네에서 갑자기 겁쟁이처럼 보이니까요.

그 이유를 한 번 밝혀보려고 그래요.

 

지금까지 예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시면서 
얼마나 선명하고, 얼마나 단호하게 사람들을 이끄셨습니까? 전혀 거침이 없으셨죠.  

예를 들면 막10:27절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뭐 이것 뿐이겠습니까? 

아주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주도적이고, 선명한 내용을 담아서 말씀하신 적이 이것 뿐입니까? 
근데 오늘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갑자기 예수님이 변하셨어요. 한없이 약해지셨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흔들거리고, 급격하게 무너지는 듯이 그렇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시고 두려워서 저러시나? 하고 오해할 만큼요.

 

그래서 이 예수님의 내면의 깊은 고통,
그게 어느 정도이기에 '내가 지금 죽기까지 되었다' 하신 것일까요?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앞에 다가온 그 고난을 정말 비껴가기 위한 절규일까요? 
그렇지는 않아 보인단 말이에요.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절규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전체의 문맥과 줄거리 속에서
이 본문의 위치가 뭔가를 정확히 봐야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사실상 14:27절부터 보는게 맞습니다. 
막14:27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이 본문은, 스가랴 13:7절을 예수님이 인용하셨는데, 
당연히 예수님은 이 본문이 무슨 뜻인지, 뭘 얘기하는지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계획이었고, 내가 그 계획에 따라 지금 이 땅에 왔고, 
이제 그 마지막 막바지의 길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아십니다. 

근데 여기 예수님이 인용하신 스가랴서 본문을 한번 보실까요?  
슥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여기서 '내 짝'이 누구죠?   *My Associate, my fellow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언하셨어요. 
내가 이 땅에 택한 내 백성을 찾아오고 회복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슥13:7

그렇게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이걸 지금 오늘 겟세마네 동산 입구 즈음에서 
예수님이, 이 예언대로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이 예언이 성취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자기 앞에 닥쳐질 고난의 잔의 의미를 모르는 바도 아니고,
이 하나님의 경영과 계획을 더더욱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스가랴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막14:27절을 다시 보시면 이렇게 돼 있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예수님은 한 군데도, 십자가의 자신의 죽음을 예고할 때, 부활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항상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과 함께 말씀하십니다. 
여기도 그 패턴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죠. 

근데 이 내용이 어디서 끝이 나냐 하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예언한 대로 50절에서 끝이나요. 
막14: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자 이제까지 전체 틀은 우리가 확인했어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 그 혹독한 기도의 시간을 갖기 전에, 
이미 자기가 마주칠 상황을 
구약의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경영과 계획에 대해서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 8명은 동산 입구에 두고, 
그 중에 3명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오십니다. 

자 그런데 들어오시기 전에, 유심히 보시면 찬송을 하고 들어오세요. 
성경을 잘 보실까요? 
14:26절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그러면 이 찬송의 의미가 뭘까요?
이 찬송의 의미가,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루어집니다. 

보통 유대인들이 만찬을 마치고 일어나서 부르는 찬송을, 신학자료를 찾아보면 
시편 113편 할랄 찬송을 부른다고 해요. 시113편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찾아서 읽어보세요.

시 113편 찬송을 부르면서 들어오시는 길목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스가랴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고, 
그렇게 인용한 말씀대로, 50절을 보니까,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 한복판에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예수님의 고뇌의 기도)이 기록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막 죽기 일보직전이라고 하신 그 기도가)
과연 예수님이 그 다가오는 고난을 정말 피하고 싶어서 였을까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한번 보시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슥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내 짝된 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면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대요.' 당연하겠죠. 
그러면 지금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손을 들어서, 아들을 치시는 장면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아버지의 아들과의 전쟁'이에요. 
마치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칼을 빼어 손을 높이 쳐든 것처럼... 비슷한 장면이죠. 

그렇게 이삭 속에 담아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은 
실제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제 그 막바지의 길에서 성취하시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서 제자들이 다 졸아요. '깊이 잠들었다' 그랬어요. 
근데 유독 베드로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14:37절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치 문장을 보면, 꾸짖고 야단을 치는 것처럼 설명이 돼 있습니다. 
근데 이거는 꾸짖고 야단을 치는 거라고 볼 수 없는게, 
'그냥 네가 약해서 잠이 들어 있구나' 하고 팩트를 얘기하신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만 잠이 들었나요?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였죠.
이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하면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얼마나 결기가 대단합니까, 얼마나 의리 있는 고백입니까? 
얼마나 충성을 보였습니까, 얼마나 열심의 의지를 표명하고 드러냈습니까?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0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31

사실 그러고 보니까 베드로만 그런게 아니네요.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고백을 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모두 열심도 표명을 했고, 의지도 드러냈고, 
'충성도 죽음도 각오한다'는 의지를 선명하게 말한 겁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예수님은 혹독한 밤을 맞이하고 있는데.. 다 졸아요. 
예수님이 이 제자들을 위해서도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마26:44

그러니까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은, 겟세마네 동산의 패러디다' 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죠.  
그 세 번씩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실 그 구속의 사건과, 제자들를 위해서 세 번씩 기도하십니다. 

▲종합해 보면, 이 말씀이 갖는 의미가 뭐냐면,   
'내 목자를 치라, 내 짝을 치라' 하는 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이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능만 하시다면 이 잔을 비껴갈 수 없겠는가요?' 라는
이 참담한 기도가 갖는 상관관계가 뭘까요? 

심지어는 여기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36
과거에는 '아바'라고 아람어를 직접 썼는데, 요즘 성경은 그냥 '아빠'로 나와요.
이 말은 가장 친근감과, 유대감과, 신뢰와, 서로에 대한 헌신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저희 집 애들도 지금 나이가 다 성인인데 
   지금까지 저한테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 
   '아빠. 아빠!'는 가장 친밀한 호칭이죠. 저도 '아빠'라는 말을 들으면 편안해져요.

자 그러면 여기서 왜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를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안타깝게 부르셨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의 이 기도는, 어마어마한 기도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겟세마네 동산의 진실"이에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고뇌에 찬 기도 속에 감춰진 진실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가장 친밀감이 드러난 것이 '아빠'(아바)라고 부르는 표현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죠.

 

그런데 그 친밀하신 아버지가,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외면해 버리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죠. 또한 나같은 죄인을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지점인 것입니다.

 

'아~ 얼마나 두 분이 하나이었으면.. 예수님이 저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셨을까?' 
가장 하나됨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믿습니까? 

예를 들면, 그냥 평소에 두 분이 별로 사이도 안 좋았고,

그저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관계 같았으면 
이렇게 혹독하고 고뇌에 찬 기도가.. 겟세마네에서 드려지지 않았을 거예요. 


만약 아버지와 관계가 나쁘면 '아니면 말지, 뭐 결국 나한테 이러시는구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렇게 포기하듯이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건성으로 반응하지 않으셨고, 고뇌로 몸무림 치셨습니다.

그건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만큼 친밀했기 때문이라는... 반증인 것이죠.

예수님은 겟세마네 에서 
정말 더 이상 어떻게 하나됨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아빠 아버지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때 첫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서로 깊이 사랑하시는 관계다. 교제하시는 관계다.' 입니다.  
   얼마나 서로를 존중하시고, 서로 한 몸처럼 사랑하시는 분이신지... 
   그냥 삼위일체라는 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예요. 

그런 아버지가, (죄인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칼을 들어 '자기 짝'을 지금 치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 입장에서는, 다가올 고통이 아파서가 아니에요. 
잠시라도 아버지와의 이런 상황이, 너무너무 신적 속성상 허락이 안 되는 거예요. 

"아빠, 이런 방법밖엔 없나요?" 
물리적인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하나님과 하나이기에
이 (괴로움의 몸부림의) 기도 속에서, 그 사랑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도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보면, 한 번 하고 끝낸 게 아니에요. 
한번 하고, 했던 기도를 또 한 번 더 하시고, 
했던 기도를 또 한번 더 하시고... 세 번 반복하셨어요. 

그 마지막 기도를 드리신 후에, 위대한 결정을 하시죠. 
'내 뜻보다는 아버지 경영과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36
그리고 기꺼이 십자가 길을 향해서 걸어가시죠. 

◑덧붙여 생각해 볼 내용

 

▲1. 일어나라 함께 가자

자 여기서 가장 슬픈 문장이 뭔지 아십니까? 성경을 잘 보시면 이렇게 돼 있어요. 
14:41절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 길은,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러 가시는 길이고, 
제자들은 도망을 가는 길입니다. 

근데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 가자'는 표현 속에, 이들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자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속성이 또 드러납니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시는 분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찐득한 사랑이신지, 
아들을 내어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어요. 

그리고 그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그 사랑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신다고요. 그래서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는 거예요.

▲2. 사역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통해서 확인한게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하나였다'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됨을 통해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여전히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경영과 계획 속에, 기도로 동역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역이, 그 동참이 뭘로 시작이 됐어요? 기도로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E M 바운즈 라는 그 기도로 유명한 저술가가 이렇게 썼어요. 
"기도 없는 사역은, 그냥 말 그대로 일에 불과하다."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려면, 반드시 기도가 전체 돼야 돼요. 
그 기도가 전제돼야, 하나님의 이미 언약 속의 말씀하신 진리가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

*겟세마네의 결심 rfcdrfcd.tistory.com/15977079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라는 영화는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사랑이란 것은 받아본 적이 없는 고아입니다.

사채업자의 하수인으로, 채무자의 몸을 절단하거나 장기를 팔게 만들어서

끝끝내 빚을 받아내는 잔혹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이들 뿐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에게 어머니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자기는 평생 고아로 알고 살아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어머니'를 믿지 않고, 폭력까지 가하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폭력도 참고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키울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속죄라도 하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죽음까지 감수합니다.

아들을 괴롭히려는 사람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아들을 지켜냅니다.

 

처음 받아보는 사랑에.. 아들은 허물어져갑니다.

처음으로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어머니가 있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선한 생활로 돌아가려는 무렵 어머니는

그 아들이 보는 앞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어머니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닌

자신 때문에 힘들어 자살한 한 아들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복수(?),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그 사람(고아)에게

사랑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잃는 고통이, 어떠한 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아는 여전히 그 자살한 분이, 자기 친어머니인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야 사랑에 눈이 떠진 그 주인공은, 자신이 괴롭히고 파괴해 왔던 가정들을 몰래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그렇게 고통을 주었던 것에 대해 속죄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 그들을 도와주며 자신은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인공은, 비록 가짜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면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과 행복은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랑이 심장까지 다다르면, 심장을 불살라 더 이상 이전의 심장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고 참 행복이기 때문에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나님께, 자신의 심장을 불화살로 꿰뚫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사랑을 만나본 사람은 사랑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시고는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살아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만났다는 증거는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임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을 만났다는 증거이고 참으로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만나보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