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교회 2024-04-14 주일예배 // 죽음 이후 한 부자의 절규 - YouTube
◈죽음 이후 한 부자의 절규 눅16:19~31
※급하게 보실 분은, 아래 ◑적용 부터 보세요!
▲개요
누가복음 16장은 1~8절까지 비유로 시작을 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두번째 단락인 16:9~18절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교훈인데,
예수님께서 제물에 대해서, 또 말씀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신실해야 될 것에 대해서 교훈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눅16:19~31절은 (16장의 세 번째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인데,
이 비유로 16장이 마무리가 되죠.
눅16장의 세 단락의 공통점은 모두 돈과 관계되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제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나? 하는 것이죠.
16:1~8절까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는 긍정적 방향으로 말씀하셨다면,
오늘 본문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제물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영원한 불행으로 인도되어질 수 있다는.. 부정적인 방향에서 교훈해 주십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19~21절까지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22~23절은, 두 사람이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또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24~끝 31절까지는,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때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요청을 합니다.
-먼저 자신에 대해서 요청을 했고,
-또 나중에는 이 땅에 남아 있는 그 가족들을 향해 요청을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주었던 그 답변들이, 본문에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살아있을 때의 두 사람
살아있을 때, 두 사람이 어떻게 달랐나요?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부자는 세 가지를 표현을 합니다.
-먼저는 옷입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명품 겉옷, 명품 속옷을 입은 겁니다.
'자색 옷'은,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바다에 뿔 고동의 내장에서, 그 자색 염료를 추출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비싼 옷감이었죠.
또 이런 옷을 만들기가 쉽지 않죠. 자색 옷은 귀족이나 상류층의 표시였습니다.
'고운 베옷'은 속옷입니다. 곱다고 했으니 명품 속옷이죠.
-부자에 대한 두 번째 묘사는 '호화롭게 즐기더라'
요즘 친숙한 영어 단어 중에 하나가 '럭셔리' 입니다.
NIV는 lived in luxury 라고 번역했습니다.
아주 럭셔리하게, 화려하게 잔치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강조하는 것은 '날마다 every day' 입니다.
잔치하는게 특별한 일이 아니고, 날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았다는 거죠.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죠.
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데 부자의 잘못이 있죠.
▲20~21절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그런데 20절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한 거지가 등장을 하는데
재미있게도 원래는 부자의 이름이 기록이 되고,
가난한 사람의 이름이 무명으로 처리되어야 되는데
지금 예수님 말씀에는 오히려 부자의 이름이 무명으로 나오고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을 네 가지로 표현을 하는데
-먼저 '그는 헌데 투성이였다'
그러니까 상처와 종기 투성이었죠. 그의 온몸은 병들었다는 거예요.
-그는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이 없든지, 가족과 멀어졌는지
주의 아무도 없고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는 존재였다.
'버려졌다 be laid'는 누가 그를, 부자의 대문 앞에 놔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마 장애인이었으리라 봅니다. 거동이 불편했다는 거죠.
-그의 먹는 것은 무엇이었느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아마 고대 사람들은, 음식물 찌꺼기를 상 아래에 버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대화하실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본문과 표현이 비슷하죠. 상에서 먹다가 버리면,
종들이 아마 그걸 주워서, 대문 밖에 있는 거지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사로는 그 찌꺼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이거는 아주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혹자는 '사람들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개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돌보아 주었다'
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경멸 또는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는 묘사입니다.
△근데 재밌는 것은 '나사로' 라는 이름입니다.
예수의 비유들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한 군데 뿐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경건,
즉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암시합니다.
헬라어 나사로는, 구약의 엘르아살에서 나왔는데,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아론의 셋째 아들이죠. 아론의 첫째 나답, 둘째 아비후가 죽고,
셋째 엘르아살이 아론의 대제사장 직을 계승했죠.
요11장에 베다니촌에 사는 나사로와 같은 이름입니다.
여러분 나사로의 이름(하나님이 도우신다)과
나사로의 삶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문제 제기
이것이 살아있을 때,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죽습니다.
◑2. 두 사람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 단순한 교훈이지만,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거지는 죽고, 부자는 안 죽는게 아니라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이 22절을 여러분들이 자세히 한번 살펴보시면
이 두 사람의 죽음을 묘사할 때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둘 다 죽었다 라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한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표현되는게 있습니다.
부자에게는 포함이 되었는데, 거지에게 빠진 표현이 무엇이죠.
'장사되며' 라는 표현입니다.
본문에 부자는 '장사되었다' 즉 장례식을 치루었다는 거죠.
그런데 거지는 죽었지만 '장사되었다' 라는 표현이 없죠.
오늘날로 하면 '무연고사' 처리가 된 거죠.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도 정말 쓸쓸하게...
마치 요즘 같으면 고독사, 무연고사 처리가 되어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는...
당시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면..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던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어떠했느냐? 죽었고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어요.
오늘날 우리들도, 대학병원 같은 큰 장례식장에 가 보면
온 병원이 화환으로 도배되어져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부자는 죽어서도 화려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입니다. 죽음 직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부자에게는 없는데, 가난한 자 거지에게만 등장하는 표현이 뭡니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라는 표현입니다.
천사들에게 인도되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이죠. *받들려'는 좀 과한 번역
고대 유대인들은, 천사들의 역할 중에 하나로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천사들에에게 이끌려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는데 무엇이 빠졌죠?
'천사들에게 받들려' 라는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어디로 가게 되었나요?
음부에 떨어지게 되었죠.
그곳은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23절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부자는 그곳에서 '눈을 들어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의 품'은 영원한 행복의 장소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혹자는 여기가 '중간상태'라고 주장합니다만,
사후에 대한 2가지 상반된 성경적 입장 https://rfcdrfcd.tistory.com/15981467
'음부'는 헬라어로는 '하데스' 입니다.
이 하데스 라는 단어를, 지금 한글성경에도 '지옥'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음부'라고 번역했습니다.
KJV는 이거를 hell 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중간상태를 인정하지 않음)
NIV는 Hades 라고 헬라어를 그대로 음역했죠.
한글 성경도 '지옥'이라는 표현 대신에, '음부(하데스)'라고 번역했니다.
그 이유는 지옥(게헨나)과 구별하기 위함이죠.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음부나 지옥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 부자가, 지옥(게헨나)에 가지 않고, 음부(하데스)에 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또는 최후 심판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최후 심판을 받기 전에, 죽은 자들이 거하는 장소를 '하데스'라고 합니다.
◑3. 음부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청함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음부에 있는 부자가, 아브라함한테 호소를 하는 내용입니다.
먼저는 자신에 대한 호소를 하는데, 재밌는 것은
여러분 지금 부자가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있죠. :23
지금 하데스, 음부라는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서로가 처한 위치를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볼 수는 있습니다.
부자는 먼저 <자신을 위한 부탁>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괴로워합니다.'
아마 지옥과 관계된 이미지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구절이 24절이죠.
불이 있고, 그 불속에서 영혼이 막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혀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좀 찍어서 서늘하게 해 달라
그러면서 정말 견디기 힘든 그런 고통들을 당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런 해석도 있더라고요.
'이 부자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가지고
죽은 이후에도 나사로가 자기 종인 줄 생각한다...'
▲24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무엇이냐?
'지금 여기 나오는 부자가,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부자였기 때문에,
소위 지옥에 떨어진 거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러분 왜 지금 부자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좋은 것을 주셨고,
그의 대문 앞에는 나사로와 같은 버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이 눅16장의 첫 번째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 것처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그에게 주신 좋은 것으로, 친구를 만드는 노력들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느냐> 지금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이웃들 친구를 사귀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았을까요?
학자들도 뭐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은데...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는 의로운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의인들의 성실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거는 지금 한국 사람들도 그렇고
당시에 유대인들도 사실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반대로 가난은 무엇이죠?
그들이 범한 잘못과 게으름, 또 그들의 안일한 삶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라고
사람들은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뭐가 돼죠? (지금도 이렇게 표현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버릇만 나빠지게 하는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경계를 명확하게 세우는 것이,
멀리 볼 때, 매정한 것이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어쩌면 부자는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느냐? 그의 집 앞에 버려진 거지였는데
오랜 세월을 지켜봤는데도, 그에게 친구로서 돕는 노력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요8:39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마3:9
유대인이란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횰을 얻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앞서 21절에서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가 되죠.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고민하나이다'
원래 뜻은 고민이 아니라 '괴로움을 겪다', '고통당하다 torment' 입니다.
고통으로 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죠.
▲25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얘'
'테크논'은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 아이일 경우 '아들아'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됨을 시인하였지만,
다음에 나오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자손 즉 선택된 민족(선민)이라는 특권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큰 구렁'은 '벌어진 틈'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은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 외에는 전혀 물이 젼혀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인 '와디'나 '협곡'을 가리키죠.
이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즉,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게 된다는 것과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의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거죠.
가톨릭에서는 '연옥'(purgatory)이란 교리를 만들어
지상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벧전3:18-20
그러니까 27절에 부자가 질문에 초점을 바꿉니다.
▲27~28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 당시에는 아마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형제 5명이 한 집에 같이 살았던지, 가까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서 그들에게 증언해 주십시오.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해서 증언하고,
그 죽음 이후에 영원한 운명은 어디에서만 결정되느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을 그들에게 증언해서, 고통받는 이곳으로 그들이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부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물 한 방울만 찍어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가족들을 향해서는 '이 고통의 장소로 오지 않도록 그들을 좀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29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르치는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재물,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해야 된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죠.
예수님 역시도 이 비유를 통해, 동일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들어라'라고 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
▲30절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가 막 강하게 호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도 회개할 겁니다.'
성경말씀하시고 안 된다는 거죠.
이런 부자의 생각은 오늘날 일반인들의 생각과도 같습니다.
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도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련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오히려 무관심해 합니다. 더욱이 초자연적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자신의 세속적인 삶으로 쉽게 복귀하고 맙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신앙인격의 변화, 내면의 변화,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결국 아브라함의 답변의 핵심은, 영원한 미래, 영원한 운명은 이 땅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의 기준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교훈, 그 교훈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적용
그런데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뭘까요?
먼저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본문 말씀을 묵상을 하다가
저한테는 이 나사로의 이름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나사로 '하나님이 도우셨다' 이것이 나사로 이름의 뜻이라면,
여러분 나사로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죠?
나사로는 죽을 때까지 환경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난, 질병, 사람들로부터의 외면, 조롱과 멸시...
그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기까지도, 그런 낮은 처지에서 어떤 변화도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면 나사로가 자기 삶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나사로를 도우신 건가요, 도우시지 않은 건가요?
그의 이름 대로라면, 하나님이 나사로를 도우셨다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나사로는 전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그 이름 뜻과 그의 인생이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간혹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자기 삶이 자기 이름 뜻과 대부분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현실 상황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우시면,
-질병은 고침을 받아야 돼요.
-가난한 부로 바뀌어야 되고
-조롱과 경멸은 존경으로 바뀌어야 되고
-사람들의 경멸은 환호로 바뀌어야 되죠.
이렇게 환경이 바뀔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기복주의적) 관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저한테 왜 중요했느냐 하면,
저희 할머니가 소천하셨을 때, 1995년도에 소천하셨는데, 그때 정말 제가 헷갈렸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당시에 젊은 목사였지만,
할머니께서 저하고 같이 보낸 시간이 30년인데
이 30년 기간 동안 할머님은 말씀과 기도에 자신의 삶을 드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 2~3일은 교회에서 철야 하시고 또 금식하시고..
그리고 성경을 정말 사랑을 하셨고
그래서 우리 가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할머님이 정말 우리 가정의 영적인 기둥이 되셔 가지고
그 어려움의 시간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근데 할머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을 때,
그때 우리 집의 형편, 그때 병원에서의 모습이
제 기억에 아주 생생하거든요. 결국 그때 제 질문은 뭐냐?
'이렇게 할머니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평생 사셨는데
끝이 그렇게 쓸쓸하고 초라하게 끝날 것 같으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게 의미가 있나?
아니 내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사로와 비슷
제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서 그 경건한 우리 할머니를 지켜보니까,
지난 30년 동안, 할머니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충성하고, 몸부림을 쳤는데도,
끝이 바뀌지 않고, 환경은 바뀌지 않고, 끝이 이렇게 (초라하게) 끝날 거라면,
'내가 기도를 해야할 필요가 있나? 하나님을 힘써 섬길 필요가 있나?'
이것이 제게 질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잘 풀리지 않았거든요!
사실은 이 나사로 이름과, 나사로의 삶은 같이 간 건가요, 따로 간 건가요? (따로 갔어요)
우리가 머리로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나사로는 삶의 끝 순간까지도 가장 비참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되죠?
하나님의 도우심은 반드시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로만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도우심은 무엇입니까?
상황이 하나도 안 바뀌는 그 비참한 삶의 자리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신뢰와 충성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할머니는 가장 초라하고 쓸쓸하게 삶을 마무리 하셨지만
'하나님은 우리 할머님을 도우셨다'
그래서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구나...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이런 자들만 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죽음은 무슨 날이냐?
여러분, 최고의 날이 되는 거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초라한 죽음이었지만,
죽었을 때 누가 그를 인도했느냐?
천사들이 그를 인도해서, 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죽음은 최고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자에게는 어땠습니까? 죽음은 최악의 날이 된 것이죠.
▲저는 우리 어머니가 77세에 소천하셨을 때,
그때가 가장 제 인생에 슬픔의 날이었죠.
왜냐하면 저희 어머님이 어떻게 고생하셨는지를 제가 생생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 어머니가 말할 수 없이 고생하셨고
또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은,
그때 제가 열심히 공부한 목적은 오직 하나였어요.
'어머니 한번 호강시켜 드리는 것' 그게 제 공부의 목적이었어요.
우리 부모님들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한테,
보란 듯이 큰소리 칠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
그게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이빨 깨물고 공부했던 목적 중에 하나였습니다.
근데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어머님이 원하셨던 것은 전혀 해 드릴 수가 없었죠.
그러다가 제가 담임목사가 돼서, 그나마 조금 교회가 안정이 되려고 할 때
그때 어머님이 소천을 하셨어요.
제가 그때 마음에 '5년 정도만 더 살아 계셨으면...
그것도 조금은 아들이 나은 모습 보고 돌아가셨을 텐데... 뭐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나?'
그러면서 제 마음에 죄책감이 있는 거예요.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잘해 드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마음에 짐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했던 적이 있어요.
'하나님, 저희 어머니를 조금만 더 살아계실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근데 그때 어머니가 저를 한번 찾아오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목사, 나는 지금이 제일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야,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 네가 아무리 장남으로서 나한테 잘해준다 해도,
내가 천국에서 누리는 이 기쁨과 영광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야 나는 지금이 제일 좋다' 이렇게 정말 생생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고 나니까 저의 모든 죄송한 마음, 무거운 마음들이.. 다 사라지게 되었어요.
'내가 잘해 드려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어머님을 제일 좋은 삶으로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우리 어머님은 지금 제일 좋은 삶을 누리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나서부터는 그런 죄송한 마음, 그런 것들이 다 이렇게 눈녹듯 사라지게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날은 언제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날은 바로 죽음을 대면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무엇입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출입구죠.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이제는 바뀔 수 없는 영원히 복된 상태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출입구가 죽음이기 때문에
여러분, 죽음은 우리에게 최고의 날이고,
존 던 John Donne 시인은,
'죽음아 네가 뽐내지 말라,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 이런 시를 썼죠.
Death, Be not proud... Death, Thou shall die
여러분 이게 그리스도인이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
우리가 죽는게 아니고, 죽음이 죽는 순간이
바로 성도의 죽음이라는 거죠.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나사로와 같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켰지만,
현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던 사람,
그들에게도 죽음은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자는 어땠습니까?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날마다 럭셔리하게 살아갔지만
그는 화려한 조문객, 화려한 장례식을 치루었지만
그는 귀신들에게 이끌려서, 결국 지옥에, 음부에 떨어지게 된 거죠.
▲코로나 때 제가 병원과 장례식장에 심방을 자주 갔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가끔 잊을 수 없는 간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한 여자분이셨는데, 이분의 남편이 말기암이셔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편의 마지막 시간을 간호하고 계셨어요.
그분이 그 병실에서, 자기한테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밤에, 자기 삶의 마지막을 목전에 두고
정말 삶의 끝이 코앞에서 있는 사람들 중에
갑자기 한 번씩 이렇게 고함을 지른다고 합니다.
'나 안 갈 거야. 나 안 갈 거야. 나 너무 무서워!'
그런 고함소리를 들으면, 다른 환자들까지 다 미쳐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금 부자의 이야기죠.
지금 우리는 죽음을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게,
돈이 없는 거겠습니까, 자식들 효도하는 거겠습니까?
바로 내가 죽음 이후에 대면하게 될 그 영원한 자기 운명에 대해서
마지막 앞에 설 때, 그분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 안 갈 거야, 나 안 갈 거야, 나 너무너무 무서워, 나 좀 도와줘!'
누가 그들을 도와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의 부귀영화,
의사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시죠.
'눕혀 놓으면 다 똑같습니다'
장관, 박사, 부자, 가난한 사람, 잘생기고, 못생기고... 여러분 다 필요 없어요.
눕혀 놓으면 다 똑같아요.
'나 안 갈 거야, 나 안 갈 거야!'
저는 지금도 그 표현이 너무 기억에 생생해요.
여러분 그 고함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절규와 호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 안 갈 거야, 나 안 갈 거야!'
누가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줄 수가 있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만이,
그 분이 정말 병실에서 부활의 주님을 소개 받았으니
죽음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부활이 있구나 부활이!
그래서 그 부활을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거죠.
우리를 음부의 권세에서 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시냐?
예수님 밖에 안 계시잖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 시간, 재능을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하며 섬기며 살아갈 때
그때 어떻게 되느냐?
죽음은 우리에게 최악의 시간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시간이 아니라,
죽음은 바로 천국의 출입구가 되어서,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이 되고,
그리고 그 빛난 천국문, 내가 바로 들어갈 때,
이 세상의 모든 수고의 짐을 다 내려놓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될 것은, 바로 영원한 운명은 이 땅에서만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믿음의 길에 서지 못할 때
여러분이 한번 부자 입장에 한번 서서
'하나님,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도록
성경이 이야기하는 음부, 그 지옥과 같은 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 그들의 귀를 열어주셔서 주의 말씀을 듣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물질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면서 살다가
영원한 천국을 함께 소유하는 자들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끄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