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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LNCK 2024. 4. 18. 20:2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나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youtube.com)

나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행3:1~12              2024.02.04.

 

◑도입, 보는 눈이 남달리 민감한 사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중에 요하네스 베르메르 가 있습니다. 
렘브란트와 같은 시대입니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실내에 들어오는 빛을 활용하여 
조화로운 구도와 색깔로, 일상의 장면들을 잘 그려낸 화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죠. 


이 소녀는 아주 허름한 복장을 하고 있는데, 매우 값비싼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은, 풍속화 라고 할만큼, 집안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 작품은 그냥 까만 바탕만 있고요...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편지를 읽는다든지, 우유를 따른다든지'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데 이 작품만은 모델처럼, 화가에게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여러모로 궁금증을 자아내고 신비한 느낌을 주기까지 합니다. 

여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죠. 
이게 이탈리아 남유럽 이거든요. 
이 그림은 '북유럽의 모나리자'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소녀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서 이걸 그렸는지 전혀 기록이나 정보가 없습니다. 
그런데 트레이스 슈발리에 라는 미국 소설가가, 이 그림에 매료되어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이야기를 지어냈고,
이 소설이 2003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상상 fiction 에 의하면, 이 그림의 주인공인 소녀는 
아버지가 실명을 하고, 집안의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서 
마침내 누군가의 집에 하녀로 갔는데, 그 집이 베르메르 화가였다는 겁니다. 

소녀의 이름을 그리트 라고 붙였습니다. 
집이 가난해도, 부모님 밑에 자랐던 소녀가, 남의 집에 하녀가 되는게 얼마나 힘든 경험이겠습니까.  

하녀로서 낯선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 얼마나 긴장되었을까요? 
가보니까 2층 집입니다. 
1층은 생활의 공간이라서, 냄비가 걸려 있고,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아이들은 뛰어다니고요, 서로 싸우고요... 

주인 마님은 도끼 눈을 뜨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짜증을 내고... 
그런 눅진한 생활의 냄새와 소음들이 뒤엉켜 있는 공간... 

그런데 주인 마님이 그리트 에게 2층을 청소하라 해서 올라가 보니까 
2층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주 조용한 화가의 작업실입니다. 

아래층 생활의 공간과는 완전히 분리된, 적막하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하고 신비하게도 한 
그런 공간입니다. 여기저기에 화가의 작품들이 있어요. 

완성된 그림들, 그리고 아직 그리는 중인 미완성인 작품들,
이 그림들을 그리트가 자세히 쳐다봅니다

그리고 작업 도구들, 물감들, 이젤, 이런 것들을 관찰하는 그 장면을 
카메라가 그리트의 호기심 어린 눈을 따라가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트가 청소하다 말고 1층으로 내려와서, 주인 마님에게 물어봅니다. 
'창문에 있는 먼지를 털어내도 되나요?' 

아니 청소하려면, 그냥 먼지를 다 털어내면 되지... 뭐하러 그걸 물어보는 걸까요? 
그때 그리트가 하는 대답이 영화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먼지를 털어내면 빛이 바뀝니다.'

그리트가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니까, 
지금이 2층 작업실에서의 그 빛의 느낌, 즉 채도를 잘 활용한 그림들이라는 겁니다. 

근데 청소하느라 창문의 먼지를 다 닦아 버리면, 
그 빛의 세기와 느낌이 달라져서, 작업 환경이 완전히 달라질 거기 때문에 
생각해 봐야 된다는 거죠. 집주인 화가에게 지장을 주게 되는 거죠.  

그리트는 가난한 집의 딸입니다. 미술 교육은 커녕, 어떤 정규 교육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있는 거죠. 예술적 안목이 있었습니다. 

화가 베르메르는 미술사에서 '빛과 색에 관해 민감한 대가'로 평가받습니다. 
대가는 재능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이때부터 이제 화가 베르메르가, 하녀 그리트에게 
자기 그림을 보여주고, 물감을 배합하고 섞는 조수 일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대화를 서서히 나누면서, 
이렇게 새로 공감대가 깊어져 가는 겁니다. 

옛날 이때는,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을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고정 후원자나 스폰서가 있어야 했어요.

베르메르에게도 거들먹거리는 부자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는 미술을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림을 잘 몰랐어요. 

베르메르는, 비록 하녀이지만
자기 미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하녀 그리트를 결국 모델로 그리게 된 그림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별명은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그림이 나왔다는 거죠.

이게 사실 fact 은 아니고, 소설가가 상상으로 꾸며 된 이야기 fiction 입니다. 
이 책이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이 영화에서는 자세히는 안 나오고 생략되어 있는데, 소설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베르메르가 그리트의 집에 방문하는 장면,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그리트가 야채를 썰어서 접시에 담는 것을, 베르메르가 주목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거는 왜 이렇게 담았니, 이건 왜 이렇게 담지 않니?' 
그러니까 그리트가 하는 말이 '그러면 색깔끼리 충돌하잖아요' 
그래서 그리트의 재능을 알아봅니다. 

예술은, 꼭 그림만을 잘 보는 것이 아닙니다. 
창문에 낀 뭔지, 접시에 담긴 야채의 색깔에서 
남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예술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요. 다 각자 다른 것을 쳐다보고 살아요. 
여러분이 누구와 함께 단체 여행을 가보셨습니까? 같이 하루 종일 여행을 합니다. 

갔다 와서 저녁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해 보면요. 각자가 본게 다 다릅니다. 
나한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사람은 기억도 못하는게 있고요. 
그 반대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면서, 길에서 뭘 보고 갔는지, 집에 가서 서로 얘기해 보세요. 
아들이 본 게 다르고, 딸이 본 게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지, 무엇을 주목하고 마음에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도 쳐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행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10
여기서 '자세히 쳐다본다'는 단어가 굉장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아테니조

'뚫어져라 쳐다본다. 시선을 못으로 박은 듯이 응시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굉장히 관심 있는 것을 쳐다볼 때가 있잖아요. 
시선을 마치 못으로 박아 놓은 것처럼,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눈여겨본다.. 라는 단어죠. 

독특하게도 이 단어는, 다른 성경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에 종종 나오는 단어입니다. 
(행1:10, 3:4, 3:12, 6:15, 7:55, 10:4, 11:6, 13:9, 14:9, 23:1)
사도행전의 신학적 무게가 실려 있는 단어입니다. 
*아래에 3:4, 3:12, 7:55절의 '쳐다보다 - 아테니죠'의 설명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흔히 종교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굉장히 팽배했어요. 
그냥 전문적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줄리어스 시저가 죽었을 때 '어떤 별이 하늘에 떠올랐다' 
이런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점성술
종교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무엇인가 하면,
'이 땅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하늘만 이야기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라이언킹>을 아시죠? 그 이야기의 아주 핵심, 하이라이트가 
아프리카의 어두운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 가운데 아버지 무파사가 
아들 라이언 심바에게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 심바 라는 주인공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을 도전하는 거예요. 

성경도 비슷합니다.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라는 이 말씀이 두 가지로 성취됩니다. 

-첫 번째, 역사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 재림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두 번째, 오순절 때, 성령, 예수의 영이 임하심으로서 부분적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한 번만 일어나는 일회적 이 사건을 통해서
이 시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젠 하늘과 땅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져서 

우리가 하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심각해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rfcdrfcd.tistory.com/15978637

  
큰 강으로 두 마을이 나누어져서, 배를 타야 건너갈 수 있는데, 
다리가 생겨서 1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신약시대라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이제 배는, 가기 위해서 교통수단이 아니고요, 
굳이 배를 탄다면, 뱃놀이를 하는 거예요. 
그게 종교 라는 세계입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하늘에만 매달리면) 이게 종교 놀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약 전체에, 구약의 뿌리와 배경이 아주 깊이 박혀 있는데 
그 배경이 중요하지만, 전체의 스토리가 중요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구약의 성막을 아주 열심히 가르치죠. 
외우게 하고, 뜰과 성소, 지성소, 모형도 만들고 해서 
이래가지고 그냥 1년 내내 성막만 이야기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영적인 교훈들이 들어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신앙의 중심을 거기 구약에만 두면 안 됩니다. 그거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자꾸 너무 그런 지엽적인 것, 옛날 구약의 것들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을 놓치고, 그림자를 붙드는 격입니다.  

 

(신약을 도외시한채 구약만 주로 강조하는 것은.. 재고해봐야 됩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로서 강조되어야 하죠. 실체는 신약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아십니까? 
젊은이들을 찾아가서 '유월절을 지킵니까?' 이렇게 물어본대요. 

여러분, 구약의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전부 다 그 안에서 이미 성취가 된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전하면 되는 거예요. 

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잘 알기 위해서, 배경으로 유월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절기를 오늘날 꼭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유월절을 지킵니까? 장막절, 나팔절을 지켜야 됩니다.' 
뭐 이런 말들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우리가 뭘 모르면, 그 얘기에 솔깃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구약의 율법이 어떻게 신약에서 성취가 되고, 
우리가 새로운 언약 가운데 있는지를 제대로 모르면...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성경의 복음은, 우리가 하늘만 주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말씀처럼 
땅끝까지 바라보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늘 과 땅, 둘 다 관심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 무엇이 있습니까? 구원받아야 될 백성이 있는 거예요. 
신음하고 굶주리는 현실이 있는 거예요. 깨어진 가정들이 있는 겁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 멀리 북한에. 동포들의 아우성이 있잖아요. 

여러분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보이기 시작하고, 
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요. 내 기도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늘만 아니라) 세상을 주목하여 본 사도들     *아테니조 한 사도들

 

3:1~4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주목하여' 아테니조 라는 말이 또 나왔습니다.  3:4
배경은 성전미문, 뷰티풀 게이트, 아름다운 문입니다. 

'미문'은 정식 명칭은 아니고 별명이에요. 
별명이 생긴다는 것은, 사실은 정식 명칭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인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전에 여러 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문'이었다는 거죠. 
구약의 백성들은, 성전이 최고로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어요. 
그 성전의 아름다움을 평생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84:10
라고까지 했잖아요. 
여러분 그 아름다운 성전에서도,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자리는 
정말 가장 아름다워야 될 자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 아픔이 있었어요.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하니까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쯤 되면, 평소보다 좀 더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그리고 매일 그를 그 미문 앞에 데려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이잖아요. 

그러나 그걸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무슨 한계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근데 이 본문의 주인공은, 매일 성전에 오면서도, 성전 앞에까지만 오지, 
막상 성전 안에는 못 들어갑니다. 장애인이라서. 온전하지 못한 자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이런 것을 뭐라 그러죠? '소외'라 그럽니다. 

그림 같은 골프장이 있어요. 숨 막히는 경치, 식당에는 맛있는 뷔페 음식, 
거기에 리조트도 겸하여 있습니다. 넓은 로비에 번쩍이는 인테리어... 

그런데 거기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
내가 누릴 수 없으니까, 그 장소가 화려할수록.. 자기는 더 소외되는 거예요. 

요즘 하나에 수백만원짜리 점퍼를 입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는, 그런 기사를 봤는데 
여러분 그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얼마나 받을까요? 

아예 모르고 살면 또 모르는데, 늘 명품을 만지고 살잖아요. 
근데 평생 그렇게 일해도, 한 번도 못 입어볼 옷이라 그러면,
그게 '소외'라는 겁니다.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씨의 소설 제목이죠. 
우리 사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천국'이 되면 안 됩니다. 

뭐 나라가 발전한다, 사회가 좋아졌다.. 그래도
누군가 소외 받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게 진정한 발전일까요?
 
교회도 누군가에게는 '당신들의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도 있죠.

당시 성전이 그랬다는 거예요.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신16:2절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여러분 신명기를 읽어보신 분은, 이 표현이 반복해서 나옴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여러분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하늘)께서

자기 백성들 (땅)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겁니다. 

그게 성전인데요. 지금 행3장의 성전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면 일어나야 될 치유와 구원, 
그게 전혀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소외의 현장이 되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죠. 
3:6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구절을 위 신명기 구절과 같이 봐야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현존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뭐라 그랬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

저 성전 화려한 건물.. 형식적인 이름을 두는 곳, 그게 아니라
베드로는 진짜 그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는 그 이름의 권세가, 베드로를 필두로 하는 '교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하는데, 바로 그 말입니다. 

 

오순절에, 하늘땅에 임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된 것이죠.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고속도로가 생긴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 예루살렘 성전뿐 아니라, 어떤 간판을 붙인 교회뿐 아니라,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이 '성전'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거예요. 

여러분, 시대가 바뀌면, 사람이 바뀝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급하게 올라가서 기도해야지' 이것도 좋지만
그 옆에 구걸하는 장애인을 주목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걸인에게 동전을 던져 주겠죠. 
그러나 대부분 그를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던져주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래도, 힐끔 쳐다보고 말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목했다' 그랬습니다.   *아테니조
정말 멋진 거, 아름다운 거, 재밌는 거를 볼 때처럼,
시선을 못 박은 것처럼 집중해서 봤다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사람이 바뀐 증거예요. 
걸인 한 사람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본 겁니다. 거지로 본게 아니라! 
그의 깊은 필요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인간,
지금은 저렇게 초라하게 무기력한 눈동자로 
동전 한닙 구걸하면 앉아 있지만 

이제 이 사람이 곧 일어나 기뻐 뛰며 
'하나님을 증거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할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 따라서,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기적이 어디서 시작됐습니까? 
그 사랑의 눈, 따뜻한 시선! 

▲베드로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9:1~2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은 이 장애인을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는데, 
제자들은 차갑고 냉혹한 시선으로 판단하잖아요. 후벼파잖아요. 원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막10:48~49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여기 맹인 거지가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필사적으로 부르는데 
예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꾸짖어 잠잠하라' 그랬어요. 

왜 꾸짖었겠어요? 우리가 예수님 모시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 들고 있는데 
네가 왜 방해하냐는 거죠. 제자들은 그렇게 냉혹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성령 받고 나서, 이웃의 아픔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 탄식이 귀에 들리는 거예요.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그 마음이 느껴지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것이 여러분 성령 받은 변화입니다.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들의 시각이 변하면서, 역사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잖아요. 
예수 믿고, 예수의 복음 안에 살면서, 우리도 조금씩 이웃의 아픔을 보기 시작합니다. *아테니조

우리 교회에 그런 사역들이 아주 많습니다. 몇 가지 소개하면요. 
-혼자 식사해 드시기 힘든 분들에게, 정기적으로 반찬 배달하는 '다비다 사역' 
-소년소녀 가장들과 함께하고 돕는 '하은회'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들을 열심히 해오고 있고요. 
-교도소 찾아가서 사역하는 '한빛 울타리 선교회' 

-이외에도 사랑방 별로, 또 공동체 별로,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는 사역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끔씩이라도 참여해 주시면 좋고요. 
함께 후원하시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훈련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영화에서, 이 화가의 집은 
생활의 공간 1층과, 예술의 공간 2층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상징적이죠. 

여러분 현실 생활에 얽매이거나 방해받지 않고, 예수를 추구하고 싶은 열망이 
예술가에게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이 더러운 속세와 좀 분리되어서,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가서 
좀 영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들하고 차원 높은 대화하면서, 종교 생활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예술적인 소통이 시작되는 것은, 
예술적 영감이 처음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트 집의 야채를 담는 그릇입니다. 
화가 집의 2층 방, 먼지 낀 창문에서 입니다. 
삶을 떠난 예술은 없습니다. 삶(땅)을 떠난 신앙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막 나타나기 시작한 곳은, 
성전 안이 아니고 성전 밖이었어요.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어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 앉은뱅이를 주목한(아테니조) 것이었어요.

여러분, 담을 쌓아 놓고, 더러운 성전 밖과, 깨끗한 성전 안, 
그리고 그 안을 온갖 종교적인 프로그램과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해 놓았지만, 
그 안에 하나님 이름(현존)이 없었습니다. 

이 갈릴리 시골 사람들, 돈 한 푼 없었지만,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런데 그들에게는 예수의 이름(권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참 성전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불쌍한 영혼들을 주목하면서 
미문, 뷰티풀 게이트 라는 이름은 붙였지만, 그 이름대로 되지 못했던 곳이, 
진짜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선교적 교회입니다. Missional Church 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았다'는 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선교적 시각(땅을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즉 우리가 출근해서, 혹은 여러분이 학교에 가서, 
여러분이 이웃과 함께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선교적으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 안에 사람들의 필요를 헤아리는 선교적 민감성을 느끼고,
이 땅에 어떤 탄식이 있는가를 듣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러분, 이 장애인이 이제 일어나서 걸어다니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놀랍니다. 
'누가 그랬지?' 하고 막 찾기 시작해요. 난리가 났습니다. 

행3:11~1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테니조'가 또 나왔죠.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라는 거죠. 
내 능력, 내 영빨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인정받기 좋아하는.. 나서기 좋아했던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겠습니다'하고 앞장서고요. 
자신감으로, 자기중심적인... 

하도 나서다가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까지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사람들이 막 몰려와가지고 존경의 눈빛으로 그냥 '베드로, 베드로!' 외칩니다. 
그런데 '내가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기적이에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장애인이 나은 것도, 
우리가 암이 나은 것, 무슨 뭐 돈을 많이 벌은 것, 
그게 다 크고 작은 기적일 수 있겠지만, 

정말 인간이 바뀌기 힘든 것은, 이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사람이 바뀌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거예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좀 인기가 생기면... 자기 인격적 단점이 드러납니다. 

'저 사람 본래 안 그랬는데.. 아이 좀 출세하더니.. 왜 저렇게 변했지?' 
변한게 아니고요 본래 그런 사람이에요. 

그 대부분 고만 고만하게 살 때는, 그냥 괜찮아 보여요. 
근데 어느 자리에 올라가 보세요.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최고 문제가 그거 아닙니까?
조금 유명해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 중에서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냐?' 할 정도가 많잖아요.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과도한 경쟁사회를 살아왔습니다. 
아이들도 그렇고, 어른들도 그렇습니다. 
경쟁사회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막 노력하다 보니까 
그 노력 자체는 뭐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 경쟁이 너무 과도하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가치들, 
인성 함양, 서로 포용하고 사는 삶... 이런 것은 다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쟁에서 승리해서 좀 올라간 사람들 중에서
정말 '성공 지향'에 쩔어있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렇게 살아왔으니 인격의 모자라죠. 
지위는 높은데, 인격은 모자라고 
연봉은 높으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함께 있기 힘든 그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사람이 되었다면, 이제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는 행복할까요? 

지금 베드로는 이날 이때까지, 막 '나를 좀 바라봐, 내가 이런 사람이야!'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사람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게 됐잖아요. 

근데 그 순간에 '내가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베드로는 이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살아계실 때, 베드로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이 말을 실천할 준비가 되었을까요? 안 됐죠. 
그 말의 의미도 몰랐어요. 

'섬기고 낮추라' 그랬는데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날까지, 제자들은 서로 잘났다고 싸웠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패배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자들을 일으켜 주시고, 성령을 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섬기라, 겸손해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다 좋은 말인데 
그 말 자체는, 여러분 윤리 밖에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일할 때에 
비로소 이 사람들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내가 내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은, 그 성공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결국에는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무대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은, 소위 제2성전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스룹바벨이 BC 515년경에 지었던 그 성전입니다. 

근데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보면, 이 성전은 굉장히 초라한 성전이라고 그랬어요. 학2:3
근데 헤롯대황 때 이 성전은, 엄청나게 화려했습니다.

고고학적인 자료나 문헌을 봐도, 당시 지중해 세계에 대표적인 관광지를 꼽힐만큼 
엄청나게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이 스룹바벨 성전을 재개축, 증축한 사람이 헤롯대왕입니다. 
그는 정말 수완이 대단해서, 로마제국이 막 엎치락뒤치락 할 때
교묘하게 줄을 잘 서서,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근데 출신 성분도 이두매 출신이고, 그의 성품도 인격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성전을 화려하게 지은 겁니다. 
그의 별명이 '건축 왕'이었어요.

근데 여러분 성전을 거대하게 짓고 싶어도, 구약에 보면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 
더 이상 키우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꾀를 낸게 뭔가 하면, 위의 성전은 그대로 두고, 
그 성전 아래를 엄청난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성전이 엄청나게 큰 건물처럼 보이는 거예요. 

지금 예루살렘에 가 보시면 서쪽 벽, 통곡의 벽이라는 높은 벽이 있잖아요. Western Wall, Wailing Wall
그게 헤롯이 쌓은 성전 지대, 기반입니다. (진짜 성전 벽은 아니죠)

그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구경오고, 성전을 보고 뭐 깜짝 놀랄 정도로 '와~' 그랬습니다. 
그런데 헤롯대황을 보고는 '에이~' 그러는 거예요. 

자기 영광을 위해 내가 살 때는, 그 성공의 외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대왕은 평생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
내 아내도, 내 아들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요. 
아내도 죽이고, 아들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정적이라 생각해서요. 
그 연장선상에서 마2장의 유아 학살이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사람이 
스스로는 행복했을까요? 대단히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에 (헤롯)성전은 있었으나, 영광은 없었어요.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아무것도 못 가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에, 
예수 이름의 능력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믿습니다. 
거기서 변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서 (하늘만 본 게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은 바라볼 필요가 없고, 
우리끼리 땅에서 잘할 수 있다... 그거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능력은 그래서 더욱 필요합니다. 

 

'주목하다 - 아테니죠' 라는 말이 
또 한번 더 중요한 대목에서 나옵니다.   1:10, 3:4, 3:12에 이어서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아테니조
스데반이 이 땅에서 막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고 하는이 이 현장에서, 

하늘을 보는 거예요. 우러러 주목하는.. 꽂히듯이 쳐다보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성경에 보면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땅에서 아주 신앙생활 잘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잠깐 듣죠. 
아주 경건생활 잘 해야... 약간의 징조를 보죠. 그죠? 

그런데 스데반은

막 사람들이 그냥 막 난동 부리는 이 와중에, 시장바닥 같은 곳에서
군중의 폭동의 와중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을 보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그만큼 하늘이 우리와, 이 땅과 가까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신약 시대이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으니까요.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믿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거예요
여전히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주목하고, 하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이 땅의 현실을 바라보고, 직시하고, 마음으로 품는 거예요. 
하늘의 영광을 갖고 살아가는 것,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이 사도들이 뭐 특별하게 용감해서가 아니라
이 영광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눈을 감아도 바로 나를 영접해 주실 예수님을 주목했기 (아테니조) 때문에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고, 당당하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 하나님 함께 하셔서 
하늘의 위로, 하늘의 평화로 채워 주시고 
그 영광으로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