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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에는 이기적이어야 한다

LNCK 2024. 4. 22. 14:4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awlIsFEBso%EF%BB%BF
그 사랑에는 이기적이어야 한다       요일4:7~11         2024.04.12    

우리의 삶의 가장 가장 귀중하게 뭘까요?
그래서 대중가요 노래에도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가 사랑이에요. 

이 세상이 모든게 돌아가는 에너지가 사랑으로 돌아가요.
사랑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죠. 그러니까 사랑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에요. 에너지! 
모든 에너지는 사랑에서 나오는 거예요. 
아이들이 콩콩 뛰어다니는데, 엄마의 사랑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천국에 가면,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고, 사랑만 남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사랑, 천국에서도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최고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빠지고서는 천국이 아니죠. 

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사랑을 빼버리고 나면, 하나님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이시거든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빼고 하나님을 말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

자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가장 주시고 싶어 하시겠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최고의 선물은 뭐겠어요?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주시고 싶어 한다고요? 사랑을 주시고 싶어하세요. 

 

자 오늘 설교는,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설교가 될 수도 있어요. 
성령의 역사하셔서 깨닫게 하시면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게 뭐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걸 좋아하세요. 

하나님은 계속 사랑을 원하세요. 모든 것에 사랑을 원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사랑하는 걸 가장 좋아하시고, 
사랑을 주는 걸 가장 좋아하신다면, 우리가 해야 될 건 뭐예요? 

우리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받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게 없어요.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귀중한게 없다니까요. 

왜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랑을 주시고 싶어 하시는 분인데 
그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최고의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이게 신앙의 핵심이에요. 
신앙의 출발점이고, 사랑이 신앙의 끝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사도요한은 자신을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로 묘사했는데,  요13:23
요한일서에서도 사도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도 깊이 체험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그 사랑을 경험해 가고, 그 사랑을 누린 거죠. 
그래서 요한계시록도 밧모 섬에서,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계시를 부어주신 거죠.

오늘도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빨리 알아들어요. 
사랑하는 자의 음성은 빨리 알아들어요. 
한 개를 가르쳐줘도 열 개를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신앙이 뭐냐? 사랑에 눈을 떠가는 과정인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떠가는 거예요. 
사랑에 눈을 떠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경험은 없어요. 

근데 이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추상적이지 않다는  거죠.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이처럼 so' 이 뭐예요.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아들을 주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사랑!

오늘 본문에도 마찬가지죠.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는 거죠.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아요. 관념적이지 않아요.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신 분이 아닙니다. 
사랑을 직접 보여주신 거죠.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교회를 다니면서 수 백 번도 더 들었지만 
이걸 교리로만 받아들이면 안 되고, 
나의 온 몸과 마음으로, 전 인격적으로, 나의 전 존재론적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고, '아~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하는 이 깊은 깨달음을, 온 몸에 소름이 돋돈 듯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몸으로 느껴야 됩니다. 사랑은 느끼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다'라고 얘기할 때, 
그게 내 마음에 정말 와 닿느냐는 거예요? 
그냥 건성으로 그 사랑을 알면 안 돼죠.

▲근데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으로 드러났는지 아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인카네이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잊고 이 세상에 오신 거예요. 

굉장한 비밀이 이 안에 있는 거예요.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여러분, 하나님은요 초월적인 존재예요. 천상에 계시는 분,
그분은 창조주예요. 그분은 영이신 분이에요. 
하늘의 하나님, 하늘보다 더 높으신 그 하나님,
천상에서 초월적 존재로 계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해요?
우리가 닿을 수 없는데요. 그 엄청난 수직적 관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요? 

여러분 왕과 저 밑에 노예와 사랑이 가능해요? 
그 엄청난 거리를 어떻게 메꿔요? 그 갭을 메꿀수 있는 사랑은 불가능해요. 

사랑은 여러분 인격적인 관계로, 일대일의 수평적인게 사랑이에요. 
수직적 관계에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어요. 수평적이어야 돼요. 
일대일이어야 돼요. 너와 나의 관계!

그러니까 성육신이라는 건 엄청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 
초월자로 계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막연한 개념 덩어리의 신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적인 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에게 실제로 다가오신 거예요. 가까이 오신 거죠. 너무도 가까이 오신 거죠. 
우리와 교감이 가능하도록, 눈과 눈이 마주치도록... 성육신 하셨어요. 

사랑하는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거죠.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신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면, 한순간 그분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고, 
그분과 대화가 가능하고, 그분과 교감이 가능하고, 교제가 가능하고, 
그 사랑이 가능해지게 하신 거죠.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가 남녀의 모든 사랑,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 
모든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모방에 불과해요. 
그 사랑의 모든 원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요15:9절에 보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거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예수님도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신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함을 얘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하게 직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또 우리에게 흘려보내신 거죠. 
우리도 그 사랑을 받고, 또 이웃에게로 흘려보내는 거고요.

▲요일4: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여러분 이것은 머리로만 아는게 아니라 경험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사랑하셨죠?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너무너무 중요한 경험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은,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거죠. 일대일의 관계!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질투하신다' 그랬잖아요. 질투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질투'라는 것은 사랑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거예요. 
사랑의 관계가 아닌데 질투가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거예요. 

사랑하는데, 누가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질투하게 돼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는 거죠. 
모호한 대상과 사랑을 할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은 이중 플레이를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에요. 

이 사랑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면 안 된다는 거죠. 
'나 외에도 사랑을 받아야 될 사람이 많으니까, 내가 양보할게'
사랑은 그럴 수 없다는 거죠.

여러분, 사랑의 속성이 뭐냐면 즉각적이에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사랑 많이 받으라고 해!' 그럴 수가 없어요. 
사랑은 속성상 이기적이에요. 

여러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너무 멋있어, 너무 좋아. 내가 양보해야 되겠어' 
그렇지 않아요. 양보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여러분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요. 
그가 나만 바라보기를 원하지요. 진짜 사랑을 받고 나면, 더 받고 싶어져요.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지 않아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사랑이 깊어지기를 원해' 그게 사랑의 속성이라는 거죠. 

사랑을 받은 사람이, 더 사랑을 원해요. 원래 그렇잖아요. 
경험해 본 사람이 그걸 찾는 거죠. 맛을 본 사람이 찾는 거잖아요. 

사랑에 대한 갈망은,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도록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시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편에서는 완벽하게 준비하셨죠. 우리에게 계속 구애를 하시는 거죠. 

여러분 성경 전체를 보면, 사실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구애예요.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구애를 하셨다고요. 

'난 널 사랑해.. 너는 나에게 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게 그거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죠. 

근데 하나님의 편에서 너무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다가오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안 되는 거예요. 아가서에서도 그 얘기를 해요. 

솔로몬은 너무도 뜨겁게... 왕이지만, 모든 체통을 내려놓고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사랑을 구애하지만, 술람미 여인은 도망을 가요. 
'내가 당신의 사랑을 받기로 너무 부담스럽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펼치면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짝사랑이 계속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짝사랑하는 거예요. 인간이 마음의 문을 안 여는 거예요. 
다가가면 도망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사랑이 뭔지 아세요? 사랑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랑은 쌍방적이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의 편에서 그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이 마음,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더 사랑을 원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된다는 거죠.

여러분들 가운데,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사랑을 얼마나 구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 내 삶을 사로잡을 때까지, 우리는 물러서면 안 돼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베풀어 주신 거대한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어요. 할 수도 없어요. 
무엇을 해도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는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아요. 
아니 우리는 이기적이어야 돼요. 

'난 하나님의 사랑을 원해!' 그 사랑에 내 목을 매는 거예요. 
그 사랑을 독점적으로 받고 싶어요. 
'나는 그 사랑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 누구에게도지고 싶지 않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갈망해도 부족하다는 거죠. 
아무리 원해도 부족하다는 거죠. 

사랑 받기에 적극적이어야 됩니다. '난 당신의 사랑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가 돼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당신의 사랑을 원하는 자들을 좋아하세요. 아가서를 보세요. 
하나님은 맹렬하게 우리를 사랑하세요.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세요. 
소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맹렬하게 불같이 우리에게 달려오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청하세요. 
즉 구애하세요. '난 이렇게 너를 사랑해! (너도 반응해 줘)' 

▲아가서를 보면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아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겨 놓으라는 거죠. 

요즘은 젊은이들이 몸에 타투를 하잖아요. 
'영자야 사랑해' 뭐 이런 글귀를 팔뚝에 새겨 넣습니다.
그러다가 또 헤어져가지고 그 타투를 다시 지운다고 애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우리의 마음 안에 타투를 그려 놓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은, 타투처럼 몸에 새기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돼요. 
우리의 마음에 새겨 놓는 거예요. 도장을 찍는 거예요. 인을 치는 거예요. 

'그 사랑이 죽음 같이 강한 거예요.' 

죽음이 얼마나 강해요? 그런데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거죠. 죽음보다. 강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뜨거워서, 물로 그 불을 끌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많은 물이나 홍수로도 끌 수 없다' 그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너무너무 강렬해서 그런 거죠. 

롬8장을 보세요.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 사랑을 끄트릴 수 있는 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홍수로도 끌 수 없다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 사랑을 정말 더욱 깊이 경험하는 거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 거죠.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고, 그 사랑을 갈망하지 않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 수 있죠? 
그 사랑에 이끌려야, 그 사랑의 힘이 나를 끌고 가는 거잖아요. 

신앙은 전부 다 그거예요. 신앙의 출발은 그거예요.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에요. 받은만큼 반응하는 거예요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은만큼만 표현하는 거예요. 
예배가 뭐예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만큼만, 하나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내가 사랑을 고백할 수 없어요. 
받아야 고백을 하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사랑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는 
눈치 볼 것도 없고, 남에게 뒤져서도 안 되고,
이 사랑을 독점하듯이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나아가서, 그 사랑을 요구하세요. 

아니,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부어주셨어요.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어요. 이너프, 충분하게! 

여러분 사랑에서 중요한게 뭔지 아세요? 충분한 사랑을 받는 거예요. 
충분히 받아야 돼요. 충분히! 근데 세상에서는 이 '충분히'가 안 돼요. 

항상 세상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뭐죠? 사랑 결핍증세 잖아요. 
가장 핵심적인게, 사랑이 안 채워지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이 크지만 채워지지 않잖아요. 함량 부족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뭐죠? 
온전한 사랑 충분한 사랑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렇죠. 

아니, 그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그 사랑에는 첨가물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요. 
MSG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요. 

여러분 음식도 첨가물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맛있긴 한데,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아요. 
몸에 이익이 안 되는 가죠.

그러니까 우리가 결핍된 사랑을 받으니까, 우리 안에 갈증이 계속 있는 거죠. 
그 채워지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내가 늘 괴로운 거죠. 늘 방황하게 되고... 돌아다니고...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 다른 것으로 뭔가 메꾸려고 하는데... 안 채워지잖아요. 

근데 완전한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그 완전한 사랑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수가 있어요. 
이 사랑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는지 아세요? 여러분 바로 십자가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가장 완전한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 앞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그 심장을 우리가 만나는 거에요. 
우리를 향한 뜨거운 심장, 강력한 사랑...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하면, 그 십자가가 굉장히 가벼운... 
그저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는 교리적 이해라든가... 
뭐 그런 수준에서 더 이상 나가지 않는 거죠. 

근데 십자가는 어마어마한 거예요. 
여러분 그 안에는, 우리가 찾고 있는 모든 갈망하는 답을 그 십자가에서 다 해줘요. 
상상할 수 없는 은혜가 그 안에 녹아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의 원액 덩어리에요. 
내 인생이 완전히 그냥 녹아지는... 충분한 답을 십자가가 해 줘요. 

그 사랑 안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의 교리를 이해했다고, 내가 내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건 아니거든요. 

그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심장을 만나게 되니까 
그 세상 안에서 에너지가 나오면서 괴력이 나오는 거예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랑이 나에게 임하니까, 내 생명을 바치는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이 사랑을 받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에너지가 그 안에서 다 나와요. 
우리의 모든 신앙의 활동들은, 그 사랑의 힘에서 나오는 거에요. 

여러분,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경험이 참 중요해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는 것, 이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있어도, 그 부모의 사랑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아요. 다시 일어나요. 
그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은 비교가 안 되죠.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더라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 돼요. 

세상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게 치유가 돼요. 
다른 사랑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내면의 상처가 많을 가능성이 많죠. 
근데 이 십자가는, 놀라운 치유의 묘약이 되는 것이죠. 

십자가는 아무리 묵상해도 부족해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니까! 
바울은 엡3:18~19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그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너무 크다고, 측량할 수 없다고 말씀했죠.
그래서 찬송가 가사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도다.'

이 사랑을 받을 때, 그 사랑의 파도가 내 심령에 밀려올 때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가장 놀라운 경험이 뭔가 하면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죠.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라는 자존감이 생기는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감정이 뭐냐면 
'내가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실만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예요?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게 어디 있어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그래서 십자가를 통하여 받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뭐냐면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건강한 자기애 self-esteem 가 생기는 거예요.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거죠.

여러분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여기서부터 모든게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면, 이게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거예요.
인간관계가 건강하게 펼쳐질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관계에 깨어짐이 어디로부터 출발되는가 하면,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가 없어요. 
그 사랑을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과 관계가 깨어지고 싶어서 깨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을 다룰 수가 없어요. 관계를 맺어 갈 수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가장 불행한 것 중에 하나가, 자기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자기를 멸시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열등감이에요. 

여러분 내가 나를 무시하는데, 누가 나를 인정해 줘요?   
내가 나를 받아 주지 않아요. 근데 어디를 가요. 갈 곳이 없어요. 그것으로 끝이에요. 
열등감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에요. 최악이에요. 무서운 병입니다. 열등감! 

여러분 오늘날 자기를 존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존중이 여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자기를 멸시하고, 자기를 경멸하고, 자기를 학대해요. 

내가 나를 존중해 여길 수 있어야 되는데, 그게 그냥은 안 된단 말이죠. 
이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 되는 거예요. 

건강한 자기애가 중요한데, 이게 우리의 삶의 기초입니다. 파운데이션입니다. 
건강한 자기애예요. 

건강한 자기애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디스 disrespect 를 하고 상처를 안 받아요. 
거기에 휘둘리지 않아요. 자아상이 건강하니까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너무 예쁘고 사랑받고 자라면요. 
옆에서 누가 '에이 못난 것' 이라고 해도, 그 말을 안 믿어요.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거잖아요. 안정감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셨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귀하게 여긴다'는 거예요. '난 널 너무 소중하게 여긴다'는 거죠. 

어느 정도로? 내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할만큼. 
'내가 나의 아들을 내어줄만큼 너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이 십자가가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의 존재감은 엄청나게 커 지죠. 
그기에 어디 열등감이 깃들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요즘은 부모가 재산을 나누어 주는 과정에서도, 자녀들이 상처를 받더라고요. 
그 재산을 나누는 것도 참 어렵더라고요. 그 유사한 문제가 요즘 많이 발생돼요. 
부모는 공정하게 나눠준다고 생각하는데, 막 형제간에 비교가 되고, 
막 이러면서 상처를 받는 거죠. 

그래서 부모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생기죠. 
이런 것들이 다 상처로 남아 있으면서, 결국은 자기 존재에 대한 평가를 
그런 재산의 유무로 평가를 해버리는 거예요. 

너무도 자기의 존재가 재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인데 
내가 스스로 평가절하 해버리고 마는 거죠.

우리는 재산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바 된 
우리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어떤 말과 평가에 의해서, 내 존재가 평가절하되고 휘둘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복음이 우리의 삶의 중심의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엄청난 거예요. 그 사랑과 마주치면 숨이 멎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황홀 그 이상입니다. 환희, 경이로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완전한 사랑, 순수한 사랑, 거짓이 없는 사랑, 변덕스럽지 않은 사랑, 
지속적인 사랑, 끝이 없는 사랑... 
세상에 어디에서든 이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면서 들려주신 음성 
그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넌 나에게 너무도 소중해!'
이 음성을 들어야 되는 거예요. 

오늘 밤에 그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자기 아들을 메다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 
'넌 나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야!'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서 우리를 사랑하시죠.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도 아니에요.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Unconditional love,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열리기 시작해요.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내가 나를 진정으로 복음 안에서, 내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깨닫고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이제 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아니면 사랑을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먼저는 뭐예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에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셨듯이,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거예요.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를 소중히 여기셨던... 
그 소중히 여기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바치시기까지 대가를 지불하신 
그 복음을 거부하는 거예요. 그럼 매우 위험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인생 레슨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내가 자기를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큰 레슨이 없어요. 

근데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배워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우리의 불행이에요. 
결혼식을 할 때도, 결혼식을 하고 같이 살아가는 삶의 여러 가지 방식들은 배울지 모르지만, 
사랑의 기술을 배운 적이 없는 거예요. 누구도 가르쳐 주지도 않아요. 

여러분, 세상에 사랑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는데, 사랑을 가르쳐 주는 학교는 없어요. 
세상에 온갖 학원들이 다 있고, 별별 학교가 다 있어서 배울 것도 많지만.. 
그래서 어떤 자격증을 터득했다 할지라도 
사랑을 배우지 못한다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을 가르쳐 줄 교사가 없어요. 
부모도 미숙한 사랑을 베푸는 거죠. 왜요? 
부모도 자기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불행이 되물림 되는 거잖아요. 
왜 사랑을 가르쳐 줄 교사가 없어요?
그 역시도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다운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이 이토록 삭막하고 공허하고 절망스러운 이유는 
돈이 부족하기 때문, 경제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사랑 때문이에요. 

오염된 사랑, 거짓된 사랑,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이용하는 사랑, 
사랑으로 시작하다가 배신으로 끝나버리는 사랑... 
우리는 사랑다운 사랑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죠. 그것처럼 불행한게 어디 있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셨어요.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도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하고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썼어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근거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여러분 공식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해요. 한번 따라합시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한다!' 

여러분, 사랑을 안 받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해요? 
여러분 사랑은 애를 쓴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사랑하려고 애를 쓴다고 사랑이 안 나와요. 

사랑을 하려면, 먼저 사랑을 받으면 돼요. 그래서 사랑을 받는데 이기적이 되라는 거예요. 
사랑을 받으시라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삶의 에너지는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죠. 
우리 안에는 사랑의 에너지가 있어야 되는데, 
사랑이 없으니까 에너지도 안 나오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만큼, 사랑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받은 내가 나를 소중히 이기고, 
이제 비로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11
이제 서로 사랑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참된 사랑이 위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그 받은 사랑이 이제 옆으로 흘러가게 되는 거죠. 
내 안에서 넘쳐 흐르는 것이죠.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이 채워지고, 그 사랑이 흘러 넘쳐서 
옆으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로도 향해요. 
그렇죠. 받은 사랑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거죠. 그게 예배고, 그게 감사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원망이 없어요. 
사랑을 받은만큼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죠? 빚진 감정이 있어요. 사랑의 빚! 

너무 큰 사랑의 빚을 진 거죠. 
그래서 남은 평생 '그 사랑에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하는게 우리의 신앙생활 입니다. 

아무리 헌신을 해도, 그 사랑에 보답을 못하는 거예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이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지는 거죠. 
내 삶 전부를 바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사랑에서 나오는 거죠. 사명으로 화답하는 거예요. 

선교지에 가서 일평생 바친 사람이 사명으로 하는게 아니에요. 
사명이 아무리 뜨거워도, 사명만으로는 오래 못 가요. 
사랑이 끝까지 가게 해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끝까지 가는 겁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특별해요. 
신앙생활의 모든 행위가, 그 사랑의 반응이기 때문이에요. 

의무적으로, 율법적으로,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봉사하는 사람과 
차원이 다른 거예요. 

여러분,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보세요. 
그녀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마리아의 그 행동은,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이에요. 
그래서 그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에게 부었잖아요. 

여러분,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특징이 하나 있어요. 
사랑의 대상을 위해 선물을 고를 때, 가격표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얼마짜리지요?' '너무 비싼데?'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에게 액수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상대가 뭘 원하는지에 관심이 있어요. 

가격을 따지면, 사랑을 안 하는 거예요. 
선물 주고 받을 때 돈을 따지는 건, 아직 사랑의 단계가 아니에요. 

마리아는 향유 옥합이 얼마나 비싼지 가격을 잊었어요. 그래서 향유를 깨어서 부었어요. 
근데 가룟유다는 옥합의 감정값이 금방 나왔어요.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가룟유다는 사랑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준비되어 있었어요. 

가룟유다가 끝까지 배반하고 있는 것을, 대제사장들 일행과 만나고 
벌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 다 보고 계세요. 배반하고 있는 걸 알아요. 
그러나 주님은 계속 끝까지 가룟유다를 사랑해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그래요. 그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을 때, 예수님은 아마도 가룟유다의 발을 가장 먼저 씻어 주었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에요. 

근데 그는 주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요. 마음을 굳게 닫았어요.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았어요. 그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는 거죠.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아끼지 아니하시고 매달기까지 하시며 사랑하신 그 사랑을 거절한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완악함이죠.

여러분, 이 사랑이 전혀 다른 행동을 만들어요. 
마리아는 아마 옥합이 몇 개 더 있어도, 그것마저도 깨었을 거예요.
여러분 삶의 질은, 삶의 퀄리티는 사랑에서 나오는 거예요. 

사랑을 아무리 주어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나 진정 사랑을 깨닫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아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요.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다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요. 
그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특성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받았다'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게 된다는 거예요. 내 안에서 이웃에게로! 

사랑하는 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하나님에게서 배운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소중히 다루시는가를 배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인권, 그런 것과 차원이 다른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이타적 삶을 살게 돼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심을, 이제 어느 순간 나도 다른 사람에게로 관심을 옮기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 병적 자기애에서 해방이 돼요. 
나만 바라보던 병적 자기애!

사랑을 받은 사람은 마음이 열리는 거죠. 넉넉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건강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 병적 자기애 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이타적 사랑을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거죠. 
그때 그 인간관계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거죠.

상대를 독점하려고 하고,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 사람들을 파괴시키는 삶을 살지 않아요.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나 중심적으로 병적 자기애에 도구화시키지 않고 
그를 온전하게 세워주고 살려주는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가 병들어 있으면요.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 상대를 파괴시켜요.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 이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 내 삶이 풍성해지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처럼 놀라운 기술이 없어요. 
그것처럼 놀라운 축복을 만들어내는 건 없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이것을 놓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사랑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왜? 사랑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전한 사랑을 우리가 배우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종교 생활이에요. 

종교 생활을 하면요, 마음이 더 좁아져요. 독선적이게 돼요. 
편협되고, 굉장히 자기중심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돼죠. 

그래서 '종교'라는 미명으로, 그 종교를 도구화시켜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거죠.
즉 고집 센 종교인이 되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는 종교인, 
그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점점 편협해지면서, 냉혹한 인간이 되고, 갈수록 나빠져요

교회를 다녀도 자칫하면, 종교 생활이 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어져요. 

종교가 나를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까지 망가뜨리며 
결국은 자기 우상화에 빠지고, 자기밖에 몰라요. 심각한 자기 왜곡 현상이 일어나요. 

여러분 죄성을 가진 우리는, 무엇을 해도 자기에게로 심하게 휘어지는 거예요. 
죄가 뭔가 하면요, 자기중심적으로 휘어지는 거예요. 모든게 자기 중심적이라는 거죠.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데 익숙하죠.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그러는데, 안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아닌 거예요. 
자기 중심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구화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고, 폭력적이게 되죠.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고 하고, 억압하려고 하고... 

부부관계에서도 서로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하잖아요. 
상대의 희생을 더 요구하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를 도구화 시키는 거죠. 

결혼을 해도 불행해지는 이유가 뭐예요? 
겉으로는 그렇게 사랑한다고 오랫동안 사귀고 데이트를 했는데 
딱 결혼하고 맞붙어 살다 보면, 이런 왜곡된 사랑이 각자에게서 나오는 거죠. 
이미 그게 내면에 설계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불행이 이미 예견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배운 사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에게 다른 욕구가 생겨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욕구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이타적 욕망'이라는 단어를 써요. 
욕망은 대개 자기중심적인 욕망이에요. 
근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이타적 욕망'이 돼요. 
그 욕망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려고 하는 멋진 삶을 살게 하죠.

끊임없이 그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은 그런 욕망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아가페예요.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되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니까,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니까,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니까,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의 승화를 본 거죠. 
다른 차원의 사랑을 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랑을 경험하면 할수록, 그 사랑에 빠질수록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점점 자라가는 거죠. 
여러분 그 사랑을 우리가 받지 않으면, 우리가 자라가지 않아요. 

여러분 왜 사람이 그렇게 옹졸한 삶을 살아요? 사랑을 받지 않으니까. 
여러분 사랑을 받으면 사람이 관대해져요.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날카롭지 않아요. 
부드러워요. 앙칼지지 않아요.

우리가 이 사랑을 받을 때, 흘러나오는게 있잖아요.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니까... 내가 경험한 것을 내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활력이 넘쳐요. 여러분,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달라요. 
온몸에서 에너지가 나와요.

그러니까 벌써 이렇게 힘이 없고, 무기력하고, 눈동자가 흐릿하면 
벌써 사랑을 안 하고 있는 거죠. 사랑을 못 받고 있는 거죠.

요즘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이 '자기는 모태 솔로'래요. 

여러분 사랑을 받으면, 온몸에서 막 에너지가 나와요. 
충분히 그 사랑을 받으면, 상처가 사라져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디스 disrespect 를 해도, 그게 오래 안 가요. 툭툭 털어버립니다.

잠시는, 사람이 감정이 있으니까 기분 나쁘겠죠. 
근데 오래 안 가요. 왜요? 사랑의 힘이 나를 더 강력하게 사로잡으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이 말씀을 
공생애 직전에 하나님이 직접 음성을 들려주셨어요.

여러분 예수님이지만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 
그 거친 유대 사이의 배척과 학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의 길까지 가는 그 과정이 너무 어려우시니까... 미리 예방주사를 주신 거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계속 그 음성을 기억하셨을 거예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기뻐하는 자다'

여러분 사랑을 받으면, 독소가 빠져요. 
사랑을 받은지 오래된 사람, 사랑의 경험을 오래 안 한 분은 독기가 있어요. 
인성이 날카롭다니까요. 

여러분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엉뚱한 것에 막 에너지와 돈과 정력을 다 쏟아버리는 것은
뭐냐면 결핍증세예요. 사랑을 못 받아서 그래요. 
그래서 다른 일에 매달려 몰입하는 거예요. 신경을 다른 데 쏟는 거죠. 잊어버리려고요.

▲여러분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어요. 
그게 십자가로 완성됐어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세요. 

성경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난 널 사랑해!'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연서(연애편지)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도 여러분을 사랑하세요. 
하나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분은 존재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 사랑은 완전해요. 충분해요. 
그 사랑에 깊이 빠져드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전부예요. 

그 사랑을 갈망하십시오. Desire 하십니다.
다른 거 갈망하지 마시고,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십시오.

그 사랑은 지금 마치 댐에 물이 가득 고여 있어서 
댐에 수문만 열면 막 쏟아질 것처럼 준비되어 있어요. 

갈보리 언덕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봇물처럼 
우리에게 범람할 정도로 
내 영혼을 완전히 압도하고 서로 잡을만큼 강력한 사랑이 준비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의 그 역사 안에 들어가면 
어느 한순간에 그 원색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을 지배할 때, 
내 안에 모든 원망 불평 불안 두려움 절망.. 
그 모든 상처, 아픔들이 한순간에 해결되고 

내 갈증이 사라지고, 사람들을 통해서 뭔가를 갈망했던 그 어떤 게 사라지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세상을 이기게 하실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능력으로 주님을 위해서 한 평생 내 삶을 드리고도 모자라는 
그런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와 찬양이 뭔지 아세요. 
사랑의 표현이에요.
기도를 통해,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거예요. 

기도는 딴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교감하는 시간이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무슨 음성?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가 뭐예요. 찬양이 뭐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에요. 
받은만큼 반응하는 거예요. 

그분의 그 사랑 안에 깊이 잠겨 들면, 그 사랑의 힘이 나를 회복시키고 
내 이웃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름답게 사랑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완성된 삶을 통하여 갈수록, 더 부요케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랑을 받는 일에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이 되시고
이 사랑을 받는 일에는 '이기적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좋을만큼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독점하듯이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