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2 사도행전 강해 (85) / 벨릭스와 드루실라 - YouTube
◈벨릭스와 드루실라 행24:24~27
지난 시간 사도행전 84강에서, 우리는 바울의 3차 변호를 살펴봤습니다.
이 3차 변호는 로마총독 벨릭스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의 결과, 바울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풀려나는 대신에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재판을 맡은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풀어주면, 유대인들의 소요가 일어날 것을, 그는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풀어주는 대신에, 헤롯궁 안에 있는 감옥에 가두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수일 후'로 시작됩니다. :24
◑24:24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감옥에 갇힌 수일 후에 바울을 찾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죠?
벨릭스 총독 과 그의 아내 드루실라 입니다.
먼저 이 부부에 대해 우리가 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노예 신분에서 로마 총독까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그 과정에서 못된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악했냐면 청부살인까지 계획을 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벨릭스는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잔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돈을 굉장히 밝혔던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뇌물을 받기를 바래서, 그를 종종 불러서 면담했습니다. :26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뇌물을 취한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성적으로 굉장히 방탕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나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아내가 아닙니다. 세 번째 아내 입니다.
그만큼 벨릭스는 탐욕과 방탕과 불의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창부수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벨릭스의 아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1세의 딸입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는 야고보 사도를 죽였던 사람이었죠. *행12장
그 야고보 사도를 죽였던 사람인 헤롯 아그립바1세의 막내 딸이 드루실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드루실라도 세 번째 결혼입니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정식 결혼은 아니었습니다.
약혼까지 했는데 파혼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시 약혼은 결혼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녀의 두 번째의 결혼은 수리아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과 결혼했습니다.
세 번째 결혼이 이 벨릭스 총독과의 결혼입니다.
그런데 벨릭스와 결혼하는 과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별하고 만난 게 아니었습니다.
둘 다 가정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유부남 유부녀로 만난 거죠. 그러면 불륜이죠.
그런데 드루실라가 굉장한 미모를 가졌다고 합니다.
(드루실라의 언니가 25장에 나오는 버니게 라는 여인인데요.
이 언니 버니게도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어쨌든 드루실라의 빼어난 미모에, 벨릭스가 넋이 나간 거죠.
그러니까 자기도 엄연히 아내가 있고, 드루실라도 엄연히 남편이 있는데
벨릭스가 드루실라를 꼬드겼습니다.
'만일 나와 결혼하게 되면 모든 세상의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이거 허풍은 아니죠. 그럴 만한 위치가 되잖아요.
총독이니까 권력도 있고 돈도 있었고요.
이 말에 드루실라가 넘어갑니다. 역사가들이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벨릭스는 돈으로 드루실라의 미모를 구입했고,
드루실라는 자신의 미모로 벨릭스의 권력을 구입했다.'
그렇게 드루실라도, 멀쩡한 남편을 버리고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드루실라의 나이가 스무 살도 채 안 되었습니다.
'스무 살도 안 된 여자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말을 안 해도 그녀의 삶이 짐작이 가죠.
그만큼 드루실라도 방탕하고 문란한 여자였습니다. 권력을 좋아했고요.
그러니까 이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환장한 커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장한 커플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에 대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듣습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바울에게 들은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24:25절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5절에 보면, 바울이 전한 세 가지 핵심 주제가 나옵니다.
의, 절제, 장차 오는 심판이었습니다.
의, 절제, 심판... 이 세 가지가 바울이 전한 메시지입니다. ☞ <절제>
1) 여기서 의는 뭘까요?
여기서 '의'는 예수를 믿을 때 주시는 의가 아닙니다.
즉 칭의, 신분적 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의는, 도덕적으로 의로운 행실을 말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에 포함된 그러한 의가 되겠죠. *믿음의 삶의 열매로서의 의
그러나 벨릭스는 이러한 의로운 행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앞서 살펴 봤듯이 그는 부도덕하고 불의한 자였습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은 절제를 설교했습니다.
절제는 각종 욕망의 통제와 억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이 절제 와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탐욕을 절제 하지 못했습니다.
돈 욕심에 눈이 멀어서 뇌물을 밝히며 살았습니다.
성적인 욕망 또한 절제 하지 못했습니다. 눈만 맞으면, 그냥 유부남, 유부녀 상관없이
가리지 않고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욕정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장차 오는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심판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심판은, 벨릭스 와 드루실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바울은, 그들을 알고, 그들을 위해 (고의적으로) 심판을 설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의로운 삶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절제와도 반대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 주제는, 지금 벨릭스와 드루실라 입장에서는
굉장히 듣기 불편한 말씀이었을 겁니다. 듣기에 굉장히 거북한 주제입니다.
자기에게 걸리는 메시지 이잖아요.
의, 절제, 심판.. 이 3가지 주제 중에 어느 하나라도
거리낌 없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은 벨릭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두려워 했다고 말합니다. :25
이 말은 깜짝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그 두려움은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다 정말 최후 심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앞에 서는 날 내가 영원한 벌을 받을 수 있겠구나'
그러니까 실질적인 두려움을 느낀 겁니다.
자 여기까진 은혜죠. 그들은 최후 심판의 때,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들이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행2장에 보면,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죠?
'그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여' 2:37
그래서 회개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벨릭스와 드루실라도 회개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벨릭스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설교를 그런 설교를 들었으니까요.
죄로부터 돌이켜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25b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우리가 이제 어찌 할꼬?'가 아니라 뭐예요?
오히려 바울에게 '그만 말하라'고 했습니다.
회개 대신에 바울의 말을 끊습니다.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거죠.
그러면서 흘리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틈이 있으며 너를 부르리라 하고' :25
그러니까 죄로부터 돌이키는 대신에 바울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자 그리고 그들의 두려움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곧바로 그들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6절에 보면, 그들을 다시 사로 잡은 건,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이 늘 사랑했던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다시 부릅니다. 한 번만 아니라 몇 차례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26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그러니까 바울에게 일종의 뇌물을 바란 겁니다.
'혹여나 바울이 풀려나기 위해서 뇌물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 거죠.
물론 그 당시에도, 뇌물수수는, 로마 법에 따르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도 뇌물을 바라는 마음으로, 바울을 자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부부가 돈에는 지금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굉장히 게으릅니다.
회개는 끝까지 미룹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에 대해서는 애써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탐욕을 얻는 데는, 지치지 않을 만큼 굉장히 집요합니다.
끝까지 뇌물을 바라는 마음으로 바울을 계속 불러서 만납니다.
아마 바울을 상당한 부자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앞에서 바울이 자기를 변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간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24:17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바울은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 중에 하나가
큰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구제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벨릭스로 하여금 '바울이 돈이 많을 것이라'는 확신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자주 불러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울을 호출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바울이 뇌물을 주지 않는 겁니다.
뇌물을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때 이 부부가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뇌물을 너무 받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자기들도 지독하지만 '참 바울도 지독하다'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2년 동안 헤롯 궁 안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새로 부임 합니다. :27
이게 벨릭스의 임기가 끝나서, 자연스레 교체된 게 아닙니다.
중간에 벨릭스가 총독 자리에서 파면된 겁니다.
그러면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문헌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가이사랴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서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총독 벨릭스가 로마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헬라인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유대인들을 제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당시 로마 황제가 네로 였거든요.
네로에게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결국 벨릭스 총독은 로마로 소환을 당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로마 황제가 대노했다고 합니다.
벨릭스가 죽을 뻔 했다는 그런 기록도 있는데요.
이때 총독 벨릭스는 불명예 퇴진을 당했습니다.
◑24:27절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그런데 떠날 때도 벨릭스는 참 무책임하게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후임으로 온 베스도에게 인수인계를 해줬을 겁니다.
그때 바울의 판결도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그 판결의 책임을 후임 베스도에게 떠 넘겨 버렸습니다.
왜냐면 이때도 벨릭스는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에 대한 탄원서를, 로마 황제 네로에게 보내지 않았습니까?
만일 바울을 풀어주면, 유대인들의 민심이 더 사나워 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걸 의식해서, 바울을 그냥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을 감옥에 남겨둔 채,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벨릭스와 드루실라 부부와, 바울의 만남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적용
▲1. 여러분 오늘 부문의 이야기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벨릭스와 드루실라 부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한심한 인간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과외를 받은 것처럼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여러 차례 개인적인 만남을 자주 가졌습니다.
여러분, 누가 바울과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의와 절제와 심판을 듣고, 잠시 두려움에 사로 잡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가지자 마자, 그들은 다시 돈에 사로 잡혔습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그들은 2천 년 전에 로마제국의 한 부분을 새롭게 하는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잘 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 신실한 믿음의 부부가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상급을 누리며 살았겠죠.
그러나 그들은, 의와 절제와 심판이라는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잠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그 두려움의 순간이 가시자마자
평소처럼 그들의 관심은 돈으로 회귀해 버렸습니다.
자 그렇게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후에 벨릭스 부부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수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오늘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 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같은 동일한 설교를 듣습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세 가지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의 영이시죠.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서 '그'는 성령님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 convict 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메세지와 같습니다.
요16:8절은 죄, 의, 심판에 대하여
본문 행24:25절은 의, 절제, 심판
꼭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위 두 구절을 비교하면,
요16:8절의 '죄'는, 행24:25절의 '절제'와 매치 되죠.
그렇게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하여 죄를 지으니까요.
이 세 가지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 바울이 강론한 의, 절제, 심판 rfcdrfcd.tistory.com/15978328
마치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죄를 드러낸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래야 회개를 통한 치유가 되니까요.
그래야 회복이 되니까요.
그리고 우리를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의 자리, 생명의 자리로 불러내고 계십니다.
이게 진짜 평안이고, 이게 진짜 성령의 위로인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듣게 되는 죄, 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오늘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반응이, 우리의 반응은 아닙니까?
우리도 말씀을 듣고 잠시나마 두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양심을 찌르는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순간이 지나가면,
언제나 벨릭스처럼, 나의 관심 또한 돈으로 회귀하지 않습니까?
돈이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그것들로, 다시 회귀하지는 않습니까?
돌이키고 회개하는 대신에, 애써 외면한 채 그대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 역시도 탐욕에는 부지런하고, 진리를 아는 데는 게으르지 않습니까?
그 결과 오늘 벨릭스의 결말이, 우리의 결말이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삶 말입니다.
△마이클 리브스가 쓴 <죄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번 달 추천 도서인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도전 받은 메시지였습니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거룩함은 일종의 위선이다."
여러분 이게 위선이라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벨릭스처럼 말씀을 듣습니다. 교회를 나옵니다. 기도도 합니다.
외적으로는 거룩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여러분은 내적인 변화가 동반되고 있습니까?
거룩하게 보이는 여러분의 신앙의 행위들이, 여러분에게 내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건 위선일 뿐이라는 겁니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우리의 외적인 거룩함,
즉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그저 위선일 뿐이라는 지적입니다.
여러분이 읽고 듣는 말씀이, 여러분의 내면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가,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을 회개의 자리로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여러분을 이끌고 있습니까?
어쩌면 벨릭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말씀을 들어도, 결국에는 교만하여 변화 되지 않는 삶 말입니다.
내적인 변화 없는 위선적인 거룩한 말입니다.
▲2. 또 하나 여러분,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 벨릭스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서 두려워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설교를 견디지 못한 거죠. 그래서 바울을 돌려 보냈습니다.
말씀을 회피했습니다.
이 모습도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벨릭스처럼 듣기 불편한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피하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말씀에는 귀를 닫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부터 도망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골라서, 취사선택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당장 여러분은 그 말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하죠.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들을 피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면 되고요. 심지어는 뭐 교회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국에 마지막에는, 그 말씀 앞에 우리 모두가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최후 심판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심판 날 우리는, 우리가 피하여 살았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우리는 꼼짝 없이, 너나 없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낱낱이 고발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에는, 더 이상 돌이킬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으십시오.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기쁘게 받으십시오.
그 말씀을 거부하지 말고, 여러분을 건지시는 사랑의 음성으로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오늘 지금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오늘 벨릭스처럼, 말씀을 듣고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붙들고, 죄로부터 그 자리에서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이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게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궁극적인 위로요, 평안의 사역입니다.
△참고로, 벨릭스의 최후
본문에 보면, 벨릭스의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문헌들에 보면, 벨릭스의 최후가 나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로 소환된 벨릭스는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폼페이로 가서 살았습니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최고의 휴양지였죠.
그가 권력이 있었을 때, 그들은 많은 뇌물로 돈을 많이 모아 놓지 않았습니까.
그 돈으로 폼페이에 별장을 짓고, 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AD 79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합니다. *지금 가이사랴는 AD 60년 경
그때 그들은 화산재에 묻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주석에 보니까, 화산재에 그냥 그대로 박재되었다는 기록도 있더라고요.
▲3. 본문에 벨릭스는 바울을 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25
그러나 '지금'을 놓친 그는, 영원히 놓치게 되었습니다.
찰스 스윈돌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장 사탄이 부하 귀신들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모든 민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을 등지에 만들 헛소문을 만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마치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와 같은 그런 이야기죠.
그 명령을 들은 첫째 귀신이 이렇게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천국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두목 사탄은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고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독교인들이 보는 성경에 이미 천국이 나와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둘째 귀신이 '그럼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그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양심 이라는 게 있어서
그 죄에 상응하는 심판이 있다는 걸 안다'고 말했습니다. ☞ <심판>
그러자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때 셋째 귀신이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냥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두목 사탄이 아주 마음에 흡족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거다!'
그래서 사탄은, 그 셋째 귀신을 세상에 보내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이 사탄의 피해자 입니다.
'서두를 것 없다'는 마귀의 꾀임에 넘어갔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의 핑계도 같지 않습니까?
'지금은 바빠서요.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한창 공부해야 할 때 이니까요...'
'지금은 돈을 좀 더 열심히 벌야 될 때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영혼에 대고 속이는 말입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착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결정적으로 이들의 착각이 무엇이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자기한테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듣고 싶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내가 너를 불러 다시 복음을 듣겠다'고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는 때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는 때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소관이 절대 아닙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의 영역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죽는 시간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언제 죽어야지..' 하고 죽는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죽기 전에 내가 믿겠다고요?'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열심히 믿겠다고요? 그게 마귀의 속임 입니다.
그 날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은 '지금, 여기'입니다.
자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냐면요.
6:1절에서 이런 말을 먼저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왜냐하면 지금이 은혜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고, 지금이 은혜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구원을 받는 가장 좋은 기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바울아) 지금은 돌아가라'가 아니라 '지금은 돌이켜야' 할 시간입니다.
그렇게 돌이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 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복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즉시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고, 가장 은혜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사람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면,
그때가 바로 여러분의 타락의 시작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지금'을 놓치게 되면, 여러분은 '내일' 더 강퍅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모레는 '더 강퍅하고 완악'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미루다보면, 저와 여러분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 마비될 것입니다.
아예 두려운 마음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냐? 바로 오늘 본문의 벨릭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신앙의 상태가 무뎌졌다면,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다른 무엇보다 여러분들의 회개를 돌아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가장 최근에 언제 회개하셨습니까?
만일 회계가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면 그게 바로 오늘 벨릭스 부부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불편한 말씀일 수 있지만, 우리를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들을 주십니다.
돌이킬 기회인 거죠.
이 기회가 늘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진리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혹 두려운 마음은 가졌지만, 그 두려움이 가시자마자, 다시 내가 사랑했던 그것들로
회귀하는 모습이 있었다면, 그리고 혹시 회개를 잃어버리고 있다면,
오늘 이 시간,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입니다.
말씀을 주시는 바로 그 시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위선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외적인 거룩함이 아니라
그런 신앙의 위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는 거룩한 신앙의 모습으로
날마다 자라가 참된 구원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