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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

LNCK 2024. 5. 3. 10:4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잔치>    ▣사랑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  | 2024-0428 - YouTube  (35:50초~ 녹취)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    눅7:36~50   예수님과 함께하는 식사 1 (레위의 집)  
  예수님과 함께하는 식사 2

 

◑도입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식사하는 중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맛있어 보이고 좋아 보이는데 
사실 먹어보니 별로 맛이 없는 과일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식당 같았는데 
들어가서 음식을 먹어보니, 그렇게 좋지 않은 음식이나 맛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또 그 반대도 아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아닌 것 같았는데, 먹어보니 너무너무 맛있는 음식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외모로 보기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신앙이 좋은 것 같고 경건한 것 같은데,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냉랭하기 짝이 없고, 능력 없는 삶...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눅7:36~50절 사이에 있는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중에 나타나서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이야기가 
성경에 네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요.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그리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다 같은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별개의 다른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예요. 
같은 이야기를, 마태와 마가와 요한이 각각 따로따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이야기(본문)는, 그 세 사건과는 전혀 별개의 사건입니다.
                                                                                        ☞사복음서 대조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실제로 두 번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 두 사건이 별개의 사건인 이유는, 

1) 시간적으로 볼 때, 오늘 이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타난 그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불과 얼마 전이었습니다. 

2) 장소도 그렇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7장의 사건은 갈릴리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요한복음과 마태, 마가복음에 일어난 사건은 예루살렘 동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3) 내용도 그래요. 
본문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7:38
그런데 베다니에서 일어난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말하고 
요한복음은 같은 사건을 쓰면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말합니다. 
(머리에도 붓고, 남은 것은 발에도 부었겠죠)

그런데 이 두 사건을, 같은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집 주인의 이름이 시몬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갈릴리에서의 집주인은 '바리새인 시몬'  눅7:36, 40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은 '나병환자 시몬'   막14:3

집주인 '시몬'의 이름이 우연히 똑같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으로, 
분명히 다른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에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굉장히 많았어요. *구약의 시므온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되었어요. 
시몬 베드로 와 열심당원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구레네 시몬 등 
굉장히 많은 시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같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전혀 다른 시몬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 시몬이 등장하는데요. 바리새인들이 누구였는가요? 
바리새인이라는 뜻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별했어요.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 않다 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경건한 사람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거룩한 사람이야, 
우리는 율법을 잘 지키고, 성경을 잘 지키며, 전통을 너무너무 잘 지키는 사람이야!' 
그래서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스스로 차별화 했습니다. '
이게 좋은 거였지만, 결국 교만에 빠진 거죠.

그들은 외모로 보기에 굉장히 훌륭한 신자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 대해서 평가하실 때, 그렇게 훌륭하게 평가하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평가하시면서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다' 
심지어는 '회칠한 무덤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회칠이란 석회석 가루로 희게 칠하는 것을 뜻합니다.
페인트가 나오기 전에는, 흰색 칠을 할 때는 석회가루를 물에 녹여서 발랐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무서운 것은,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어요. 
오늘 교회 안에는 굉장히 유능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는 크리스찬들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에요. 

직업이 목사인 사람, 직업이 중직자인 사람 
매일매일 설교하고, 말씀을 강론하고,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교회 비전을 세우고,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굉장히 경건해 보이지만 

어쩌면 본문의 바리새인 시몬처럼 
그 마음이 주님과 멀고, 그리고 예수님의 책망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눅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이건 좀 드문 일입니다. 좀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 눅7장을 우리가 읽고 있지만, 
앞서 눅5장과 6장에서 이미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는 충돌이 일어났어요. 

이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이야!' 

그때부터 '신성모독한 저 예수라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그런 상황에서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어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눅11장과 14장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을 합니다.   11:37, 14:1
예수님께서 그 초청에 다 응하셨어요. 

그들이 왜 예수님을 초청했을까요? 좋은 마음으로 초청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분명히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눅5장, 6장에서 그들이 이미 결론을 내린바 
'신성 모독자다'라는 내린 결론에 대해서 

거기에 대한 증거 수집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이나 행동 중에서,
그 내린 결론에 증거가 될 만한 사실들을 모으기 위해서 예수님을 초대했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께 대해서 뭔가 신성모독에 대한 약점과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들의 집으로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르셨을까요?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바리새인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속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도 구원받고 그들도 변화되어야 할 사람이기에, 
바리새인의 집에 그들의 초대에 응하셔서, 거기에 가셔서 또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는데 
오늘 우리 주님께서 메시지를 전하시는 방법은 
그들이 죄인이라고 멸시한 한 여인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 여인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여인의 변화되는 그 삶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들 바리새인들도 변화되도록,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들이 변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변화되는 사람을 보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를 전도하고 싶고, 가까운 사람, 가족들을 전도하고 싶으면요. 
내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바리새인인과 같은 모습이 아니에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열심히 교회 헌금하고... 그런 외형에 열심히 충성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 내면이 변하고, 내 마음이 열리면서, 내가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과 같은 삶, 그 삶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7: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 후에 
예수님께 시몬이, 초청하는 자가 반드시 해야 할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았어요. 

1) 당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집으로 손님을 초대를 하면 
손님이 그 집으로 들어올 때, 주인이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좀 더 귀한 손님이라면, 종을 시켜서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2) 그리고 손님이 들어올 때, 입맞춤으로 환영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성경에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하셨죠.  살전5:26, 고전16:20, 롬16:16

입맞추는 것이 그들의 문화였고, 예의였는데 
시몬은 예수님께 입맞춤도 하지 않았어요. 

3) 그리고 더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감람유 즉 올리브 오일을 부어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께 올리브 오일도 부어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몬은 어쩌면 예수님을 초대한 후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너무너무 잘 아는 이 시몬은 
자기가 예수님과 그렇게 친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동료 바리새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자기가 막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하면 
'시몬이 예수님과 친한 것 같아...'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평판이 굉장히 나쁜데 
그러면 시몬의 평판도 같이 나빠질 가능성이 크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을 의식했을까요? 
당시에 이런 식탁의 자리는, 식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참관하는 그런 풍습이 있었고,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식사하는 그 태도와 자세는,
우리처럼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합니다. 

비스듬히 다리를 뻗고 누워서, 왼손으로 방바닥에 받치고 
오른손으로 마음대로 음식을 가져다 먹는... 그게 문화였어요.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그 식사 자리를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곳에 와서 구경을 할까요? 
뭐 남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모인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당시 문화에, 이런 식사(잔치) 자리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들이 초청이 되고, 
즉 예수님 같은 분이 초청이 되면, 
1부는 식사를 한다면, 2부는 심포지엄, 토론회 같은 것이 열려서 
거기에 초청된 사람이 연설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주위에 있는데, 
그 사람들이 볼 때, 이 시몬이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한다는 것, 
시몬은 그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죠.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몬의 결례에, 이 여인이 열받았던 것일까요? 
한 여인이 집주인 시몬 대신에, 예수님을 환영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여인이 뛰어나온 것입니다.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지금 그들이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있기 때문에,   *식사 자세
그래서 차린 음식에서 발이 제일 멀리 떨어져 있도록 앉아(누워) 있죠.

오늘날 우리들은, 탁자와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기 때문에, 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화에 보면, 아이들이 식탁보 아래로 기어들어가야, 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문화에서, 외부 사람들이

식사하는 사람들과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데가 어디예요? 발이에요.

(사람들이 음식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비스듬히 누워 있고, 발이 음식 반대쪽으로 뻗어져 있음)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상치 않았던 돌발 사태가 벌어졌어요. 
여인이 예수님의 발 곁에 설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그 발 곁에 서서 어떻게 했다고요? 울기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오'라는 헬라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울음이 터져나온 거예요.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그 자기 내면의 감정의 벽들이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그의 수치의 벽도 다 무너졌고, 그리고 마치 댐이 터지듯이
자기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이, 마치 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루터는 이것을 heart water 라고 표현했는데, 자기 마음 속의 모든 것이
마치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그에게 있어 죄와 절망의 모든 담들이 다 
예수님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어요. 

그것들이 다 무너지니까, 그 속에 있던 물이 막 쏟아져 나온 거예요. 
그 눈으로 눈물이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적시고'
헬라어 '브레초'는 '비가 온다. 비가 쏟아진다'할때, 그것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예요. 
그러니 그냥 촉촉이 적신 것이 아니죠.
빗물처럼 그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흥건히 적시기 시작했어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는 그 눈물을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흙이 그대로 묻어있고, 아직도 더러운 것이 그대로 묻어있는 예수님의 발, 
'누구도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지 않았구나' 
그의 눈물이 마치 빗물처럼 예수님의 발로 쏟아지고, 
그리고 루터는 이것을 '마음의 물 heart water'이라고 불렀어요.

▲그러자 여인은 머리털을 풀었어요. 이것은 기가 막힌 사건이었어요. 
당시에 여성이 머리털을 푸는 그 행위는, 남편과 함께 침실에서만 할 수 있는 행동이었어요. 
그 어떤 여자도 밖에서 함부로 머리를 풀어헤치지 않습니다. 

 

실수로라도 머리핀이 고장이 나서 머리가 풀어졌다 그러면, 
그것은 남편이 이혼할 수 있는 사유가 되던 바로 그 시절에, 이 여인은 자기 머리털을 풀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닦아주지 않았던 그 발, 그를 초대했던 시몬도 닦아주지 않았던 그 먼지 묻은 발, 
그 발을 닦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닦아진 후에, 입맞추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입맞추다'는 단어는 '카타필레오' 인데요. 
이 카타필레오가 또 다른 곳에 등장합니다. 
눅15장에 집을 나간 탕자가 다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 탕자를 안고, 그 탕자에게 입맞춤 했죠. *카타필레오
그냥 한 번 쪽하고 입맞춘 것이 아니라, 쪽쪽쪽 여러 번 입맞춤 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 아들을 끌어안고 그에게 입 맞추는 것처럼, 
여인은 그렇게 예수님의 발을 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무한한 존경의 표시죠.
(요즘도 손등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시하는데,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무한한 존경의 표시죠)

▲그리고 여인은 가지고 왔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죄인인 이 여자는 눈치채지 못하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발을 씻어주는 통상적인 예의를 그분께 거절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발을 바라보았습니다. 

긴 사랑의 여정으로 발이 모두 더러워지고, 여행에 지쳐있는 그 발이었습니다. 
여인은 (너무 분하여) 울기 시작했고, 그 눈물은 그의 발까지 씻어줄 정도로 
엄청난 소나기를 쏟아부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종류의 성수 holy water 가 있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이, 마치 수정 같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데, 
그 하나하나는 보석처럼 소중했습니다. 

그 회개하는 눈물, 이보다 더 귀중한 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영혼을 얽어매던 악마의 그물이었던) 자기 호화로운 머리털을 풀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신성한 발을 닦았습니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의 면류관이자 영광인, 최고의 장식인 머리털로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 낮고 더러운 그 부분을 섬기기에는 너무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때 그녀의 허영심이었던 그녀의 흐르는 머리카락은, 이제 겸손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낮은 것(발)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높은 것(머리카락)을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발에 입 맞추기 시작을 했습니다. 
겸손히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 복된 발에 입을 맞춥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런 헌신의 행위는, 시편이나 찬송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향유가 들어있는 옥합병이 생각이 났습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처럼, 그녀도 향기를 즐기고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자기에게 향유를 바르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그것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장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그분의 복된 발에 쏟아부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 여자 정말 잘한다. 나도 본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어요. '이게 웬 시추에이션이야, 이게 웬 상황이야, 도대체 저 여자는 뭐야?' 

너무나 어색해하고, 그리고 너무나 불편하고,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 했습니다. 
이 행동에 대해서 시몬의 반응은 이러 했습니다.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지금 이 시문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어요. 
'자기 마음으로 생각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했는데, 
4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바리새인 시몬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거룩한 모습으로 강대상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막 메시지를 외치고 있는 저 어떤 한 사람(설교자),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어요. 
그 마음이 어떤지를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은, 
우리들의 외모와, 우리들의 경건함과, 우리들의 헌신과, 우리들의 수고의 땀방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눈물,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 식사를 마치고, 예수님께서는 식사 후에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눅7:41~47절까지인데요. 50데나리온, 5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50데나리온은 두 달치 월급에 해당되고, 500데나리온은 2년치 월급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둘 다 못 갚는 거예요. 주인은 둘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셨죠. '둘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했어요.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44~47절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아셨어요. 시몬의 마음도 아시고, 
시몬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시고, 그리고 여인의 마음을 아셨어요.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시고, 그의 마음에 어떤 담이 무너졌는지를 아시고, 
그의 고통 가운데 그 무너진 담 속에서, 그의 마음에서 물처럼 흘러내려온 
그 소리를 우리 주님께서 들으셨어요. 

그리고 그 마음의 괴로움의 소리를 들으셨어요. 
주님 앞에 나와서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는 그 갈급한 그 소리를, 우리 주님께서 들으셨어요. 

 

그리고 그 마음 속에서 울리는 그 갈급한 용서의 그 갈망이 
이 여인을 움직여서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예배하고, 예수님 발 앞에 경배하도록 했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용서함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요3:16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요.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me!
이것은 우리의 입을 떠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감격을 주고 감동을 우리에게 힘을 주는데,
그러나 이렇게 사랑받은 자가, 예수님을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가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은 나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소리치고 노래하고 그리고 감격 감사하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를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신.. 내가 완전히 죽은 나는 이런 죄인인데 
나를 구원하신 주님, 주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이렇게 얼마나 많이 주님 앞에 고백을 했는가요? 

오늘 이 여인이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이 식사시간에 디저트를 주셨어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식사예요. 그 디저트는 48절부터 50절 사이에 나타납니다. 

7:48~50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디저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사함이에요.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은 이것을 디저트로 먹어야 해요. 
예수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네 죄가 사함받았느니라' 
죄의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아직도 내 죄가 용서되지 않았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이 자리가 예수를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죄가 다 용서받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디저트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의 역사입니다. 

세 번째 디저트는 예수님께서 '평안히 가라' 
오늘 이것을 가지고, 오늘 예배 자리를 떠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죄사함과, 구원과, 평안! 
이것을 얻는 자는, 주님 앞에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봉사를 많이 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는 자도 귀하지만,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자, 우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교육청에서 한 번은 연구를 했었는데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시키는 제도에 대한 연구>를 한 거죠.

 

보충수업은 학업이 떨어지는 애들을 모아서, 보충수업을 하는데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왜냐면 보충수업 대상자로 분류되는 순간,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나는 실패자다. 나는 탈락자다'

그런 자의식 속에서 학생들에게 학습 효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근데 예외가 한 명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은 보충수업의 효과로 성적이 향상되었는데,

그래서 그 학생에게 연구의 초점이 맞춰진 거죠.

 

'도대체 모든 학생들에게는 보충수업에 전혀 효과가 없는데

왜 이 학생에게만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그 여학생은 육상선수 였다는 거예요.

그 여학생의 보충수업을 지도한 교사는, 이렇게 증언했죠.

 

'제가 여학생에게 말한 것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 학생이 운동할 때, 육상경기 할 때, 힘껏 열심히 응원해 주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찾았다는 거죠.

그 운동 잘 하는 학생의 운동을 격려해주고, 응원해주고, 지지해 주니까

 

그를 응원해 준 그 힘이

그 여학생에게 변화를 일으켜

열심히 공부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부어질 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그 교사와 여학생처럼)

 

하나님을, 자기가 잘못하면 책망하고 진노만 하는 그런 분으로만 알면

우리는 점점 자기를 보호하게 되고, 겉으로만 율법을 행하는 척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지, 격려, 응원을 경험한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성도'

 

자기 내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