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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두 측면 출17:8~16
출17장은, 르비딤 광야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고,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으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했고,
그리하여 승리를 얻은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진리의 두 측면”이란 관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도입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방패를 보고 이 방패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쪽 편 사람이 “그 방패는 금으로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편 사람은 “아닙니다. 그 방패는 은으로 되었습니다.”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 방패는 앞면은 금이고 뒷면은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생각할 때 한쪽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진리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양면을 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것이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이고 다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신득의(以信得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보면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말씀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바른 행위를 (믿음의 열매로, 믿음의 반응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 다 불변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게 되면 신학적으로 가장 많은 충돌을 보인 문제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책임에 의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오랜 시간 동안 충돌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도 말씀하고 있고,
인간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할 책임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이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한 면만 보고
그것을 과도히 강조하는 오류에는 빠지지 말아야 됩니다.
양면을 가진 진리들은 때로는 난해한 면도 있습니다만
그것을 묵상하면 진리를 알아가는 묵상의 재미도 꽤 큽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받다
마라를 거쳐 엘림을 거쳐 신 광야에서 만나를 얻어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 도착을 했습니다.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에 또 목이 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르비딤에서 또 모세를 대하여 원망을 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인도하여 내기는요?
그들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하도 살려달라고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인도해 낸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인도하여 내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을 합니다.
“모세야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 반석을 향하여 서라.
그리고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반석을 쳐라. 그러면 생수가 나올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반석을 쳤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실컷 물을 마시고 해갈을 했습니다. 그곳은 르비딤이었는데
그곳을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해서 ‘맛사’라고도 하고
‘하나님과 말다툼을 했다’는 의미에서 ‘므리바’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마시며 기뻐할 때 아말렉이 쳐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인 위기를 극복하자마자 생존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는 올라가서 기도하고
여호수아에게 백성을 붙여 나가서 전쟁을 하게 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백성은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스토리에는 진리의 양면성에 대한 몇 가지 포인트가 나오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이 공격은 아말렉의 사악함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까?
지금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고 있는 생존적인 위기가 아말렉의 사악함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입니까?
대답은 둘 다 입니다. 아말렉의 사악함 때문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에도 이런 어려움이 초래된 것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의 특징은 분노입니다.
“야곱을 만나기만 하면 죽이리라, 나의 장자권을 빼앗은 자라.”
자기가 팔아먹고서도 뺏었다고 하면서
야곱을 죽이려고 분노를 20년 동안이나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야곱을 만나자 마자 끌어안고 입 맞추고 울었습니다.
결국 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마음 속에 있던 그 분노가 그 후손인 아말렉에게 내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을 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말렉 후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말렉의 후손이었던 하만이라는 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에스더서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말렉의 죄악은 세 가지입니다. 주1)
▲아말렉의 사악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원인인 것이 확실하지만
진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또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의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 이름을 므리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다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분이 우리와 진짜 함께 계시는가?’
지금까지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의심하고 시험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문시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존 자체를 문제로 삼으시고, 생존의 위기를 주신 것입니다.
▲또 이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모세의 절규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출 17:4).
모세가 돌에 맞아 죽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잘못한 것 무엇입니까?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바로왕에게 가서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냈습니다.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은 그 모세에게 돌질을 하겠다고 위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위협하니까, 하나님은 아말렉을 통해서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신 것입니다.
결국 아말렉의 공격으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는 아말렉의 사악함 때문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이기도 합니다. 양쪽 측면을 둘 다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위기가 오고 나를 괴롭히는 아말렉 같은 족속이 있을 때에
아말렉은 사악하다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나에게는 무슨 죄악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왔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인가? 하나님의 지팡이인가?
두 번째로 이 스토리에서 볼 수 있는 진리의 양면성은 지팡이에 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까? 하나님의 지팡이입니까?
하나님 것입니까? 모세의 것입니까?
이에 대해 모세가 말합니다.
“내가 내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 17:9).
모세는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말씀에 하나님은 “너는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서라”(출17:5)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모세의 지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모세의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를 사용하기에 합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지팡이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 것은
바로 모세라고 하는 사람의 믿음과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아니고 다른 사람이 쓰면 보통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아무 역사도 안 일어나는 일반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미국에 20세기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쯔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는
바이올린 연주를 해서 수익이 생기면 구제하고 헌금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돈을 저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을 고르다가 최고의 명기를 발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값이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이 바이올린을 사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돈을 모아서 바이올린을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은 벌써 어떤 수집가에게 팔리고 없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수집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수집가는 팔지 않았습니다.
크라이슬러가 쓸쓸히 돌아가다가 다시 찾아가서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그대로 두면 저 명기가 한 번도 소리를 내지 못할 테니까
저것이 영원히 침묵을 지키기 전에 내가 연주 한번 해보아도 되겠소?”
그 말을 듣고 수집가는 크라이슬러가 연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연주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것이 바로 하늘의 연주구나’라는 생각이 든 그 수집가는
“내가 보니까 그 바이올린은 당신만이 쓸 수 있는 것 같소. 그러니 공짜로 가져가서
그 바이올린의 소리를 온 세상이 듣게 해주시오.”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제가 그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주를 했으면 제대로 소리가 났겠습니까?
깽깽이에 불과한 것이죠. 무슨 좋은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팡이는 모세의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이 있고 모세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지팡이를 쓸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이 높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젠체하거나 잘난 척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내가 내 능력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지팡이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서 위대한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도구를 높여 주시고 사용 받는 도구는
하나님을 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있어야 할 아름다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도구를 쓰시고 높이시지만 도구를 신격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도구를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모세는 모세입니다.
영원히 구별되는 간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구를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도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몰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위기시에는 기도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가?
인생의 위기가 오면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일하십니까?
여러분 몸이 약해서 병들면 기도하십니까? 병원가십니까? 어떻게 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이 본문에 나타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한 세 번째 포인트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병원 가고 약 먹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로 나는 가서 기도만 하겠다”고 해서 기도만 하다가 치료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위기가 왔을 때 기도만 합니까? 아니면 사업을 다시 재정비 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문제에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지혜를 얻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 of God)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야겠다’며 문제만 생기면 기도하고 일은 안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Immanence of God)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우리와 함께도 계십니다.
초월성과 내재성은 함께 고려해야 됩니다. 양면이 함께 진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중세기 신비주의자처럼 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일도 하지 않고 매일 기도만 합니다.
배고프면 그릇 들고 가서 구걸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주발 발(鉢)자, 구걸할 탁(托)자 해서 탁발수도자이라고 부릅니다.
초월성만 강조하면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해방 신학자가 되고 자유주의 신학자가 됩니다.
자유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균형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고 전쟁터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군대를 붙여서 나가서 싸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도 하고 전쟁도 해야 합니다.
병들면 어떻게 됩니까? 기도도 하고, 약도 먹고, 병원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사도 세워 주시고 약사를 세우셔서 약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그 의사와 약사 가운데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하나님께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병들었을 때에 먼저 기도하시고, 좋은 약도 먹고 좋은 병원에도 다니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안 될 때에도 먼저 기도 하시고
열심히 사업도 다시 정비해서 다시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삶의 현장에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균형감을 상실하면 반드시 신앙에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저의 신학교 동기 중에 목회를 열심히 하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귀신 축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해서 사우나를 했습니다.
사우나를 하고 나서 좀 덥다고 해서 선풍기 앞에서 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깨어보니 고개만 움직이고 온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몸에 마비증세가 왔던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에 와서는 귀신 축사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열심히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그렇게 해도 몸이 낫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할 수 없이 병원이라도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아스피린 두알 먹고 한숨을 자고 나니까
몸이 확 풀려가지고 그 다음 날부터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그 분이 목회를 하는데, 한 여자가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예배중에도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찬양하다가도 쓰러집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이 ‘이번 것은 틀림없이 귀신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귀신을 쫒는 기도를 했습니다.
“귀신아 나가라!” 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것도 안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간을 축사하다가 할 수 없이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가 진료를 하더니 ‘이 여자는 기생충이 뇌에 가득 차 있는데
기생충이 뇌를 건드려서 예배중에 거품을 무는 것’이라고 진단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기생충을 서서히 죽이고 나서 그 여자는 멀쩡하게 살아났습니다.
그 후에 의사가 그 목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주일만 더 늦었으면 이 여자는 죽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나는 인간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헬리콥터가 와서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인간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고 잡지 않았습니다.
배가 와서 구출하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인간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고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별 수 있습니까? 결국은 물에 빠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어서 천국에 갔더니 베드로가 영접을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불평을 합니다.
“아니 내가 인간 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손 의지하려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나를 죽이십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서 비행기도 보내고 배도 보냈는데.. 배가 안 갔습니까?”
신앙에 있어서 균형감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 삶의 현실과 의사와 모든 인간관계에 내재해 계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위기가 오면 싸울 사람은 싸우고 기도할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일도 해야 합니다.
균형감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그리스도의 모형은 모세인가? 여호수아인가?
네 번째로 이 스토리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은 모세인가? 아니면 여호수아인가?
답은 마찬가지로 두 명 모두입니다.
▲언덕 위에서 기도하는 모세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틀림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악과 허물이 큽니다.
그러나 비록 죄악과 허물이 커도 이 세상에서 아말렉이 쳐들어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이 많다고 해서 너무 기죽어 살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죄가 커서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십니까? 누구나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어도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하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했지만, 그들이 죄가 없어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죄 많은 백성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승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도리어 시험거리가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지도자가 되어서 싸우는 여호수아도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여호수아’는 구약시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기도도 하시지만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아말렉과 싸울 때,
세상 죄악 마귀와 싸울 때에, 성령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여 나를 지배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침례 부어 주시고,
내게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아말렉이 나를 쳐들어올지라도 나가서 능히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성령세례, 성령충만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세도 예수님의 예표요, 여호수아도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도 하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이처럼 진리는 양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방패가 앞뒤가 있듯이 진리도 양면이 있습니다.
어느 진리 하나만을 붙들고 좌로 우로 치우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는 도리어 위대한 승리의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하게 승리하고 그 곳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라! 여호와는 내게 위기시에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내가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시라!
여호와 닛시라!” 이런 신앙고백을 하며 그 곳에 단을 쌓은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크십니까?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가 크지만 누구는 죄 없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죄가 크고 허물 크고 부족해도 기죽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날마다 승리하며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사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아말렉의 죄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함으로 인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듣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아말렉의 두 번째 죄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것을 빌미로 해치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평화롭게 지나가려고만 했던 것인데 말입니다.
-또한 아말렉은 비겁한 자들이었습니다. 아말렉에 대해 모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신 25:18)
아말렉은 인격이 비겁하고, 뒤통수 치고, 뒤에 떨어진 약한 사람을 잡아 죽이는 짓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말렉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말씀하셨고 또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최소한 아말렉은 미워하셨습니다. 아말렉은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시되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워한바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감사하고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