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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영광

LNCK 2024. 5. 17. 20:3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핍박 과 순교

 


신자의 영광 | 행 7:52-60 | 이규현 목사 | 주일예배 | 24.5.12 - YouTube
◈신자의 영광          행7:52~60             2024.05.12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일어난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핍박 입니다.
그 가운데 스데반 집사의 얘기입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문제 때문에 뽑았던 일곱 리더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에요. 
근데 구제만 한 게 아니고, 초대교회 때의 집사의 역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 집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죠.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성전으로 끌려가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는 내용이 행6장 후반부에 나오고요. 

본문 행7장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스데반이 진술하는 내용인데, 
설교 형태로 꾸며져 있습니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렇게 유대인들이 고소를 한 겁니다. 
고소 내용은, 이게 신성 모독죄이고, 모세의 율법을 비판한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이게 사실이냐?' 하고 묻죠.  7:1
이렇게 물을 때 스데반이 이제 답변을 하는데요. 그게 본문 행7장입니다. 

▲7장 전장이 스데반의 설교 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행2장과 3장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마는 
이 7장의 내용이 아주 탁월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입니다. 

설교학자들도 그렇게 평가를 하는 굉장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집에 가셔서, 7장을 전체로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 7장에서 다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행7장을 읽으면, 구약 성경을 다 읽는 것과 같아요. 
구약 성경을 함축해 놓은 내용이 이 7장입니다. 

핵심 내용은 뭐냐면, 
-아브라함의 얘기 
-모세의 이야기
-요셉의 얘기도 나오고 
-성전 얘기, 할례 등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들을 스데반이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 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많이 부각이 되죠. 
문제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택함 받았다'
그 뿌리는 아브라함부터 출발합니다. 언제나 아브라함을 내세우는 거죠.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것이 유대 민족, 이스라엘 민족의 우월감을 가지게 한 기초가 된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
이게 유대인들의 자랑입니다. 

근데 스데반이 이 두 조상을 가지고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스데반의 설교 요지는 뭐냐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부르신 것은 그들이 특별 해서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을, 이제 깨뜨린 거죠. 

너희들이 '모세 모세! 하는데, 너희 조상들을 봐라.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얼마나 반역을 했느냐?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너희 조상들이 어떻게 대우 했느냐?' 

유대인들의 과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게 아니다' 
이게 스데반이 설교한 말씀의 요지입니다.                 
   
'만약에 너희들이 잘났다면, 특별했다면 
그렇게 4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겠느냐? 

당신들이 모세를 자랑하고 있는데, 모세를 너희 조상들이 키웠느냐? 
너희들이 선민이라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의식, 우월감, 선민사상 등의 그 환상을 
이제 스데반이 이스라엘 역사를 쭉 훑으면서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7:39절에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또 51절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53절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이나 율법을 받은 것들에 대해서 
대단히 자부심을 느끼고,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는데,
그게 진정한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유대인들이 낫다,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이 설교가 굉장히 강력한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그 잘못된 역사관을 재 해석해 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 설교에 초점은 어디로 끌고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너희들이 잘나서 선택 받은 게 아니라는 거죠.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뼈 아픈 지적입니다. 사실 그게 맞는 지적이죠.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내가 누군가보다 나아서, 
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참한 625전쟁 이후에 
이 나라가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에게서 어떤 요인을 찾아낼 수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죠. 

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 인간의 편에서, 신화를 자꾸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큰 교회로 자라난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전도를 많이 해서?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이렇게 자꾸 우리 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강조하고 싶어지는 거.. 이게 우리의 유혹이에요. 
여러분, 큰 교회에 다니면, 우리의 믿음도 큰 것입니까? 
교회 사이즈와 우리의 믿음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뭔가 다르다'고 주장을 하면 
유대인들이 빠졌던 오류에 빠지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었는가?'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정 반대라는 거죠. 

오히려 불순종하고, 오히려 더 반역하고, 오히려 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거예요. 
구원을 얻는 일에 방해만 했다는 겁니다. 
우리의 행위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중에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토록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서, 우리를 구원 한 게 아니라는 거죠.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보다 더 강조되는 게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스데반은 지금 설교에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계속 집중하는 거죠. 
구원의 근거는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모세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할례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것은 어마어마한 자부심이었어요.
이게 구원의 근거로 그들은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스데반이, 보수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근거를 왜 다 깨 부쉰 거죠? 
그것은 유대인들이 가진 잘못된 우울감이, 결국은 구세주이신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낼수록 
그들의 자랑들은 무익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입어야 할 죄인의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고 높이고 싶어하던 아브라함도 죄인의 한 사람이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붙들고 자랑해 오던 모든 것들을 부인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왔는가를 인정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소망이 없는 자들... 
우리 자신에게서 어떤 자랑 거리도 없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자신에게 각자 한 번 질문해 보세요.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 하셨는가?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여러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이 안 돼요. 

내(이규현 목사)가 어떻게 저 부산 구석진 곳에서, 불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저는 기독교 와는 전혀 상관 없던 자예요.   주1)  

부산이 바닷가, 우상숭배의 도시입니다. 
어린 시절에 제가 주변에 아무리 돌아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집안입니다.
사촌 팔촌 친척들 가운데도, 성도가 한 명도 없었던 집안입니다. 
복음의 완전한 사각지대 였습니다. 

게다가 불교 집안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보살이었습니다.
요즘 사월 초파일(석탄일)이잖아요. 초파일을 어떻게 지내는지.. 아주 제가 익숙해요. 
저희 집에서 절에 매다는 등을 만들었으니까요. 

대나무를 가져와서 작게 자릅니다. 그 대나무 조각으로 등의 형태를 잡고, 
종이를 바르면, 초파일에 쓰는 '연등'이 완성되는 거죠. 직접 수공예로 했어요. 
그게 제 어릴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등이 한 개에 3백 원짜리, 5백 원짜리 두 종류가 있었어요. 

3백 원짜리 등은 완전 정사각이에요. 
5백 원짜리 등은 좀 비싸기 때문에 직사각형으로 좀 컸어요. 

그 안에 촛불을 넣는데, 사람들이 접수를 하면, 
저희 아버지가 그 등에 아무개 이름을 쓰고, 촛불 넣고, 거기에 매달아요. 

아마 지금 그 길거리에 보이는 것도, 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내고 
헌금을 해서 아마 매단 것일 거예요. 

그런 집안에서 자란 제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어떻게 목사가 됐는지... 저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는 그래도 저 인간보다는 낫지' 
그게 결코 아니라는 거죠.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을 얻었는가? 
좀 더 의로운 게 있어서 구원을 얻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설명이 안 돼요. 

교회 바깥에, 우리보다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은 뭡니까?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우리가 유대인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모세의 후손, 요셉의 후손이라는 거예요.
율법을 받았다... 스데반은 그거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과거의 전통, 과거의 배경, 그리고 조상들의 하나님을 절 섬겼던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 보면, 우리의 자랑이 자꾸 늘어나요. 
막 공로를 자꾸 세우려고 그래요. 

이 교회 안에 '공로패' 주는 것... 이거 별로 안 좋아요.  ☞ rfcdrfcd.tistory.com/15981413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미화하려고 하는 유혹이 있어요. 
그래서 간증은 항상 위험한 요소가 숨어있어요. 

우리의 자랑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자랑이 늘어나면, 하나님의 은혜는 축소 될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인류의 역사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 뭐냐면, 
복음을, 사람들은 거부 한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거부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왜요? 그 십자가 앞에 나가면, 우리의 죄를 인정해야 되니까요. 
인간은 당당하고 싶은 거죠. 

인간에게 뿌리 깊이 있는 게 뭐냐면 자존심이에요. 
뼈속까지 새겨져 있는게 자존심이에요. 모두 다 자존심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서면, 내가 죽을 죄인인 거예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배경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꽉 찬' 상태에요. 
그리스도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말을 듣는 게 거북한 거예요. 
'왜 나를 위해서 죽는다는 거지? 난 의로운데...'

스데반의 설교가, 그들의 자랑을 다 무너뜨려 버린 거예요. 흔들어 버린 거죠. 
혈통 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무조건 구원을 받습니까? 
유대인들은 그걸 너무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거죠. 

성전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과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거죠.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만 가두어 두고, 기계적인 제사 의식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였어요.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율법의 정신을 다 무시해 버리고,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있었던 거죠. 

여러분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뭘까요?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아예 알지 못하고, 그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 할례를 받은 것, 
성전을 드나드는 것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죠. 

여러분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누구보다 열심히 예배드려 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너무 가깝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도 선교 130년이 넘어서니까, 기독교 집안이 4대, 5대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가정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뭐 자연스럽게 주일날 교회에 가는 거고, 그리고 십일조 하는 거고... 
때로는 봉사하기도 하고, 직분을 받기도 하면서,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 
그러나 사실은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자기는 그리스도인 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기계적인 신앙 생활, 형식적인 그런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있는데... 
그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결국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근거를 흔들어 놓으면서 
결국은 그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할 때에 
그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것입니까? 
그 복음 앞에 어떻게 반응 하죠? 

7:54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여러분 마음에 찔리면 회개하면 됩니다. 
근데 마음에 찔렸는데 어떻게 해요? '그를 향하여 일을 갈거늘' 

사람들이 복음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참된 진리를 선포 한다고, 모두 '아멘!'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죠. 이를 막 가는 거예요. 

 

여러분, 스데반의 설교는 너무도 복음이 명확한 설교 예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꿰뚫으면서 
정확하게 말씀을 들이대는 거잖아요. 그러면 아멘 해야 되는데... 

그래서 마음이 찔렸어요. 그러면 회개해야 되잖아요. 
그래도 인간은 마음에 찔려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분 나쁘다는 거예요. 

여러분,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 와 '하나님이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갭이 있다는 거죠.

사실 설교자의 유혹이 그거예요. 
주일 날 딱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성도인데, 
그들에게 정말 부드러운 말씀, 살살 녹는 초콜릿 같은 말씀, 
저도 그런 설교 전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제 마음이에요. 하나님은 다를 수 있어요. 

여러분 병원에 가면, 정말 의사 선생님이 '큰 문제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병에 걸려 있는데도 '그냥 뭐 문제 없으니, 집에 가서 쉬세요.'
그냥 듣기 편안한 얘기를 해주고, '일주일 후면 나을 거예요' 이렇게 진단한다면, 
그는 정상적인 의사가 아니죠.

성경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뭐예요? 우리는 죄인 이라는 거예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거예요. 

▲자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이 이빨을 갈 이유가 없습니다. 
맞는 얘기거든요. 복음이거든요. 근데도 이를 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들어도, 어떤 사람은 분노하는 거예요. 
적개심에 가득해서 이를 갈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스데반의 설교는, 최고의 설교입니다. 
앞부분에 베드로의 설교를 압도합니다. 

그런데 최고의 설교에 최악의 반응입니다. 
청중들은 분노로 가득해서 순식간에 폭도로 변했죠. 

7:57~59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청중들이 분노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길을 막고 달려들고, 아주 섬짓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고 나가서 그를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이 앞서 바로 예수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죠.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자 우리가 행1:8절의 말씀을 잘 압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투스인데
영어로 순교자를 뜻하는 마터 myrtar 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죠. 

사도행전의 키워드가 '증인'이고 
그 증인은 '순교자'라는 뜻도 되는데 
스데반의 삶을 통해 이게 입증이 된 거죠. 행1:8절이 현실화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인은 순교와는 거리가 멉니다. 
전도하다가 순교당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2천년 기독교 역사에는 순교가 매우 흔한 일이었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1세기는 여러분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표적이 됩니다. 
모여서 예배 드리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예배드리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언젠가는 내가 믿는 이 일 때문에, 나는 죽음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다' 라고 선택을 하는 순간, 
이 선택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 올 수 있다.. 라는 걸, 언제나 의식했다는 거죠. 

한국도 선교 초기로 올라가면, 순교의 비가 흥건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최초 초기 4백 년 동안 기독교는 혹독한 박해를 통과합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말을 하잖아요. 

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순교한 일이 아닙니다. 
관심을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무엇이 그로하여금 순교하게 했을까?' 하는 거죠.

여러분, 목숨은 하나 밖에 없는데, 누구나 목숨은 두려운 거잖아요. 아끼는 거잖아요. 
아까운 거잖아요. '근데 무엇이 자기 목숨을 걸게 했을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순교 했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게 아니고 
순교를 하게 만들었던 그 힘이 어디에 있느냐? ... 는 거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 질문 앞에 선 거죠. 
'언제나 내가 믿고 있는 진리를 위해, 내 생명을 걸 수 있는가?'

이건 추상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에, 자기 생명을 걸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돼요. 

여러분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순교가 계속 됩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죽을 만한 이유와, 죽을 만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에요. 
'나는 무엇을 위해서 죽을 것인가?' 이게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주제죠. 

대게는 오래 사는 문제, 건강하게 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물어야 될 질문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서 죽느냐?' 이 생사관이잖아요. 

▲여러분 스데반의 최후 장면을 보죠.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입니다. 
아무 결과가 없잖아요. 2장에서 베드로는 설교 하니까 하루에 3천 명이 돌아왔는데 
스데반은 명설교를 했는데... 돌이 날아와서 거기서 죽었단 말이에요. 

실패 처럼 보입니다. 회심자가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비참한 최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스데반의 죽음의 과정을 우리는 잘 지켜봐야 되죠.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장면을 보면, 여러분 무엇이 연상 됩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장면이 연상이 돼요. 예수님과 너무 흡사 해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자신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자 그의 마지막 기도를 보세요.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명 장면입니다. 멋진 증인 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죽는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한 맺힌 죽음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위해서 사는데 내가 이렇게 죽다니... 너무 억울하다'
이게 아니에요. 한 맺힌 게 아녜요. 

여러분 이 스데반의 죽음은, 앞부분에 아나니아 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과 대조적입니다. 
결국 끝이 중요.합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잘 죽어야 합니다. 

내가 잘 죽고 싶다고.. 잘 죽어지는 것입니까? 아뇨.
잘 살아야.. 잘 죽어 집니다. 
또 잘 죽어야.. 잘 산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 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은 성령이죠. 성령이 어디까지 이끌어 갑니까? 
죽음의 현장까지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겁니다. 

성령 충만은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잘 살았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한 맺힌 죽음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지막 시간에 눈을 못 감아요. 마지막에 눈을 못 감으셔요. 
자기 속에 맺힌 게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데.. 죽으려고 하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지를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죽음이 삶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해석이 안 되는 죽음이 많아요. 

 

여러분 스데반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죽음을 세상에서 볼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불가능해요. 
자신에게 돌을 치며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이게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게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합니다. 

우리가 보여야 할 모습은 이런 거죠. 
'무엇이 이렇게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한가?'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그게 복된 죽음이에요. 
내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그건 승리한 것입니다. 

자 그가 죽어가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데' 

여러분 하늘이 열렸어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마지막 상황은, 인간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인지 모르지만 
하늘이 열린 거죠.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 하늘의 환상을 봅니다. 
주님이 일어 서신 것을 본 거죠. 

여러분, 주님이 보좌에서 일어서신 거예요. 
부활하시고 성천하신 그리스도를 성경이 표현할 때는 
'보자에 앉아 계시는' 분으도 얘기해요.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 

근데 복음을 위해서, 예수를 위해서 증인 되는, 죽는 그 순간, 
주님이 보좌에서 벌떡 일어 서신 거예요. 
주님이 천국에서 스데반을 지지하고, 환영하는... 
그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니다. 

영광 종의 영광의 모습을, 스데반이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광이죠.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랬어요.  :60
여러분 성경의 죽음에 대한 표현이 '잔다'는 거예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도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자는, 죽으면 그냥 죽는 거예요. 
그러나 그리스도 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잔다' 라고 얘기합니다. 

잔다는 게 뭐예요? 결국 깨어나는 거잖아요. 끝이 아니라는 말이죠. 
죽음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은 시작이에요. 새로운 시작!

죽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죽음은 재창조의 시작입니다. 
죽음은 나의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사건입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이, 실제로 자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악을 쓰며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한이 가득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런 게 없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상태... 

여러분 잘 죽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죽는 삶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는 이유가, 나의 죽는 이유라면 
최고의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원망할 일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아쉬운 결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의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바울의 출현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기도가 어떤 것이죠?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라고 하는 이 기도가 
응답 된 사건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뭡니까? 

바로 이 스데반의 죽음의 자리에서, 청년 사울이 출현했다는 거예요. 
:58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서 사울 이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이게 기독교의 역사예요.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기독교를 집대성한, 
교리화 하고, 기독교를 기독교로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사울은 돌로 친 사람들의 편에 있있고, 
스데반의 순교에 가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면서 목도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사울은 회심한 이후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였다' 라고 하는 표현 속에는 
스데반의 죽음에 참여했던 자신의 죄를 회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그도 스데반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칩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여운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스데반을 거두시고 사울을 등장시키십니다. 
사울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의 역사속에 등장을 예고하는 장면이죠. 
스데반의 순교의 터 위에, 사울이라는 인물이 탄생 되었던 거죠. 

스데반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신자의 삶은, 물론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 까지도, 하나님이 사용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헛된 죽음은 없습니다. 스데반은 내몰려 죽은 게 아닙니다. 
타살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순교 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지켜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또 다른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을 축복하신 거죠. 

성도들은 핍박을 통하여 교회는 더 단단해지고, 복음은 더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핍박이 하나님의 나라의 전진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의 모사로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반역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거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55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 죽음의 순간에도 스데반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을 우르러 보고 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뭘까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늘의 법정이 열린 거죠. 
하늘의 법정은 세상의 판결을 뒤집어엎어 놓으시는 거죠. 

스데반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불신앙적 세상,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이 참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탈종교화, 탈기독교화가 가속화되는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의 문화에 우리가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해 보는 거죠.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면서, 우리에게 질문이 필요해요. 
'나는 진짜 신자인가? 
나는 종교적인 껍데기를 뒤집어쓴 유사 pseudo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내가 믿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내가 생명을 걸 수 있는가?' 

아니,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한 번이라도 조롱을 받아 보거나, 
박해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 지금이라도 전도지를 들고 전철이나 어디 길거리에 나가면 
당장 그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요. 

'내가 믿고 있는 진리' 이것을 부끄러움 없이 
사도바울이 롬1:16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그런 복음의 탁월성, 복음의 우월성, 복음의 유일성! 
이 복음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진리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자 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라고 할 때 
그 기준이 너무 낮아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교회 다니는 정도, 그 정도면 그리스도인으로 쳐 줍니다.

그러나 1세기에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말은, 그게 아니에요. 박해를 염두에 둔 거예요. 
내 생활에, 내 삶에 직접적으로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이게 크리샌덤 시대에 가는 거죠. 
기독교 국가가 되면서, 예수를 믿는 게 핍박이 아니라, 더 유익함이 많아지는 
그런 시기가 왔을 때...

박해를 피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예수를 믿었던 그 시대의 신앙은 
강력한 신앙이었는데, 
예수를 믿는 게 보장이 되고, 예수를 믿는 보스 Boss 가 있고, 
예수를 믿을수록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그 시대가 오자 
그리스도 인들의 신앙이 변질 되기 시작했다는 거죠. 

요즘 오늘 우리 시대를 보면, 비만 와도 주일 출석이 교회들 마다 줄어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시험 하시려고, 요즘 주일 날마다 비를 내리시는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주일 날 교회 가는데 '비가 오는 날 내가 교회 갈까 말까' 만약 고민하면 
그게 진정한 신앙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종교화로 흘러버려요. 
종교화가 뭘까요?  자기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강화한 거죠. 
율법을 지켰어요. 열심히 지킨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을 돋보이고 드러내는 
자기 증명, 자기를 강화하는 일에 쓰여진 것이지, 

그 율법을 통하여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주를 위해서 살고,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마지막 고백은 
'언제나 나는 죄인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돼요. 

예수를 믿고 열심히 봉사한다고.. 나 자신을 의인화 시켜 버리고 
그리스도가 필요 없는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게 이미 종교화로 흘러버린 거죠. 

여러분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는 삶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 되었어요.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키운다고 죽을뻔 했다. 너무 고생 많았다. 너무 힘들게 살았다.
그 은혜를 너희가 알아야 된다' 이러면 자녀들이 이렇게 말한대요. 

'아버지의 자식으로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여러분 언제나 그리스도를 드러내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드러냈다가 망신당함)

 

쉽지 않는 삶을 살아왔지만, 
'얘들아 아빠가 (우리 가정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야! 
주님이 아니었으면, 오늘 아빠는 이 자리에 없었어!'
 
자녀들도 마찬가지죠. 
'내가 내 잘난 맛으로 살아온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나라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는 이 고백이 
누구에게나 마지막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의 삶의 근거가 예수 한 분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고, 그렇게 한 평생을 다 바쳐 도 
마지막 우리에게 남은 언어는 '그리스도' 이어야 돼요. 

처음도 끝도 그리스도, 그 분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로 꽉 찬 삶, 
툭 건드리면 예수가 툭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예수를 위해 살다가, 예수를 위해 죽는... 
신자의 영광은 '예수를 위해 살다가 예수를 위해 죽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신자의 영광이요, 가장 안전한 삶이요, 가장 복된 일이에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 /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 붙잡고 
우리의 과거, 우리의 삶의 배경에 
세상 근거를 끌어 오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그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나를 증명해 내기 위해서 일평생 목을 매달고 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예수를 드러내며, 예수의 증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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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다른 설교중 발췌 내용

 

저(이규현 목사)는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수영로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수영로교회에서 전임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수영로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부산에는 성도가 1천 명이 넘는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교회의 수가 부산이 대구보다 적습니다.

당시 수영로교회가 막 일어날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영로교회의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 수영로교회에서 섬길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부산 사람입니다. 부산 토박이입니다.

부산에 있는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며 절망하고 눈물 흘렸던 사람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정말 그만두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현실이 매우 절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부산의 교회가 처한 현실이 매우 좋지 않던 때에 정필도 목사님께서 수영로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제가 1986년에 교회에 부임했으니 교회가 설립된 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초창기였는데, 당시에도 성도가 4천 명가량 되었습니다.

교회가 한창 부흥 성장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정필도 목사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은 한 영혼을 향한 열정이 매우 강한 분이셨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은 부산 사람인 저보다, 부산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부산의 복음화를 향한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보며 목사님을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산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시는 목사님을, 어떻게 해서든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