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02 사도행전 강해 (42) / 안디옥 교회와 그리스도인 - YouTube
◈안디옥교회와 그리스도인 행11:19~26
▲개요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2가지 특별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성경에서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 첫 번째 사건은, 안디옥교회가 세워진 일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첫 이방인 교회입니다.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앞서 고넬료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첫 이방인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널리 퍼집니다.
이방인 선교의 최초 전초 기지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던 거죠.
2) 본문에서 또 주목해야 할 표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 Christians 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1:26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처음 생깁니다. *크리스티아누스
◑1.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복음이 확산되다
11:19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 구절은요. 행8:1절에서 나왔던 부분이죠.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교회의 대대적인 박해가, 메가톤 급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숨어 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예로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죠. 또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 외에도 흩어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흩어진 자들이 어디까지 갔느냐?
본문에 보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갔다고 말합니다. :19
베니게는 해안 지역,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셨던 곳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이라는 마을을 지나가시는데요. 마15:21
이 두로와 시돈이 베니게 지역에 있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죠. 오늘날의 키프로스 섬입니다. 작은 독립국입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8장에 사마리아, 9장에 다메섹, 11장에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복음이 확장되어 전파된 것을 증거해 줍니다.
안디옥은 어떠한 지역인가요? 주1)
▲처음에는 그곳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함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9
흩어진 성도들이, 그 이방 지역인,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에서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다고 나옵니다.
이방인 지역에 가서도, 처음에는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소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방인들을 차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2. 하나님은 무명의 사람들도 들어쓰신다
그런데 여러분 20절을 보십시오, 파격적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최초로 그곳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헬라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그 사람들이 누구냐면,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구레네는..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입니다.
구레네 출신 시몬이, 골고다 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적이 있었죠.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과감하게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무명의 신자들입니다. 너무 존재감이 낮아서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무명입니다.
우리가 알만한 이름이 아니라는 거죠.
세계의 선교를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교두보와 같은 안디옥 교회가
첫 이방인의 교회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개척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요. 바울이나 베드로나 어떤 위대한 인물들이 그 교회들을 개척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어떤 스토리들을 자꾸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유명한가, 유능한가, 출중한가?' 물론 그런 것들은 그런대로 귀하게 쓰시지만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귀하게 쓰십니다.
참 무익하고 무명이라도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손에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유능하고 탁월해도 하나님의 손에 복되게 사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름도 모르는 무명의 성도들을 통해 오늘 안디옥교회가 개척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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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누가는, 이 수많은 이방인들이 믿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손이 아니라 주의 손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오늘 여러분이 결심하고 오늘 교회로 온 게 아닙니다.
억지로 누군가에 의해 끌려 나온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이 여러분을 이끌고 오늘 이 자리에 앉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요. 예루살렘 교회에도 들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2
여러분 왜 파송을 했겠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건강한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는 교회인가 검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믿었는데 단순히 교회가 하나 생긴 걸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복음이 왜곡되지 않고 잘 전해지고 있는가 분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 태동한 이 어린 교회를 돕고 싶어서 사람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보냅니다.
여기도 이해가 쉽게 안 되는 구절이죠.
여러분 바나바는요. 12사도가 아닙니다. 사도가 아닌데도 바나바를 보냅니다.
그러면 왜 굳이 바나바를 보냈을까요?
아마 여기에는 바나바의 출신지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죠. 구브로는 이방인 지역이고, 안디옥과 비교적 가깝습니다.(위 지도 참조)
그 이방인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바나바였으니, 이방인 교회를 이해하기가 쉬웠겠죠.
반면에 12 사도들은 모태 유대인이었죠. 뼛속 깊이 유대인들이었죠.
태어난 곳도 이스라엘이고, 자란 곳도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 밖을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요. 여러분 이방인 교회에 누가 더 적합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도들보다 구브로 출신인 바나바가 더 적합했었겠죠.
물론 출신 지역 때문에만 바나바를 보낸 건 아닙니다.
바나바가 교회를 돌보고 세우는 일에도 적합한 인물이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24절에 나오는데요. ↙
◑3. 착한 사람 바나바
요즘엔 '착한, 선한 사람' 이런 거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대신에 '유능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잘 하는 사람, 특기자' 이런 사람이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착한 사람'을 강조합니다. ☞ <착함, 선함>
11: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위 구절에, 바나바에 대한 독특한 소개가 있습니다.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a good man
여러분 '착하다'는 말은요. 아무한테도 쓰인 적이 없습니다. *아가소스, 선한
사도행전에 보시면 누구에게도 '착한 사람'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오직 바나바에게만 독보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방인 교회를 품을 수 있는, 성품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품적으로만 적합한 게 아니라
저자 누가는 바나바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24
영적으로도 교회를 돌보는 데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로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나바를 통해,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키셨습니다.
24절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큰 무리'는 21절의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을 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바나바는 혼자 사역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바나바가 떠올린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행9:30절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다소로 도망을 갔습니다.
다소로 도망을 간지가 거의 10년이 되었던 지금의 시점입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 잊혀진 사울을 데려오기 위해, 다소까지 찾아갑니다.
안디옥에서 다소까지의 거리는, 북서쪽으로 210KM 정도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장례가 있어서, 전북 임실을 다녀왔는데요.
서울에서 임실까지의 거리가 210KM였습니다.
이 거리를 지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겁니다.
그런데 이때는 KTX나 자동차도 없던 시대가 아닙니까? 걸어서 갔겠죠.
그 먼 거리를 사울을 찾아간 겁니다.
그리고 다소라는 지역까지 가서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이, 안디옥교회에서, 공동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첫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스토리입니다.
◑4. 주님이 더하시는 역사, 부흥의 주권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의 개척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디옥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십시오.
▲1.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 강권적 역사입니다.
이 장면에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주께 돌아오더라'는 표현입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손이 아니라 주의 손입니다.
부흥과 교회 성장의 주권과 주체가,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11: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4절에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것도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뜻입니다.
앞서 9:31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때도, 9장의 문맥을 보면, 뭐 어떻게 교회와 사도들이 열심히 전도한 게 아닙니다.
물론 열심히 전도했겠죠. 그러나 그게 주된 요인이 아닙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성도의 수가 더 많아지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였습니다.
☞ '그리하여'에 담긴 신비 rfcdrfcd.tistory.com/15979129
▲2. 여러분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세워진 첫 이방인 교회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숫자가 교회에 더 많아졌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주께 돌아왔다'라고 말하고요. '주께 더하여 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돌아오더라, 교회에 더하여졌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주께 돌아왔다. 주께 더하여 졌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교회의 덫치만 커진 게 아니라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거듭남의 역사, 회심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죠.
여러분 교회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께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입니다.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가 아니라,
주께로 사람이 돌아오고, 주께로 더하여지는 역사가 있어야..
그게 진짜 교회가 해야 할 핵심적인 역할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덩치를 키우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상은 경쟁사회이죠.
그런데 일부이지만, 교회마저도 오늘날 안타깝게도 경쟁을 하는 시대임을 보게 됩니다.
자꾸만 다른 교회와 비교를 하고, 뭔가 좋아보이는 것 있으면 따라하고...
물론 선한 것은 본을 받아야 하겠지만,
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른 교회를 따라가려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사람을 붙잡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께 더하여지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많은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단지 교회 공동체의 숫자를 더하시고, 교회의 규모를 키우시려는 게 아니라
오직 '주께로 돌아오는, 주께로 더하여지는' 자들을 세우시는 과정입니다.
교회의 숫자를 더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 더하여 지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주께로 돌아오는' 자를 세우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 우리 교회에 잘 익숙해지는 사람,
우리 교회의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우리 교회의 중심으로 들어와서
우리 교회의 일을 맡아 잘 섬기는 사람을 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위한 일꾼을 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교회를 바르게 섬기기를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단지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교회의 일꾼'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한 수단으로 여러분을 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가 아니라, 주님께 더하여지는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여러분들이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를 통해,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세상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고,
자신이 세운 계획으로 앞날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 나라를 목도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 그렇게 주께 더해지는 사람,
그렇게 주님을 믿으며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
우리 모두가 그런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해, 이 주님께 더해지는 주님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함께 말씀을 듣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런 주께로 더해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교회로 더해지는 교회가 아니라,
주께 더해지고, 주님께 돌아오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우리 모든 성도들이, 교회로 나오는 일뿐만이 아니라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위에 '주의 손이 함께하사'
21절과 24절의 말씀대로,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로 더하여 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어서 또 하나 사도행전 안에서 처음 나오는 본문의 표현이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1:26절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공동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약 1년 정도 말씀으로 양육을 했는데요.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닉네임입니다.
그 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진 적이 없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불렀습니다.
1:12절에 보면 '제자들'이라고 불렀고
1:16절에는 '형제들'이라고 불렀고요.
2:47절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불렀고요.
9:14절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9:2절에 보면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다양하게 불렀던 거죠. 정해진 이름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신조어가 탄생합니다.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Christians, 크리스티아누스, 복수
여러분 이 닉네임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더라고요.
-이 닉네임이 좋은 이름이었다.
-아니면 부정적인 뉘앙스로 불려진 이름이었다.
이 이름에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수쟁이'와 같은 표현이죠.
'예수쟁이'와 같은 뉘앙스로 불려졌습니다.
오늘날 '예수쟁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롱의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예수쟁이'와 같은 이름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그런 조롱의 의미로 쓰였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한번 보세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무슨 얘기죠.?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아니죠.
교회 바깥에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이죠.
자칭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타칭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예요.
지금 이 교회의 멤버는, 유대인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로마인, 헬라인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리켜서 '유대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로마인'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헬라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하나의 단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말을 지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요? 자기들 스스로가 아니라 밖에서요.
무슨 얘기입니까? 바깥에서 보기에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변화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은 여러분 교회를 다닌 게 아닙니다. 예배만 드리며 왔다갔다 한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들은 '주님께 더해진' 자였습니다. :24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변화된.. 삶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인이었지만, 더 이상 헬라인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지만 더 이상 유대인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인이었지만 로마인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인, 또 헬라인, 또 유대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닉네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 아래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요.
그들은 거대한 로마라는 세상의 주류적 가치관에 저항하며 오히려 거꾸로 살았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세상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세상과는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바깥의 사람들은 '다르다'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이 붙여졌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26절에 개역은 '그리스도인'이란 단수로 번역했으나, 원문에는 '그리스도인들' 복수
완전 새로운 부류, 새로운 닉네임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자칭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타칭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단순히 교회를 다니느냐,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변화해서
세상과 다르게 진짜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변화된 모습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인식되고 있습니까?
'우리 부모는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부모는 잠실 사는 부모가 아니다.
우리 부모는 잠실인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이다.
잠실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관과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녀에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에게도 보여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 나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 아내를 보니, 진짜 예수가 살아계시는 분이구나.
그분을 정말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는구나...
저 사람을 보니 정말 이 땅이 전부가 아니구나...'
그런 다름과 구별이, 여러분의 삶의 열매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타칭 그리스도인이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을 정직하게 오늘 말씀 앞에 비춰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주님께 더해진' 자들의 특징이죠. :24
여러분 그리고 이게 정말 최고의 전도이죠.
'예수 믿으세요!' 이런 말 한마디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가 묻어나와야... 여러분 그게 진짜 전도이죠.
▲그리고 이런 삶의 중심에는, 하나가 있었는데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로 불려지게 된 과정에는, 그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1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 말씀으로 그들은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배움과 들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에 의해 날마다 점점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대로 그저 하루를 살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그들은 독특하게 살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니까 나는 좀 더 특이하게 살아야지' 그런 결단으로 산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말씀에 진짜 영향을 받았던 거죠.
말씀을 들은 대로 그들은 살았을 뿐입니다.
자신이 삶에 놓여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씩 순종하며 훈련하며 살았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도 넘어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므로 다시 그 말씀 앞에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그 말씀에 영향을 받아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세상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변화가 바깥에서 보기에도 인식이 될 정도로
그 존재가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과 다르게 살아갈 때
여러분 그 삶은요, 세상을 끌고 오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세상과 부딪혔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세상과 거꾸로 살아가니까요.
그러나 세상과 부딪히긴 했지만 세상은, 그런 그들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도무지 만들어낼 수 없는 삶의 열매들이 삶의 모습들이
그런 믿음의 매력에 자꾸 시선이 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주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먼저 바라기는요., 여러분 모두가 교회에 더하여 지는 게 아니라
주님께 더하여 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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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안디옥 도시
사도행전에 보면, 안디옥이 두 군데가 나옵니다.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이죠.
본문의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진 곳은 '수리아 안디옥' 입니다. (이하 안디옥)
안디옥은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가장 큰 도시는 로마, 두 번째 큰 도시는 알렉산데리아, 세 번째가 안디옥이었죠.
로마 제국 안에서 탑3 안에 드는 도시니까, 세계적인 도시였겠죠.
그 당시에 로마의 부자들이 몰려들었던 도시가 안디옥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약 50만 정도가 살았다고 합니다. 작게는 25만~많게는 60만 명까지.
1세기에 한 도시에 50만 명이 살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1800년도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인구가 8만 명이었습니다.
8만 명이 살던 도시가 수도가 되었던 거죠.
그런데 이것보다. 1700년 앞선 안디옥의 인구가 50만 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대한 도시인지를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거죠.
거대한 도시였던 만큼, 다양한 사람들, 인종이 모여 살았습니다.
헬라인, 로마인, 유대인들이 섞여 살았는데요.
그 중에 유대인들의 인구 분포가 7분의 1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다양한 인종이 모인 만큼, 또 다양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우상을 많이 섬겼던 도시였는지
여러분이 안디옥을 '신들의 거처, 신들의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그 정도로 우상이 많았던 거죠. 그러니까 굉장히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겠죠.
그런데 이 안디옥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는 항구를 끼고 있습니다. 실루기아 항구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들은 대부분 항구를 끼고 있는 도시였죠.
바다로 쉽게 진출할 수 있는 실루기아라는 항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이 안디옥에서 세계선교를 떠날 때, 이 항구를 이용합니다.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13:4
뿐만 아니라 안디옥은 동서와 남북의 딱 중심에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제국이 있었고요.
남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애굽이 있었고요.
서쪽으로는 소아시아를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가 안디옥이었고
그래서 상업의 중심지가 안디옥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교회가 개척이 되었던 거죠.
세계 선교를 위해 너무나도 절묘한 자리에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세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