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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증인입니다

LNCK 2024. 5. 21. 13:44

 

 

 

우리는 증인입니다  2024.05.19. - YouTube 
우리는 증인입니다          행9:19~31        위 설교 일부 녹취

▲도입 / <밀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포스트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적은 늘 우리 안에 있었다' 
일제 시대 독립군들 중에, 일본이 심어놓은 스파이 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독립운동 하는 척 하면서, 내부 정보를 빼돌리고, 그 첩보를 일본에 알려주고 
그래서 독립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제가 심어 놓은 사람도 있었지만, 
독립 운동 열심히 순수하게 하다가, 붙잡혀 가서 고문 받고, 
그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회유되거나 거래를 받아들여서 
이제 스파이(밀정) 노릇 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피해가 계속 되다 보니, 독립운동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논하면서도 
'지금 이 안의 적이 있을지 모른다. 혹시 저 놈일까?' 서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습니다. 

 

나중에는 누군가가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가 풀려 나오면 
'혹시 거래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그를 조직에 안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오해 받는 사람은 억울했겠지만, 밀정 한 사람 때문에 조직이 노출되고 
동지들이 잡혀가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부적인 불신과 의심의 분위기가 계속 팽배해지면서, 
밀정 자체 때문에 받는 타격 못지 않게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저 사람이 적일 지 모른다. 믿을 수 없다' 의심하는 분위기 때문에 
훨씬 더 큰 타격을 받고, 독립 운동이 활력을 잃어 갔다, 와해 되어 갔다... 하는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이 긴장을 생각하면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봅니다. 

◑배신과 상처 받을 각오를 한채, 사울을 받아준 다메섹 성도들

행9:19b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여러분 다메섹 성도들도 처음에는 사울을 당연히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21
했지만, 결국 회심한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사울이 받아들여져서 다메섹의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19
이건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사울은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었죠. 
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하고 나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8:2~3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당시는 지금처럼 교회 건물이 있고, 간판이 붙어 있고, 이런 데가 아니잖아요. 
교인 명단, 이런 것도 없었습니다. 
가정 집이나 가게, 공장의 창고.. 이런 갖가지 장소에서 소규모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공동체가 모여서 예배하는 장소, 
예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알려 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죠. 
만약 사울이 밀정 노릇을 했다면, 다메섹의 모든 교회가 초토화 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메섹의 제자들은 사울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래서 이 다메섹의 제자들이야말로, 신약의 교회를 가능하게 한 진정한 영웅들 이었습니다. 

 

북한 지하교회에, 교인으로 가장해 침투한 스파이 1명 때문에, 86명이 발각 체포된 사건 주1)

 

▲그 시작은 이 장면입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형제 사울아'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서 했던 첫 마디가 '형제 사울아!' 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 에게 '사울을 찾아가라' 했을 때에 
아나니아는 펄쩍 뛰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저는 못 갑니다!'
처음엔 그랬지만, 결국 순종하고 갔습니다. 
가서 첫 마디가 '형제 사울아' 놀랍지 않습니까? 원수 였는데... 

저는 생각해 봅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준비하고 갔을까요 
아니면 가서 그냥 입에서 나왔을까요? 

제 상상으로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하나님이 가라니까.. 뭐 안 갈 수도 없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갔을 수도 있어요. 

가서 그냥 전도도 대충하고.. 하라니까 하고 와야지.. 처 삼촌 벌초 하듯이.. 
요나가 니느웨 전도하듯이...  그렇게 무성의하게 갔을 거예요.

근데 막상 가서 보니까, 사울이 불쌍해 보여요. 사랑의 마음이 생겨요. 
자기도 모르게 '형제 사울아' 하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 만나서 얘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생각도 안 했는데, '그거 내가 해 줄게' 말부터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통해서 일 하십니다. 
여러분 사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아나니아의 형제가 되는 순간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둘째 아들이 태어났어요. 
'부모에게 아들이 생겼다'면 '큰 아들에게 동생이 생겼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죠. 

신학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 받는 것은 '구원론' 이라고 그러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교회론' 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이 둘은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많은 신학이 이거를 떼서 자꾸 설명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로 보면, 구원은 둘째 아들이 와서 아버지 품에 안기는 거예요. 이건 구원론이죠.
그럼 당연히 따라 와야 되는 게 뭔가 하면, 첫 아들이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교회론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구원론이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즉 여러분 중에 한 명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이게 교회론인 겁니다. 구원론과 교회론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눅19:9

우리 새가족반에서 거듭 공부하는 내용인데요.
Believing (믿다) 다음에 → Belonging(속하다) 이 있고, → 그 다음에 Becoming(되어가다)가 있어요.
이 3개는 늘 함께 갑니다. 

믿고 → 그리고 속하는 거죠. 
하나님을 믿고 영접하고, 우리가 형제 자매가 되는 거죠. 

 

현실적으로는 속함 belonging 이 believing 보다 먼저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는데 교회에 나와요. 
같이 예배도 드리고, 밥도 먹고, 축구도 하고, 청년부 회원도 되고 
아직 예수님도 잘 모르는데 대표기도 하라 그러면, 뭐 종이에 그냥 써가지고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믿게 되는 거죠.
belonging 이 believing 에 앞서는 경우도 사실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이 믿는 일에, 하나님의 가족들이 받아들여 주는 것, 
환대 하고 포용 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밀정' 이라는 영화 일제 시대를 다뤘죠. 야망과 폭력의 시대입니다. 
청년 사울이 칼을 들고 날 뛰던 시대도, 야망과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대를 통과하면서, 선량한 사람들도, 순수한 사람들도 긴장하고 경계하게 됩니다. 
서로 의심하게 되고, 그게 쌓이면 서로 미워하게 됩니다. 상처가 쌓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긴장하고 경계하면서, 그것으로 피해를 조금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은 훨씬 더 큰 피해, 손해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 긴장함으로, 경계함으로 결코 우리는 그 폭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환대, 포용이 필요한데... 그런데 여러분, 포용 이라고 하는 것은
늘 내가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 Vulnerability 을 포함합니다

여러분 사랑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꼭 물어봐야 될 질문이 있습니다.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떤 젊은이가 어떤 이성을 사랑합니다. 짝사랑이죠. 
그러면 그 날부터 상처받을 준비를 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 자존심 내세우면서, 사랑을 구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의 사랑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키우다보면, 조그만 것들이 부모를 얼마나 무시해요? 그죠. 
뭐 귀찮다 그러고, 뭐 엄마는 뭘 모르면서 그런다 그러고요... 
사랑은 vulnerability, 즉 상처 받을 가능성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배신 당하지 않으려고,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자기 마음을 감싸기만 하면요... 사실은 외로움이 더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이 시대의 병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가룟유다를 끌어 안으시는 데, 
가룟유다가 칼을 들이댔지 않습니까. 배신 당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사전에 좀 뽑아내지 않으셨나?' 
징후를 다 아셨을 텐데 '너는 집에 가라' 그러셨더라면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요?

예전에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면, 궁예가 나와서 '관심법'을 썼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음
그래서 사람들을 딱 보면서, 배신할 사람들, 역모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뽑아내서 차단하잖아요. 

그래서 핵심 참모들이 한 20명 된다 그러면, 먼저 한 사람을 뽑아서 처단했습니다. 
집에 가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남은 19명이 다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신뢰하면서 함께 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놈이 눈에 거슬리는 거예요. 
'너도 문제 있어, 아니 네가 더 나쁜 놈이야' 그렇게 하나씩 빠지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거예요. 

궁예는 초기에 민중의 스타였습니다. 희망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너는 집에 돌아가라' 그랬으면 
나머지 11명이 잘 갔을까요? 아닙니다. 다음에 또 누가 돌아가야 돼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도 남아 있을 자격이 없어요. 그렇게 비겁하게 배신할 사람을, 어떻게 가까이 두겠습니까. 
그러면 결국엔 다 돌아가야 돼요, 그러면 결국엔 아무도 안 남아요. 아무도 자격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상처받을 각오 하시고 품어 주셨기 때문에, 
사도들이 있고, 베드로가 있고, 오늘 사도행전이 있는 겁니다. 

청년 사울까지도 사랑해 주신 거예요.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고, 오늘 우리 교회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 예요, 

그래서 여러분 신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누군가 상처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까지 119년 동안에 이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그 상처를 감내하면서 섬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섬겨 보세요. 교회 학교 부장을 하든, 찬양대 대장을 하든, 
사랑방 목자로 섬기든... 여러분 뭐 얼마나 상처가 많은지 몰라요. 
전화 해도 씹어버리고... 

그런데 그거를 각오하면서, 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정이 있는 겁니다. 

◑사람의 변화를 믿어야 합니다

이제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합니다. 3년의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다 사울을 두려워 하여, 
'사울이 제자 됨을 나는 안 믿어, 그 사람 변했을 리가 없어' 라고 하는 거죠. 

이런 거 보면요. 3년 전에 벌써 
다메섹의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운 일(사울 용납)을 했던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아직 사울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습니다. 근데 딱 한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바나바 입니다.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가, 일면식도 없는 사울을 교회에 추천하고 보증해 줍니다. 
이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11:24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냥 아주 순진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사람의 변화'를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을 경험해 보면, 대충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 쪽은 '사람은 절대 안 변해. 그 놈은 절대 안 변해.. 괜히 사람을 잘못해서 믿었다가 
나중에 낭패당하면 큰 일 나!'

-다른 한 쪽은, 그래도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에 희망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입니까? 
'아휴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은 변하지 않아, 사람은 안 변해!' 하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 하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겠다' 하고 믿어야 되잖아요. 

사람의 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변화시켜셔서,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걸 믿을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청년 사울)에 대해서 마음을 열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변화시킬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물론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은 절대 안 변할 거야' 어떠한 경우에도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향해서도, 우리 중에 '자녀가 너무 속 속여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힘듭니다. 나는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도 못하실 거라고 속단하기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울도 바뀌었잖아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죠. 1:8 
변화된 사울이 스스로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겁니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 했는지 23절부터 함께 읽습니다. 

9: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눈을 뜬 후 즉시로 전도했고요. 강력하게 열정적으로 다메섹에서 전도했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전도했으면, 얼마나 별나게 했으면, 사울을 꼭 집어서 죽이려고 그랬겠습니까? 

당시에 다메섹에 다른 예수의 제자들도 많았어요. 
그 사람들은 다 제쳐두고 '저놈은 죽여야 된다' 할 정도로 
뭐 한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겁니다. 

▲23절 앞에 '여러 날이 지나매' 그랬는데 
이거는 그냥 단순히 '며칠, 열흘, 보름' 이런 말이 아니고 
실제로 최장 3년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갈1:16~17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그러니 '수 일 후에'  9:23
그 기간에 사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지냈고,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가
(다메섹에서의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갈1:17절의 '아라비아'는, 우리 현대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를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아라비아는, 
다메섹 성을 벗어나, 사해 남쪽 페트라까지, 요단 동편 그 광야 전체가 '아라비아' 입니다.

(* '아라비아'라는 말 자체가  "desert or barren"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중동 사람들은 성이나 도시에 한데 모여서 살았고,
성이나 도시를 벗어나면 황량한 광야 천지이죠. 그걸 '아라비아'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근데 사울이 아라비아 3년 동안에도, 거기서 열심히 전도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9:23
아라비아에서 돌아온 사울은, 다시 다메섹에서 열심히 전도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울의 인생 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갔던 길이, 우리의 인생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앞장서서 이끌고 가려전 자에게서 →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원수였죠. → 근데 형제로, 사울 형제로 바뀌었습니다.  *'헝제 사울아'  
세 번째 복음의 핍박자로 살다가 → 그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자기도 핍박받음을 불사하는 증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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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북한 지하교회에, 교인으로 가장해 은밀히 침투한 스파이 1명 때문에, 86명이 발각 체포된 사건

1990년 초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86명의 지하 기독교인들이 국가안전보위부에 발각돼 
일부는 처형되고 나머지는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사건이 있었다고 최근 탈북한 보위부 출신의 이민수(가명)씨가 밝혔다. 
보위부내에서 ‘황해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은 근래 보기 드문 대규모 지하 교회 탄압사건이다.

이 사건의 전모는 1996년 보위부 내부 비밀강연자료에 상세히 밝혀져 전 보위원들이 참고했으며, 
체포에 공로를 세운 보위부 비밀정보원의 육성녹음테이프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당시 보위부에서는 남한의 ‘악질’ 목사들이 성경책을 밀반입 시켜 
북한 내부를 끊임없이 파고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지만 단서를 잡지 못해 혈안이 됐다. 

수십년 보위부에서 잔뼈가 굵은 여성보위원이 다리 관절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27세의 딸을 정보원으로 끌어들여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는 안악군에서 의심이 가는 지하교인에게 접근해 그에게 전도당하는 것처럼 위장해 침투했다. 
교인들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김일성 초상화도 잘 달지 않았다.

보위원의 딸은 오랜기간 공을 들인 끝에 지하 교인들의 예배장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교인들은 어두운 지하실에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예배 전에 차례로 자기 소개를 했다. 
어디 사는 누구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됐고 등등. 이 이야기를 비밀 보위원은 모두 머릿속에 담았다. 
86명의 신상명세를 전부 외울 만큼 그녀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그녀의 보고로 비밀 교회는 무너졌다. 그녀는 비밀정보원에서 정식 보위부지도원으로 승격됐고 
최고훈장인 노력영웅메달까지 받았다. 김정일로부터 금으로 된 명함시계와 컬러TV, 냉동기(냉장고)까지 선물로 받았다.

이민수씨는 북한 사회가 식량난 등으로 불안해지면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비밀리에 확산되고 있어 
국가보위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처벌이 엄중해 질수록 종교 활동도 더욱 은밀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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