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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성경 쓰기

LNCK 2024. 5. 29. 20:13

 

삶으로 성경 쓰기(Bible Writing Life) I_태승철 목사- YouTube

https://cafe.daum.net/heavendeer/RlFJ/19

 

삶으로 성경 쓰기             딤후3:14~17                ☞▣ 말씀

 

‘삶으로 성경쓰기’

영어로는 Bible Writing Life입니다.

 

이미 인쇄되어 문자화된 성경책을 필사하는 의미가 아니라,

삶으로 성경을 써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어느 교회가 “Acts 29”라는 모토를 내걸었습니다.

이유는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한 복음의 전도를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이어가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인데, 올바른 생각이고 큰 공감이 되었었습니다.

 

성경의 외연을 확장하는 범위이자 성경으로 부를 수 있는 범주는

전도나 사도행전이나 교회의 삶에 국한되어서도 안 되고,

선민 개개인의 삶의 영역 전체를 통하여 계속해서 쓰여 져야 합니다.

 

사도행전만 29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창세기도 51장이 필요하고,

모든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선민이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성경말씀이 삶에서 계속 쓰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사사기, 시편, 예언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로마서나

그 외의 다른 서신들도 계속해서 확장되어 삶에서 쓰여 져야 합니다.

     ☞마가복음17장 https://rfcdrfcd.tistory.com/15981538

 

▲성경이 쓰여 지지 않는 오늘 하루의 내 삶은

신앙인의 삶도 아니고, 선민의 삶도 아닙니다.

 

가정, 직장, 시장, 사업장, 병원, 학교 모든 곳에서

나 한 사람의 성경은 계속해서 쓰여 져야 하는데

내 삶은 성경을 쓰는 삶이기 때문이고, 성경 쓰는 삶에 전도도 있고

기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모든 가르침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기록되어 주어진 성경을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바로 성경의 내용이 확장되는 것이라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에 ‘정경’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정경’은 기독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경전을 말하는데

우리가 정경과 성경을 혼용해서 사용해도 틀리진 않습니다. 정경이 곧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정경은 ‘카논’이라는 라틴어의 ‘척도, 표준, 모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 있고, 라틴어로 그대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경으로 부를 수 있는 성경은 종교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것인데,

397년 카르타고 회의를 통해서 신약의 정경이 결정이 되고,

구약성경은 90년경에 얌니아 회의 Council of Jamnia 에서 정경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정경으로 결정이 되었다’는 것은 이 정경 외에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다 모아서 그 중에서 사도적 성격이 있거나,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고 믿어지는 문서들,

다른 성경들과 모순이 되지 않는 책들, 교회가 보편적으로 읽고 있는 책들을 골라내서 확정지은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정경에서 누락된 15개의 외경까지도 성경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또한 구약에 나오는 여러 주인공들의 이름을 사칭해서 만든 가짜 책인 위경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성경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정경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경 형성이 갖는 의미가 양날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 손에 주어져 있는 성경은 정경으로 결정한

종교회의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러한 정경 결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이유는

이단들이 구약은 성경이 아니라고 밀어붙이면서

신약과 주로 바울 서신만을 중심으로 정경 작업을 먼저 했습니다.

 

이 이단들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정경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교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원의 명확한 이해와 삶의 지침과 영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준과 척도가 되는 정경 형성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정경 형성 과정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날의 검’이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잘못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기 때문인데

‘정경으로 결정한 것은 성경이 완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경으로 결정된 성경을 표준삼아서,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민의 삶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의 내용 자체가 성경이 되어야만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경이 형성됨으로서 성경이 완결된 것으로 보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나 많은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보면 거룩한 성인으로서의 삶의 이야기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선민으로서의 삶의 실패가 있고,

선민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과정이 있는데

우리의 삶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 역시도 계속해서 성경을 써 나가는 것입니다.

 

▲정경 형성은 반드시 있어야 했지만 정경이 형성됨으로 인해서

잘못 오해하게 된 것은 ‘성경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서 계속 확장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삶은 표준과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표준과 척도’는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섭리하셔서

우리 손에 주어진 정경으로 불리는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사는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성경이 되어서

계속 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 이웃에게 읽힐 때에 이웃의 신앙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의 고린도 교회에서

아테네 선교 실패 이후에 침체 위기를 겪고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 동안 있었던 전도 여행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사도 바울이 말씀에 사로잡혔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 교회까지 올 때의 삶이

성경이 되어서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표준과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정경은 될 수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5장에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의 기본 원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성경 해석을 할 때에 우리가 꼭 붙잡아야 될 기본 원리를 알면,

왜 우리의 삶이 성경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집니다.

 

요5:39~42절에 보면 주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 삶이 성경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나오고

성경 해석의 기본 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시는데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셨던 성경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읽고 있었던 구약 성경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으며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이미 일어난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기억하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떤 구절을 만나든지

그 구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길, 즉 십자가의 달린 예수님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고,

어떤 구절이든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지금 나의 사건으로 내 눈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구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이르는 길을 찾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급은

 

이 땅을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 하나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영생을 얻는 구원은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돈, 자녀, 건강, 사업을 사랑하던 내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성경 해석은 영적인 논리를 통하여 십자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찾아내는 것인데,

그렇게 찾아내는 이유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증표가 하나님의 사랑은 기쁨과 만족과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서도 아직 자녀나 사업이 잘 되어야 만족하고,

내 건강이 회복되어야 만족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만족한다면

그것은 구원을 얻은 하나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생기는데, 온전하게 다 이루었기 때문이고,

이럴 때에 이웃을 향한 사명이 주어지게 되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오늘의 번제(매일 인터넷 설교사역)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과 구원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기쁨과 행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성경이 성경되게 하는 요소들인데, 그 요소들을 붙잡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통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

그 사랑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행복과 기쁨, 그 기쁨에 겨워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요소들이 우리의 삶에서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직장이나 가정이나 우리의 삶에는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이 네 가지 요소가

그대로 다 들어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이 네 가지 요소가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선민의 삶을 사는 것은 곧 성경을 써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경으로 채택된 성경 안에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영적 실패나

성공과 씨름하는 입에 담기 부끄러운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사건들까지 성경에 올라온 이유는

거기에서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으로 갈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유일하고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그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밖에 없다는 생각 또한 성령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잘못된 삶이라도 십자가와 하나님 사랑이라는 관점, 구원과 사명의 관점을 통해서

삶을 돌아보게 되고 그것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성공한 신앙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실패 이야기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 하지 못했고,

이웃을 위한 사명감보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므로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경을 이루는 기본 관점인 십자가와 하나님 사랑과 구원과 사명의

기본 관점에서 바라보며 나의 삶을 반성하는 것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와

주님께서 풍랑 이는 배위에서 주무실 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사장님의 핍박 속에서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일관했더니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내가 하는 일은 월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영혼들을 위해서 사명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하게 되는데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실패와 성공 사이에서 씨름하는 것과

십자가에서 매 순간 죽어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고,

그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사명이 수행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내 삶을 바라볼 때에

내 삶은 성경이 되고 성경의 연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정경이 되어서 표준과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표준과 척도에서 제공하는 기준인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구원과 사명의 기본 틀을 가지고 내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성공이든 실패든 우리의 삶은 성경으로 쓰여 집니다.

그러한 관점을 매일매일 적용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선민이 아닙니다.

돈 벌어야 성공이 아니고, 기도 많이 해서 건강을 회복시킨 것이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무당이나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유일한 길로 여기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 삶에서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죽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명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고 나는 계속해서 죽어가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으로 기쁨을 얻게 되는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되고 또한 반성하고 씨름하는 것이 성경이 됩니다.

 

이렇게 성령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관점을 가지고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의 삶이 성경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어떻게 써 나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 주 동안 계속 해보고자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렁이 같은 벌레에 불과한 우리의 삶을 성경이 되게 하시오니,

이보다 더 큰 인생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의 장, 절로 가득가득 채워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