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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tEZ4Opu1KBc
◈삶의 원칙을 가졌는가? 마4:4~11 2024.05.24.
◑끊임없이 선택과 결정속에 살아가는 현대인
자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산물이에요.
오늘도 우리가 철야에 나온 것은, 철야에 나가기로 선택을 한 거예요.
그냥 막 어쩌다가 나온게 아니죠.
결정이 쌓여서 인생이 된 거잖아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들을 해요.
그래서 그 결정들의 총합이, 오늘날 내 인생이 된 겁니다.
자, 결정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길이 정해지는 거죠.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모든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겁니다.
작은 결정들도 있죠. 어떤 물건을 살까, 말까? 먹을까, 말까?
중국집에 가면 항상 고민하는 거 있죠.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이사를 갈까, 말까? 진학을 할까, 말까? 어느 학교를 갈까?
이게 다 선택이죠. 결정을 해야 되는 거죠.
결혼을 할까, 말까?
결혼에 대한 결정을 할 때도, 어떤 사람하고 결혼할까?
이렇게 인생에 중요한 결정들이 있죠.
아주 중요한 결정이 있고, 가벼운 결정이 있고
어떤 결정은 후회를 남기고, 또 어떤 결정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결정을 따라 실패와 성공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정이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좋은 결정을 많이 하는 게 복된 인생이죠.
자 무엇이든지 결정을 해야 되는데, 요즘은 '결정장애자'들도 많다고 그러죠.
결정을 못하는 거예요. 계속 결정을 미루고 미루는 거죠.
근데 여러분 결정을 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에요.
그 결정하지 않은 그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터인데,
자기가 책임을 져야 되는 거거든요.
결정을 안 한다고, 결정을 안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이 결정을 하도록 요구 받습니다.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자, 결정을 못하는 많은 이유들도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에요.
내가 결정하고 난 다음에, 좋지 못한 결과가 있을까 봐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자꾸 너무 많이 따지고, 너무 많이 계산하다 보면... 결정을 못할 때가 많아요.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는 행동을 해야 되는데, 결정을 못하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결정한다는 것은, decision making, 이것은 일종의 모험과도 같아요.
어떤 결정을 하든, 모험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하지만, 결국은 그 결과는 내가 끌어안아야 되는 거죠.
중요한 것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밤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결정을 하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성경적)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정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런데 원칙이 없으면 어떻게 되죠?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주변의 여건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거죠.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다 어떤 원칙, 프린시플 principle 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원칙이 없는 사람은, 미래를 알 수가 없어요.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겁니다.
바람 따라 물결 치는 대로, 친구 따라 흘러가는 거죠.
오늘 우리가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우리의 자신을 맡긴다면,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거죠.
특별히 포스트 모던 시대는, 기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원칙도 없는,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어요.
'결혼' 하나만 해도
그 결혼에 대한 성경적 원칙이 없어져 버렸어요.
오늘 시대에는 기준이 없어져 버렸잖아요.
남자, 여자의 성별 기준도 없어져 버렸잖아요.
내가 남자 하겠다고 하면 남자가 되는 거고, 여자가 되겠다면 여자가 되는 거고...
▲원칙이 있으면,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런 원칙이 없는 삶을 살면
우리의 마음이 매일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갈등과 고민이 꽉 차게 되는거에요.
어떻게 결정을 해야 되는데, 그럴려면 원칙이 있어야 되는데
그 원칙 자체가 없어져 버리니까, 결정을 못 내리는 거에요.
고민과 갈등이 많아져요. 마음이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부족해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거에요.
원칙이 있는 사람은, 결정을 할 때 들쑥날쑥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 원칙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할 때, 그 원칙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는 거죠.
그래서 아직 삶의 원칙이 분명히 세워지지 않은 사람은
아직 인생에 준비가 덜 돼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성경적 삶의) 원칙이 잘 잡혀져 있는 사람은,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엘리야 시대를 보면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왕상18: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울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 머뭇거리느냐?'는 거죠.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의 머뭇거림, 이게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예요.
그런데 사실 이 머뭇거림의 현상은, 불순종의 다른 모습이라는 거죠.
그리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을 그때, 마귀가 역사를 해요.
왜 머뭇거리는가요?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아직 프린시플, 원칙이 자리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돈을 벌 때도,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을 벌기 전에 '번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 정해져 있어야 돼요.
대부분 돈만 벌려고 해요. 벌어서 뭐 할 건데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 없으면 벌어봤자예요.
마찬가지로 성공해봤자예요. 인기를 얻어봤자예요. 아무 소용없어요.
한방에 추락해버리잖아요. 그렇죠?
◑성도는 '성경말씀의 원칙'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다니엘을 보십시오. 성경에 다니엘을 보면,
바벨론에 붙잡혀간 어린 소년입니다. 자유를 빼앗긴 신분이잖아요.
노예입니다. 노예는 자기 결정권이 없어요.
그런데 다니엘은 어때요? 오, 다니엘은 전혀 의외의 모습을 보여요.
단1:8절, 유명하잖아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이게 프린시플(원칙)이에요. 다니엘은 뜻을 정했잖아요.
간단한 얘기가 아니죠. 포로로 붙잡혀온 사람이고, 주도권이 없어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벨론의 왕실의 문화를 따라야 돼요.
자기 마음대로 먹고, 자기 마음대로 입을 수 없어요. 근데 다니엘은 뜻을 정해요.
원칙을 정했다는 얘기에요. 삶에 원칙이 있었다는 말이에요. 선을 분명히 그었다는 거죠.
와 이건 대단한 거예요. 여러분, 특히 먹는 문제잖아요.
먹는 거는 매일 부딪히는 주제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씩 부딪히는 게 아니라, 하루에 세 번씩!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밥 먹을 때마다 그 원칙이 자기 자신을 지켰다는 거죠.
▲여러분 직장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술에 입을 안 대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들어간 사람과
상황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사람은... 게임이 안 되는 거죠.
상황에 따라 내가 결정하겠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원칙을, 프린시플을 정하는 거예요.
'나는 술에 어떤 일이 있어도, 목이 날아가도 나는 술은 입에 대지 않겠다'라는
원칙이 서 있어야 돼요.
뜻을 정하고 살면, 결정에 도움이 많이 돼요. 상황에 따라 결정하려는 게 아니라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 이 결정이 어디에서 온 거죠?
중요한 것은 신앙으로부터 왔어요. 다니엘이 믿었던 신앙,
그 신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원칙이 정해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아이덴티티, 거기에서 원칙이 정해진 거예요.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분명한 (성경적) 원칙이 있었고
그 원칙에 의해서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여호수아를 보세요. 그는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송별설교에서 그렇게 말하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 이게 원칙이에요.
그가 광야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을 밟은 인물이 된 것은,
이런 삶의 원칙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룻1:16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시어머니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제 각자의 인생을 가라는 거죠.
남편도 다 죽었으니 이제 함께 살아야 될 이유도 없고, 더 구속될 필요도 없어서
각자 삶을 선택하라는 거죠.
그 결정의 순간에 룻은 분명한 태도를 보이죠.
이 선택은 믿음의 선택이라는 거예요.
그녀의 신앙에서 나온 믿음의 선택!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겠다는 그 고백을 한 거예요.
여러분 이게 삶의 원칙이에요. 룻은 삶의 굵직한 원칙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나는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것이 내 삶의 선택입니다.'
여러분 나는 상황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태도를 가지면... 위험한 거예요.
그런 인생은 굉장히 불확실한 겁니다.
여러분 슈퍼마켓에 가도, 내가 무엇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고 간 사람은 간단하잖아요.
딱 메모해가지고 가서, 딱딱딱 사면 되잖아요.
근데 그냥 가서 사는 사람은... 그냥 후회하죠.
쓸데 없는 것들이 많이 살 가능성이 크죠.
여러분 바른 원칙은,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겁니다.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신뢰가 가요. 그 사람은 원칙이 분명한 거예요.
여러분 '그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은 뭘까요?
그는 상황보다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란 거예요.
좋은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남의 허물을 드러내거나 비난하지 않겠다' 이것도 원칙이에요.
'나는 다른 사람을 디스하거나 욕하지 않겠다.' 그 원칙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난 누구와도 약속에 있어서는 철저히 지키겠다'는 것도 원칙이에요.
그런 원칙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원칙을 100% 못 지킬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원칙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원칙이 없이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것은, 이 큰 원칙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원칙을 가질 수 있느냐?'
세상의 사람들은, 실수를 통해서 그런 원칙들을 배워가요.
'아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저렇게 해야 되겠구나'
또 어떤 경험을 통해서 원칙을 만들어가요.
그런데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프린시플을 배우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배우면,
우리의 삶에 가지런한 원칙들이 생기게 돼 있어요.
여러분 십계명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는 원칙들이에요. 그렇죠?
십계명은 얼마나 아주 확실하게 요약되어 있는 삶의 원칙,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아주 열 가지로 기가 막히게 짜여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성경말씀을 들으면요. 말씀 안에 굵은 원칙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줘요.
그 전체가 뭐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도록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나는 예배자로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큰 원칙들 속에서, 우리의 삶에 디테일한 원칙들,
즉 세컨더리 원칙들이 생겨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큰 원칙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 나올 거 아니에요.
우리가 인간관계의 원칙도, 이 말씀 안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의 원칙 속에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세컨더리 원칙들이 생겨요.
마7:12절의 말씀처럼,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네가 먼저 대접하라' 라는
이런 세컨더리 원칙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 큰 원칙을 우리가 이해하고 나면
-시간 사용의 원칙
-또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될 것인가의 원칙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원칙
-헌금할 때의 원칙
-주일을 지킬 때의 원칙 ... 이런 것들이 다 나오는 거예요.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갈 원칙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걸 우리가 정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의
시간의 프라이오리티 priority 를 어디에 둘 것이냐?
아침에 기도하는 시간에, 그게 그 안에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원칙들을 각자 한번 종이에 써보시라고요.
내 삶의 대원칙, 그리고 그 대원칙 속에서 나온 또 다른 작은 원칙들,
내 삶의 모든 영역에, 그런 기본적인, 베이직한, 핵심적인 프린시플을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뭐냐면
제 설교도 그런 주제를 갖고 있어요. 그냥 막 중구난방 설교하는 게 아니고요.
우리의 삶에 가지런하게,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삶의 관점과, 인생의 목적과...
그런 것들이 잡혀지도록...
설교를 계속 들으면, 그런 것들이 잘 잡혀져서
내 삶의 성경적 원칙이 딱 세워져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
그런 것들이 설교 안에 들어있는 거죠.
우리의 인생은 결정을 하는 거죠. 순간순간 우리는 결정해야 되고 선택해야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결정과 선택에는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우리의 삶의 문제는 뭘까요? 원칙이 없는 거죠.
우리의 삶에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세상이, 마귀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 나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뭐가 찾아오죠.? 템테이션이 있어요. 유혹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바른 원칙을 붙잡고 살지 않으면, 한순간에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상황들이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원칙이 없으면, 유혹에 무너집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 속에서, 원칙인 하나님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고 살지 않으면
이 세상의 안으로 들어가면, 그 상황이 우리를 흔들어 댄다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요. 우리는 죄의 유혹에 약하죠.
여러분 우리는 유혹에 약해요. 우리 안에 죄성이 완전히 해결이 안 돼 있는 우리는
유혹에 약하다고요.
유혹을 계속 받으면 안 넘어갈 사람이 별로 없어요.
유혹이 직접적으로 안 와서 내가 안 넘어가지
유혹이 계속 오면, 안 넘어갈 사람이 없다니까요.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예를 들면, 갈대아 우르를 같이 떠났어요.
근데 목초지 문제가 터져요.
여러분 유목민에게 목초지 문제는, 재산권을 지키는 데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목초지는 작은데, 아브라함의 양들, 가축들,
조카 롯도 자기의 가축들이 있었죠.
그런데 이제 목조지가 작으니까 종들끼리 싸우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제안하잖아요.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창13:9~
아브라함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내린 거예요.
왜냐하면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거친 광야에서,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결정은, 그냥 나온 결정이 아니에요.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데는
아브라함의 그 결정의 기준이 되는 말씀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지금 뭘 따라갔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름을 받고,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당장 목초지 상황으로 보면, 양보할 상황은 아니에요.
근데 그걸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삶의 원칙이 '말씀을 따라가는' 거란 말이죠.
근데 롯은 어때요? 그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말씀을 받아서 갈 때, 우르를 떠난 사람인데
롯은 말씀을 받고 떠난 게 아니라, 그냥 삼촌을 따라온 거예요.
삼촌을 따라오다가, 사람을 따라가다가, 상황에 문제가 생기니까
'삼촌을 믿었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종들끼리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은 자기의 살 길을 따라 선택한 거예요.
그 기준이 어디 있어요? 목초지예요. 기름진 땅이에요. 경제논리였죠.
그 기름진 땅을 좇아가는 것 자신의 삶의 기준이요,
선택과 결정의 모든 원칙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 롯의 마음에는, 이미 결정된 자기 기준이 있었어요.
그래서 13:10절에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말씀의 원칙이 없어요. 눈앞에 기름진 땅밖에 안 보이는 거에요.
롯의 결정 방식에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었다는 거예요.
당장 기름진 땅이 그의 선택의 기준이었어요.
그래서 롯의 원칙은 수시로 바뀌는 거예요. 결국 어디로 가죠?
13:12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의 기준은 그 눈앞에 기름진 땅이었어요.
자기의 욕망이 그것을 따라간 거죠. 욕망은 여러분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죠.
그가 결국 선택한 마지막 정착지는 어디죠? 소돔과 고모라 땅,
결국 망한 거죠. 여러분 이게 유혹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상황에 문제가 생기니까, 자기 가축을 살려야 되고, 재산권을 보호해야 되니까
그 가운데 성경적 원칙이 없으니까, 자기 길을 간 거예요. 결국 망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에게도 항상 유혹이 있는 거죠.
백화점에 물품을 구입하러 가서서, 원칙이 없는 사람은,
조금 더 업그레이드 한 제품을 보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거죠.
'이왕이면 좀 더 좋은 거 살까?' '어, 세일이네? 20 %?'
자기도 모르게 몽유병 환자처럼 카드를 긁어버리는 거죠. 원칙이 없으니까.
여러분 옷이나 물건이면 다행이죠. 우리에게 유혹이 계속 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결혼했는데도, 갑자기 다른 이성이 딱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도, 유혹은 사라지지 않아요. 신앙이 좋아도 유혹은 찾아와요.
'나는 기도 열심히 하면, 유혹이 다 사라질 거다...'
안 그래요. 철야기도 마치고 집에 와도 유혹이 와요. 유혹의 종류가 달라요.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의 마지막 부분은
광야에서 예수님의 시험을 한번 살펴보려고 해요.
이 시험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이기셨는가를 통하여
오늘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프린시플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세요.
오늘 이걸 붙잡고 가셔야 돼요.
예수님도 매일 우리가 당하는 유혹을 받으신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예수님은 배고프시기도 하고, 예수님은 육체를 갖고 계셨기 때문에
금식하시면 배가 고프신 분이에요. 공기만 마시고 사신 분이 아니에요.
유혹을 받을 수 있어요.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그 말은 뭘까요?
살아있는 동안은 유혹이 있다는 거죠.
그럼 우리가 이 유혹이 있는 세상에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때로는 이 유혹이 원칙을 깨버리게 돼요.
문제는 유혹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한다. 할지라도, 분명한 원칙을 붙들고 살아야 돼요.
자 우리는 일평생 무엇과 싸워야 돼요? 유혹과 싸우는 거예요.
그 유혹에도 불구하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가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유혹을 거두어 달라고 하면 안 돼요.
유혹과 싸우면서 성장하는 거예요.
유혹이 아예 없는 삶을 살겠다? 그건 꿈도 꾸지 마세요. 유혹이 있어요.
아무리 신앙생활을 많이 해도 유혹이 있어요. 근데 유혹과 싸우면서 성장해가는 거예요.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하는 거예요. 유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갈고 닦아지는 거죠.
그래서 유혹을 이겨야 되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되는데, 예수님은 원칙을 갖고 계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 원칙을 갖고 계셔요. 분명한 원칙!
평소에도 예수님은 어떤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는...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시는... 그래서 하나님과 시간 가지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사시는,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1. 여러분 오늘 예수님에게 첫 번째 온 시험이 뭐예요?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거죠. 언제 이 시험이 왔습니까? 40일을 주리신 상태예요.
40일을 주리신 상태에 있는 예수님에게, 마귀가 급소를 때리는 거죠.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거예요.
이때 주님의 단호한 프린시플이 나와요.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였을 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으니'
굉장한 말씀이에요. 이게 예수님의 원칙이에요.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 신8:3
대원칙이에요.
우리가 결정을 내기 전에 항상 무엇을 확인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돼요.
이게 주님에게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어요. 주님은 떡보다. 말씀을 선택하십니다.
상황은 떡이에요. 그런데 상황보다 더 중요한 프린시플인 말씀을 선택하신 거죠.
여러분 주님은 굶주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결핍의 상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의 매일의 현실에 마주치는 주제예요.
다급한 문제, 상황의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필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말씀을 잊어버려요. 말씀이 안 보여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떡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죠.
조금이라도 더 떡을 확보하려고 전쟁을 치릅니다.
떡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 그래서 이 세상을 보면, 떡으로만 사는 것처럼 보여요.
그리고 실제로 떡이 없으면 죽어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할 것은, 떡은 우리의 육체는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해요.
떡은, 즉 우리에게 주어지는 물질은 일시적으로 살게 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순간을 선택할 건가, 영원을 선택할 건가?
문제가 여기에 달려있는 거예요.
주님은 '말씀'을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았어요.
떡이 없으면 한순간 힘들지만, 말씀이 없으면 영원히 힘들어요.
여러분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떡을 아무리 쌓아놔도 행복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돈이 엄청나게 많은데 살 맛이 없어요. 살 맛이 없어...
그래서 불안해요. 허무해요. 안정감이 없어요.
너무너무 돈이 많이 있는데도 영혼이 채워지지가 않아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이 중요한 대원칙,
여러분 이거를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돼요.
말씀이 우리를 배부르게 해요.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해요. 나를 살게 해요.
오늘 이 땅에 먹을 게 부족해서 우울증, 정신병에 걸리는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될 매우 중요한 원칙이 있어요.
결정을 할 때, 우리가 말씀의 원칙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재정적인 압박이 오거나, 삶의 실패가 오거나, 위기에 몰리거나 할수록
말씀을 더 가까이 하셔야 돼요.
떡이 선택의 기준이었던 롯의 인생은, 모든 걸 다 잃어버려요.
떡만 쫓았던 그 인생은, 모든 걸 다 잃어버려요.
그러나 여러분, 조카 롯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선택하죠.
말씀을 따라 간 거죠.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결과가 어떻게 되죠?
창13:14~15절을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여러분 우리의 삶의 대원칙은 언제나 말씀이어야 돼요. 말씀을 따라가야 돼요.
말씀이 충만해야 돼요. 그러면 떡의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돼요. 말씀을 쫓아가야 돼요.
떡은 당장 주어지지 않아도, 말씀을 붙들고 살면, 떡도 나중에 따라와요.
떡만 따라가면 인생이 '떡'이 돼요. 만신창이가 돼요.
항상 떡보다 말씀을 선택하는 여러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
또한 두번째 우리의 중요한 프린시플(원칙)은 뭐예요?
마4:5~6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귀가 거짓말하는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왜 성전 꼭대기 올라가서 뛰어내리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예요.
4: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여러분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돼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 돼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하나님이 눈 감아주실 것처럼 착각해서도 안 돼요.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놓아서 '하나님 한번 해보시죠?'
감당하지 못할 일을 자기가 막 벌려놓고 '하나님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께 모든 걸 돌리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물 위를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걷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왜 그래요? 배 타고 가면 되지!
어떤 사람은 공중부양 해서 1M 뜨려고 하는데요.. 왜 떠요? 비행기 타고 가면 돼지!
쓸데없는 짓 하는 거죠.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 막16:18
복음을 증거하는 그 상황 속에서는, 하나님이 독으로부터 지켜주실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자기의 능력으 증명해내기 위해서
일부러 독을 마시면서 하나님 앞에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 평소에 독 마시면 죽어요. 왜 마셔야 되는데요? 상식에 안 맞는 거잖아요.
여러분 높은 곳에 뛰어내리면 죽는 거예요.
쓸데없는 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돼요.
▲가끔 신자들 가운데 과대망상적 환자들이 있어요. 저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게 엄청난 얘기예요.
근데 본인의 과대망상이에요.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그 세계에 빠져 있어요.
그런데 그 과대망상증에 빠져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줄로 믿고,
10년, 20년, 30년을 사는 걸 제가 봤어요.
하나님 자신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아무리 들어도 저는 황당한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물어보면, 좀 횡설수설해요.
여러분 목회자들 가운데도 과대망상적 환자들이 있어요.
교회는 몇 사람 안 되는데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 거창해요.
교인은 지금 5명인데 '백만 제자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진다는 것과, 비현실적인 것을 구분해야 돼요.
믿음은 허구의 세계를 꿈꾸는 게 아니에요.
자기 마음대로 꿈꾸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만든 꿈이죠. 자기가 정하고 하나님에게 몰아붙이는 것,
이게 다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자신이 목표를 세워놓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은 그래요. '하나님이 이거 안 들어주시면 나도 망신, 하나님도 망신!'
여러분 자기가 망신 당하는 건 괜찮아요. 하나님 망신을 왜 끌어넣어요?
왜 일 저질러놓고, 기적을 구하는 거죠?
그 기적이 나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그래서 이 두 번째 유혹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봐야 돼요.
나를 위해, 나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요.
예수님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완전히 자기를 죽이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의 여정에,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자랑하거나
우리의 인기를 추구하거나, 이런 것들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에요.
내 이름이 나거나 이런 것들이 위험한 것이에요.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영광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끌어와서, 하나님을 몰아가서
하나님을 궁지에 몰아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매도해버리는...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3. 세 번째 마귀의 유혹은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 번째 유혹이 더 무서운 유혹이에요.
사단의 의미는 뭐예요? 나에게 절하라는 거죠. 강력하고 노골적이에요.
어떻게 마귀에게 절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근데 이건 미묘한 사단의 유혹이에요.
이 세 번째 유혹은 강력한 한방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매일 유혹을 당하는 주제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 많아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자세히 살펴야 돼요.
이건 어마어마하게 미묘한 문제예요.
우리는 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죠. 근데 안으로 들어가보면, 아닐 때가 많아요.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걸 올려놓죠. 그게 뭐죠? 우상이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우상을 섬길 때는 '내가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해요.
이게 우상승배가 무서운 거예요.
우상숭배를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는 거잖아요.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실수잖아요.
'이걸 하나님이라고 하자' 아론과 그 백성들이 했던 일이에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을 섬기자는 거예요.
우상이 그런 거예요. 가려내기 어려워요. 은밀하고 교묘하게 밀고 들어오기 때문에.
▲세상은 우상으로 완전히 도배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상 숭배니까
그래서 존 칼빈이 그랬잖아요. 인간은 우상 공장이라고.
사람은 매일 그냥 우상을 찍어내요. 끝도 없이 찍어내요.
공장에서 자동차 찍어내는 것보다 더 많이 찍어내요.
그래서 팀켈러 목사님도 얘기 했잖아요. 무엇이든지 우상이 될 수 있어요.
여러분들 주변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손에 쥐고 있는 거든, 눈에 보이는 거든,
매일 듣는 것이든,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어요.
우상이 그냥 지천에 깔려 있어요. 옆에 주변에 매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게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대용품이에요. 가짜 신!
그 가짜 하나님이 우리를 점령해버리고, 지배해버리고,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들고,
그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에 우리를 딱 무릎을 꿇게 만드려는 거예요.
'무릎 꿇고 절하라'는 이 말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들이란 거예요.
그게 지배하니까, 내 삶의 모든 것들이 거기에 의해서 조종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돈,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 어떤 사람에게는 인기,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 어떤 사람에게는 지성,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다움,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 우상숭배로 가득한 세상이에요.
우리가 과연 우상숭배로부터 자유로운가요? 우리가 진짜 하나님만을 섬기는가요?
자유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가 무릎을 꿇는 곳이 어디입니까?
맘몬이죠. 사람들이 돈에 얼마나 민감해요?
이게 하루아침에 넘어가는 게 아니라, 서서히 은밀하게 넘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도 우리를 넘어뜨리는데 도가 텄어요. 약점을 잘 알고 있어요.
우리가 어디에서 잘 넘어지는가를 꿰뚫고 있어요. 나의 아킬레스 건을 알고 있어요.
근데 여러분 이게 결국은 어디로 가죠? 우상숭배!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섬기는 거예요. 자아숭배!
헨리 나우엔이 그랬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이 되는 쪽이 훨씬 더 쉬운 사람들이다'
▲자 이때 우리 주님이 어떤 원칙을 가지고 반응하셨어요?
4: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원칙,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서 절대적인, 단호한, 분명한 원칙이었어요.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의 삶의 원칙이라고 하는 것이 무너지면
우리는 한순간 우리의 현실에, 그리고 한순간 마귀의 유혹에,
한순간 내 경험에 의지하여 살다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항ㅇ상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 사명 중심으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요.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될 때,
원칙이 모호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 내 결정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말씀을 멀리하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끊임없이 내 경험에 의해서, 내 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던 내 기준과 원칙들로 인하여
혼란스러운 내 삶, 무질서한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질서를 잡아가고, 그래서 내 삶이 견고해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는 거죠. 롬12:2
아브라함이 말씀을 따라갔던 것처럼 창12:4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다만 그를 섬기고 그만을 경배하라'
이 원칙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이 원칙이 더 견고해질수록
우리는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이 분명한 원칙 안에서 내가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내 삶에 질서가 생기기 시작하고, 내 삶이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고,
내 인생을 하나님에게 복되게 하시고,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