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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손을 드실 때

LNCK 2024. 6.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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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손을 드실 때            행12:1~25         

◑도입

본문 사도행전 12장은, 사도행전 전체의 전반부를 마무리하고 
후반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중간의 장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선교 운동이, 이제 13장에서 세계로 막 뻗어 나가기 직전에 
이제 예루살렘이 주 무대가 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선교 운동이었습니다. 
행1장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 명령이 나왔고요.
'교회'라는 단어는 5장에 가서야 처음 나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성령 강림 때부터 교회라는 공동체가 탄생한 건 사실인데, 

'교회'라는 이름이 생기고 제도가 갖추어져 간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가 먼저입니까, 교회가 먼저입니까? (선교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교회라는 제도가 모양을 갖추어 가는 겁니다. 

'교회'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을 떠올립니다. 
좀 오래 다닌 분들은 '조직표'를 떠올립니다. 뭐 당회, 제직회 등

우리가 예전에는 선교 그러면, 교회 안에 많은 일이 있습니다. 
예배부, 선교부, 교육부, 봉사부도 있죠. 

선교부는 '교회의 많은 부서 중에 하나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많은 일 중에 하나다'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선교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선교입니다.
예배부, 선교부, 교육부, 봉사부가 하는 일들도, 본질적으로 다 '선교'를 지향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사실은, 선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 하시고 회복 하시는 모든 과정이.. 선교 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교회를 사용하시는데, 교회만 사용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여러분의 가정도 사용하시고, 병원 의사들의 손길도 사용하시고, 
과학자들의 연구도 사용하시고, 문화 예술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시는데 
그 중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부분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보면 선교가 큽니까, 교회가 큽니까? 선교가 훨씬 크죠. 
그래서 선교는, 교회가 주체가 되어서 
기획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로 앞서서 이끌어 가시면서, 교회가 따라가는 거예요. 
우리가 계속 이 관점으로 사도행전을 읽어 왔습니다. 

10장에 고넬료의 회심 
그리고 11장에, 그 이방인들의 회심이 보고되고 수용되는 과정이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준비 안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따라간 거예요. 
교회도 겨우 겨우 (하나님의 선교를) 따라가는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 행12장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도적) 선교를 겨우 따라가는 교회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key word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그러니까 피비린내가 나는 일이 생기죠. 그는 독재자 입니다. 
죄없는 사람을 죽였는데 백성들이 박수 칩니다. 

그가 야고보 사도를 왜 죽였습니까? 백성들이 좋아하니까 죽였어요. 
여론 조사 결과가 우호적이니까, 그걸 따라간 것입니다. 

여러분 '민심은 천심이다' 이게 다 맞는 말입니까? 
네 가끔은 맞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민심은, 오리무중이고
민심이 그냥 막 이상하게 어리석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인류 역사가 본래 그랬습니다. 

죄가 있다/ 없다가 아니라 
'백성들이 좋아한다? ... 그러면 죽여라!'

예수님도 '그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였다'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설명하죠. 행8:33

여러분 그래서 이런 공정한 재판의 시행은, 이사야 때도, 예수님 때도,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있는 문제입니다. 

이건 악성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 이죠. 
여러분, 포퓰리즘 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아주 본질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정치학에서 가장 고약한 두 존재는,
타이런트-독재자이고, 다른 한 쪽은 데마고그 라는 포퓰리스트 입니다.

그 시대에 벌써 그들은, 그 둘(타이런트 와 데마고그) 의 횡포를 파악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헤롯은, 이 두 악이 겹치는 지점에 있습니다. 
독재자인데, 포퓰리스트 입니다. 타이런트 와 데마고그

그래서 사도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여론조사 해보니 지지율이 높아요. 
그래서 '베드로도 잡아들이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끝나면 축하 이벤트로, 베드로를 처형하기로 기획합니다. 
백성들 앞에서 베드로를 처형하면서, 이걸 정치적인 이벤트로... 
'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깨끗이 차단하는 정의로운 왕 헤롯'으로
정치적 선전의 분위기를 만들고자 기획하는 거죠. 

'이제 내 지지율이 최고를 찍으리라' 헤롯의 참모들과 회의에서 교활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런데 앞서 5장에서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는데, 천사가 꺼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둔 사람들이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죠. 

혹시 모르니까 이번에는 철저히 지키자. 
그래서 4인 X 4조로, 열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베드로를 지킵니다.  12:4

▲이때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가 기댈 곳은, 주님 밖에 없었습니다. 

저쪽은 힘이 있고요. 돈이 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정치적 이벤트를 기획할 머리도 있고, 전략도 있습니다. 

여론을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갈 인적 네트워크도 있어요. 
신문도, 방송도, 법정도, 지식인들도... 다 저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드로의 인신을 구속해 놓을 군사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기도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감옥에 천사가 나타나죠. 감옥 가운데 찬란한 빛이 비췹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쳤습니다. 
원문을 보면 '강타했다' 세게 쳤습니다. 베드로가 아마 깊이 잠들었나 봅니다. 

이때 베드로에게는, 내일 죽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맡기고 평안이 자는 믿음이 있었나 봐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천사가 '일어나라' 그래요. 쇠사슬이 벗겨집니다. 
'급히 일어나라 띠를 띠고 신을 신어라.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하면서  :7~8
하나 하나 자세하고 세세하게 말하죠.
 
여러분 이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손짓, 눈짓 한 번만 해도, 베드로가 즉시 따라 나가야 정상 아닌가요?
영화에 탈주극을 보면 주로 그렇죠. 

근데 베드로의 탈출은, 하나 하나 신 신고, 띠 띠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이거는 너무 상세하게 알려주는 거죠.

그러니 베드로가 지금 자기가 감옥을 나가게 되는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알았다면, 천사가 일러주기도 전에, 알아서 척척 대응했을 것 아닙니까.

이거는 유치원생 한테나 하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천사가 옷 입는 것까지, 신발 신으라는 말까지 해 줘야 돼요? 
좀 굉장히 이상해요.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천사를 따라 가는데요.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한 블록)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알겠노라' 
이 말도 굉장히 이상해요. 여러분 천사가 나타나면, 즉시 알아야죠. (느릿느릿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환하게 빛이 비치는데, 자기 옆구를 세게 쳐서 깨우는데, 
옷 입으라 그랬고, 문이 막 몇 개나 저절로 열리고,
파수꾼을 몇 차례나 지나갑니다. 프리 패스 합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즉시 알아야죠. 그런데 한참 뒤에 지나서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무슨 말인가 하면,  :11
그때까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뭐 영문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다 상황이 지나가고 나서, 천사가 떠나고 나서, 베드로는 뒷북 치는 거예요. 
*지금 이 단락의 주제는 '더디고 느리게 깨닫고, 주님을 뒤따라가는 답답함'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죠. 주님의 행보에, 우리가 너무 느리지 말고, 보조를 빨리 맞춰야 된다는 거죠.

▲행10장에 보면, 고넬료 집에 가서요,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깨달았도다' :35 라고 했는데
'이제야 드디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퍼뜩 깨닫지 못하고, 뒤늦게, 늑장부리다가.. 결국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면, 깨달아야 돼요.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찾아오면, 그때라도 깨달아야 되는데...

그런데 고넬료 집에 가서야, 고넬료의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깨닫습니다. 10:34~35

여러분 (10장과 11장의) 두 장면이 되게 비슷하죠. 느리게 느리게 깨닫고서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게 여러분,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 주도적인 선교

▲그러다가 가끔씩 정신 차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앞서 나가시고, 하나님이 이방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가시는데,
교회는 뒤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뒷북 치는 거예요. 
뒤따라 가기는 하는데, 너무 느리고 천천히 마지 못해 가더라는 거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죠)

원어로 보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12:11
원어를 영어로 옮기면 Peter came to himself
'이제야 제 정신을 차렸다'는 거죠. 

위와 아주 비슷한 구문이 눅15장에 나옵니다. 
'그(탕자)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15:16
완전 밑바닥까지 간 거죠.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when he came to himself ESV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17

이제야 제 정신이 들었다는 거죠. 그 이전까지는 정신 없이 살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하게 살아갑니다.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정신을 차린다는 거예요. 
그때 민주주의가 조금씩 전진합니다. 

▲<가끔은 제정신> 이란 책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님이 쓴 책인데요. 
책 제목이 재밌죠. 

사람들이 다 착각하고 헤매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다가도 가끔씩 정신 차릴 때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도 대부분의 시간에는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가끔씩은 정신 차릴 때가 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서 가시는데, 교회와 성도는 계속 해맵니다. 
엉뚱한 데서, 막 그냥 에너지를 허비합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정신 차릴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다 라고 부릅니다.
보니까 전부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물론 맞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확한 말은 아니에요. 성령이 앞서 나가도, 그걸로 전부가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이 따라가야 돼요. 

비록 뒷북 치더라도, 그래도 인간이 따라가는 그림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중요하지만 '성령행전'이 아니고 '사도행전' 이에요. 
사람이 선교해야 돼요. 뒷북 치는 거라도, 뒷북 이라도 치면서 따라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도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서 사도행전 가르칠 때, 
'성령행전이 아니고 뒷북행전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적) 선교'가 중요하지만, 
교회의 선교가 꼭 필요한 거예요. 
이게 둘이 서로 싸우는 대립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를 앞서가고, 
교회 선교를 반드시 포함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전혀 모릅니다. 사람은 똑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헤겔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미네르바(부엉이)는 서구 문명에서 그리스 시대 때부터 지혜의 상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해가 지고 나야, 즉 상황이 다 끝나고 종료되어야
'아~ 그건 이래서 이런 겁니다' 라고 설명할 수 있는... 그게 철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자에게 '앞으로 이 시대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하고 묻지 말라는 거죠.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는 지혜가 없습니다. 

헤겔이 살던 때는, 철학자가 최고로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죠. 
지금은 어느 학문이 가장 똑똑할까요? 뭐 과학자들도 똑똑한 분들이 많지만 
인문사회 분야의 학자들이 모이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입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라는 말 그대로 예요. 
*It's the economy, stupid! 빌 클린턴이 1992년 선거유세 중에 써 먹었던 구호

여러분 경제학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현상에 반짝반짝 합니다. 
얼마나 파악하는데 명수들인지요. (근데 미래는 모릅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살던 우리 동네 안에는 노벨상 받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중에 경제학이 최고로 많았습니다. 

얼마나 많은가 하니, 우체국 가서 줄 서 있을 때, 앞 사람하고 막 잡담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였어요.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 또 노벨상 수상자가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꽤 그 동네에 노벨 경제학 수상자들이 몇 분 살았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요? 

세계적인 경제 전문가니까, 주식 투자하면 그냥 돈을 막 벌면서 떵떵거리며 살까요?
아뇨. 제가 보니까, 그들도 그냥 밥 먹고 살아요. 그냥 평범하게 살아요. 

여러분,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라 하더라도
다음 달에, 내년에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모릅니다. 

이론은 이론입니다. 이론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요. 
인간 중에 최고 수준의 이론가라도 
이 변해 가는 현실의 역동성을 따라 잡기에는 대단히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학자의 제일의 덕목은 똑똑한 거 아니에요. 머리 좋은 거 아니에요. 
성실한 겁니다. 근데 성실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가 하면,
즉 학자의 진짜 제 일의 덕목은 겸손한 거예요.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인정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그냥 막 다 안다' 하면서, 아는 척 하는 사람은 
사이비일 확률이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그걸 늦게라도 깨달으면 다행이에요. 
뒷북이라도 제대로 치면 다행인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응겁결에 교회도, 하나님의 선교를 뒤따라갑니다.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어요.
그래서 응겁결에,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정신 없이 따라가는 겁니다.
근데 이렇게라도 따라가면 다행이라는 거죠)

그렇게 겨우 깨달은 베드로가, 천사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옥에서 풀려난 후에,
마가요한의 어머니 집으로 갑니다. 거기에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죠. 

12: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풀려나는 순간에, 성도들은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성도들이 뭘 기도했을까요? 베드로를 살려 달라고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주님께 맡기는 기도, 
'순교를 하게 되더라도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야고보도 순교 했잖아요. 베드로는 뭐가 다릅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라고 특별 대우 하셔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인도하실 수는 있습니다. 

처음에는 맡기는 기도 했는데, 기도가 약간 변경됩니다. 
'아 이거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왠지 하나님 도와주실 것 같은 확신이 들 때가 있죠.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모르고 기도합니다. 
내 열망이 너무 강하면, 이걸 하나님의 뜻인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형제가 자매를 짝사랑 했습니다. 
너무 너무 그냥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뿐이었어요.
그래서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계속 기도하면, 막 확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짝 같아요. 그거는 백 퍼센트 거짓 확신입니다. 
아직 자기 열망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할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어야,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형제가 먼저 자매를 내려놔야죠)

그리고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응답주실지 몰랐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도하던 성도들도 그랬어요. 뒷북 쳤잖아요.

성도들은 기도해 놓고도, 베드로가 막상 감옥에서 나오자... 믿지 않고 놀랐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알면 다행이에요. 뒷북이라도 치면 다행이에요. 
우리는 대부분 (주님 뜻을) 모른 채로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줄 믿습니다. 

12:16~17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7절의 야고보는 주의 동생 야고보 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였죠.

'베드로가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라는 말은, 
지금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거죠. 

헤롯 한 명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이 지역 주민들 다수가 위험한 사람들이에요. 
예루살렘이 이미 그런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서 스데반의 순교도 있었고, 며칠 전에 야고보 사도도 순교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특이한 것은, 베드로같이 중요한 인물이 어디로 가면, 
안디옥 으로 갔다, 뭐 구브로로 갔다... 이런 말이 나와야 정상인데, 
그런 말이 안 나와요. 

사도행전은, 사도의 행적을 보통은 충실하게 전하는 편인데 
그냥 '다른 곳으로 가니라' 무슨 말입니까?  :17

'베드로가 어디로 갔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베드로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꽤 영웅적인 면모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번 설교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그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자가 낫고, 
죽은 사람도 살렸어요. *다비다

대단히 영웅적이지만, 이 사도행전은 베드로 개인의 영웅담이 아니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그냥 훅 사라졌어요. 이제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할 때가 된 겁니다. 
그러면 사라지는 거예요. 

자세하게 기록하자면, 베드로의 영웅적인 면모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버티고, 허둥지둥 헤맨
어쩌면 초등학생 보다 못한 기억도 많아요. 그게 인간의 선교의 기록이에요. 
인간은 실수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주도해서 선교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실수하면서도, 느릿느릿 하면서도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잘한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의 교훈

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이웃 나라 두로와 시돈의 사신들이, 헤롯(아그립바 1세) 왕에게 볼 일이 있어서 
사절단으로 지금 헤롯을 찾아왔나 봐요.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헤롯은 뭐 은으로 만든 대단히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오는데 
햇빛이 비춰서, 반사되어서 휘황찬란 합니다.

(그 날이 또 로마제국의 승전기념일인가 해서) 헤롯 왕이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데,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헤롯은 최고의 순간에 최저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군중들이 왕에게 빈말로 아부를 한다고 해도, 
헤롯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야죠.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다가, 고넬료가 자기를 신처럼 대우했을 때
즉시로 '나도 사람이라' 하고, 고넬료의 경배를 만류, 제지했습니다. 10:25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행14장에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막 병을 고치고 그러니까요.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했어요. 헤르메스는 대변인인데, 바울이 설교했던 모양이에요.

14:13~15 '시외 (도시 바깥의)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는 단호하게 선을 그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지나치게 나를 높일 때... 대단히 조심해야 됩니다.
대척점으로 높아진 만큼 반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헤롯은 슬그머니 용인하고 즐깁니다. 뒤에서 부추겼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뭐 내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죽죠. 

본문의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인데,    
마2장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유아 살해를 명령했던 왕이죠.
(행26장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 그의 아들)

▲사실 아그립바 1세는, 헤롯 가문이었지만 호칭은 그냥 '아그립바' 였어요. 
사람들이 '헤롯'이라고 잘 부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른 헤롯 왕처럼 대왕도 아닙니다. 사실 분봉왕이에요. 
헤롯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자녀들이 유대 땅을 나누어 통치했죠. 그래서 분봉왕입니다.
분봉왕은, 우리가 아는 의미로 '영주'에 가깝습니다. 

근데 굳이 여기서, 저자 누가가  '헤롯 (왕)'이라고 격상하는 이유는,
1) 마2장의 헤롯 왕과 본문 행12장의 아그립자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거예요.

 

누가가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쉬운 말로 하면 '그 놈이 그 놈이다' 라는 거죠. 
다른 사람인데 '그 놈이 그 놈이다' 라는 거예요. 

헤롯 대왕은 유아살해를 명령했던 그 이미지를, 
본문의 이 사건에 투영시키는 것입니다. 이 자도 헤롯대왕과 똑같은 살인자라는 거죠.

그리고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의 이미지, 
모세가 태어날 때 유아들을 살해 했던 그 이미지와도 겹쳐 있습니다. 

그냥 어떤 한 권력자가 아니라, 잔인한 독재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로마 황제도 포함됩니다. 

2) 그런데 누가가, 분봉왕 아그립바를, 헤롯 (대왕)으로 격상시킨 더 중요한 이유는, 

'로마 황제에 대한 경고'를 복선으로 깔고 있습니다. '헤롯 왕을 보라'는 거죠! 

 

여러분 마태복음도 아마 AD 80~90년에 기록됐을 거에요.
AD 70년은 로마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잔혹하게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때 아기들까지 살해했습니다. 

그 베스파시안 황제와 그 후손들, 왕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겨냥(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본문의 아그립바처럼 된다는 거죠.

여러분 사도행전 12장의 이 헤롯 이야기도 
사실은 헤롯 아그립바 1세 개인이 아니라 
자신을 신격화 하는 권력에 대한 경고입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황제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이 아니에요. 
AD 80년 혹은 90년 정도에, 로마, 안디옥,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수십 년 전에 유대 라는 조그만 지역에 영주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까불다가 죽었고 어쩌고 하는 게 관심이 있었을까요? 

역사가는 언제나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의 유익과 교훈을 위해서, 
독자가 관심 가질 만한 일을 토대로 역사를 씁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은 데오빌로 라는 이방인에게, 로마제국에 사는 사람에게 
본문의 헤롯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로마 황제를 겨냥한, 우회해서 날리는 경고였다는 거죠. 당시 황제숭배가 유행하고 있었거든요)

이방인 인데, 로마 제국의 사람인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알고 나면, 스스로를 신격화 하는 그 교만한 로마 황제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 질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헤롯처럼 죽는다는 거죠!

▲본래의 로마는, 공화정 때부터 통치자를 신격화 하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어요. 
'통치자는 그냥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하는 거지, 누가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커지면서 제국이 되고 나니까, 
이집트, 페르시아, 소아시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기 왕을 신으로 섬겨왔거든요. 그 문화가 섞이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와서 자꾸 로마 왕을 신격화 하는 겁니다. 
로마 황제들이 처음에는 거부합니다. 

조금 있다가는 거부하는 척 합니다. 점점 크레센도 되는 거죠.  
그러다가 슬그머니 신의 자리에 오르는 거예요. 나중에는 조장하기도 하고요. 

여러분, 그리고 급기야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황제를 예배 하지 않으면 
죽이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의 상황입니다. 
사도행전도 대단히 비슷한 시대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로마가 나름 '황금시대'라고 자랑할 만한 
건덕지가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영주 헤롯 아그립바 1세(본문의 헤롯)의 시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어요. 
여러분 보세요. 구약에 보면, 유대 민족은 늘 주위에 얻어터지는 민족이에요. 
침략당하고, 이방인들 누가 쳐들어온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벌벌 떨고, 고개숙이고, 막 그냥 당하면서 살아갔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까 옆나라 두로와 시돈까지 와가지고 
자기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할 때 조심해야 돼요. 
잘 나갈 때 자기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벨 에포크' 라는 말을 아십니까?  *불어, 아름다운 시절, 좋은 시절
19세기 중엽부터 ~ 1914년까지 유럽, 특별히 프랑스 중심으로
나폴레옹의 혼란 이래로, 이제 비스마르크가 '앞으로 전쟁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 
그러면서 인류 문화가 많이 발달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찰스 다윈이나 프로이트가 이 시기에 활동했고요.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달, 수세식 화장실, 전화, 전보, 철도, 엘리베이터, 
자동차, 비행기까지 ... 이 시기에 대충 조악하게나마 시작됐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기에,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벌렁거렸는지요. 
이제 인류의 자존심이 그냥 완전히 하늘을 찌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거의 끝날 무렵인 1912년에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죠. 
이 배가 처음 만들어서 광고했을 때,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그 화려한 외형, 
최상의 써비스...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습니다. 

'이 배야 말로 인류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배다.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데 첫 항해였어요. 일주일 동안 가는 길에 5일째 침몰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빙하에 부딪혀서 침몰하죠. 승선인원 1/3만 목숨을 건집니다. 
(총 2,224명 승선, 사망 1,514명, 생존 710명)

이것이 당시 서구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요!
그냥 큰 배 한 척 침몰한 게 아니고요. '서구 문명이 침몰한 게 아닌가?' 충격을 받았어요.

벨 에포크 시절에, 모든 분야가 막 뻗어나가고 있을 때,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인간의 교만을 발견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했죠)
그리고 2년 후 1914년에,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죠. 

여러분, 그렇게 발달했던 과학 문명, 기술이 
이제는 1차대전 때 전부 다 사람을 죽이는 데 쓰입니다. 지옥 같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좋았을까요?
여러분 타이타닉 영화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얼마나 심각한 불평등이 그 배 안에도 있었는지요. 

당시 세계가 그랬습니다. 프랑스와 유럽의 황금 시대는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렸는데, 
그들이 가난한 나라를 수탈함으로써 제국주의가 가능했습니다. 

그럼 유럽의 선진국 안에서는 자기들끼리 잘 살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프랑스 대혁명 (1789)이 지난지 1백 년이 지났어도, 별로 나아진 게 없었어요.
 
원래 프랑스 대혁명이, 농민들이 '못 살겠다. 우리도 좀 먹고 살자' 그래서 일어난 거잖아요. 
근데 여러분 이상하게도 그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빈부 격차는 더 심해졌습니다. 

1차세계대전 직전에 프랑스의 상위 10%가, 
프랑스 전체 국부의 80~90%가 집중되어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천국' 이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의 벨 에포크, 로마 제국의 벨 에포크... 
둘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벨 에포크의 판을 펼쳤던 비스마르크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 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 받을 바보 짓이 폭발을 일으킬 거야...' 

이게 실제로 비스마르크가 말했는지는 아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했다면, 
이분이 1차세계대전이 사라예보에서 우발적인 사건으로 일어나기 훨씬 전에 죽었기 때문에, 
뭐 예언 같은 말일 수 있죠. 

어쨌거나 이 말은, 인간이 만든 이 화려한 번영이 
여러분 '화약고 위에서 담배 피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이 저주 받을 바보 짓' ... 인간의 교만이라는 거죠. 
인간의 허약함, 이 문명의 파괴성을... 사람들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로마 제국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읽을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행12장 서두에,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처형하는 이벤트를 기획한 게
'유월절 후에' 라고 했잖아요. :4
(정확하게 말하면 '무교절 후에'인데, 유월절과 무교절이 연이어 진행되므로
당시 사람들은 무교절도, 유월절에 포함시켜서 '유월절'로 말했다고 합니다)

유월절이 어떤 날입니까? 출13:9~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셨던 때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가만히 계시는 것 같지만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손을 드셔서 
강한 자를 내리치시고, 정의를 회복 하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헤롯이 심판 당해 죽음) 기록입니다. 
여러분 헤롯 혼자 교만했고, 헤롯이 혼자 어리석었습니까?

아니에요. 헤롯 혼자 죽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박수 쳤잖아요. 
사도들을 죽이는 일에 '죽여라 죽여라!' 동조했잖아요. 

여기서 오랫동안 참으시던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 
이것이 일단락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13장에 보면 안디옥 중심의 선교가 나오는데 
본래는 예루살렘이 그걸 했었어야 돼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시온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나갔어야 되는 겁니다. 사2:2~3

그런데 예루살렘이 그 역사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행1:1~12장까지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제 역사가 벌어지죠. 
주역은 베드로 입니다. 

행13장부터 안디옥이 중심이 되고, 그 다음에 로마까지 갑니다. 
주역은 바울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베드로도 무대의 중앙에서 사라집니다. 

 

이제는 그 자리에 바울이 등장합니다. 
새로운 시대, 세계를 향해 선교해야 되는 시대에 준비된 사람은 바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앞서 가시고 인간은 따라가는 겁니다. 
때가 되면... 또 그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넘어가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겨우 겨우 하나님의 역사를 뒤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순종함으로 뒷북이라도 쳤기 때문에 
생명의 길로 가게 된 줄 믿습니다. 

반면에 헤롯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흥황하여 더하더라' 12:23~24

네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입니다. 
헤롯이 손을 들었지만,    12:1
하나님이 손을 드셨을 때   12:23 '주의 사자가 (손을 들어)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그 헤롯은 그냥 아무 존재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롯은 그냥 망했죠.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했습니다. :24

여러분 12장 처음에 보면, 베드로하고 헤롯이 싸우는 것 같잖아요. 
성경은 '베드로가 이겼다. 베드로가 승리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했다'고 말씀했습니다. :24

성령이 이끌고 가시는 것 같은데, 심지어 '성령의 승리'라고 말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했습니다. 할렐루야! 

인간은 가다가 실패합니다. 넘어집니다. 때가 되면 사라져야 돼요. 
여러분 인간은 복음을 전하면서 대우를 받을 수도 있고, 야고보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승리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아주 중요한 교훈은 이겁니다. 
'승리를 말하되, 승리를 확신하되. 승리주의에 빠지지 않는 겁니다.' 
'Triumph, not Triumphalism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은혜를 주실 때에
혹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귀하게 사용하실 때에 
'그래, 내가 한 것, 내가 이루어 놓은 게 이렇게 위대한데...' 
라고 하는 바로 그 태도, 그게 승리주의 예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 복음의 승리를 확신하고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결코 나의 승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이어야 합니다. 
내가 이기고, 내가 잘 나고, 내가 모든 중앙에 서고... 그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한다면, 
나는 어디에 있든지, 언제까지 나를 쓰시는지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