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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도하고 귀환하다

LNCK 2024. 6. 20. 18:2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도하고 귀환하다   행14:1~28    인터넷설교 녹취,정리

오늘 본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아                  
이고니온으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가 
그 이후 루스드라,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더베는 1차선교여행의 종착지이자, 반환점이었어요.

이제 1차선교여행을 잘 마무리하고, 
그들을 파송 했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이들의 첫1차선교여행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약 2240킬로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대장정 이었어요. 그리고 이들의 첫 번째 선교여행은 
그 이방 땅에 수많은 제자들을 세우고, 
또한 그 이방 땅에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지는 놀라운 열매를 맺는 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1차선교여행은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바울과 바나바 속에는 무엇이 있었길래 
이런 엄청난 일을 감당해 냈는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교훈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1. 그들 안에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인간 속에 있는 불, 특별히 열정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열정이란, 어떤 대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 대상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놓는 헌신의 행위, 
이것이 결합된 상태를 '열정'이라고 하죠.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열정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는 이방인들이 우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마치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행3장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자를 일으킵니다. 

14:11~13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 이방인들의 이방신에 대한 열정
바나바는 제우스, 그리고 바울은 계속 설교를 하고 있으니까 
그의 아들이자 대변자인 헤르메스로 추앙하면서
'신들이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 오셨다' 이렇게 높혔어요. 

그때 시외 (시 바깥의)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바나바와 바울에게 와서, 제사, 경배하려고 했던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 대해서 
얼마나 열정적인가를 봅니다. 이방인들의 우상을 향한 열정!

이렇게 사람을 신으로 추앙한 것은, 당시 헬라인들의 '반신반인 문화'에서 기인합니다.
즉 부모 한쪽이 신이나 여신이고, 다른 한쪽이 인간이라는... 그런 문화가 있었어요.

2) 유대인들의 유대교에 대한 열정
근데 또 한편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신념을 향한 열정을 또한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게 거슬리는 거예요. 

그들에게 있어서는 율법과 성전이 우상화되어 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예수를 전할 때, 필연적으로 
'율법을 함부로 말한다, 성전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한다' 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왜냐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지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런 복음의 이야기들은, 
유대교의 율법과 성전 숭배에 관한 신념과는 맞지 않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고니온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5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신으로 추앙받는 현장은 루스드라 입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원정 온 유대인들,
그리고 이고니온에서 원정 온 유대인들이 합세해서
루스드라로 와서
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기절시킨 거예요.
죽은 줄 알고, 시 외곽으로 (질질) 끌어가서 버려버린 거예요.
 
바울의 전도여정이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 였는데,
바울이 전도한 곳마다 믿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들은 원정도 불사했습니다.
마치 다메섹으로 원정가던 사울의 옛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참고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 까지는 160킬로,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는 120킬로인데,
그 먼 거리를 유대인들은 원정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 잘못된 열정 때문에! 

3)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을 향한 열정
바울과 바나바가 1차선교여행을 움직여 나갈 때,
어디로 가라고 지시를 받고 가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가라' 하고는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고 는 말씀 안 하셨어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던 것처럼, 
사실 이들도, 파송은 받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들은 이제 매일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 되는 그러한 (답답한) 상황에서도...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버가에서, 타우루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던 그곳에서, 
마가는 '이거 도저히 못하겠다. 너무 힘들고 어렵다' 해서 돌아가 버렸어요. 

바울과 바나바가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사기가 저하되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좋은 일만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위협과 협박, 그리고 조롱과 박해,
이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멈춰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 19절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먼 길을 원정 온 유대인들이
그곳 루스드라이 유대인 무리들을 충동해서, 그들과 합세해서
바울을 돌로 죽일듯이 내리쳤습니다.

그 때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스데반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바울이,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돌로 한 번 맞고'  고후11:25
아마 이 때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이 광범위하게 갈라디아 지역이거든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이후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6:17
이 말도, 루스드라에서 돌로 맞아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사건을 염두에 두고 했던 말입니다. 

이때 바울은 아마 아주 중상을 입었던 것 같아요. 당연히 그랬겠죠.
폭도들은 바울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으니까요. 

14:20 '제자들이 (죽은 바울을)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이 일어나' 
'일어나'는 헬라어 동사로 '아나스타스'인데, 
부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부활이 명사로  '아나스타시아'죠.

물론 문자적으로 '누워있다가 일어나다'는 뜻이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수많은 경우에, '죽음에서 부활하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제자들이 이제 버려져서 누워있는 바울을 둘러 섰어요. 
바울을 위해 기도했겠죠. 그리고 매우 슬퍼했을겁니다. 
제자들도 '진짜 바울이 죽었다'라고 생각했을 그 때에 
기적적으로 바울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신 거죠.

그래서 이 구절을 놓고서, 어떤 사람은 
'바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 사건이 1차선교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분수령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차선교여행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아래에 자세히 설명)

근데 여러분, 돌에 맞아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칠 정도로 맞았으면 
엄청난 중상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20b절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이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거기서 자기가 돌에 맞았거든요. 또 폭도들이 일어나서 돌로 치면 어떻게 합니까?

(*어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멀리서 돌을 던지는 게 아니라,
한 사람씩 차례로 가까이 다가와서, 손에 쥔 돌로 내리찍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엄청난 열정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인 그 도시로, 담대하게 다시 돌아가는 열정!
완전히 '죽으면 죽으리이다!' 각오로 나아간 것이죠.

다행히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울이 승리한 것이죠. 
바울은 '핍박과 돌로 침과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열정'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다음날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로 갑니다. :20
더베는 1차선교여행의 종착지, 반환점입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져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200km만 더 가면, 바울의 고향 다소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곳 더베에서 오랜 기간 머물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2.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부흥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근데 여기서 지도를 잘 보셔야 됩니다.
21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앞서 전도했던 도시들을 거슬러 돌아간 것입니다.

더베 (반환점) → 루스드라  → 이고니온 → 비시디아 안디옥 → 버가 .. 이런 여정으로 
왔던 길을 그대로 거꾸로 되돌아 간 겁니다.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는 직선거리, 최단 거리를 버리고,
일부러 도시, 도시들을 들러서 갑니다.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돌아가는 길에, 그 성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바울이, 핍박과 죽음에 굴하지 않고,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그 도시들에 다시 찾아가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비로소) 주께 돌아오고, 제자가 되는 놀라운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내용이 21~23절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그러니 1차선교여행의 실제적 열매는, 돌아오는 길에, 맺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죽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서
더베 → 루스드라 → 이고니온 → 비시디아 안디옥에 놀라운 부흥이 있었고,
(처음에 그 도시들을 방문했을 때는, 큰 열매가 없었어요)

*루스드라는 2차선교여행 때 디모데를 만난 곳이죠.
지금 본문은 1차선교여행 때, 바울이 돌에 맞은 곳이고요.
이때 큰 상처를 입은 바울이, 디모데의 어머니 집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https://rfcdrfcd.tistory.com/15981441

얼마나 열매가 많았든지, 바울과 바나바는 장로들(리더)까지 세워야 했습니다. :23 
여기도 '장로'들을 처음으로 세우는 지점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그 위기와 두려움에 굴하지 않으니까,
선교에 실제적인 열매가 생겼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매가 많았던지, 장로까지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사람이라면 다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열정, '와 저렇게까지 잠도 안 자고 돈을 버나?' 
어떤 사람은 쾌락에 대한 열정, 
오락에 대한 열정, 
취미활동에 대한 열정, 
드라마에 대한 열정, 
자기 자식에 대한 열정, 
자기 꿈에 대한 열정... 사람들은 다 열정을 가지고 사는데, 대상이 다를 뿐이에요. 

'그 열정으로 불타 오른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열심입니다.

사실 사람 안에는 모두가 다 열정이 있습니다. 근데 그 대상이 다를 뿐이에요. 
우리는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의 열정을 보면서 놀라지만,
근데 바나바와 바울은, 우리를 보면서 놀랄 겁니다. 왜요?
우리가 가진 열정이 엉뚱한 열정이거든요.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목숨과 생명도 아끼지 않는 그 열정에,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에 축복해 주셨고, 구령의 열매들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혹시나 오늘날 '세상적 열정' 때문에, 불만족이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정, 복음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 
세상적 열정이라면, 그 예를 위에서 들었죠. 돈, 쾌락, 명예, 자녀, 취미활동 등

그것은 결코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물을 저장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와 같고요, 렘2:13
그것은 '시지프스의 바위' 와도 같습니다. 
그럼 나는, 결코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대상을... 만족해 보려고 시도하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아무도 이루지 못한 만족을, 내가 이루어보겠다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솔로몬도 이루지 못했던 세상 만족을, 
내가 한 번 호기 있게 이루어 보겠다고, 열정을 다 쏟아부어 내 삶을 불태우겠습니까?
시간 낭비, 정열 낭비, 자원 낭비로... 결국은 후회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3. 바울과 바나바의 한 영혼을 향한 사랑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이후로,
계속해서 박해를 받고 있고 피신해야 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이고니온을 거쳐 루스드라에 왔는데, 
루스드라는 회당이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열 명만 모이면 회당을 세우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회당이 없을 정도로 시골 작은 마을이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피신하던 바울과 바나바가
인적이 드문 깡촌으로 지금 도망간 것입니다. 
루스드라는, 뭐 다소나 비시디아 안디옥같은 큰 도시가 아니었어요. 

근데 거기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어요. :8

9 '(그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회당이 없는 곳이니까, (회당이 있었으면 들어갔을 텐데, 그런 언급이 없으니까)
바울이 노천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듣는 사람들 중에, 그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을 주목하고 보니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바울이 본 거예요. 

'아 저 사람에게 예수가 필요하다.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면 바울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뭐 영적으로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설교자도 이렇게 앞에서 설교를 하다 보면,
듣는 성도, 안 듣는 성도... 다 눈에 환하게 들어옵니다. 

설교내용을 필기 하는 척 하면서, 무슨 낙서하는 사람도 있고요, 다 보입니다. 
바울은 그 장애인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이 들어서,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그 장애인의 간절한 믿음에, 바울의 영혼을 향한 사랑이 더해진 거죠.
그 결과 그가 일어서서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위에 중풍으로 다리를 못 쓰다가, 가끔 병이 회복되어
다시 걸어다니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병원에서 무슨 '재활운동' 같은 거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차츰 차츰 더디고 느리게 회복되는데,

성경의 기적은.. 정말 기적인가 봐요.
나면서 일평생 한 번도 걷지 못한 사람이 걸으려면,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재활을 해서, 근육을 키으고 해서 걷는 게 아니라,
그냥 그날로 금방 걸어버려요. 기적과 재활은 다른 차원인가봐요. 

이 소문이 작은 루스드라 마을에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근데 마을 바깥에 (신전에) 있던 제사장이, 제사용으로 쓸 소를 끌고 와서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막 뭐라고 말했습니다.  :11    주1)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에는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내용인 즉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추앙하고 경배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걸 깨달은 바울과 바나바는 즉시로 옷을 찢으면서, 그 경배를 제지시켰습니다. :14

그러면서 바울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15~17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위 설교는, 바울의 공식적으로 두 번째 기록된 설교이고, 
이방인을 향한 첫 번째 설교였어요.  *첫 번째 설교는 비디시아 안디옥 회당에서 

근데 이 설교를 보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설교라서 그런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전한 설교와 다르다는 것을 보게 돼요. 

왜요? 유대인들은 말씀도 알고, 율법도 알고, 다윗도 알고,
하나님이 여호와 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언약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전할 때는, 언약을 중심으로 쭉 설교를 했습니다. 

근데 이방인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르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맞추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결실하게 하시는 하나님 등 
이방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빙 둘러 안디옥으로 돌아간 바울과 바나바

27 '거기서 (앗달리아에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1차선교여행의 종착역이자, 반환점은 더베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여기가 다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파송교회에 돌아온 바울은, 1차선교여행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그 즈음에 '이방인들이 믿고 돌아오는 문제, 그들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되는가?' 하는
주제를 놓고,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립니다. 행15장

공의회 결과,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유대인의 할례와 율법(절기법, 정결법 등)을 지킬 의무는 없다고 확정됩니다.

바울이 1차전도여행 때 전했던 복음과 결이 같았던 결정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뻐서, 즉시로 그 예루살렘에서, 편지를 써서 
갈라디아(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보낸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최초의 바울서신이 탄생된 것이죠.

근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최종 목적지, 종착지 더베에서 동쪽으로 200km만 더 가면, 바울의 고향 다소가 나옵니다.
그리고 또 약 220킬로 더 가면, 파송받은 안디옥 교회가 나옵니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버려두고,
1차선교여행에서 전도한 지역들을 돌아보기 위해, 먼 길을 다시 되돌아온 것입니다.

 

자동차로 도는 게 아닙니다. 걸어서 도는 것입니다. 굉장한 열정입니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열정입니다. 거의 1천 킬로를 다시 걸어서 되돌아온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의 열정도 크고,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 극우파들의 열정도 엄청나지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겠다는 바울과 바나바의 열정은 더 크고 굉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던 거죠.

그 열정 위에, 하나님이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그들은 1차선교여행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또한 교회를 세우고, 장로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건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버가로 돌아옵니다.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말씀을 버가에 전하고'
바울이 1차선교여행을 가는 길에,
구브로 섬에서 앗달리아(항구)를 거쳐서 버가로 가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어요.

그런데 그 때는 무슨 이유인지, 버가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래서 버가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건너 뛰었다는 것입니다. 거기 오래 머물지도 않았죠.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돌아오는 길에,
버가에 들러서, 복음과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 1차선교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사도바울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서 거의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다시 보시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만약에, 바울이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가 돌에 맞고 그냥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면,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제 갓 믿었던 사람들이 '아 이거 어떡하나? 두려운데?'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루스드라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갔어요. 
그때 그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고 이 믿음에 꼭 머물러 있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22 

바울이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자기를 돌로 친 사람들에게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핍박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용기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영혼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새신자인 그들을 돌보러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서, 갓 신앙생활을 시작한 영혼들입니다.
그들 영혼에 대한 사랑, 꼭 루스드라 뿐만 아니고
바울은 방문하는 모든 도시들마다,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게 동력이 되고, 원인이 되어... 살인적인 이동거리를 소화해 내면서, 전도한 것입니다. 

이런 영혼에 대한 사랑을, 우리 각자가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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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루가오니아 방언
원래 갈라디아 사람들의 조상은, 유럽의 고울(프랑스, 독일)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 일부가 갈라디아 산악지대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 지역을 '갈라디아'(고울 사람들의 지역)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들 원래 방언이 또 있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