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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올바른 반응

LNCK 2024. 6. 20. 20:09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638879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올바른 반응     출14:1~14      2014.11.30.  <섭리, 경륜>

 

서론

 

70명이었던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한 이후 430년을 지나면서

200만 명이 넘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되었으니

아내와 자녀의 수를 합치면 20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430년을 사는 동안 요셉을 아는 바로가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교적 평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를 모르는 바로가 등장하고부터는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시고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1월을 아빕월이라고 하는데, 출애굽은 아빕월 14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정월 14일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는 장자와 백성들의 첫째 아들을 모두 잃는 슬픔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께 항복하고 출애굽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출12:3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라암셋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라암셋은 오늘날 이집트의 멤피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숙곳이었습니다.

숙곳은 ‘짐승의 우리’라는 의미인데, 숙곳에서 북동쪽으로 걸어가면

불과 10일도 걸리지 않는 가나안 땅과 가까운 지역입니다.

 

신1:2절에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하룻 길이었더라”

호렙산에서 출발해도 11일이 걸렸다면

숙곳에서 출발했을 때, 10일 내에 갈 수 있는 거리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출13:17절에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북동쪽 길은 애굽의 요새들이 있고 블레셋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는 도중 전쟁을 치러야 할 가능성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보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까봐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원래는 숙곳에서 북쪽을 향해 가야 하는데, 남쪽에 있는 에담으로 내려갔습니다.

출14: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여기 ‘돌쳐서’라는 것은 ‘돌아가라’(Turn)는 의미입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바다와 믹돌 사이의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로 가라는 것은 홍해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대륙과 시나이 반도 사이에 홍해가 있는데,

지금은 홍해 끝자락에 ‘빅토르’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원래는 호수가 아니었는데,

물이 줄어서 호수가 된 것입니다. 빅토르 호수가 있는 지점으로 생각됩니다.

 

거기가 ‘비하히롯’입니다. 비하히롯은 ‘하토르 여신의 신전’이라는 의미이고,

하토르 여신은 바로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출애굽 이후 첫 번째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60만 명의 장정 노예를 잃고, 여자까지 포함해서 총 2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노동력을

잃어버린 바로가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로 잡아오기 위해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와 믹돌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믹돌은 바위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좌우에 바위산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건널 수 없는 홍해가 있으며,

뒤에서는 특별병거를 몰고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서남북 사방 어느 곳으로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연히 찾아온 것도 아니고,

길을 잘못 들어서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오다가 이런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떤 반응이 정상적인 반응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과 모세가 보인 반응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산전, 수전, 공중전 등 별 위기를 다 겪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에 대처하는 반응은 가지각색입니다. 오늘은 출14장의 말씀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과 다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내가 생각한 길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뜻이 너희 뜻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55:8~9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으로 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13:21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오다 보니 홍해 앞,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6:8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북동쪽으로 인도하셔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완전히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너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네게 절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절은 고사하고 17세에 구덩이에 빠졌고,

노예로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구덩이에서 노예로, 노예에서 감옥으로, 17세부터 30세까지

13년의 젊은 청춘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현실은 노예와 옥살이로 전전긍긍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요셉의 결국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왕 바로를 만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험난했던 요셉의 인생 여정이 총리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동쪽 지름길이 최상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름길로만 가려다 보면, 갖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돈을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자를 준다는 것은 약점과 위험부담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지름길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갑자기 6학년이 되거나

중・고등학교를 뛰어 넘어 대학생활을 한다면 그가 인생을 바르게 살거나,

올바른 인격을 소유할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무조건 빠른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빠르게 잘 하지 못하더라도 학교를 다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출세를 강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교회를 빨리 부흥시키려는 사람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천국에 가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지름길이 아닌 먼 길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홍해 앞으로 가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가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 백성들과 바로는 장자를 잃는 재앙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아직도 내게는 막강한 군대가 있다”고 건방을 떨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고 하셨을 때,

“여호와가 누구관대 그의 말을 듣겠느냐?”고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의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버티고 서 있는 바로를 향해 “너의 군대를 전멸시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입니다.

 

▲출14장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을 잘못 들어 사방이 가로막힌 곳으로 갔기 때문에

뒤쫓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로의 판단이 상식적으로는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빨리 가서 다시 잡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홍해에 빠뜨려 죽이려고 유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서 있고, 바로의 군대도 홍해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고,

바로는 애굽 군대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는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겉보기에는 약하고 초라합니다.

모세 역시 가진 것이 막대기 하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계산하였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 앞으로 쫓아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모세의 반응입니다. 고린도후서 5: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따라 반응(By Sight)하거나,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By Faith)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을 오감으로 반응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시각), 소리를 듣는 것(청각), 냄새를 맡는 것(후각),

음식을 먹는 것(미각), 만져 보는 것(촉각)입니다.

사람들은 오감만 가지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감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출14:10절에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니 좌우측에는 바위산이 보이고, 앞에는 홍해가 보이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는 것이 보이니까

스스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오감 five senses 만 가지고 판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로 반응을 보입니다.

 

1) 첫째는 두려워 합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0).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다섯 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옆에서 아들이 계속 아버지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점심을 거르실 까봐 걱정됩니다”,

“오늘 밤 잠자리가 없을 까봐 걱정이 됩니다”,

“자동차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그래,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걱정을 하면 나중에는 “야! 임마! 걱정하지 마!”라고 소리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할 일이 아닙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2) 둘째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지금 모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노예들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배 고픈 이유는 네가 배 부르기 때문이고,

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네가 공부를 잘 하기 때문이고,

내가 못 생긴 것은 네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책임을 남에게 미룹니다. 이런 논리는 노예의 논리입니다.

 

제가 한 번은 기도원의 강사로 간 적이 있었는데, 주차구역에 주차를 잘 해 둔 제 차에

어떤 사람의 차가 와서 부딪혔습니다. 그런데 나와서 저를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 왜 이 차를 세워두었느냐?”는 논리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논리가 없는 것이고, 책임전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 불평한 것은

그들이 오감을 가지고 판단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질 올바른 반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세부터 30세까지 단 한 번이라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책임을 돌리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섭리를 똑바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작 그 정도 밖에 못하시나?”하며 하나님을 꾸짖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도대체 나를 돌볼 능력도 없으시면서

왜 구원하셨습니까?” “내가 언제 하나님보고 구원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냥 지옥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은 하나님을 꾸짖는 것이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원망과 불평, 그리고 두려움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경험하게 된 일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응답해 주시고, 때로는 능력도 주시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감만을 근거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오감만으로 반응하지 않고 ‘육감’(Sixth sense)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감각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말씀도 주시고, 우리의 예배도 받아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출14:13~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놀라운 말을 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먼지를 내며 달려오는데 모세는 두려워 벌벌 떨며 원망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만히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 너희가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현세에서도 보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보지 못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멋진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똑똑히 보라고 말했습니다.

 

출14:15절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앞에 홍해가 있는데도 앞으로 나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지고 반응하고, 믿음의 말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앞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시편 46:10절에도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우연히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우연히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참 고통스러운 일, 두려워할만 한 일, 낙심될 일들이 있어도

모두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연은 통계학자들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감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반응하고, 믿음을 따라 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출14장의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3.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 목적하신 바를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두 가지 목적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를 멸절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가 군대를 믿고 설치니, 멸절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권세를 좀 가졌다고 하나님 앞에서 목을 굳게 하면 바로처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는 군대를 믿고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신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내민 순간 동풍이 불어와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200만 명이 하룻밤에 홍해를 건넜다면 최소 6km이상 갈라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홍해가 6km나 갈라져서 물벽을 세우고 있는데, 200만 명이 캄캄한 밤길에

어떻게 그 길을 어떻게 건널 수 있었겠습니까?

 

출14:19~20절에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하나님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계시다가 예수님이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로 옮겨오시면서

구름기둥도 옮겨옵니다. 애굽의 군대는 캄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명이 있었습니다.

한 밤중인데도 환해서 길이 다 보이고, 웃으면서 200만 명이 홍해를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군대도 병거를 몰고 홍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거의 바퀴가 빠지고, 뒤에 있던 병거와 전복이 되고 걸려 넘어지기 시작하더니

애굽의 군대가 모두 홍해로 진입하였을 때, 양쪽에 서 있는 물벽이 무너져

홍해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때 건넜던 홍해는 깊은 바다가 아니라 갈대숲이었는데,

그 시즌에 물이 말라서 건너갈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같대 밭에 물이 마른 것이면

애굽 군대는 어디에 빠져 죽습니까? 그런 소리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건너간 것보다 애굽의 군대가 빠져 죽은 것이

더 큰 기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목적은 고전10: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그러므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 목적은 침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의 참 의미가 침례라는 것입니다.

 

침례는 물속에 들어감으로 예수와 합하여 옛 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물속에서 일어남으로 예수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침례라고 말했습니다.

이제껏 찌들었던 노예근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홍해가 합쳐져서 더 이상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출14장의 모세처럼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모세가 “가만히 있으라!”고 명한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갖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운명론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샬라

 

기독교가 이슬람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모세가 홍해를 향해 앞으로 가라하시면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운명론은 눈을 감고 믿는 것이고, 섭리론은 눈을 뜨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셨는데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은 어려움이 놓였을지라도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섭리론을 믿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홍해를 건너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