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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끄시게 하라

LNCK 2024. 6. 21. 10:5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성령이 이끄시게 하라 2024-06-16 - YouTube
성령이 이끄시게 하라        행13:1~12         2024-06-16    

사도행전 말씀을 계속 우리가 묵상해 가고 있는데, 깨닫게 되는 게 있어요. 
'주님은 주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특별히 세워가시고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놀라울 정도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한 
그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 교회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주님을 섬기며 금식할 때였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고, 
또 바나바와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서 따로 세우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교회가 감당할 일을 분별하게 되었다. 
'이게 너무 참 특별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경우 성도들이 금식 기도할 때는, 자기 삶의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곤 합니다. 
또 돌파해내야 할 문제를 만난 성도들이, 평소에는 그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지 못하다가도 
무턱대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너무 급해서 마음이 간절한 거죠. 
그래서 그때 금식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귀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다 귀합니다. 
그러나 그런 금식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문제 해결이 더뎌진다 느껴지면, 
기도가 쉽게 멈춰지게 되고, 또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반면에 오늘 본문처럼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하는 금식'이 있습니다. 
이건 주님의 마음을 구하기 위하여 금식하는 거죠. 

이사야서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58:6절을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주님이 주목하시고 사랑하는 이들의 삶의 형편을 품으며 
기도하는 금식기도입니다. 
또 복음을 증거하고, 주의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한 금식기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기기 위하여 금식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사명을 분명하게 붙잡고 싶어서, 금식하며 기도한 거예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2
안디옥 교회는, 그 당시에 막 생겨난 신생 교회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를 파송할 즈음에는, 아마도 창립 1년이 될까 했던 그런 시점이었어요. 

여러분 그런 식이라면, 교회에 얼마나 기둥 같은 일꾼들이 많이 필요한 때입니까?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기도하면서, 
성령께서 안디옥교회를 이끌어 가시도록, 교회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겼어요. 

그래서 그들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기꺼이 사울과 바나바를 안수하여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합니다. 

핵심적인 일꾼을 교회에 붙잡아 놓은 게 아니에요. 
그들이 기도할 때 '주님, 이 일꾼들은 안 됩니다. 그들은 보낼 수 없습니다. 교회도 세워야죠.' 
이런 기도를 그들이 올려드린 게 아니에요.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금식기도 한 게 아니었어요. 
흘려보내기 위하여, 오히려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금식기도 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행하였던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 꽤나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교회와도 다른 모습을 갖고 있구나'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누군가가 세워질 때, 예를 들어 중직자가 세워질 때, 
그들은 높임의 자리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죠.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알게 하시는 것은, 
'사명의 자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그 자리로 부름받는 것이다...'를 알게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도 기도할 때, 그들은 사명이 깨달아지고, 붙잡아졌어요. 
그러니 실제적으로 순종도 하게 된 것입니다.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아멘이죠. 주를 섬겨 기도할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가, 사울과 바나바를 보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일하신다. 나를 통해 일하신다.' 
이게 믿어지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성령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니, 두려울 게 없어지는 거죠. 
염려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 생활에 진짜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오늘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성령님이 보내신 자리인가?' 
정말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삶의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게 맞나?' 
성령님이 이끄시도록 우리의 삶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13:4~5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이후에 
구브로 섬의 살라미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묵상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여기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 
제 마음에 너무 안타까움으로, 마음의 슬픔으로 다가왔어요. 

여러분 회당이 어디입니까?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오랫동안 강론되었던 곳이 회당이에요. 
회당이 어디입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엄청나게 가르쳤던 곳이 회당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바로 그런 곳(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 다시금 전해져야 했어요. 왜 그런 일이 있어야 했나요? 
그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머리로는 믿고 살아왔지만 
기계적인 율법생활에 빠져서, 형식적인 율법생활에 사로잡혀서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져 간 거예요. 

말씀은 많이 보고, 말씀대로 산다고는 했는데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믿음은... 굳어져 버린 겁니다. 
그러니 그곳에 복음이 필요했던 것이죠.

▲제가 목회하며 함께 동역했던 한 목회자 분이 지금은 케냐 선교사님으로 
귀하게 사역을 하고 계세요. 
그 분이 케냐에 파송된 첫 해에, 거기서 시간을 보내시고 고백하며 나누시는 말씀이 
'내가 케냐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케냐에 왔다.'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네가 바로 선교지다. 너의 삶이 바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할 선교지다.' 
그런 마음을 주셨다는 거예요. 

'이 케냐 땅을 위해 내가 헌신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나를 위해 선교지로 보내주신 주의 뜻이 있구나. 
날 위해 여기로 보내주셨구나...' 그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주1)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케냐에서 얼마나 귀하게 섬기시는지요. 
제가 참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교사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를 강하게 이끌어 가셨어요. 
그들이 순종했으니까 또한 가능했던 일입니다. 

13:7~8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그들이 살라미를 떠나 바보라는 지역에 이르게 됐는데 
거기서 유대인 거짓 선지자, 마술사인 바예수를 만납니다. 

그는 그 지역의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봐서 
바예수는 총독에게나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꽤나 행사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사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이제 막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직전에 
40일을 주리시고 광야에서 영적 전쟁을 하셨던 것과 같은 상황임을 봅니다. 

'바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와의 아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뜻의 의미는 '구원의 아들' 이런 의미가 바예수 라는 이름에 담겨 있어요.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만 봐도, 
유대인인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쭉 자라왔던 그런 인생이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가 이제 엘루마(마술사, 박수무당)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박수무당의 삶을 그가 살고 있어요. 그의 정체성이 완전히 뒤바뀌어져 버린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가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왔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예수가, 성령님이 보내신 사울과 바나바를 대적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특히 믿음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해요.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그때 믿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왜 그렇게 바예수가 그렇게 애를 쓰며 막으려고 했을까요? 
롬10:17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이 믿음이 굳건해지면, 믿음이 승리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거죠. 
믿음이 세상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에 힘을 쓰며 사는지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무엇에 마음을 다 쏟고, 힘을 쏟으며 살아오셨나요? 
그게 우리의 삶을 바꿔갑니다.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가로막고자 힘을 썼던 인생, 
바예수의 인생이 엘루마로, 마술사로, 박수무당의 삶으로 
그의 본래적 정체성(유대인, 구원의 아들)까지 왜곡되게 된 거예요. 

이런 상황 가운데 사울이, 바예수가 믿음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그 본질을 꿰뚫어 봅니다. 
13: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사울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도, 성령 충만함으로 이루어졌어요. 
성령께서 이끄셔서, 문제가 뭔지를 보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믿음의 역사를 가로막는 삶의 모든 것이 멈춰져야 한다. 
믿음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들은 멈춰져야 함을' 지적합니다. 

엘루마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바울이라 불리는 사울이 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뭘 멈춰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13: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엘루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그쳐야 하는지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과 악행은, 모두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해요.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마귀에게 속했기에,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속하면, 죄를 한 두 번 지어도, 결국 그 죄를 회개하고 그칩니다. 

여러분 '마귀의 자식이다' 하면, 
우리는 '아휴 마귀의 자식은 진짜 안 되지' 
그러면서 우리는, '내 삶'과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이렇게 거리를 두고 봅니다. 

그런데 '마귀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에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속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속하여 있지 않은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내 생명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고, 지금 내 생명이 어떻게 지탱되어 가는가? 
그거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자, 그는 마귀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주의 바른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냥 세상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엉뚱한 길로 접어듣는 삶, 
이게 다 마귀에 속한 삶이에요.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엘루마의 삶을 꿰뚫어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엘루마가 시각장애인이 되어서,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어떠한 일도 행하지 못하게... 그를 그렇게 만드세요. 
그 상황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러니 엘루마가 어둠에 쌓여서, 자기를 인도할 자를 두루 찾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됩니다. 
그것에 관해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냐면, 
11절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 말씀이 참 특별해요. 주의 손이 엘루마 위에 있을 때 
이때 주님의 손은, 그를 멈추게 하시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시고, 
악행을 멈출 수밖에 없도록...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세요. 

그런데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이런 표현이 나왔을 때 
교회가 말씀으로 흥황하고, 믿는 자의 수가 더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주의 손이 엘루마 위에 있을 때' 
이때는 그가 볼 수도 없게 되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악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종의 징벌과 같은 일이 일어난 거죠.

처음에는 '참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게 됐구나.. 징벌이구나'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살펴보니까 '엘루마가 악행을 멈추게 되었다.' 
그에게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죠. 

성경은 오늘 이 말씀 이후에, 엘루마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기록하지 않고 있어요. 
다시 눈을 뜨게 되어서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여전히 거짓과 악행을 행하며 어둠에 거했는지... 전혀 기록이 없어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의 손이 그 위에 함께 하셨을 때 
엘루마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 앞에 놓였다는 거예요. 
돌이킬 기회가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다는 겁니다.        

사울도 바울이 되는 그 회심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잖아요. 
'아, 엘루마는 어떻게 됐을까? 엘루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런 생각이 제 마음에 들었었어요. 

그런데 제가 묵상을 하다 보니까, 주님이 주시는 질문은 
'엘루마 어떻게 됐는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서 허락하셔서 돌이킬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그 돌이킬 기회에 저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그렇게 물어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돌이킬 기회를, 주님이 허락하셔서 얻게 되었는데, 
여전히 어둠 가운데 거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는지... 우리가 그것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조명하에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이 다 드러난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그러나 본질은, 그것은 은혜라는 거예요. 

내 허물과 죄가 다 드러나서, 이제는 얼굴을 들 수도 없을 정도의 삶이더라도,
하지만 아직 돌이킬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증거 중에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지난 6월 초에 제자훈련 2기생들이 수료를 했습니다. 
제자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관심을 가지시고 한번 참여해 보시면 좋겠어요. 

그 훈련 가운데, 천국소망을 다루는 시간이 있어요. 
그때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과제가 있는 주간입니다. 

그런데 그 유언장을, 반원들과 작성해서 다 나누는 시간을 가질 때, 
굳이 어떤 분들은 스스로 이런 얘기를 하세요. 
'아, 목사님 저는 유언장을 읽을 때, 저는 안 울 겁니다. 저는 안 울 거예요.' 
뭐 사람들이 안 물어봤는데도, 스스로 자기는 안 울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사람이 웁니다. 유언장 읽을 때. 

근데 유언장의 대부분 내용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더 사랑하지 못해서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난 사실 사랑했다.' 
이런 이야기가 유언장에 가장 많이 등장해요. 

함께 더 시간을 보내며, 기쁨 가운데 있지 못했던 아쉬움을 털어놓습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더 믿음으로 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유언장의 대부분을 그런 내용으로 쓰시더라고요. 

근데 다르게 살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이야기를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성도들에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남편과 아내에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유언장을 나누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유언장 안에 '안타까워하고 사랑한다 고백하고, 
믿음으로 더 살기를 원한다'고 했던 그 내용을, 

이 땅에서 아직 살아갈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유언장을 쓰고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돌이켜 살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더 사랑하고, 더 품어내고, 더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 기회가, 내 앞에 아직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깨닫고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것!

▲여러분 이제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을 이끄시도록 내어드리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갈 기회가 있다. 
성령님이 내 삶을 아직 이끌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은혜이고 기쁨이죠. 감사인 줄로 믿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그분들 중에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분이 계세요.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천국, 지옥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또 어떤 분은 막 화도 내세요. '내가 왜 죄인이냐? 나 참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냐? 난 죄인도 아닌데...' 
'지옥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도 없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복음을 안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말씀드리고 싶은 한 가지가 있어요. 
'죽은 이후에 깨닫는 것은 늦다'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거예요.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은, 심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 바로 그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 그 자체이십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신 거예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새로 값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니 이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고, 믿지 못하게 하는 역사를 
우리는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지 않도록, 우리가 주의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다음 주일이면, '새생명 전도축제' 주일로 우리가 함께 예배합니다. 
지난 6주간 동안 저희가 지금까지 태신자를 작정하고, 품고, 기도하고, 관계를 맺고, 
속회로도 초청하고, 이제 주일 예배 자리로도 초청하고자 하는 거죠. 

그런데 아마 이 일에 마음을 쓰고 참여하셨던 성도님들이라면 
'전도가 참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셨을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복음의 역사가 증거되는 일을 
세상의 영이 가장 싫어하죠. 가장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러니 그 일을 막고자 하는 거죠. 
그러니 우리의 마음에 때로는 낙심도 주고, 우리의 마음에 어려움도 느끼게 하고, 
상황과 여건으로 인하여 낙심할 기회를 우리에게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알아야 돼요. 
복음이 전파되고 증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은 
세상의 권세(마귀)가 가장 당황스러워해요. 
왜냐면 세상 권세가, 성도들로부터 영적인 선제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때로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낙심이 됩니다. 
근데 사실은 세상의 권세가 지금 당황해 하는 거죠. 
하나님 나라 역사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거죠. 

오늘 본문의 바예수, 엘루마라 불렸던 그 마술사처럼 
세상의 권세가 당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어떤 영적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게 해주세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 삶에 멈춰야 할 문제도 보게 하시고 지적해 주세요. 
우리는 순종하여 멈추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대적하는 그 권세를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도록, 성령님은 우리를 이끌어주세요. 

그러니 진짜 문제는 뭡니까?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우리 삶을 내어드리면 되는 거예요.

결국 사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증거할 때, 
엘루마란 자는, 믿음의 역사가 못 일어나도록 
총독 서기오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어요.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여러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3:12절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 (엘루마가 소경이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복음의 역사가 더욱 강하게 드러났어요. 
구브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보고 믿게 되었어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이끄시는 일은 언제나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내 삶은 진짜 변할까? 믿음의 삶 가운데 내가 변할까? 
우리 가정은 변화될까? 우리 식구 전부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내 삶의 일터와 삶의 터전은 과연 더 나아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고 순종하면, 
언제나 놀라운 변화를 주님은 허락하십니다. 놀라운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 

총독이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일이 이제 벌어진 거죠. 
아마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뭐 그럴 수도 있지, 믿을 수도 있지' 
이 정도 반응한 사람들이 아마 대부분이었을 거예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우리 가운데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도, 쉽게 믿음을 잃어버리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매 순간 주의 말씀이 감격이고, 주의 말씀이 성취되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도록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역사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이방선교가 시작되었어요. 
또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소아시아를 넘어 복음을 증거하는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 시발점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령을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역사를 주님이 드러내 주세요.  그 교훈을 주시려고
이방 선교의 시작 지점에, 이 말씀을 기록해 주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보면 어떤 교회였을까요? 
전통이 있는 교회가 아니었어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면, 그저 막 세워진 교회입니다. 어떻게 될지 미래가 잘 안 보여요. 
'신생교회? 그래 지금 막 세워진 아주 어린 교회로구나...' 그렇게 봤을 겁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복음의 역사에, 구원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에 
강력하게 동참하는 교회로 서게 되는 것을 보게 돼요. 

여러분, 교회가 외적 성장이나, 외적인 건물, 교세를 자랑할 게 아닙니다. 
교회가 자랑할 것이 하나 있다면, 성령님께 어떻게 순종하고 있나? 
얼마나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게 우리의 자랑이 돼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일어났는데 
이유는 딱 한 가지, 성령께서 이끄셨고, 교회는 순종했고... 이 일이 계속 일어난 거예요. 

◑안디옥 교회의 중보기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금식했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를 섬기기 위해, 주의 일을 위해, 그들은 기도했어요. 

바나바와 사울, 정말로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꾼을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중보의 기도를 이어갔어요. 

본문 13:1~3절은, 사실 안디옥 교회의 중보기도에 관한 내용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예요. 
그들은 기도했어요.  

그리고 3절 이하에 나오는 복음 전파의 역사와, 
복음을 가로막는 대적에 대하여 승리하는 일은,
이 안디옥교회의 중보기도가 계속 이어졌기에, 성령께서 행하신 일이라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기도와 더불어 일어난 거예요. 안디옥교회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주의 제자들,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의 역사는 강하게 드러났어요. 

'주님의 손'이 안디옥 교회와 그들이 파송한 주의 사도들, 
그 위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신 겁니다.    :11

그런데 그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지혜가 있었던 거죠. 
그 주님의 손에, 자신들의 손을 포개어 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였던 거예요. 

여러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이끄실 때, 우리로 깨닫게 해 주시면, 멈춰서야 할 때 멈춰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도, 우리 각자의 마음에 
'내가 이거는 진짜 주님 앞에서 멈춰서야지, 끊어내야지! 
내가 그 일에 더 이상 마음 뺏기면 안 되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으면, 담대히 멈추시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 
내가 그 자리에 혹 서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바예수라, 엘루마라 불렸던 그가 걸어간 길은, 처음에는 '구원의 아들(바예수)'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믿음을 부정하는 자, 그 길을 걷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그런데 오로지 주를 섬겨 기도했던 안디옥교회 성도들, 그들이 걸어간 길은 놀랍습니다. 
순종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성령께서 보이신 길이라면 믿음으로 끝까지 걸어갔어요. 

사울과 바나바가 복음 들고 이방을 향하여 나아가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주님이 늘 동행하시는 길이고, 
기쁨과 변화의 길이었어요. 

여러분 어느 길을 걷기 원하십니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여러분의 삶을 내어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움의 길이 아니에요. 기쁨과 놀라움의 길이고, 변화의 길이고, 결국 생명을 누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길에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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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복음은 말로 전하기 이전에, 먼저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존재론적인 선교'라고 하죠.

2018년 여름에 제가 단기선교 선교팀을 이끌고 케냐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선교팀과 더불어서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해서, 케냐 남부에 말린디 라는 곳까지
차로 오랜 시간을 이동하여 갔더니, 선교사님 계신 곳에 이를 수가 있었어요.

마침 저녁식사 시간에 우리가 도착했기 때문에,
선교사님 댁에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고 되었고,
그때 선교사님께서 선교 팀원들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케냐에 처음 와서, 큰 기대로 선교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너무나 명확하게 주신 마음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선교지가 바로 너의 마음이다. 너의 삶이고, 가정이다!'
그때 제(케냐 선교사)가 고꾸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삶이 먼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충만히 누리기 원하시는구나'
그래서 그 힘으로, 지금까지 선교 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선교 여정을 통해서, 여러분이 먼저 주님을 분명히 만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