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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노래

LNCK 2024. 6. 21. 20:55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7435701

유리바닷가의 노래 https://rfcdrfcd.tistory.com/15976627

 

모세의 노래          출15:1~8         2014.12.07.

 

서론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는 구약에 세 곳이 있고, 신약에 한 곳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 중에 처음으로 나오는 곳이 출15장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노래 가운데 첫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노래를 부르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노래가 있습니다.

 

출15장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부른 승리의 노래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지만,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서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로 기록된 모세의 노래가 시편 90편입니다.

‘짧은 인생의 노래’(Song of Life)입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32장에 나오는 ‘경고의 노래’(Song of Warning)입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설교하면서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너희를 하나님은 징벌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덧붙여 신명기 32:43절에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를 짓고 살겠지만,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오셔서

모든 죄를 속하실 것을 예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를 ‘어린 양의 노래’(Song of the Lamb)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계15:1~4절에 보면 모세의 노래를 어린 양의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3).

 

하나님의 백성은 모세가 살던 시대나 종말의 때가 이른 시대까지

계속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고,

 

계15:1~4절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는

출14장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와

신32장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를 부분적으로 결합한 노래임을 볼 때,

이들은 동일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나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

모두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세 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에 빠지지 않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셋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이 3대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하는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 자신을 높이기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아론이나 미리암을 높이기 위해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즉, 사람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노래 속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33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출15장 1절에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모세는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를 찬송하면

남자만 6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같이 합창합니다.

여자와 자녀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200만 명이 넘는 큰 무리가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양대원 100명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해도 웅장한 느낌이 드는데,

200만 명이 한 목소리로 찬송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세는 마이크를 쓰지도 않았고,

가사 전달도 여의치 않았을 것인데 200만 명이 넘는 큰 무리가 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기적입니다.

 

출15:2절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모세의 노래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노래를 부르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도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기분 전환이나 오락, 혹은 여흥을 위해 노래를 불러서도 안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 높이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하나님을 높이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속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세는 그 가운데 특별히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2a절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강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가진 것은 지팡이 밖에 없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마저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나 아무 힘도 없는 약한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약할지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우습게보도록 하면 안 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약해도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무시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불가능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압제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는 것과 홍해를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바로가 어떤 사람이고, 애굽이 어떤 나라인데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또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깊은 홍해를 건널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홍해도 6km이상 갈라져서

하룻 밤만에 그 깊은 홍해를 다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받은 구원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귀와 지옥, 영원한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이

우리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50%에 우리의 능력 50%가 더해져서

신인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궁하신 능력으로 된 것임을 믿으시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2. 모세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속성 두 번째는 ‘용사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용사라고 고백했습니다.

 

3절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사’는 ‘전쟁의 사람’(Man of War),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 군인이 아니라 위엄이 있는 용사라고 고백합니다.

7절에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큰 위엄이 있는 용사요, 가장 능력 있는 용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싸우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들과 싸워서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원수들은 돈이 있고, 힘이 있고, 권력도 있어서 기독교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는 용사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응석이나 받아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업신여기고 대적하고 막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할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수염을 뽑히고도 가만히 앉아 오냐오냐하는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싸우는 용사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멸절시킨 용사이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패배할 싸움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삿4장에 ‘시스라’라는 사람이 하늘의 별들과 싸우다가 망하고 여인 야엘의 손에 말뚝이 박혀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습니까?”, “구원이 중요합니까?”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받고, 구원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옥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 이상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은 불 보듯이 뻔 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무궁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싸우는 용사이십니다.

 

▲3. 모세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속성 세 번째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11절에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중에 주와 같이 거룩한 존재가 누구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피조물과 구별되어 피조물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이 거룩이라는 하나님 속성의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태양을 섬기고, 달을 섬기고, 바위를 세워놓고 그 앞에 절하고,

멋진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숭상하고,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우를 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범신론자나 만유내재신론자들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범신론자들은 바위 자체를 신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일컫고,

만유내재신론자들은 이 바위 속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천사들과 영적인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했습니다.

그리고 쫓겨나서 이 세상에서 귀신들, 악령들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 속에 들어가 무당이 되도록 만들고 악한 사상가들도 만들고

악한 정치인들도 만들었습니다.

 

무당, 점쟁이들은 모두 피조물을 숭배하는 귀신 숭배자들입니다.

이방종교, 이단종교와 이단사설은 모두 귀신 숭배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 영적인 존재들과도 구별되는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무당, 점쟁이를 찾아다니지 마세요.

그들이 미래의 일을 그렇게 잘 안다면 왜 점쟁이 노릇을 해서 먹고 살겠습니까?

 

귀신 따라 다니지 마시고, 귀신 숭배하지 마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인간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해서 자기 동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하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도 아주 깊은 곳에 떨어질 사악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도 문제고,

자기 스스로 교만해서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시편 50:21절에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모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들을 위해 싸우시는 은혜를 노래하고,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심판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출15:9절에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고”, “‘내가’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라”,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이 한 구절에 ‘나’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쓰였습니다.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14:13~14절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의 아들 계명성인 루시퍼는 “나의 보좌를 높이고, 북극 집의 산 위에 좌정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언어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만한 말을 한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 귀신들의 대장이 되어 사람들 속에 들어가 악한 짓을 일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단 교리를 퍼뜨리기도 하고, 공산주의 사상,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원수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15:8절을 보면 그들을 향해 콧김을 불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출 15:8).

 

또 이어지는 10절에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콧김을 불으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가고,

또 원수들은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로 다 덮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콧김만 불어도 원수들은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콧김만 불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른 손을 쓰시는 권투 선수와 같은 모습으로 대적을 부수시는 분이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현재의 이스라엘의 대적인 바로와 그의 군대는 물론이고,

미래의 원수가 될 자들도 하나님이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십니다.

 

14~16절에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만날 원수입니다.

에돔과 모압, 가나안 거민들도 모두 원수가 될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두려워 떨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같이 조용하게 만드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수가 멸망당할 때 기뻐했을까요?”

 

원수가 멸망당할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과

원수의 멸망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걸까요?

 

저도 이 점에 대해서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에는 원수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했다는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원수가 망할 때에 좋아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아마도 원수가 망할 때 기뻐하지 말라는 것의 의미는

개인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악인들에게 구속받고 고통 받던 민족들이 악인의 멸망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기뻐한 것은 인지상정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멸망당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일본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해방될 때 백성들은 광복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망할 때 기뻐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인지상정을 뛰어 넘어가는 차원이 높은 수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적인 심판이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편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계18:20~21절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바벨론이 멸망할 때에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행한 일 중 가장 악한 짓은 ‘노예무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잡아서 돈을 받고 팔아먹은 것입니다. 얼마나 악한 짓입니까?

지금 미국에는 많은 흑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백인이 흑인들 중 한 사람만 건드리면 폭동이 일어납니다.

한국 사람들은 공연히 그들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격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악이 낳은 결과입니다.

 

저는 미국 남부에 속한 뉴올리언스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아직도 노예 시장이 있습니다.

그곳은 아직도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예가 링컨대통령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었을 때 의인들은 모두 기뻐했고,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 해방을 했을 때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악이 이 사회에서 떠나가기를 기도해야 하고,

이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특권

 

출15:13절에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속하신 백성들’(The Redeemed People)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구속함을 받은 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17절에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주의 백성을 심으시겠다(Plant)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아 침례를 의미하는 홍해를 건너

이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백성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옥에 가는 것은 다 틀린 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가 노래를 부르고 난 이후

두 가지 종류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모세의 노래와 같은 노래를 부르는 믿음의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입니다(출 15:21).

미리암은 모세의 노래를 화답해서 계속 믿음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22절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이 있은 후 3일이 지나고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이 쓰다 보니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우리를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고,

바로의 군대가 수장되는 것도 생생하게 경험하고 본 사람들이었는데,

그 일이 있은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3일 전에는 모세의 노래를 함께 불렀지만 이제는 가사가 바뀌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부른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리암과 같이 계속해서

모세의 노래를 불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시편 40편 2~3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세의 노래를 계속 부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