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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바닷가의 노래 계15:2, 대하4:2~5 편집장 묵상글
◑물두멍-바다-유리바다의 연결성
▲1. 모세가 만든 성막에 ‘물두멍’이 나옵니다.
성막 마당에 번제단을 지나면,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영어로는 laver(라버), basin(베이슨)인데, ‘대야, 세면대’란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키요르’인데, 같은 뜻입니다.
한글로 ‘물두멍’은 ‘물을 길어 붓고 쓰는 큰 독’을 뜻합니다.
요즘 쓰는 말로는 ‘큰 물통’인데, ‘대야, 세면대’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군요.
▲2. 솔로몬 성전의 <바다>
그런데 같은 역할을 하던 이 성막의 기구가
솔로몬 성전에 가서는 명칭이 ‘바다’로 바뀝니다.
광야 성막에서 물두멍의 크기가,
솔로몬 성전에서는 아주 크게 늘어납니다.
그건 성전의 마당이, 성막의 마당보다 크게 늘어난 이유도 있고,
어쨌든 크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기능은 똑같죠.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이나 몸을 씻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깨끗이 씻고 들어가야죠.
그리고 번제를 드리다보면, 먼저 짐승을 잡아야 하고,
또 번제단에 올려서 태우는 과정에서, 손이나 몸을 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성막의 크기
가로 25미터 세로 50미터, (성소는 5 x 14 M)
성소 건물만 계산하면 약23평,
솔로몬 성전의 크기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 왕상6:2
건물(성소)만 10 x 30 M. 약100평
솔로몬 성전의 크기가, 성막보다는 더 늘어났습니다.
그래도 어디 내놓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크기, 피라미드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크기,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계산은 여러분 각자의 검증을 요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물두멍’도 크기가 늘어났습니다.
왕상7:23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그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바다의 직경이 10규빗은 5미터, 둥근 둘레가 15미터 정도
2천 밧을 담는다고 했는데, 수 십 드럼의 굉장히 많은 양의 물을 담았습니다. *44,000L = 220드럼
그 바다를 12마리 소가 3마리씩 동서남북으로 바치고 있었죠.
그런데 솔로몬 성전에서 물 저장고의 명칭이 ‘물두멍’에서 → ‘바다’로 바뀝니다.
처음에 성경을 읽다가 ‘바다’라고 나오니까,
얼핏 보면 생소한 옛날의 한국의 악기 이름 같습니다.
*중금, 초적, 소관자, 당적 등
아주 생소한 이름이라는 뜻이죠.
설마 동해 바다 할 때, 그 ‘바다’인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 보니 ‘Sea’라고 나와 있습니다.
‘동해, 남해’할 때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아니, 이거 좀 과한 것 아닌가요?
솔로몬 성전에, 마당에 큰 물탱크가 있는데, 높이가 2미터, 직경이 5미터라고
크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바다 Sea’가 뭡니까?
‘연못’이나 ‘호수’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걸 어떻게 ‘바다’로 부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걸 ‘바다’로 부른 이유는
과장법이 아니라
천국에 ‘유리바다’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15:2
광야의 성소, 솔로몬 성전 모두
천상의 성전과 천국의 모형이죠.
거기에 진짜 천국이 있다면, 성전은 천국을 축소해서 지상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 장난감으로 모형 탱크, 모형 비행기도 만들고 하잖아요.
왕상7:23에 나오는 ‘바다’의 히브리어는 ‘얌’인데,
지중해, 홍해, 사해 할 때 ‘바다’입니다. 영어로 sea이죠.
그게 진짜 바다가 아니고, 성전 기구의 명칭이기 때문에 대문자 S를 써서
성경에 ‘Sea’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의 통일성이 놀랍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천국에 ‘유리바다’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나님이 계시로 가르쳐 주신 게 있었으니까,
성전 마당 물 저장고를 ‘바다’라고 호칭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양식과 설계에 따라 지었다고 했는데
역대상 28:19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열왕기상 6:38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였더라’
신약의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이 있으니까
천국에도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죠. ‘유리바다’요. 계15:2, 4:6
모세는 천국을 환상 가운데 보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성막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출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25:40참조
※혹자는 창1:7에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눠졌는데,
‘궁창 위의 물’을 ‘천국의 바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창1:7에 궁창 위의 ‘물’로 나와 있지, 그걸 ‘바다’로 호칭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궁창 위의 물’은 그저 ‘구름’으로 봅니다.
▲3. 신약시대의 물세례와 불세례
이 ‘바다’가 신약에 와서는 건물로서 성전 자체가 없어졌으니까요.
그리고 신약의 성전은, 우리 각자 또는 교회의 모임이, 성전이 됩니다.
그럼 물두멍, 또는 ‘바다’는 – 물세례가 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구약 성전에서 ‘바다’의 물로 씻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는, 물세례와 더불어 불세례가 나옵니다.
잭푸닌은 해석하기를
물세례는 – 우리의 외적 행위적 죄를 씻는 세례이고
불세례는 – 우리의 내면적 마음의 죄를 씻는 세례라고 설명했습니다.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마3:11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이제 장차 천국의 <유리바다>를 살펴보겠습니다.
▲1. 천국의 유리바다는 불이 섞인 바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로서, 신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반대로 신약의 실체 역시, 구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서로 도움을 주죠.
구약에서 물두멍, 바다는.. 씻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를 씻어서 정결케 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로 들어갔죠.
*‘천국은 지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지상에 바다가 있듯이, 천국에는 유리처럼 맑은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갈 때는
유리 바다를 통과해서, 지나서 가는데
이 세상의 때와 허물과 모든 것을 씻고서, 천국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른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원래 바다는 물이죠. 신약의 물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럼 신약의 불세례는 .. ‘불이 섞인 유리바다’입니다.
계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sea of glass mixed with fire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지상에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천국에서 <불이 섞인 유리바다>를 통과하는 것이며,
그걸 통과해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불이 섞이 유리바다>를 통과하려면
지금 지상에서 <물세례와, 불세례, 즉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세례만 받아가지고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불이 섞인 유리바다>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었는데요?’라고 항변해도,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2. 유리바닷가에서,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여기서 ‘유리 바다’라고 하면, ‘재질이 유리로 된 바다’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게 아니라 유리나 수정처럼 맑은 바다를 뜻합니다.
계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계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위 3절에서 ‘모세의 노래’라고 했지요?
유리바다를 건너서 천국에 다다른 성도들의 노래는,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내용이 아주 흡사합니다.
즉 애굽의 추격을 피해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광야의 이스라엘은
‘구원의 노래’를, 그 바닷가에서 불렀습니다. 구원 받은 게 너무 감격해서요.
출애굽 백성들이 특별히 ‘기이하도다’ 라고 노래한 것은,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정말 기이한 기적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기이한> 방식으로, 즉 상상하기도 어려운 놀라운 방식으로 구원 받았으므로
유리바다를 건너자 말자, 출애굽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유리바닷가에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이 너무 소중하고, 기이하고, 감격하는 사람은
‘어메이징 그레이스’ 참으로 놀라운 은혜라고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이, 놀랍고 놀라울수록
구원의 감격과 찬양이 더 뜨겁고 더 우렁찹니다.
미지근할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사람은 ‘유사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구원 사건의 모형입니다. 계시록은 완성이고요.
그러므로 출14장 홍해 모세의 노래는,
계15장 유리바닷가의 노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바다’가 위치해 있었던 것은,
장차 성도들이 ‘유리바다’를 건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를(도착할) 것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완성된 ‘미래 천국’은
지금 우리의 미완성인 ‘지상 천국’에서도 그림자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 계시록이, 미래 천국에 가서 살고 있는 성도들만 위해서 쓰여진 게 아니라
당시 현재를 살고 있던 성도들을 위해서도 ‘이중 목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이 ‘모세의 노래’를 불렀듯이
오늘 마귀와 죄악에서 (바로와 그 군대를 상징) 구원받은 신약성도들도
감격적인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모세의 노래, 구원의 노래, 어린양을 찬양하는 노래’는 계15:3
미래에 유리바닷가에서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예표로서, 오늘날 구원 받은 성도들도 그 감격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나 애굽의 군대에서 구원 받은 것이나
오늘날 우리가 마귀와 그 세력에서 구원 받은 것이나
다 감격적인 것이니까요.
오늘 이 감격의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신자만이
장차 유리바닷가에서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오늘 이 감격적인 구원의 노래를 못 부르는 신자들은
장래 유리바닷가에서 그 노래를 부를 것이라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이 ‘유사 (사이비) 구원’이라는 것이죠. *비슷하지만 아닌 것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가 똑같이 홍해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때때로 홍해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홍해가 저주와 심판의 바다가 되지만
여러분에게는 그 홍해가 구원의 바다, 수정처럼 맑은 유리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3. 세상의 고통의 바다는, 천국의 유리바다로 바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 바다라는, 그 혼돈과 절망의 바닷가에서 울부짖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풍랑이는 바다는 무섭지만,
과거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몰랐던 시절의 사람들은
‘바다’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바다 깊숙이 나아가지 않기도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 – 고통의 바다’라고 했는데,
그 의미만 놓고 보면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인생은 모두 이 세상의 바닷가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앞두고 울었던 것처럼
울고 불고 슬프게 비통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인생의 본질적 상태입니다.
그러나 저 천국에서는
‘울고 부는 바다’가 아니라
‘모세의 노래, 구원의 노래, 어린양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미리암이 홍해를 건넌 후에
출14장에서 불렀던 감격적인 노래보다
비교, 상상할 수 없이 감격적인 노래를
장차 우리를 저 천국에서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 천국에서도 약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들은, 그 천국의 유리바닷가의 찬양의 내용을
한 번 잠시 묵상해 보시겠습니다.
계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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