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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발이 성전 안에 섰으니

LNCK 2024. 6. 26. 20:58

https://blog.naver.com/karamos/80049077606

 

우리 발이 성전 안에 섰으니           시122:1~10

 

여러분 평소에 교회에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십니까?

오늘 교회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마지못해 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어제 오후 용인지방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는데 길이 괜찮을까? 오늘은 가까운 교회 갈까?'

망설이다가 오시지 않았습니까? 아내가 가자고 하니까 따라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날 예배에 빠진 성도들의 빠진 사유를 보면 "아내가 어디 가고 없어서,"

또 반대로 "남편의 출장으로," 이런 사유를 종종 대합니다.

남편이 출장 갔다면 교회에 오셔서 출장 중인 남편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 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하나인 시편 122편은

교회에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와야 하는 것부터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기쁨으로 와야합니다.

 

시인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할 때처럼, "나도 기뻐하는도다" 화답하셔야 됩니다.

 

1979년 9월 셋째 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중국이 폐쇄정책에서 개방정책으로 바꾼 다음에 교회의 문도 하나 둘 열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제일 처음으로 문을 열도록 허가 받은 교회가 상해에 있는 목은당(沐恩堂) 교회입니다.

800명쯤 모일 수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부의 허가를 받고 문을 여는 교회를 공인교회라고 부릅니다.

공인교회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성도들이 비공식적으로 모이는 가내(처소)교회를 더 의지했습니다.

 

공인교회이기는 하지만 30 년만에 처음으로 교회의 문이 열리니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서 예배 시작 한 시간 전에 이미 자리가 다 찼다고 합니다.

 

그 뒤에 온 분들은 교회 계단에 앉고 뜰에 서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찬송 소리에 천장이 떠나가는 것 같았고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목이 매어서 설교가 자주 중단되었고

축도가 끝난 다음에도 성도들은 한 시간 이상을 교회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 날 교회에 올 때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왔겠습니까?

처지와 형편은 다르지만 교회에 올 때는 기본적으로 이런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이 시 122편은 제목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중의 한 편입니다.

그런데 이 시 가운데는 성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했을까요?

 

이 시에서 예루살렘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서울로서 다윗의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성전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성전이 없으면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유명해졌습니다.

성전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전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성으로 불리우고,

성전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형편은 북왕국이 훨씬 강했습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북왕국에 속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역사의 정통성은 남왕국에서 찾습니다.

 

다윗 왕조의 혈통이 남왕국 쪽으로 이어졌고, 예루살렘이 그쪽에 있었기 때문인데

예루살렘이 그쪽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전이 남왕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전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일곱 번이나 대원정을 떠났습니다.

 

성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모든 성도들의 이상향이 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과 예루살렘 성전이 같이 쓰이는 것처럼

모든 교회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목양교회가 있어서

"수지"라는 이름이 전통적인 경건에 충실하면서

통일과 북한선교, 기독교문화 보급에 앞장서는 복음주의 운동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절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이제 성전 안에 막 들어섰습니다.

 

혹시 실제로는 아직 안 들어섰는데 들어 선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새 성전 교육관 입당을 목전에 놔두고 있는 우리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온 순례자는 제일 먼저 찬양합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개역성경」에는 "조밀한 성읍"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우리는 웅장한 건물 앞에 서면 탄성을 발합니다.

63빌딩이 처음 세워졌을 때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는 사람마다 감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서울의 자랑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그와 같은 고층 건물을 짓는 것은 군사적인 이유로 허가 받기 어려웠는데

독실한 크리스천인 시공주 내외가 열심히 기도해서

거의 기적적으로 허가를 받았고, 건물의 모양이 두 손을 맞대고 기도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북경의 자금성(紫金城)에 가면 그 규모 때문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 지어진 건축물 앞에 서면 감동을 받습니다.

건축은 예술 가운데서도 차원이 아주 높은 예술입니다.

우리는 유서 깊은 고적 앞에 서면 감탄합니다. 서양인들을 "원더풀!" 소리를 연발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발이 성전에 들어오면

그것보다 더 놀라운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더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성전에 올 때부터 찬양을 하며 와야합니다.

 

▲시편 120편~134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데 우리는 "우리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르며 와야합니다.

 

가끔 성가대의 찬양을 통해 듣는 "나 어제 밤 잘 때 한 꿈을 꾸었네"로 시작되는

"거룩한 성"이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가사가 매우 은혜롭습니다.

그 가사가 성전에 오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크던지 작든지 우리에게 성전이 있다는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성전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죄와 허물이 많고 부족해서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장소가 주어진 것을 찬양해야합니다.

 

▲남북이산가족면회소 설치가 검토되고 있습니다.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남북이산가족면회소에 가서

이산가족 만나는 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성전은 상처받은 심령이 치유함을 받고 새 힘을 얻는 곳입니다.

이런 성전이 주어진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육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병원들이 얼마 전에 폐업을 해서 국민들에게

큰 불편과 어려움을 준 일이 있습니다. 만일 영혼과 심령의 상처를 치유하는 교회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쓸모 없던 사람이 변화되어 유익한 사람이 되는 교회가

이 땅에 주어진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지난 번 부흥회 강사(김유정 목사님)를 통해서 우리는 그 생생한 사례를 보았습니다.

주인집에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노예 오네시모가 신앙을 통해서 새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감독이 되었다는 전승까지 전해집니다.

 

그저 세속적인 출세만이 목적이었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 프랜시스가

교회를 통해서 사랑과 구제의 실천자가 되어 성자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황해도 일원에서 소문난 깡패였던 김익두(金益斗)가 교회를 통해서 새 사람이 되었고

기적을 많이 일으키는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6․25 사변 중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황해도 신천교회를 지키다가 교회 마당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성전은 이와 같이 귀한 곳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에 올 때 찬양하면서 오시기 바랍니다.

오셔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을 떠나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마치고 돌아갈 때 "신자의 의무를 다 했다" 하는 해방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주유소에 들려 급유를 마친 자동차가 다시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달리는 것 같이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위에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합니다.

 

▲독일에 가서 어느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데 안내하는 목사님이

"이 교회는 천 년이 되었습니다. 부분적인 수리는 여러 번 했지만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고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유서 깊은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면서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 교회당은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튼튼하게는 지어야겠구나!'

 

근 500년 전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설교하던

비텐베르그 성(城) 교회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루터가 설교하던 강대상도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신축 성전이 백년 뒤 이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목양교회야, 너는 치밀하게 짜여진 성전으로 건축되었도다" 찬양하는 성전이 되고,

2,500년에도 변함없이 성전으로 사용되고,

나가서는 3000년 새 밀레니엄 예배도 드릴 수 있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여러분 찬양하면서 성전에 오시기 바랍니다. 성전에 오셔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찬양하는 성전을 이룩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전을 사랑하며 축복하는 일입니다.

 

6절에서 9절까지는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축복하는 간절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전은 축복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통해서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축복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서로 축복할 때 축복은 더 크게 임합니다.

요즘 예배 용어나 형식을 바꾸는 시도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습니다.

 

"묵도"란 말은 이제는 "조용한 기도"라는 말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 목사님이

"하나님의 축복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하면

성도들은 "목사님과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화답을 합니다.

(가톨릭은 오래 전부터, 미사 때 그렇게 서로 화답했습니다. “사제에게도 함께~”)

성찬식 예문도 앞부분이 그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축복할 때 복이 더 커집니다.

일방적으로 축복을 원하는 경우에는 받을 수 있는 축복이 적어집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파경을 맞이했습니다. 의외로 생각되어서 이유를 잘 알아보니

어느 한쪽에서 사랑을 받기만 원해서 다른 한쪽이 부담과 짜증을 느껴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축복해야 합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성전을 통해서 큰 축복을 받습니다.

 

▲어제 이 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린다는 방송을 들으며

교회 때문에 많이 염려하고 기도하신 줄로 압니다.

교회가 궁금해서 교회로 오시다가 교통이 마비되다시피 해서

되돌아가신 성도님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습니까?

 

어제 오후 4시 30분부터 교회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전기사고를 염려해서 바로 전기 콘센트를 다 뽑아 버렸기 때문에

전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전화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더 궁금하셨을 것입니다.

 

공사현장은 무사합니다.

교회에는 흙탕물이 많이 들어 왔는데 지금 지장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여름수련회 준비를 하던 학생들과 청년 교사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수습을 하려고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교역자들이 달려오고 성도들이 서로 연락해 가며 빗자루, 걸레, 쓰레받기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물이 많이 들어 왔습니다만 성도들이 합심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니까 이렇게 깨끗해졌습니다.

 

성도들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런 힘이 견디기 어려운 위기의 여러 고비에서

교회를 지켜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당으로 들어오셔서 바닥이 진흙 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먼저 깜짝 놀라고

그 다음에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아세아방송에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겨울에 송신소 변전소에서 전기 사고로 화재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놀라서 물통을 구해 들고 달려가는데

그 때 송신소장이 노먼 블래이크라고 호주 계통의 키가 큰 미국인 선교사였습니다.

 

이 분도 함께 달려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주 시내 전기가 다 나갈 정도로 큰 사고였는데 화재가 일찍 수습되었습니다.

이십 년 뒤 그 선교사가 은퇴한 뒤에 "그 때 퍽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고 했더니

그 선교사는 겸손하게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내가 관절염이 있어서 주저앉은 것이었겠지요"

서로 웃은 일이 있습니다.

 

성전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두 배가 되어 여러분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성전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축복이 열 배가 되어 여러분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성전이 평안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평안이 바다 물결과 같이 큰 평안이 되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덮을 것입니다.

 

◑셋째, 성전은 심판의 보좌가 있는 곳임을 알아야합니다.

 

5절,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이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이 왕권의 중심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해야 하고 그 통치에 순종해야합니다.

 

올해 여름성경학교의 총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생활",

오늘 끝나는 유치부 여름성경학교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어린이"

내일부터 시작되는 중고등부 수련회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올해 속회 공과의 주제 역시 "새 천년,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한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상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사랑과 공의가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거기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또 성전이 모든 것을 판결하는 곳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개인적인 일나 국가적인 중대사도

성전에 와서 제사장에게 물어 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으로 판결했습니다.

 

성도들은 중요한 문제의 판결을 성전에서 구해야 합니다.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가운데,

묵상하는 가운데 교역자들과 신앙선배, 동료들의 조언을 통해서 구해야합니다.

 

국가의 최고 판결기관은 대법원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성전이 또 하나의 대법원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헌법재판소의 기능이 많이 강화된 것 같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이 법은 헌법 정신에 어긋나오!" 판결하면 그 시간부터 그 법은 효력을 잃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성전이 또 하나의 헌법재판소가 되어야합니다.

"이 일은 우리의 헌법인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하면

자기에게 아무리 유익이 되는 일이라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삼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칠칠절․초막절입니다.

이 가운데 칠칠절은 맥추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삼대 절기에는 모든 백성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례(典禮 또는 傳例)입니다.

 

이 노래는 이와 같은 절기들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이 되면 빠짐없이 성전에 와야합니다.

아니, 새벽 기도회와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예배와 금요심야합심기도회와

속회예배에 빠짐없이 성전에 와야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례가 되어야합니다.

 

이제 우리 발이 새 성전 안에 서려 하고 있습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을 더욱 사랑하고 성전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하여 기쁨이 더욱 커지고 더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