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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LNCK 2024. 7. 2. 11:2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말씀

 

그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행6:4~7, 엡4:12      2023.06.04. 축약, 정리

◑말씀, 설교의 중요성                  

말씀이 꾸준하게 그리고 책임 있게 전해지지 않으면 
성도들은 영적 영양 부실을 겪게 됩니다. 

교회 세속화 혹은 약화가 일어난 곳에는 항상 징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뒷전으로 밀려 나는 거예요.

말씀보다 앞서는 그것들도 다 필요한 것이겠죠. 그래서 강조되는 거죠.
그렇지만 말씀이, 설교가 다른 것의 뒷전으로 밀려날 때, 
교회의 세속화, 교회의 약화, 영적 침체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설교자가 말씀 자체를 선포 하기보다, 
사상이나 세상적인 이론과 철학을 전하려고 할 때,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물론이요, 일부 신자들까지도, 
말씀의 권위 혹은 진리의 권위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저항을 내비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오늘날 생각보다 까다로워 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이 시대적 환경과 문화가 
절대 진리, 구원의 유일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데, 우리가 어떤 것에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하여 회심을 일으키고, 
말씀을 통하여 영적 성장을 일으키고,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헌신자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넘치는 말씀이 강단에서 설교로 선포되어지면, 
교회는 살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와 설교자는 교회의 심장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몸의 모든 기관을 돌면서
각 장기와 기관에 피를 통해, 생명, 산소, 영양분을 공급하듯이 (여기엔 예외가 없습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교회의 모든 기관과, 모든 영역, 모든 성도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생명, 산소, 영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와 성도는 살아서 활발히 움직이게 됩니다.
반대로 그 기능이 약화되면, 교회와 성도가 약화되거나 시들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오래 계속 지속되면 '영적 침체 spiritual recession'에 빠져버리는 거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네가 실상은 죽은 자라'는 말씀처럼 되어버립니다. 계3:1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이죠. *대변자, 받아서 전달함

그래서 여러분, 예배 시간에 설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언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설교'라는 이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 전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전달하게 하시고, 
그래서 때로는 설교자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 부족한 입술을 통하여 교회에 말씀이 전달될 때, 
그 전달되는 과정 속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10:44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필요가 채워지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들을, 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계속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 수 천 년의 전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도 중요하고, 회중도.. 둘 다 중요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을 때, 어떤 태도로 우리는 받아야 되는가요? 
설교자도 중요하지만, 설교를 받는 우리의 태도도 매우 중요해요.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렇게 대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름부음 받은 대언적)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 이 시간 대할 때, 
그 말씀은 오늘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rfcdrfcd.tistory.com/15981710

 

▲그런 의미에서 '전하는 설교자'와 '말씀'은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령이 설교자에게 역사를 하십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서도, 성령이 역사를 하시고 
말씀을 받는 성도들 가운데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루터나 존 칼빈이나 이런 분들은 모두 
'하나님이 강단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임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렘15:19
설교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죠. 

말씀에 대한 존경심은, 설교자에 대한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설교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입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 중에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은혜 생활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물론 설교자 역시 말씀을 전하는 일과, 자신의 삶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되겠죠.

▲바울은 자기가 쓴 서신서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정당성을 많이 강조합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에서 나오는데요.
 
이유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닙니다. 
자꾸 사람들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울의 사도 직을 훼손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의도는 뭐냐면,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그 말씀을 훼손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사도권이 없으면, 그가 전하는 말씀은 
더 이상 성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훼손시키려고 했던 거죠. 

여러분 오늘 우리도, 메신저와 메시지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6: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러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이라면,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책임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근데 말씀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면, 말씀을 전하는 자와 관계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위 6:6절은 그냥 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잘 전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을 듣는 자들이 도울 때, 
그 좋은 말씀들을 받는 회중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말씀을 듣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가 그냥 흘러 들어오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날은 '좋은 목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좋은 목사는 사실 좋은 회중 안에서 만들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누가 먼저 인가'를 알 수 없는 역학 관계가 있는데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듯이
여러분, 좋은 목사를 통해 좋은 교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아니면 좋은 교인이 있어서 좋은 목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네, 이 말도 맞습니다.

둘은 상호 관계가 있는 거예요. 
어느 한 쪽 탓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최우선순위

여러분 좋은 목사는 누구입니까? 
물론 좋은 목사는 다 잘 해야 하지만, 그래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입니다. 행6:4

여러분, 집 안에서 엄마가 해야 할 역할이 많이 있죠. 
아이들을 옷을 입히고, 잠도 재워 주고, 같이 놀아도 주고, 학교도 보내고... 
다 하는데 그래도 엄마가 밥을 안 해 준다면, 좋은 엄마가 되겠습니까?
제때 따뜻한 밥을 꼬박꼬박 잘 먹이는 엄마가.. 좋은 엄마예요. 

마찬가지로 목사는, 무엇보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맡겨진 양 떼를 배불리 먹도록 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그 다음 차제의 문제예요. 

성도들 역시 목사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말씀의 사역자가 되도록 하는 것,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원해야 됩니다.

▲말씀의 사역이 활발하게 많이 일어나는 그 시대는, 참으로 복이 있어요. 
근데 말씀 사역이 약화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희귀해지면 
그 시대는 영적 어두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래서 행6: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힘쓰리라'
과거 성경엔 '전무 全務 하리라' 고 했죠.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일이, 사도들 사역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왜냐면 과부를 구제하는 문제를 중재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사도들이 깨달은 거죠. 

이 말은 여러분 뭘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그 말이죠.
지식적인 말씀이 아니라, 기도가운데 이루어지는 영적인 말씀 사역!

그래서 교회의 돌아가는 모든 것은, 말씀의 원리 안에 이루어져야 된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되면 
결국 교회 안에 불필요한 문제들이 이슈가 되고,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힘썼을 때, 전무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요?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래서 목사는 바쁜 활동가이기 보다는, 
좀 더 차분한 시간을 확보하고, 묵상하고... 
때문에 '영성가'로서의 설교준비에 정성을 드리는 데, 힘써야 합니다
(목사가 심방, 건축, 회의, 외부집회 등으로 바쁜 것은 범죄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울러 목사('목자' 라는 뜻)가 양떼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존재 목적은 말씀 전파에 있습니다. 양떼들에게 배불리 꼴을 먹이는데 있다는 거죠.

한 교회를 목양하도록 위임된 목사의 설교는, 곧 목양의 핵심입니다. 
성도들을 직접 일일이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지만,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어떻게 목사님이 매주 내 개인 사생활을 다 들여다보고 
설교를 하느냐?'는 거예요. 누가 자기 사정을 목사님께 알려줬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여러분,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 성령의 작용이 있습니다. 
성령은 각 개인에게 필요한 말씀을, 오늘 공적으로 선포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어떤 분은 자기 개인에게 말씀을 한다고 듣는 이유는 뭘까요?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거죠. 

설교는 단순한 연설이 아닙니다. 설교 행위 안에 성령의 개입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가, 설교를 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회자의 설교를 사용해서 회중을 돌보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목사로 하여금 (시의적절하게)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지시해 주시는 거죠.
매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날수록 '기름부음 받은 설교자'가 됩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 공동체에,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설교자에게 알려주시고, 그것을 준비해서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공동체 가운데 흘러 넘치도록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공동체의 운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살아있을 때, 덩달아 살아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간증자들이 많이 세워지는 집회 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은혜로운 간증들이 성도들의 신앙에 도전을 끼치기도 하지만, 
간증에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이런 집회는 우리가 조심해야 돼요.

(더욱이 한 간증자가, 똑같은 간증을 20~30회 교회를 순회하면서 반복하는 것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간증자 스스로가 변질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간증을 꼭 하려면, 5~10년에 한 번 정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변질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변질은, 간증자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 스스로 교만해지는 거죠) 
 
여기 위험성은 뭐냐하면, 말씀보다 간증(체험)을 더 선호하는 문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교회의 후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 보다 앞서가는 게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아무리 예배 시간에 귀중한 것들이 많아도 
말씀의 자리가 교회의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 개혁주의 교회의 특징은, 강단에 아무런 장식이 없습니다. 
그냥 강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게 독특한 구조예요. 

(과거에는 강대상과 더불어 성찬상이 있었습니다. 40년 전만 해도 있었죠. 
거기 성찬상에는 보통 큰 성경을 펼쳐 놓았습니다. 원래는 '성찬상'입니다.
그 이유는, 개혁주의는 은혜의 방편을 '말씀'과 '성찬'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삽니다.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 것처럼, 말씀을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살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성도를 능히 든든히 세웁니다

행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라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까? 
시스템, 건물, 조직이 잘 짜여진 교회? ... 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저력은 말씀에 있습니다. 
성도들 안에 말씀이 단단히 새겨져 있다면, 
그 교회는 누구도 흔들 수가 없어요. 

▲설교가 살아날 때, 말씀이 흥왕하게 될 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됩니다.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 구절에 의하면, 봉사는 누가 하느냐? 
온전(성숙)하게 된 성도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역할은 누가 하느냐? 
목사가 하는 거예요. 목사가 말씀을 통해서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온전하게 된 성도가 하는 일은, 성도는 봉사의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말씀하는 교회는, 
어떤 특정한 사역자, 전문가가 사역을 하는 게 아니고, 
모든 성도들을 말하는 거예요. 본래 교회에 대한 그림은 그런 거예요. 
모든 성도가 사역자가 되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들이 봉사(사역)의 일을 회피합니다.
연말만 되면, 부교역자들이 아주 힘들다고 하죠.
내년에는 다들 교사나 봉사직을 안 맡으려고, 부교역자의 전화를 안 받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가장 근본적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설교가 약화되어, 성도가 온전케 되지 못하여, 봉사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건사하기도 힘든데.. 사실 봉사하기가 엄두가 나지 않겠죠.

원래 교회의 목표는 그런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을 위하여 있고, 
그렇게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수단은, (90%이상이) 말씀, 설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에서 설교를 강조하고, 빠짐없이 예배 때마다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도 성도가 온전(성숙, 장성)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단락이, 이 설교의 하이라이트 입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힘주어 설교하지만, 설교의 임팩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이 설교에 충격을 받아야 되는데, 
아주 좌우에 날선 검에 살짝 베인 것처럼, 그런 두려움과 통증이 있어야 되는데, *좋은 의미

마치 무디고 무딘 칼날이 바람만 일으키고 스쳐간 것처럼, 
아무 임팩트가 없는 설교.. 그저 예배당 공기만 진동시키고 마는
맥빠진 설교가 선포되어진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그거 모르는 설교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를 다 압니다.
20년 전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지식이 많이 공유되어서 다 압니다.
'말씀이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거죠.

설교자 자신이 먼저 실천하고, 그 말씀대로 평소 삶을 살고,
그 다음에 가르치는 말씀은 '힘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저 성구 사전으로 검색해서
'이 말씀이 이 설교 맥락에 적합하겠구나' 해서, 지식적으로 전달하는 말씀은
말은 맞는데, 맥이 없는 거죠. 듣는 사람들도 진부해 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마4:4
이게 그저 나온 말씀이 아니란 거죠.

예수님이 지난 30년 동안 살아오시면서, 그 말씀을 암송하시고, 묵상하시고,
평소에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사시는 가운데... 마귀에게 그 말씀의 검을 휘두르신 것입니다.

 

이런 '체화, 육화된' 말씀이 임팩트가 있고, 교인들의 심비에 새겨진다는 거죠.
좌우에 날 선 말씀의 검에, 제대로 베이는 것입니다. 

△그럼, 설교자가 모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서 다 살 수는 없는데,  *인간이니까요.
어떻게 모든 말씀을 가르칠 수 있나요?
모든 말씀을 다 실천하기란.. 사실 어렵고, 사람은 다들 자기 약점이 있잖아요.

그 말씀이 살아지지 않으면, 실천이 쉽게 안 되면 
'그거는 안 되더라, 힘들더라, 살아내기가 어렵더라' 라고 고백하는 것이,
또한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 적지 않는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간디의 유명한 일화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이죠.  주1)

▲오늘날 회중들이 설교를 지루해하는 중대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전에 봤던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시는 분 있습니까?
글쎄 그런 마니아가 간혹 있을지 몰라도, 아무리 재미있어도 두 번, 세 번 안 봅니다.

여러분, 전에 읽은 책을 두 번, 세 번 보시는 분 있습니까?
그 책을 정독해서 읽으신 분이라면, 두 번, 세 번 다시 읽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새 책을 꺼내서 읽지요.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는 거죠.

그렇다면 과거에 들은 설교, 두 번, 세 번 들으면... 청중의 기분이 어떨까요?
과거에 아무리 감명 깊게 그 설교를 들었어도, 재방송은 좀 은혜가 많이 떨어집니다.
설교도, 예화도.. 신선한 게 은혜스럽습니다.

교회 새로 나온 새신자는 상관없습니다. 뭐든지 처음 듣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교회 10~20~30년 다니신 분은, 설교 본문과 제목만 봐도
'오늘 설교의 대지는 보통 그런 거겠구나' 하고, 자기 머리에 밑그림이 딱 그려집니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이런 현실을 타개하는 길이 있느냐? 있습니다.
설교를 "더욱 깊게" 하는 것입니다.

1) 위에서 '내 몸으로 실천해 본 말씀의 설교'와 아울러
2) 한 가지 더 '내용을 더 깊게 파는' 것입니다. 

그 본문의 배경과, 역사적 사실, 구절의 원어 연구, 전후 문맥 검토,
대조 본문(병행구절)과 비교 등, 과거에 설교보다 좀 더 깊이 파면(연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청중들이 딴 생각하다가도, 금방 자기 주의를 설교에 돌려서, 귀기울일 것입니다.
'이거는 전에 못 듣던 새로운 내용이네...' 하면서요.

△어떤 설교사역 전문가에 의하면, 
지금부터 20년 이전 과거 설교들은, '한 두 구절 풀이, 제목 설교'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나름 은혜도 있었고, 좋았지만.. 온전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설교 본문이 열 구절, 스무 구절이라도
실제 설교는 거두절미 하고, 그 중에 딱 한 구절, 아니면 두 구절,
그렇게만 설교했다는 거죠. '요절 중심의 제목 설교'

쉽게 말하면, 주해설교, 강해설교를 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 이유는, 주해설교, 강해설교를 하려면 많은 힘이 드니까요.
설교 준비하는 시간도 10배로 더 많이 들고요.

그러니까 한 구절 딱 따와서 설교하고, 
한 구절만 읽기는 허전하니까, 본문은 전후로 길게 한 열 구절 정하는 거죠.
 
그러나 요즘 앞서가는 설교자들, 
그리고 젊은 목사들일수록, 이제 신학공부도 과거보다 많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설교 본문을 순서대로 강해설교하고,  
본문의 '해석'에 치중합니다. 
'그 성경 본문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그걸 마치 금맥을 찾아서 캐내는 광부처럼, 열심히 곡갱이 질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 10년 지나면, 뭐든지 다 발전하잖아요. 사회의 모든 면은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지금은 과도기이지만,

앞으로는 강해설교로, 
즉 본문의 문맥을 해석하고, 
그 본문의 각 구절의 주석을 연구하고, 필요한 원어의 뜻을 설명하고,

그래서 한국교회의 강해설교가
우리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 세계로 수출되어지는 *K-POP이 아니라요
그런 날이 10년이 지나면, 다 바뀌어지리라 보는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까요...

지난 세월, 한국교회가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 (건축, 개척) 중심으로 선교를 했다면,
앞으로는 한국교회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말씀을 구절 구절 해석해서 가르치는
그런 선교를 하게 될 날이 지금 오고 있고, 앞으로 완전히 흐름이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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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마하트마 간디의 '사탕 일화'
어느 날 그 유명한 인도의 간디 선생님에게 
한 여인이 사랑하는 자기 어린 자식을 데리고 와서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단 것을 너무 좋아해서 이가 다 상했습니다. 
단 것을 먹지 않도록 좀 따끔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제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간디는 이 어린 소년을 가까이 불러서 뭐라고, 뭐라고 얘길 했어요. 
뭐 별 얘긴 아니에요. "단 거 많이 먹지 마라. 몸에 해로우니라." 
그리고 보내면서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이 아이는 단 것을 먹어댑니다. 여인은 일주일 후, 다시 아이를 데리고 
간디 선생님에게 갔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다고, 그런데 효과가 없다고 했더니 
간디는 아이에게 다시 말합니다. 

"얘야, 단 것을 많이 먹으면 해로우니까 먹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서는 
그 이상 말이 없어요. 어머니는 의아해졌습니다. 

아니,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오늘 또 그렇게 말하시니 
이래가지고 무슨 효과가 있겠나 싶어서 
"선생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했지만 얘는 달라진 게 없거든요." 

간디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오늘은 효력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서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 때는 나도 단 것을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 동안 나도 단 것을 안 먹었습니다. 
그러고서야 오늘 말했으니까 효력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