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니온 전도 행14:1~7 인터넷설교 녹취, 정리
▲도입
행13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그들은 이고니온이라는 지역으로 갔는데요.
이고니온은 오늘날 터키의 코냐 라는 지역입니다. (여행채널에 가끔 나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까지의 거리는 동남쪽 약 144KM의 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없었고,
더군다나 가는 길에 넘어야 하는 산이 30개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멀고 험한 길이라는 뜻이죠.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 .. 이 지역을 통털어 '남갈라디아'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라는 명칭은, 오래 전에 고울(프랑스) 사람들 일파가
그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형성된 도시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답니다.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오래 있어'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면, 사역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패턴과 거의 비슷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패턴이 4단계로 요약되죠. 복음전함 → 믿음 → 거부자들의 박해 → 쫓겨남
이 사역의 패턴이 본문 이고니온 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두 반응으로 또 나뉩니다.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반대로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일어나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합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또 이고니온에서 피신해 나옵니다. 14:5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실 새로운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제(설교자)가 처음에는 이 본문을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이 본문을 간단히만 다루고, 8절이하 루스드라로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이고니온을 건너뛰려고 했습니다.
▲이고니온에 '오래 있어'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는데,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먼저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고 말합니다. :1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는 뜻입니다.
a great number of Jews and Gentiles believed : NIV
그런데 물론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죠.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안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합니다.
여기 '형제들'이란, 예수를 믿게 된 새신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도 포함되겠죠.
(당시 기독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도'라는 표현은 나중에 나옵니다)
물론 바울과 바나바가 악감의 주된 타겟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3절부터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이해되지 않는 사도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곳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걸 알고 있었겠죠.
그런데 3절에 보면 뭐라고 나오죠?
'두 사도가 오래 있어' 라고 말합니다. Therefore they spent a long time
여러분 이 반응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도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악감을 가진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반응이 나와야 하죠?
'두 사도들이 빨리 그 곳을 떠나가니라'
여러분, 이 반응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어느 회사에 취직해서 들어갔습니다.
회사에 들어갔더니, 상사가 한 명 있는데 약간 비정상적인 인격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미워합니다. 게다가 다른 직원들을 선동을 해서
여러분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그래서 부서 전체가 여러분을 왕따 시킵니다.
공기가 딱 다르게 느껴지는 거죠.
여러분을 쫓아내기 위해, 여러분을 매일같이 괴롭힙니다.
여러분에게 악감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이 나와야 맞죠?
그 회사를 빨리 그만두거나, 빨리 사직서 내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거죠.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이 무엇이죠? '두 사도가 오래 있어' 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반응이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왜 박해를 당하는데, 계속 오래 버티며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반응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다'고 나옵니다.
지금 핍박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공기를 아는데,
위축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3
악감을 품고 반대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도들은 지금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라고 말합니다. :3
여러분 사도들이 눈치가 없는 걸까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건가요?
아니겠죠. 인간적인 이유로는 오래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갈 곳이 없어서 오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보란 듯이, 그곳에서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 사도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들은 지금 이방인들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세상의 대적과는 무관하게
이들은 지금 자기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모습을 박영선 목사님은 '무한 궤도'로 비유를 했습니다.
여러분, 탱크나 포크레인, 불도저 같은 데 보면, 바퀴 위를 감싸고 있는 긴 벨트가 있죠.
그 크고 동그란 벨트를 회전시켜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장치가 무한궤도이죠.
영어로 '카테필러 caterpillar'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한글보다 영어를 더 자주 썼습니다.
그래서 무한계도를 탑재한 차들을 보면, 자기가 자기 길을 깔면서 움직입니다.
보통 모든 차량들은, 길이 닦여있는 도로만 갑니다.
특히 기차는, 레일이 깔린 철로 밖에 못 가죠.
그러나 무한궤도를 장착한 차량은, 자기가 자기 길을 깔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길이 없어도, 길을 깔면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모습이, (박목사님은) '이런 무한궤도와 같다'고 말합니다.
지금 사도들은 세상이 자기들에게 호의를 갖고 반응하든, 무관심하든
박해를 하든 상관없이,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는
자기들이 직접 길을 깔아가면서, 마치 무한궤도를 장착한 사람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적, 세상의 반응, 호불호와는 무관하게
자기네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타협하거나, 믿음을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현실에 부딪히는 반대와 어려움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종종 타협을 하거나 손을 놓아 버립니다. '내가 이러려고 이걸 하느냐?'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현실에 부딪히는 반대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에 안찬호 선교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펀 글)
이 분이 선교하는 마사이족은, 미개하고 폐쇄적이고 전투적인 부족입니다.
아직도 소똥으로 집을 짓고, 소의 젖과 피를 마시며 삽니다.
그 곳에 선교를 갈 때, 마사이 말도 전혀 못하고, 영어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원래 이 분은 탄광촌에서 깡패처럼 살다가 갱도에 갇혀서 죽게 된 순간에
같이 있던 사람에게 전도되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후 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무작정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선교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처음으로 설교를 부탁받았습니다.
마사이족 언어를 못한다고 하니까, 그냥 영어로 해도 된다고 해서,
짧은 영어로 원고를 준비하여 읽는 연습을 하고, 드디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 설교를 한다니까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시간이 돼서 강단에 섰는데, 너무 긴장이 되어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설교는 영어로 준비했는데, 기도는 미처 준비를 안한 것입니다.
긴장해서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인 것입니다.
다들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일단 기도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Heavenly Father, Help us” 그리고는 아무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Help us... Help us...” 하면서 속으로는 “Help me”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수했구나, 큰일났다’ 이런 생각에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바보 바보, 너가 선교사라고?
넌 자격이 없어, 끝났다. 그냥 도망가라’
이런 마음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어디서 한국말로 “주여”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답답해서 사모님께서 하신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래, 차라리 한국말로라도 기도하자’ 라는 마음에
큰 소리로 “주여” 하고는 그냥 한국말로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거의 한탄과 설움으로 기도를 했는데, 오히려 마음은 후련하더랍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눈물 때문에 원고가 다 젖어서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그냥 강단에서 내려와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다가
그렇게 예배가 끝났습니다.
“이젠 끝이구나. 이렇게 설교를 망쳤으니 선교고 뭐고 다 끝났다.”
이런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채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하는데,
추장이 제일 먼저 달려와서 부둥켜 안더니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목사님을 잘 따르겠습니다”
하면서 우는 겁니다.
이어서 성도들도 다 울면서 “목사님, 회개합니다.”
“목사님 용서해 주세요. 목사님을 싫어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소를 한 마리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 목사님은 어리둥절하고 너무나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놀랐습니다.
케냐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몸의 체액을 무척 아낀답니다.
이들이 반가운 손님에게 하는 최고의 인사는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아끼는 체액을 주는 것이 가장 귀한 인사입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와서 눈물을 바가지로 쏟았으니, 얼마나 감동을 했겠습니까!
‘선교사님이 와서 우리를 위해 저토록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나’
라는 생각에 회개가 절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추장의 회개로 전 부족이 한 번에 전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유창한 영어로 혹은 마사이 어로 설교를 했다고 이처럼 되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실수투성이의 선교인데도 그는 20년이 넘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서 이제는 마사이족의 대추장으로 추대되어 귀하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선교사가 20년이 넘도록 '오래' 거기 있은 이유가 뭡니까?
'눈물을 뿌리며' 자기의 진정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 대답이 오늘 본문 안에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눈여겨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두 사도'라는 단어입니다.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켜서 '두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지금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서
'두 사도'라고 부르는 장면입니다.
물론 1절과 3절에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두 사도'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워 원문에 보면 '사도'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주1)
우리말 성경에선 이해하기 쉽도록 '두 사도'라고 만들어 넣었을 뿐입니다.
헬라워 원문으로 보면, 딱 4절에만 '사도'라는 헬라어 단어가 나옵니다.
사도의 헬라어가 '아포스톨로스' 인데요. 14:4절에 비로소 처음 나옵니다.
지금까지 누가는, 사도행전 안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행9장의 사울의 회심 이후, 한 번도 그를 '사도'라고 부른 적이 없고, 그건 바나바도 마찬가지죠.
이제껏 원래 사도행전 안에서 '사도'는, 열두 제자인 열두 사도에게만 쓰인 명칭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가는, 이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뒤에 4:14절에 보면요. 이들을 또 사도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사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바나바가 누구라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실라도 사도였습니다.
살전2:7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여기서 '우리'는, 바울, 실라, 디모데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바울 자신과 실라, 두 사람을 '사도'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디옥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다,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바울도, 바나바도, 실라도 '사도'인 것입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사명을 갖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니까요.
△오늘날 우리 역시, 이렇게 '보냄 받았다, 파송 받았다'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사명감 만큼 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명감의 그릇이, 결국 사역자가 일하는 범위요, 깊이요, 한계라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분명한 사람은.. 자기가 받은 사명감 만큼 일을 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불굴의 의지로 그 먹구름을 헤치고서 뚫고 나갑니다.
자기가 받은 사명감 때문입니다.
또한 사역자는, 받은 사명 이상으로 일을 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 사명의 한계를 초과해서 일한다면.. 그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두 사도가 '사도'로서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명감에 불타서, 자기를 반대하는 분위기인데도, 이고니온에 오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명감이 불분명한 사람은.. 사명감이 불분명하니까,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냥 마가처럼,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 일에, 자기가 받은 사명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 유학하는 학생들에게 'Ph. D.는 사명감으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논문이 빠꾸 back 되고, 4
새로 써 가면 또 빠구 되고... 쉽게 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고비도 넘깁니다.
그 과정에서,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보따리를 싸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Ph. D.를 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난관이 오더라도, 끝까지 버티고, 그 파도를 타고 넘고, 또 타고 넘어서
결국은 학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많은 유학생들이 공감합니다.
본문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라고 특별히 부른(쓴) 의미는,
두 사람은 '사명감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사명을 받아 보냄받은 자'이니까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사명감! 그러니 정말 무한궤도를 장착한 불도저처럼
자기들을 반대하는 이고니온에서도 '오래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버티다가.. 나중에 어쩔 수 없으면, 그제야 떠나는 거죠.
그리고 루스드라를 거쳐 더베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고니온을 들립니다.
이들이 12사도 안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사도라고 불린 게 아닙니다.
여기 '사도'는 넓은 의미로 포괄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고 교회에서 파송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신, 사절, 특사 라는 의미죠. (원래 사회에서 그런 의미로 쓰고 있던 말을,
교회가 갖고 와서 쓴 것입니다.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을 시중에서 쓰고 있었죠.)
참고로, 바울은 '사도 - 사명을 줘서 보냄을 받은 자' 라는 말 말고도
'사신 ambassador' 이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사신 ambassador'으로 자기가 보냄 받았다는 거죠.
고후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렇습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자 라는 사명감이 분명하고, 뜨거워야 하겠습니다.
왜냐면 '부르심을 받은 만큼 일하니까요!'
*부르심을 받은 만큼 일한다 https://rfcdrfcd.tistory.com/15975211
◑복음사역을 뒷받침하는 표적과 기사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3절에 보면요. 하나님께서, 두 사도를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십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가 어디에 동원되죠?
그들을 핍박하는 나쁜 환경이나 나쁜 분위기를 제거하는 데 동원되지 않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시니'
사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의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죠.
두 사도가 표적과 기사를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것이 뒤따라 자연스레 나타난, 동반된 것입니다.
▲따르는 표적
3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담대히 말하니'가 먼저 나옵니다.
복음의 말씀을 먼저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표적이 뒤따랐습니다.
이렇게 '표적이 뒤따를 것'을, 예수님이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이 확인시켜 주는 거죠.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이라는 확증을 주신 것입니다.
혹자는, 표적과 기사가 signs and wonders 나타나는 사람들이
너무 은사에 치우친다고 비판합니다. 맞습니다. 치우치거나 우선하면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됩니다.
그런데 복음 사역을 오래도록 계속하는데 '아무 표적과 기사도 안 나타난다.
우리는 오직 말씀 사역만 한다..' 이것도 이상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이 정상인데, 안 나타나는 것은 비정상인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 뒷받침 하기 위함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서, 그들을 대적하는 나쁜 환경이 장애물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그 표적과 기사로 인해,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도 일어났습니다.
3절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는데'
4절에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그러니 표적과 기사를 모두 다 믿는 것은, 또 아닌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여전히 안 믿는 것입니다.
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그 관리들이'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로, *유대인, 이방인에 이어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원들입니다.
앞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곳 관원들이 나서서 핍박했을 때 13:50
바울 팀이 그곳을 발에 티끌을 털어버리고 떠난 적이 있었는데,
똑같은 일이 이고니온에서도 벌어졌습니다. 13:51
'모욕하며'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나타내는 말로,
이것은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폭력행위라기보다는
경멸하는 어투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히는 것을 나타냅니다.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5
그들의 모욕은, 투석을 통한 폭력행위로 발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의 아나니아의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음 방문 도시인 루스드라에 가서는
바울이 실제로 돌에 맞아 '죽는' ... 죽은 줄 알고, 그들이 성밖에 내다 버렸죠.
그 일이 발생합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바울은 더 이상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더 이상 그들을 격동시키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피해 줍니다.
그래서 거기서 약 40킬로 남쪽에 위치한 루스드라로 옮겨갑니다.
너무 대적이 강하게 나올 때는, 강대강으로 맞부딪히는 것보다는,
피할 때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입니다.
'비겁하거나, 쫄보라서 피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초기에 내한선교사들과 일본 정부는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가졌습니다.
왜냐면 성경에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36~37년부터 내한선교사들과 일본 정부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동아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이 '천황 우상화'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신도 종교 강조 정책으로
일본과 한국의 국민적 일체감을 끌어내려 했는데,
선교사들이 (일부 성도들 포함)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에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자 일본은,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했고,
1937년부터 당시 남장로교 선교사만 (호남에) 1백명 가량 있었는데, 다 떠나게 되었죠.
그런데 끝까지 떠나지 않고, 광주 선교 기지를 지킨 유화례 선교사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유화례 선교사 https://blog.naver.com/coldwater1cup/223281152415
그는 625때도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산속에서 한국성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지를 지킨 불굴의 선교사로 유명합니다.
그러면 한국을 떠난 선교사는 겁쟁이고,
끝까지 남아서 선교지를 지킨 유화례 선교사는 용맹한 선교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감동대로, 인도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에는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습니다.' :3
그러나 또 하나님이 떠나라고 감동을 주시고, 또 환경이 그렇게 인도하니
이고니온을 떠난 것입니다. :6
:6절의 '도망하여 fled'는 '피신하여'로 옮기는 것이 더 문맥상 정확합니다.
새번역, 공동번역은 '피하였다'로 번역했네요.
오늘날에도 중국, 아프간, 인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비자 등의 문제로
인근 다른 나라로 떠나는 분들도 있고, 또 그 나라에 계속 머물러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계속 머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울 선교팀도, 처음에는 계속 오래 머무르다가, 나중에는 또 떠난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보냄이 마치 양떼를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냄을 받은 세상은, 우리를 해치려는 이리 때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본문의 이고니온의 대적자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마다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고 오늘날의 성도들은
'마치 무한궤도와 같은' 삶을 삽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길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깔아서 (만들어서) 가는 자들입니다.
성도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 골인지점까지, 과정이 좀 험란해서 그렇지, 승리가 확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뱀 잡는 땅꾼들 말에 의하면,
뱀이 돌아다니는 시기에, 산 중턱에 그물을 쳐 놓으면, 뱀이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물이 있으면, 후퇴하거나 우회하면 되는데, 뱀은 그걸 모른다고 합니다.
오직 직진만 하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땅꾼에게 다 붙잡히고 만다는 거죠.
후퇴할 때는 후퇴해야 하고, 피신할 때는 피신해야 합니다...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인터넷에 보니, 뱀은 배에 수많은 비늘이 있고, 이 비늘은 뒤쪽방향으로 나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뒤쪽에서 앞쪽으로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구요.
바로 이 비늘의 방향 때문에 뱀은 결코 후진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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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4:1절의 '두 사도'는 원전에는 '그들 autos'로,
4:3절의 '두 사도'는, 원전에 '오래 있어 diatribo'라는 동사에 포함되어 생략됨.
개역엔 '두 사도'라고 했는데, 원전에는 '사도들 아포스톨로이' 이렇게 복수형을 씁니다.
'두 two' 라는 말이 없어요.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했습니다. 롬1:1, 고전1:1, 9:1 등
그런데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의 칭호를 적용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지위가 사도로서 인정받았다는 점과
'사도'라는 말이 예수를 직접 수행한 12명의 제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당시에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갈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