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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만큼 일한다

LNCK 2014. 10. 29. 18:15

◈부르심만큼 일한다         고전 1:1~2      2006년 5월 설교 스크랩, 정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전 1:1~2

 

◑1. 부르심이 중요하다

 

사도바울이 결혼도 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위한 일꾼이 된 비결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전 1:1

 

그렇다. 성도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부르심이다.

 

지금 어느 교회가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사역을 감당할 것인가?

- 그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교회이다. 

 

(물론 지상의 모든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의 모임이지만,

시대적인 특별한 부르심이 또한 있다고 본다.)

 

지금 어떤 주의 종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내는 일을 감당할 것인가?

- 그 일에 부르심을 입은 주의 종이다. 평신도도 마찬가지다.

 

 

만약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요소가 강하게 확신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 나라에 별 의미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사명을 받아야 한다.

 

‘내가 오늘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그 일을 시키셨다...’

라는 강한 내적 확신 말이다.

 

▲성경에 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부르심 없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스스로 주의 일을 계획까지는 하겠지만,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을 뿐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용기는... 부르심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부르심을 받는다면, 우리 삶과 사역은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내 사역에 부르심이 있는가? / 희미한가를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기독교는 철저히 부르심의 종교다.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계속된다.

 

부르심이 없으면... 역사history는 변화되지 않는다.

부르심이 없으면, 그 시대에 하나님이 이루시기 원하시는 뜻이 성취되지 않는다.

 

부르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밤중에 자는데, “삼성아!” 라고 부르는 그런 음성이 아니다.

 

빌 2:13절,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소원(부르심)을 주신다.

마음에 어떤 열정(부르심)주신다.

 

▲모세의 부르심

모세도 80세 노인으로서 미래에 아무 비전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니, 자신의 모든 악조건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났다.

부르심을 받은 그 순간, 지팡이에 의지해 살던 한 양치기 노인이

2백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변신했다.

 

어떤 사람도, ‘내 나이 때문에, 내 형편 때문에, 내 사정 때문에,

내 약점 때문에, 내 과거 때문에, 내 가정 문제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 사실은 부르을 안 받은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런 자기 약점들을 기꺼이 극복한다.

상처도 다 치유된다.

 

▲여러분,

어떤 분은, 자기가 대도시에 살지 못하고, 시골에, 낙후된 지역에 살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의 사역이 펴지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원망한다.

 

우리나라에서 소외된 지역에 살고 있으니,

사실 서울로 이사하려고 해도, 시골 집과 논밭 다 팔아야, 서울에 방한 칸 얻기도 부족하고,

또 부동산에 내 놔도, 팔리지도 않는다. 시골집은.

그러니 서울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러나 갈릴리를 보시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낙후 지역, 갈릴리 출신이다.

그 소외된 지역, 낙후한 곳인 갈릴리, 그래서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너 말씨를 들어보니, 너는 갈릴리 사람이구나!' 이렇게 천대를 받았던 그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세계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도들이 배출된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위대한 것이지

자신의 형편과 사정은.. 아무렴 상관 없습니다.  큰 변수가 아니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심의 문제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위대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 임을 인식하자

안타깝게도 세상에 모든 교회가 이 시대에 다 쓰임 받고 있지 못 하다.

부르심을 듣는 교회, 거기에 응답하는 성도가 모인 교회를 

하나님은 마음껏 들어 쓰실 것이다.

 

▲제 개인적 부르심

저도 부족한 사람이다.

우리 사모가 항상 저를 일깨워 준다. ‘당신은 부족한 사람이야!’

 

사실이다. 저는 제가 부족한 사람임을 늘 깨닫는다.

저랑 일주일만 같이 지내보시면, 여러분도 그 사실을 깨달으실 것이다.

 

그런데 23년 전에,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다.

그리고 제게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듣지 못하는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될 것’불러주셨다.

부르심이 임하는 순간, 저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뀌었다.

 

부르심 때문에 저는 선교지에 가서, 지금까지 16년째 사역하고 있다.

부르심 때문에 주님은 저를 거름더미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셨고,

넘어졌을 때, 깨어지고 상처 입었을 때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고, 

또 치료하시고, 또 강하게 만드셔서, 또 새 힘을 주셔서... 오늘까지 이르렀다.

 

요즘 제게는 하루하루가 새롭다.

하나님이 너무 축복을 부어주셔서 무서울 정도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이 지경을 넓혀 주시는데

‘주님, 그만 하시옵소서! 저는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같은 자를 부르시는 것을 보니) 뭘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라고 기도한다.

 

제가 대단해서 오늘까지 주님을 섬기며 지내 온 것이 아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심은,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불러주셔야 되는 거지.. 내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예수님이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때 사도와 제자들은 모여서 오직 기도에 전념하는 가운데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사명을 받고, 사명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도 된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실까/말까.. 그건 하나님의 영역이다. 내가 함부로 결정 못 한다. 

그러나 내가 간절히 기도하고, 내가 주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내 영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이틀 기도하고, 사흘 째 부르심을 받으면.. 못 받는 사람 없이, 다 받지만

그렇지 않다.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님은 나타나 주신다.

 

나는 사역의 부르심을 못 받았는데요.. 그게 주님의 탓도 있을 수 있지만,

어쩌면 내 탓이 더 크다는 것이다.

 

 

◑2. 결과는 주님께 맡기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떠나야 한다.  

반드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 원리이다. 그것은 업적주의다.

많은 한국의 대통령, 정치인들이자신의 재임 기간 안에 모든 결과를 보려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인들도 똑 같다. 내가 행한 일의 결과를 내 시대에서 내 눈으로 보려 한다면

우리는 정도를 벗어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결과를 내 세대에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을 살면서,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경제 원리로만 본다면 바울은 철저히 (자기 세대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자기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또는 감옥으로 자기를 찾아 오는 사람들(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만년의 고백을 들어보면, 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은 다 자기를 떠났으며(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일을 네가 아나니”(딤후 1:15)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자기와 함께 했던 자도 다 자기를 떠났다고 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결과로부터 자유하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하여 그 자신을 계속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 땅을 떠난지 3백년이 지나서, 저 천국 하나님의 품속에서

그 결과를 지금까지 영원히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요셉은 자기 세대에 결과를 본 사람이고, 바울, 아브라함은은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로부터 자유할 때 마음을 비운 자가 누리는 평안을 맛본다.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나머지 결과는 주님께 맡기자.

 

아브라함을 보시라.그는 자손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거듭 받았다.

그런데 그 약속은, 자기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원 속에서 이루어졌다.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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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시스의 환상의 예.그는 스플래토 라는 지역에서, 젊은 시절 어느 날,

자기가 멋진 기사가 되어기를 들고, 말을 타고 행진하는, 그런 환상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기사가 되어, 전쟁에 나갔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어,

몇 년간 포로로 잡혔다가, 기사회생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꿈과 환상은 물거품이 되었는가?잭 윈츠라는 사람이 쓴 글에 의하면,

그의 '스플래토의 환상'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에, 성 프란시스의 기념일에수많은 인파들이, 깃발을 들고, 말을 타고,

프란시스를 기념하며.. 그 도시를 행진하더라는 것이다.

프란시스의 꿈(사명)은, 자기 다음 세대에자기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반드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