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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려는 사람

LNCK 2024. 7. 1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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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려는 사람            행20:17~25           1997.12.28.

 

▲도입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 찾기’

어떤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신문에다가 이런 광고를 실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삶에 대해서 진 실로 만족하다고 하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제가 백만불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더랍니다.

 

정해진 날짜가 되자 수많은 지원자가 모여들었습니다.

저마다 자기는 만족하고, 자기는 스스로 행복하다며, 자기의 행복한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다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받는 보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

자기 받는 보수에 대해서 스스로 항상 만족하게 생각하며,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고 산다고.

 

또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남편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취미 생활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만족함을 느끼며 산다... 그랬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저는 불평하고 싶어도 불평할 꺼리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이런 괴변도 있었답니다.

 

계속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행복과 만족을 발표했지만

어느 사람의 설명도, 납득할 만한 것이 못돼서

결국은 백 만불 상금은 아무도 받지 못 했답니다.

 

그 왜 그랬냐 하면, 이 광고주가 단 한마디의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 앞에 모두가 제대로 대답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당신들은 진실로 당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면,

내 돈 백만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까?’ 이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참 행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행복입니다.

아직도 돈 백만불이 필요하거든요. 아직도 또 어떻게 되길 바라는 게 있죠.

기대가 있고 바라는 것이 있는 동안은, 엄격히 말하면 행복은 아닙니다.

이대로 이 형편 이대로.. 이모습 이대로 만족해야 그것이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참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한 순간에 내 모든 소원을 다 이루고 만 것입니다.

다시 다른 소원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것 입니다.

 

◑1. ‘죽어도 좋을 만큼’의 일을 가진 사람이 행복합니다

 

빌2:17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는, 양의 피를 쏟아 붓는다는 소립니다. 양을 잡아서 선지피가 솟아오를 때

그것을 그릇에 받아다가 제단에 붓습니다.

 

그와 같이 ‘내가 이 시간에 죽어서 비참하게 죽어 피를 쏟아부어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런 행복이 진짜 행복입니다.

 

▲우리가 성탄이 될때마다 듣게 되는 곡이 있습니다.

이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원래 오르가니스트요, 그는 오르간 연주자로서도 탁월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그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하고,

크게 환호를 하고, 큰 칭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연주는 두 다리와 열 손가락만 가지고는 모자라는 연주같은데

이렇게 연주를 잘 하게 되는 비결이 뭡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내 마음과 생각과 힘과 목숨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서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그래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 정력과 생명을 다하는 순간.. 자기 정령을 다 바치는 바로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위해서 이렇게 해 본 일이 있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온 정력을 다 쏟는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것이지요.

 

이런 경험을 한 번도 못 하고 죽으니 불쌍한 사람이지요.

이런 경험을 한 번만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세상을 헛되이 산 게 아니죠.

 

사람의 극단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표현에 있어서

‘생명’과 연결해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스우면 ‘우스워 죽겠다’. 맛이 있어도 ‘맛 있어 죽겠다’.

‘졸려 죽겠다. 피곤해 죽겠다. 좋아서 죽겠다...’ 뭐 죽겠다는 말을 곧 잘 합니다.

 

이럴 때에 흔히들 생각하기를 ‘아 이거 한국 사람들은 궁상맞아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한다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고, 세계 어느 나라 말도 마찬가지요.

 

사람은 원래가 죽고 싶은 본능과, 살고 싶은 본능이 함께 있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나라 말이든지 이걸 전문으로 연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언제나 극단적 감정 표현은 죽음과 관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에 대해서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한이 없다. 또 죽어도 행복하다.’

이렇게 죽음과 연관해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극치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대로 죽어도 만족합니다.’ 바로 거기에 행복의 절정이 있다는 말씀이올시다.

 

사도바울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 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아무리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해도 살길이 없어요.

부득불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구를 위해 사는 겁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 부모님들 가운데는, 참 우리 어머니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아요.

 

‘나는 자식을 위해 살지...’

자식을 위해 정성을 다하다가, 마지막에 그 아이들이 크면서 집을 나가버리면

‘나는 인생을 헛 살았다’ 뭐 그러더만요. 그건 처음부터 잘못 산 거예요.

 

세상에 났다가 ‘그래 자식 하나 낳아서 그거 키우자고 살았나?’ 그건 아니예요.

근데 어떤 부모가 이런 얘길 하는 걸 들었어요.

 

어떻게 자식 하나를 위해서 일생을 살아야 되느냐고요?

어떻게 그게 목적이 되겠느냐고,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내 인생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가 자기 우상이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목적될 만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바로 그 분이 내 생의 목적이요.

누구를 위하여 살고,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어요.

 

삶에 목적도 분명하고, 죽어야 할 이유도 언제나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깝지 않게 살았습니다. 온통 다 쏟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행복한 것이죠. 미련 없이 살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래 그가 간증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것이 그리스도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죽으면 끝난 것인 아니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살았다 그 말입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뿐만 아니라 목적은 있는데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목적에 실망이 있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 놓고는, 내가 뭘 해야 될지를 몰라요.

이래 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여기에 복음을 위하여,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서 은혜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은혜의 복음 이것이 바울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난 태어날 때부터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났다.‘ 분명합니다.

이렇게 확실한 목적이 구체화된 그런 생을 살았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 가를 알고 있었어요. 좀 더 나아가서는

내게 주신 경륜을 알았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제가 프랑스에 갔을 때, 정명훈 씨가 오페라를 지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이 좋은 분이요. 시작하기 전에 들어오라고 해서 준비실에 가서 기도를 하고

끝난 다음에 또 마치고 기도를 했는데, 온 몸이 땀으로 젖었는데 굉장합니다.

 

제가 거기서 지휘하는 걸 봤는데, 두사 간 반을 내리하는데, 거의 악보를 한 번도 안 봐요.

열렬히 지휘를 하는데요, 난 뭐 음악은 잘 모르겠고, 지휘만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 분이 유명한 것은 악보를 외우는 거래요.

그 큰 악보를 몽땅 외워 가지고 연습 시간에도 딱딱 지적하는 데

외국 사람들, 그 코 큰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꼼짝을 못 한다고 그래요.

그렇지요. 얼마나 성의를 다하는데...

 

그래서 저는 여기 나와서 독창하는 사람들, 뭐 악보 손에 들고 하면, 영 들을 마음이 없어요.

'그럴려면 그만두지 그걸...'

그럴 바에야 되겠어요? 좀 성의를 기울여야지... (악보와 가사를 외우고 나와야지)

 

언젠가 한번 누가 저더러 음악회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갔지요.

들어보니까 시원치 않아요. 그 다음에 자꾸 또 오라고 그래요. 그러면 안 가요.

피차가 고생이에요. 들어주자니 힘들고, 연주한다가 힘들고...

이거야말로 타고나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쪽으로 은사를 주셔야 돼요.

 

내게 주신 은사가 뭡니까? 그걸 정확하게 알아가지고 여기다가 온 정력을 쏟아야 돼요.

충성이란?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요.

없는 재주를 부릴려고 한평생 몸부림쳐 봤댔자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이 절망뿐이요.

많은 사람 고생 시킵니다.

 

자 조용히 남에게 주신 은사 부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나대로 나대로 나 에게 주신 훌륭한 것이 있어요.

그것을 극대화해 나가 는데 사도바울은 바로 그것 이예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이걸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에 자기 목숨을 걸고 총력을 기울였어요... 그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2. 자기 일을 잘 마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끝낼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최고의 만족을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바로 여기에 행복의 극치가 있습니다. 자기 사명을 다 마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제쯤은 하나님이 내 일을 끝내려고 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복음 전하는 사역, 이 사명을 이제 마치려 함에...

다 마칠 때가 왔어요.

 

결론을 지을 때가 왔는데 이 때에 ’나는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은 시작하기도 힘들지만, 끝내는 게 더 힘듭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만은 설교나 강연도요

어떤 말로 시작하느냐가 참 어렵고요.

또 어떤 말로 끝내느냐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 혹 부부싸움 해봤어요? 시작은 어떻게 했던간에

이제 끝을 내긴 내야겠는데, 끝을 내고 자야겠는데, 무슨 말로 끝을 내나? 이게 어렵다고요.

감정이 격해지니까.. 말은 끝은 내긴 내야겠는데 끝낸다는게 어려워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지만,

이제 끝을 내야죠. 끝을 잘 마무리 짓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로마서 13:11절에 보면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 시기, 어느 시점에서 생각해야 되느냐.

이 카이로스의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그 다음에는 시편 90:12절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내가 지금 몇 살입니까? 여러분 나이가 얼맙니까?

거기에 걸맞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젊은 사람이 늙은 척 하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고,

늙은 사람이 젊은사람들 하는 거 하겠다고 하면 주책이예요. 그걸 알아야 해요.

 

어느 책에 보니까 운동도, 운동 안해서 병든 사람도 많지만

적절하지 않은 운동을 해서 죽은 사람도 많데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생을 정리할 때에요. 이제 또 일을 늘어 놓아서는 안돼요.

이제는 줄여서 ‘나는 이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남은 시간에’

그것이 지혜란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내 전도 사업을 마치려 함에는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용기로 하나 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 전했습니다만은

이제 달려갈 길을 다가고 마치려 합니다. 행20:24

 

그 순간 그는 자기의 죽음이라고 하는 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물러가지만은 하나님의 사업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내 개인의 일은 끝나지만, 하나님의 일은 더 크게 역사될 것이예요.

 

(*영국에 요한 웨슬리와 동생 찰스 웨슬리의 묘비에 이런 말이 적혀 있대요.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데려가시나, 그의 사역을 계속해 나가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d.)

 

그래서 그는 모든 욕망을 다 버리고, 평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모든 기대감마저 하나님께 바쳐버렸습니다.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무엇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욕망도 없습니다.

이제는 끝나는 시간이기에,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감에

그의 모든 생각과 판단력과 자기의 의지까지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행20:24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는 하나님께 생명을 완전히 바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더 위대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계획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예루살렘에 가면 가고, 로마로 가면 가고,

감옥으로 가면 감옥으로 가고, 순교의 죽음이 다가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교하고...

그럴 생각이에요.

 

하나님께 이미 깨끗하게 헌신해 버렸습니다.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일단 끝을 맺고, 모든 전도사업과 계획을 일단 끝을 맺고,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고 남을 생을 삶니다.

 

이제 앞으로 몇일을 더 살던, 어떻게 되던... 빈부귀천 간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까지 바쳤으니까

‘내 주여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서 죽던, 주님 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남은 시간을 살았더란 말입니다. 이미 바쳤고, 그리고 남은 시간을 살았습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의 포로 생활을 했던 한 영국 장교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45년 4월 8일 주일아 침에 본 회퍼 목사님,

독일 복음주의 교회 목사님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날 아침에 아침예배도 마치기 전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독일군인 둘이 찾아와서

‘죄수 본 회퍼 우리를 따라와!’ 그러더랍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형장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그때의 바로 그 영국군인 포로된 군인 하나가 말하기를

“목사님,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내 생명의 시작입니다.’

 

감옥생활은 끝났습니다. 내 자유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세상 고통스러운 생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간증하며 형장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암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깨끗하게 헌신하고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바쳐버리고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덤으로 이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창조적 역사가 있고 새로운 용기가 함께하는 것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