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성장 | 행 14:1-7 2024.07.07. - YouTube
*위 동영상 11분 경부터 녹취
◈신비로운 성장 행14:1~7
※가끔 복음을 전하다가 벽에 부딪히게 되면, 그냥 주님의 주도하시는 흐름에
내가 순종해서 따라가면 됩니다.
또 복음이 올바로 전파되고 있는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발효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계속되면 지치죠. 낙담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유혹이 밀려올 수 있죠. 그만두고 싶어지는 거죠.
여러분 아무리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어느 지점에 가면 그 열정이 소멸됩니다.
(사역은) 사람의 고집으로 될 일이 아니고, 신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근데 바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3절에 보니까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차선을 끊임없이 통과하면서도, 바울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요.
저항이 심할수록, 그의 전투력은 더 빛납니다.
◑바울이 불굴의 투지를 보였던 이유 : 주님의 이니셔티브를 따라 감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야 돼요.
'무엇이 그러하여금 그에게 그 많은 시련과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게 했는가?'
여러분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가 있습니까?
바울의 이 열심과 헌신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바울이 남다른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다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당하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절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전도여행, 복음전파사역)은 어떤 단순한 교리를 이해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울을 그렇게 움직였던 힘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다메섹 사건 이후에 그는, 그가 뭘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헌신과 열심에, 기독교가 매달려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발전 역사를 보면, 겉으로만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무슨 체계화된 조직체가 만들어져 움직이지 않았어요. 1세기의 기독교는 형체가 없었어요.
무슨 효과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는가? 없었어요.
이 1세기 초대 교회를 연구하는 자료를 들여다보면
교회가 숫적인 성장을 추구했다는 것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한국교회는 그 많던 총동원 주일... 근데 1세기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빠른 성장이 있었을까요? 이게 미스터리 이에요.
교회 성장 매뉴얼이 있었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전도 세미나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선교 전략회의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관련된 논문이나 신학자도 없었습니다.
(그럼 있은 게 뭡니까? 하나님의 강권적, 주도적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거기에 이끌려 갔던 것이죠)
세워진 교회들도 다 얼마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누구도 전도를 강조한 적도 없습니다.
구호를 외치고, 몇 만 명을 부르짖었던 적도 없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복음이 확장하는 일에 대한 어떤 운동도, 전략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의 선교 여행만 보고 있습니다.
영웅적인 인물들이 초대교회에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어부 출신이요. 평범한 사람들뿐입니다. (영웅은 후대에 된 것이고요)
바울의 선교여행이 3차까지 진행되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도행전에 보면, 결국 바울이 로마로 죄인이 되어서
호송되어 가는 것으로 끝나버려요.
처음 출발 때는 굉장했잖아요. 3천 명, 5천 명
막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면 그 여세를 몰고 가서, 사도행전 28장이 되면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져야 되는데,
바울 사도가 죄인이 되어서 로마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호송되어 가는 것으로
사도행전은 끝나버립니다. (인간적 시각으로는) 아쉬운 엔딩이예요!
그런데 여러분, 바울의 활동은 사도행전으로 멈추는 것 같지만,
성령의 역할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누가 이루어 가시는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위대함에 우리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내가 경험하는게 중요합니다.
그 복음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고, 그 복음이 얼마나 능력있는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을 한번 제대로만 경험하면, 그 복음 안에서 우리를 이끌어내는 힘, 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생명과 맞바꾸어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확신이, 바울 안에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반대와 저항에도 후퇴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울과 바나바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13:51절에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털어버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바울 팀은, 복음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이죠.
핍박을 당하면 계속 이동하고 이동하고... 핍박 받음은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오늘 시대와 너무 다르죠. 여러분 복음이 여기 (한국)까지 오는 데는,
숱한 핍박과 환란과 시련이 있었고,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어마어마한 마이너스, 어마어마한 어려운 시련이 닥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일상을 믿음으로 살아내었습니다.
마10: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전도자가 환대 받지 못하는 모습이죠.
행14:22절에 보니까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환란이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죠. 사단은 전도자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마귀의 공격 대상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바울을 없애려고 하는 거죠.
메신저를 없애버리면, 그 메시지가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마귀가 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공격하는데
그것이 뭘까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낙심"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낙심이 찾아오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멈추게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 계속되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나가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 낙심이 무섭습니다. 만약 전도자들이 낙심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우리에게까지 올 수가 없었습니다.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그 마귀의 파상 공세를 당해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반대에 계속 부딪치고, 열매는 없고... 그러면 낙심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다가 끝나는 것 아니냐?'
여러분 우리가 밭에 비유할 때, 길가 밭과 돌밭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리 말씀이 뿌려져도 열매가 없습니다.
수고를 하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
바울은 선교여행 중에, 어떤 데는 수고에 비해 열매가 풍성한 곳이 있고,
어떤 곳은 고생만 하고 끝이 나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길가 밭, 돌짝밭은... 아무리 수고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근데 어떤 곳은 옥토가 있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둡니다.
모두가 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복음을 박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멈출 수 없었죠. 그것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고,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드립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 말씀을 어떤 분들은 '전도를 열심히 해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다'
이렇게 겁을 주는데, 원래 뜻은 겁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매료된 삶을 설명하는 거죠.
복음을 믿고 경험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반대에 부딪치고 어려움이 와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돌에 맞고도 멈출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누가 한 마디 한다고 '나는 이제 그만두겠다'
그건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에요.
죽을 일을 당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은, 복음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과 시련을 당하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환란이 영광으로 보여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예수를 믿어 이렇게 생고생하는가?'
그런 사람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비밀이 무엇인가요?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뒷받침하십니다
바울은 험하고 까다로운 이 선교의 여정에 대해서
나중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딤후3: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사건이 대표적인 일이에요. *루스드라
모두가 죽었다고 한 것이죠. 근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내다 버렸는데, 몇 시간 후에 털털 털고 일어났어요.
(심정지가 되었는데, 기적적으로 맥박이 다시 뛴 것입니다. 심폐소생술을 안 했는데도요)
그 이튿날에 그는 약 50KM의 먼 길을 걸어가서 더베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하는 바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그는 죽어도 몇 번 죽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그를 건져 주신 거죠.
하나님이 (사명을 마치기까지) 살려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증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복음이 귀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귀중히 다루시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한 일을 만나지 않거나, 시련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 중에도 우리를 도우시고, 환란 중에 위로하시고,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복음을 끝까지 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 복음을 전할 때 또 어떤 일이 일어나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납니다.
행14장에는 루스드라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바울이 한마디 하는데 '일어나 걸으라' 하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행3장에 일어난 사건과 유사해요.이 베드로가 날 때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할 때 일어난 것과 같은 사건이에요.
행3장에서는 베드로가 행했다면, 오늘 본문 14장에서는 바울이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입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거죠.
그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power 을 받고...' 하셨는데, 1:8
그 말씀 그대로,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는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루스드라
그 기적을 통하여,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시고
그 기적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면서 복음은 계속 퍼져 나가요.
그래서 행13:48~49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여러분 복음은 계속 퍼져나갑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누가 하시는 거죠?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God's initiative
하나님이 그 복음을, 모든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어 증거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외에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인내의 발효'
그래서 앨런 클라이더가 지은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라는 책이 있습니다.
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 / Alan Kreider
그 책에서 독일 신학자인 표현을 빌려서, 교회의 성장을 발효의 과정으로 비유했어요.
떡에 누룩이 발효되는 과정처럼, 기독교가 퍼져 나갔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성장은, 발효의 과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빵이나 김치에 발효가 될 때 보면, 발효의 과정이 육안으로는 잘 안 보여요. 보이지 않아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거죠.
발효란, 오묘하게 서로 합력하여 작용하는 미생물들의 신비하고 부글거리는 생명력입니다.
즉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발효는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발효는, 누군가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습니다.
조율되지도 않고, 예측되지도 않고, 멈출 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발효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때때로는 여러 요소들이 섞여 상승 작용을 일으킵니다.
발효는 외견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진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승 작용이 일어나고, 그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됩니다.
여러분 이게 초대 기독교를 표현하는 학자의 얘기예요.
당시에 기독교는 미미하게 보였습니다. 1세기에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하게 보여진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제국의 변방에 아주 소수의 미미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약간 사이비 같은
그런 분위기였단 말이에요.
근데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서 뚜렷한게 하나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인내라는 거예요.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수를 믿는 순간, 환란이 그냥 찾아온 거예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소외 당하고, 모든 것에서, 집안에서 쫓겨나는 환란이 오는 거예요.
근데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그리스도인들은 조급증을 멀리 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조급하면 안 되죠.
인내밖에 없습니다. 누가 인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건 없어요.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져 갈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답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살아내는 거죠. 그게 인내 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내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게 세상과의 차이에요.
세상은 빠른 답을 원합니다. 조급증을 가진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어요.
당장 답을 원하는 거죠. 조급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상황은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현대인들의 조급증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그 무엇을 찾고 있죠.
그리스도인들은 정반대로 인내하는 거예요. 장래 소망을 기다립니다.
'지금이 전부가 아니야!'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조급하셨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수한 시련과 박해속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게 인내 예요.
그래서 오늘 그 책의 저자는 '인내의 발효 Patient Ferment '라는 단어를 쓴 거예요.
그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내를 배웠습니다.
인내하는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스스로 조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자기 보조를 맞춥니다.
여러분 인내하는 사람들은 거칠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인내의 개념이 없으면, 산상수훈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른 뺨을 치는데 어떻게 왼뺨을 돌려댑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라는 거죠.
현실 속에서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경험하고 복음을 내가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살아내는 방식이 뭐냐? 그게 인내를 통하여 합니다.
인내는 누구 하느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인내가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힘으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서구 기독교가 정복의 방식으로 선교한 면이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주의 힘과 함께 선교가 같이 갔던 적이 있었어요.
힘으로 이룬 선교나 방식은 후유증을 낳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의 후기기독교 시대에 그 영향을 지금 받고 있는 거죠.
우리가 힘을 쌓고, 힘으로 무엇인가 이루고 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고
그렇다면 인내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근데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내하는 삶을 통하여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죠.
근데 결국은 그 인내하는 모습이, 이교도들에게 큰 메시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안 될 것 같아 보였는데... 오묘하게 점점 (발효되어) 부풀어 올랐습니다.
미미하게 변화되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인내의 발효에 의해서였다' 이렇게 얘기해요. Patient Ferment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상한 인내가 이교도들을 신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의 성장, 교회 성장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기이하고 신비한...
때로는 이상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경멸당하고 환영받지 못하던 1세기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서서히 부풀어 오른 발효된 반죽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말은,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잉태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은 뿌리를 내리게 되고, 그 생명은 가지를 내게 되고,
그 생명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가 또 다른 나무를 만들어내는...
번성케 되는 에스겔의 환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닫고,
그 복음을 그대로 내 삶 속에 살아낸다면,
복음이 내 삶의 힘의 근원이 된다면... 그 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던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것,
때로는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장래에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그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이 복음을 끌어안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갈 때,
약속된 구원의 날이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이지요. 감사할 게 참 많아요.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복음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돼요.
140년 전에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 어둠의 땅, 흑암의 땅,
예수의 '예' 자도 알 수 없었던 이 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너무 미미했죠. 핍박을 받았어요.
우리 한국에도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수 없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오늘 이 민족 가운데 역사하셔서
세계사의 독특한 민족으로 오늘 우리 민족을 사용하시고,
오늘도 힘들고 어려운 상왕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 민족 가운데서
여전히 복음을 가슴에 품은.. 그 복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이 나라를 지키시고, 앞으로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복음이 우리 나라에까지 오게 하고, 그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구원을 얻게 하신
그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여러분들을 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믿음의 인내를 통하여, 그 인내가 발효되면, 그것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그렇게 되면, 한 개인의 삶을 바꿔 놓을뿐만 아니라
그 가정을 바꿔놓고, 그리고 민족을 바꾸어 놓고, 세계를 바꿔 놓는 역사가
복음의 능력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