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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민족

LNCK 2024. 7. 17. 09:4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나라 위한 기도>

[두레온라인교회 설교] 신앙과 민족(2) 2024/07/14 - YouTube

신앙과 민족                       마25:31~33

◐민족의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                

지난 주에 내가 이광수 선생이 쓴 <도산 안창호> 전기를 얘기하다가 
설교를미처 다 마치지 못하고 마쳤습니다. 오늘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안창호 선생님! 나는 참 젊을 때부터 혼자 마음에 '참 이런 어른을 닮았으면...' 하던 
우리 역사에 뛰어난 애국자요, 인격자입니다. 
안창호 선생 같은 지도자가 참 아쉬운 때이지요. 

안창호 선생은, 20대에, '나라를 어떻게 하면 구할까?' 생각하다가 
'그 길은 교육이다. 교육!' 
'옛날 서당 교육 때문에 이 나라가 멍들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실시해야 된다!' 

그래서 교육을 배우려고 20대 미국으로 유학 갔습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간 것이지요. 
당시에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달 걸려서 갔습니다. 

선교사님이 주선해 준 방에 짐을 풀어놓고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나갔더니, 
미국 사람들이 삥 둘러서서 뭘 구경을 하는데 
백인들이 박수를 치고 흥미있게 즐겨서 '무슨 일로 저러나?' 하고 가봤더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선 인삼 장수 두 사람이 길 가운데서, 서로 상투를 쥐고 싸우는 거에요. 
조선 사람 두 사람이 복장도 이상한데다가, 머리도 상투머리 쥐고 싸우니까 
백인들이 재미 있어가지고 박수를 치면서 구경을 하는데 
안창호 선생이, 정말로 뜨거운 물을 얼굴에 끼얹는 것 같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교육받지 못하고, 훈련받지 못하는 백성은 해외에 나가서도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싸움판에 들어가서 
'동포여, 나라는 일본한테 뺏기고 있는데, 우리가 미국 와서 이러면 됩니까?' 하고 
중간에 들어가서 말리니까, 

백인 구경꾼들이 '재밌는데 왜 그러냐고.. 그냥 두라고...' 
그래서 청년 안창호가 싸움을 뜯어 말리고, 한쪽 길에 두 사람을 데려가서 
'도대체 왜 이럽니까?' 그랬더니, 
인삼 장수들이 자기 구역 침입했다고... 싸운 것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에 저도 가봤는데, 가운데 큰 길이 나 있고, 
그 길 양쪽으로 도시가 갈라져 있습니다. 

조선 인삼 장수 둘이 사전에 약속을 한 거예요. 
'너는 도로 이쪽 편, 나는 저쪽 편에서 장사하자' 하고 구역을 정했는데, 
인삼을 팔다 보면, 길 반대 편에서도 주문을 받고 하니까, 서로 상권이 섞인 거예요. 

그것 때문에 자기 구역 침입했다고, 백인들 보는 데서 길 한복판에서 싸운 거지요. 
그래서 안창호 선생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조선 동포들의 생활을 교육해야 되겠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청소도구, 잔디 깎는 이런 도구를 구해가지고 
조선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잔디 깎아주고, 커튼 달아주고, 또 페인트 칠해 주고, 

'조선 사람들이 미국 땅에 와서 우리가 존경받고 살아야지요'
그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아편을 많이 먹지요.
중국인들이 미국까지 와서 아편에 중독되어서 
중국 사람들의 아편쟁이들이 모이는 동네, 소위 아편 굴이라 그럽니다. opium den 

'조선 사람이 거기 아편 굴에 있다'는 말을 듣고,
도산 선생이 거기로 일부러 찾아갔더니 
조선 사람 한 사람이 아편 중독이 되어서, 중국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아편을 빨고 있는데 너무 불쌍해서, 

도산 선생은 미국에 올 때, 신혼부부로 같이 갔어요. 
신혼부부 단칸방에 그 아편 중독된 사람을 업고 왔어요. 
도산이 신혼부부 단칸방에 아편 중독된 그 사람을 업고 와서, 부부가 둘이서 극진히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편 중독된 사람이 아편에서 벗어났어요. 그거 어려운 것입니다. 
술 중독, 아편 중독 이런 거는, 한 번 걸리면 자기 힘으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워낙 안창호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니까 
'내 평생에 부모한테도 이런 사랑을 못 받아봤다' .. 그 사람이 감동받아서 아편에서 손 떼고 
그 다음에 그가 일용노동자로 돈을 벌어서, 
자기 버는 돈의 절반을 항상 안창호 선생한테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어요. 
그 뒤로 평생토록 자기 수입의 절반은 꼭 떼어가지고, 안창호 선생한테 후원했습니다. 

▲이제 로스앤젤레스 옆에 리버사이드 라는 조그마한 시가 있습니다. 
거기는 오렌지 밭이 있었어요. 
미국은 뭐 과수원 농장 하나가 차를 타도 10분씩 갈 정도, 큰 과수원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조선 노동자들이 오렌지 따는 일을 했는데, 
한 주 일해서 주급을 받으면, 주말에 술 마시고 도박하면서 탕진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거예요. 

조선 노동자들의 십장은 일본인이에요. 
일본인이 감독을 하면서 '조센징은 할 수 없다'고 손가락질하고 그랬는데 

그걸 보고 청년 안창호가 민족적인 의분을 느껴가지고, 
조선 노동자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권면하고, 
오렌지 농장에 가서 같이 오렌지를 따면서 자기 동포들한테 권했습니다. 

'동포여! 오렌지 하나 딸 때,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땁시다!'
아주 유명한 얘기예요. 

'오렌지 하나 딸 때마다, 이게 독립운동하는 거다!' 
그렇게 설득을 해서, 노름하고 술 먹고 이러던 사람들이 
안창호가 전하는 신앙과 애국심에 감동이 돼가지고 
그 사람들이 상해 조선 임시정부의 후원자가 됐습니다. 

김구 선생이 대표로 있는 상해 임시정부에 무슨 예산이 있습니까? No
어떨 때는 한 달 지출의 3분의 1을 미국의 노동자들이 보낸 성금으로 유지했습니다. 

우리 민족에도 그런 지도자가 한 때 있었던 거지요. 
우리에게 그런 지도자가 참 아쉬운 때입니다.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7년 있다가 이제 귀국을 해가지고   *1907
'조선 민족을 새롭게 해야겠다' 그래서 <교육 입국>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외교 입국>, 외교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 
김구 선생 같은 분은 <강병 입국> 그래서 독립군을 만들어서 기르고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 같은 분은 <산업 입국> 산업을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조만식 선생이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부족해도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 
일본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지 말고, 조선 사람이 생산한 물건을 쓰자!' 

김교신 선생은 <성경 입국, 성서 조선>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김교신 선생과 <성서 입국>

김교신은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일본의 평신도 성경학자 우찌모라 간조 선생에게 배웠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삿뽀로 농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교인이 되었는데 
그는 아주 평신도로서 성경학자였습니다. 

그분 문하에서 성경 공부하고 예배 드리고 하면서 
1927년에 김교신과 아홉 명이 모여서 '성서조선연구회'를 만들었어요. 

그들은 '조선을 성서 위에 세워야 된다.' 
'우리 민족이 왜 일본에 종살이 하게 됐냐? 혼을 잃어버리고 정신이 비뚤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면 일본 사람보다 조선 사람이 훨씬 우수한데, 
왜 일본에 종살이 하게 됐냐? 그건 얼soul이 병들었고, 조선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운다.' 
그래서 성서조선운동을 일으켰어요.

김교신 선생은 일본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졸업을 하고 귀국해서는 
이제 중학교에 지리 선생이 되었습니다. 

양정중학교의 지리 선생이 되어서 수업시간에 절반은 지리를 가르치고, 
절반은 조선 역사, 을지문덕 장군 이야기, 강감찬 장군 이야기 등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고려시대의 강감찬 장군은, 숫적으로 10배가 넘는 거란 군을 
지혜로운 전략으로 물리치고 *귀주대첩
27년 만에 거란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고려가 승리했습니다. 

그때 고려가 세계에 유명해져서, 코리아라는 이름이 그때 생긴 거예요. 
고려가 코리아로 알려진 거죠. 

강감찬 선생이 거란군을 물리친 얘기는, 청소년들에게 국사를 그대로 가르치면,
청소년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물리치던 그 얘기,  *살수대첩 
강감찬이 거란군 물리치던 얘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전멸시킨 이야기, 이런 걸 가르쳐야 되는데 

일제시대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어 배우고, 일본 역사는 배우면서, 조선 역사는 못 배우는 거예요. 
그때 김교신 선생이 지리 시간에, 지리는 절반만 가르치고 
조선 혼을 깨우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친 거지요. 

그때 김교신, 함석헌, 유달영 이런 분들이 1927년 1월에 
도쿄 하숙방에서 모여서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고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 그래서 시작했는데, 1927년 7월에 월간지를 내게 됐습니다. 
그 월간지 제목이 <성서조선>이예요. 

그 첫 호부터 일본에 의해서 폐간될 때까지 전체가 합본이 지금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 서재에 합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립 도서관 같은 곳에도 있습니다)

그 창간사를 읽어보면, 지금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져요. 
김교신 선생이 1927년 7월 호에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창간사에 뭐라고 썼냐면 
"나는 애인이 둘이 있다. 조선이라는 애인과 성경이라는 애인이다. 
두 애인 중에 한 명도 버릴 수가 없어서, 책 제목을 '성서조선'이라 한다." 
그렇게 창간사를 시작해요. 

"성서조선아, 선교사들 밑에 따라다니는 조선교인을 따라가지 말아라. 
제국주의 일본의 종이 되지 말아라. 
저 산골짜기에서 농사 짓는 농사꾼, 저 돼지 잡고 소 잡는 백정을 찾아가서 
조선의 혼을 깨우고, 예수를 심어라!" 창간호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 글을 읽어보면, '참 우리 선배들은 이렇게 혼이 살아 있었구나!' 
지금 읽어도 가슴을 뜨겁게 하는 거예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신민회

그런데 도산 선생이 미국에서 귀국해서 
'우리 나라를 일본의 종에서 해방시키려면 두 가지를 해야겠구나' 
-국민을 가르치는 교육을 해야겠구나, 국민교육운동!
-둘째는 산업을 일으켜야겠구나.. 산업진흥운동! 

그래서 신민회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비밀결사조직이에요. 
'새로운 백성 만들기'라는 뜻의 신민회입니다. 

그 신민회에서 처음으로 
'이 나라는, 고종황제를 물리치고 백성이 주인되는 공화국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걸 맨 처음 주장한 분은 이승만, 
조직으로서 처음으로 추진한 것은 도산의 신민회예요. 

그래서 신민회를 조직을 했는데, 
전국의 동지를 만드는 데, 두 가지 원칙이 있었어요.

-목숨 걸고 조선 독립에 헌신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은다. 
-조선은 본래부터 지방색이 강하니까, 팔도의 각 도별로 공평하게 회원을 뽑자.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지방색이 없도록 골고루 뽑자. 

그래서 도산은 불과 29살에, 각 도를 다니면서 동지를 모은 거죠. 
그때 신민회 동지들 중에, 김구도 있고, 이승훈도 있고, 전덕기 목사도 있고... 
이렇게 동지들을 모았어요. 

모아서 신민회를 만들었는데, 비밀결사조직이예요. 
각 도 단위로 책임자를 두고, 그 도단위 책임자 밑에 군 책임자를 두고, 
비밀결사 독립운동조직이지요. 

1907년에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그 동기가 네 가지예요. 
나도 과거에 학교에서 역사공부도 했는데, 
요즘 우리 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치질 않아요. 

그런 걸 안 가르치고 엉뚱한 것만 가르쳐 가지고, 그걸 식민사관 이라 그래요. 
일본 사람들이 조선 역사를 쓴 걸 가르치고, 식민사관을 가르치고... 

안창호 선생의 신민회 같은 건 위대한 사건인데 
신민회가 1907년에 만들어서 1911년에 발각이 돼가지고 
105명이 구속돼가지고, 105명이 재판 받았는데, 그 징역 햇수를 다 더하면 605년이에요.

 '105인 사건' 또는 '신민회 사건'으로 불립니다.

▲그 유명한 신민회를 만들 때, 네 가지 정신을 토대로 헀어요. 

첫째,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뿌리내리게 한다. 

둘째, 동지를 발견하여 단압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기른다. 
조선 사람들이 똑똑하지만, 각자이고, 단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단합을 도모해서 국민운동을 일으키는 기초를 닦는다. 

셋째, 각지에 교육기관을 세워가지고 청소년을 가르친다. 
그래서 대성학교, 오산학교, 숭실학교... 그 시대에 교회들도 
'한 교회 한 학교 세우기 운동'을 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나라 혼을 깨우치자' 했지요.

그래서 지금도 전국의 사립중고등학교가 300여 개 있는데 
3분의 2가 개신교에서 세운 학교들입니다. 그때 그 전통이 아직까지 내려오는 거죠. 

넷째, 산업을 일으켜서 국민의 부를 창출하고, 신민회를 운영하는 운동자금을 적립한다. 
그래서 도자기 회사 세우고, 심지어 대구에 여관도 세우고, 
거기서 연락도 하고, 장사도 하고, 
여러 가지 유기(놋그릇) 장사도 하고, 사업을 일으키면서 '산업입국'을 도모했어요. 

이승훈 장로는, 평양에서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유기장사로 아주 부자가 됐던 사람인데, 안창호가 연설을 잘한다 그래서 
평양 모란봄 꼭대기에 쾌재정 이라는 정자가 있어요. 당시는 1907년이었어요.

쾌재정에서 청년 안창호가 연설한다는 소리를 듣고 
유기(놋그릇) 사업해서 부자된 이승훈은, 그때 그 연설회에 참석을 했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정신, 기독교정신에 남강 이승훈은 크게 감동이 됐어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세 가지를 결심했어요. 

-그 다음 날 자기 상투를 스스로 잘랐어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상투 안 자르던 시절이었죠.
-술, 담배 딱 끊고 고향 평북 정주에 내려가서 사재를 털어 교회를 세웠어요. 
 그게 오산교회이고 
-교회 부설로 학교를 세운 것이 오산학교입니다. 
  *남강 이승훈 장로  rfcdrfcd.tistory.com/15976376

오산학교에서, 아주 기라성 같은 애국자들이 거기서 배출됐습니다. 
유명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 아시죠? 
일제시대 신사참배 반대로 옥중순교 하신 주기철 목사가 오산학교 출신입니다. 
(원래 경남 출신인데, 경남에서 소학교 졸업 후에, 평북 정주 오산학교로 유학을 간 거죠)

조만식 장로가 거기 교장이고, <안창호 전기>를 쓴 춘원 이광수가 
오산학교의 국어선생 이었습니다. 

또 한경직 목사, 함석헌 선생도 오산학교 출신이고,  
고당 조만식, 다석 유영모 등이 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민족 혼을 깨우는 교회, 민족 혼을 깨우는 학교... 
그런 운동의 맥을 우리가 이어가야 되는데, 지금 우리가 그러질 못해요. 
기껏해야 자기 교회 커지는 거... 이런 건 우리가 벗어나야 되지요. 

그런데 안창호, 이승만, 이런 기라성 같은 선배 기독교인들,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의 민족 지도자들이 교회 출신들이에요. 
그 전통이 중간에 끊어져 버렸어요. (*기복주의 때문, 거기로 빠져버렸어요)

지금 우리나라에 국회의원이 약 300명인데 
그 중에 여야를 합쳐서 127명이 개신교 신자, 가톨릭 신자가 90명입니다. 
불교 신자는 42명이래요. 

그런데 127명이 제대로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딱 민족혼과 예수님의 혼이 합쳐 있으면, 나라가 안 이렇지요. 

그러니까 교회는 항상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돼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예수님 사랑하는 정신과, 
인생을 투자해서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같이 가져야 되는 거지요. 

▲양과 같은 민족
마25:31절부터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32절의 '민족'입니다.   *에스네, 민족들, 이방나라들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개인'에게 적용하는데, 본문에 분명히 '민족'으로 나와 있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즉 많은 민족들 중에, 양의 편과, 염소 편으로 구분됩니다. 

양의 편은, 하나님이 칭찬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굶주릴 때 먹였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봤고, 내가 병 들었을 때 돌아봤고... 정말 훌륭한 민족이다.' 

양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이 병 들었을 때 찾아보고, 굶주릴 때 먹이고 했습니까? 
그랬더니 주님이 뭐라 그랬습니까? 40절이죠. 40절이 핵심입니다. 

마25:40절, 이 말씀이 정말 살아있는 말씀이지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그래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 존중이에요. 
절대로 사람이 누구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안 돼요. 그건 염소 편이에요. 

염소는 머리로 잘 떠받잖아요. 헤딩을 잘 합니다. 
양은 잘 순종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막 욕설을 잘하고, 싸움질 잘 하면 
'이놈아, 나올 때 염소고기 먹었나? 왜 이리 치받냐?' 이런 말을 하지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양의 편이 돼야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 뭡니까? 
반만년 역사에 외국을 침입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정말 양의 편으로 살아왔지요. 

우리 민족의 자랑이 뭐냐? 나라가 어려울 때는 꼭 국민들이 자진해서 일어났어요.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이 일어났지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이 일어났어요. 

여러분 '두레'라는 이름 아시죠? 
두레는 '더불어 산다'는 의미인데
호남지방의 농민들 사이에 두레 비밀조직이 있었습니다. 
일제에 항거하는 비밀 독립운동이 두레인데, 

일본 경찰이 아무리 애를 써도, 호남지방의 두레 운동의 책임자를 찾아내지 못했어요. 
해방될 때까지 그랬어요. 왜냐? 
논바닥에서 논 매고 밭 매는데,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죠. 다 비슷한 농민들이니까요.

항일운동단체였던 두레운동 만큼은 끝까지 비밀을 지켰습니다. 
두레 정신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안창호 선생이 세운 신민회가 왜 발각됐냐 하면 
1907년에 조직이 되어서, 한일합방이 1910년이거든요. 
1911년에 들통이 나서 105명이 구속되고, 고문 받다가 죽고, 
안창호 선생 이하 전부 옥살이하고 했는데, 그 비밀조직이 4년 만에 왜 들통 났느냐 하면, 

'천주교인도 한 사람 우리가 포섭해야지' 해서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을 신민회에 가입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명동성당의 뮈텔 주교에게 이 사실(신민회 조직)을 털어놓았고, 
뮈텔 주교는, 그 사실을 일제에 알려주는 대가로, 명동성당 앞 큰 마당을 불하받았다고 합니다.  주1)

일제는, 그 정보를 토대로 신민회 비밀조직을 색출해 내고, 
먼저 잡아들인 사람들을 고문하고 해서, 신민회를 완전히 와해시켰는데,
이게 '105인 사건' 또는 '신민회 사건'으로 불리지요. 
한 마디로, 조선 내부의 당시 최고 독립운동 조직을 해체시킨 겁니다.

물론 가톨릭 안에도 좋은 분, 훌륭한 애국자가 많았지요. 
그런데 그 주교는 정말로 잘못된 선택을 한 거죠.
그 성당 앞 마당을 불하받으려고, 그런 민족 애국단체를 밀고해버린 겁니다.
(*불하받다 : 국가 또는 공공 단체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당시에 명동성당 앞을 지나갈 때면, 그 마당에 침 뱉고 갔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뭐냐? 신민회든 독립운동이든, 거의가 다 교회 지도자들이었어요.
왜냐? 우리 선배들의 신앙은, 예수 사랑과 동족 사랑이 같이 간 것입니다.
교회 사랑과 동포 사랑이 같이 갔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 아닙니까? 
그러니까 미국 LA 리버사이드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면서도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따자고 캠페인을 벌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정신입니까?

그 농장 주인이 감동을 받아서, 안창호 선생을 만나서 
'당신이 조선의 지도자요?' 
'아닙니다. 저는 심부름 꾼입니다.' 

농장주는 안창호 선생의 얘기를 다 들어보고 감동을 받아서 
'내가 당신 하는 일을 돕고 싶은데, 요청을 해보시오!' 

그러니까 '우리 조선인들이 모여가지고 영어도 공부하고, 조선 역사도 배우고, 
주일에 예배도 드려야 하겠는데, 장소가 없으니, 장소 얻을 돈을 좀 빌려주시오!' 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한인은 1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농장주는 당시 2만 불 수표를 써 주면서, 
'안 갚아도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그걸 가지고 창고를 하나 빌려가지고 
낮에는 한인들이 농장에서 노동하고, 저녁에는 그곳에 모여서 
조선 역사를 배우고, 영어 배우고, 주일날은 예배드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2만 불을 얼마만에 갚았느냐? 딱 한 달 만에 갚았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뭉치면, 일을 내는 거죠. 

한 달 만에 2만 불을 갚으니까, 농장 주인이 감동해가지고, 체크북 한 권을 줬어요. 
'이거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 당신이 알아서 쓰세요.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체크북 : 개인수표 용지가 여러 장 묶인 다발

그러니까 안창호 선생은, 딱 공적인 일에만 그걸 쓰다가, 
상해 임시정부에 출장 갈 일이 생겨서, 그 농장 주인을 찾아가서 체크북을 반환하고 갔어요. 
'내가 중국에 가는 일이 있는데, 혹시 못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 체크북을 반납합니다.' 
이런 진실과 정성, 이런 정신을 우리가 배워야 돼요. 그렇지요? 

우리가 크리스찬으로 산다는 것은, 그게 소금이고 빛이 되는 삶인 거예요. 
우리가 그런 정신을 교회에서 배워야 돼요. 주일학교에서부터! 

그런 정신을 가지고 교인들이 뭉치면, 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따르는 거예요. 
'사람 구실하려면 예수 믿어야겠네.. 사람 대접받고 사람답게 살려면 우리도 예수 믿자!' 

그렇게 소문나는 우리 교회와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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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일제강점기에 가톨릭 교회는 뮈텔 주교가 
안중근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 안명근에게 얻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대가로 
당시 일본인과의 성당 부지 소송 문제에서 이득을 얻고자 했다. 

그 결과 일제는 안명근을 포함하여 신민회소속 독립운동가 105명을 일망타진하며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명동 성당은 하사 받은 부지로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으며 
그 부지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일부이다. 
*출처 명동성당 - 나무위키 (namu.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