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6

남강 이승훈

LNCK 2016. 9. 10. 22:25

◈남강 이승훈 출처, 장로신문

 

 

 

南岡 李昇薰 1864-1930 / 글. 이승하 목사

 

 

남강의 제자인 김기석은 《남강 이승훈》에서 “그의 일생을 지배한 것은

겸허하고 맑은 서민 정신이었다”라고 하였다.

 

이승훈은 1864년 4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읍에서 이석주 씨와 홍주 김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1년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두 살에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아버지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11세에 유기상(鍮器商) 부자인 임일권의 사랑채 사환으로 일하다가

주인의 신임을 얻어 수금원이 되었다.

 

15세에 이도제의 딸과 결혼하고 임씨의 물건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여러 장터를 다니다가 평안도를 넘어 황해도로 진출했다.

 

1887년 24세의 남강은 납청정에 돌아와서 철산 오삭주의 돈을 빌려

임일권과 같은 상점을 개설하고 평양에 지점을 두었다.

 

7년 동안 사업을 잘했다. 석유와 양약을 수입했고 운수 사업도 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터는 한반도였다.

가족들은 피난시켰으나 전쟁이 끝나자 모든 재산이 사라졌다.

 

1895년 5월 남강은 납청정에 왔다가 평양으로 갔다.

평양은 1년 동안 도적과 거지의 소굴이었다.

남강은 납청정에서 상점과 공장을 세웠다.

 

▲평양에서 몇 해 동안 사업을 하는 동안 남강이 경영하는 상사가 상계를 좌우했고

엄청난 돈을 벌어 갑부가 되었다. 남강이 평양에서 장사로 성공한 것은 민첩했고,

신의가 있었고, 사람을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남강에게 민족 운동과 개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남강은 산업 진흥이 나라의 힘이라고 믿었다.

 

그의 ‘관서 자문론(關西資門論)’이란 문호를 개방했을 때 작은 자본을 합치면

대자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남강이 41세에 노일 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이 승리했다.

이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소가죽을 중국으로 무역했으나,

전쟁이 빨리 끝나서 무역은 망했다.

 

남강은 10년 사이에 남들이 우리나라에서 싸우는 것을 두 번 보았다.

힘이 없어 이를 막지 못했다.

 

남강이 연등사에서 안명근을 만났다. 그는 일본의 침략을 막는 길은 학교를 세우고

비밀 조직으로 일본의 힘을 꺾어야 한다고 하였다.

 

▲1899년 남강이 39세에 오산면 용동에 본가를 짓고 승천재를 세워 소년들을 가르치며

관서 지방의 민족 자본을 만들어 외국 자본을 막기 위한 ‘관서 자문론’을 폈다.

 

이탈리아와 제휴해서 국제 무역 회사를 세워 세계로 진출하려고 했는데,

1904년 러일 전쟁으로 파산하였다. 한겨울 경서와 역사서를 읽었다.

그중에 율곡(栗谷)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주로 경세(經世)에 관한 논책과 헌의(獻議)를 읽었다.

 

남강이 오산학교에 모셔온 여준(呂準)에게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배웠고

감옥에서 신구약성경과 《천로역정》을 여러 번 읽었다.

 

▲44세인 1907년은 을사보호조약과 해아 밀사사건으로 나라가 들끓었다.

한국 교회에는 성령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평양 쾌재정에서 연설했는데, 도산의 혼이 호소하는 연설을 들었다.

도산은 4천 년의 명맥이 끊기고 나라가 망하는 경각에 달렸다고 외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특히 안창호의 교육 진흥론에 크게 감동했다. 연설이 끝난 후 도산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변화를 알렸다.

 

남강은 이튿날 상투를 자르고 금주 단연하였다.

한문을 가르치던 승천재를 신학문의 강명의숙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남강이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남강은 “몸과 집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평양에서 도산에게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들었다. 그는 양반과 천민의 차별이 없고,

굶주리고 헐벗는 사람이 없기를 원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다. 백성이 덕스럽게 살기를 원했다.

 

남강의 민족운동은 인도주의였다. 그의 민족운동은 개화주의와 직결된다.

생활하는 태도를 바꾸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남강이 도산을 두 번째 만났을 때

<신민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하였다.

 

남강은 평북 총관과 산업 부문을 맡아 자기회사(瓷器會社) 사장, 태극서관의 관리자가 되었다.

오산학교도 신민회 기관이었고, 청년학우회도 오산에 두었는데,

남강이 일생에 가장 힘쓴 것은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사회가 안고 있던 내재적 모순과 외압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폈다.

여기에 기독교적인 정신을 갖춘 인물들은 서북 지방 출신이었다.

 

오산학교 설립 당시는 기독교 학교가 아니었고, 남강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남강은 안면이 있던 유명근의 아들 유영모를 선생으로 초빙했는데

그는 20세의 청년이었다. 유영모는 수업을 시작하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였다.

 

1주일 후 학생들 스스로 기도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뿌리내렸다.

학생들은 성경을 배우면서 행동이 변화하였다.

 

▲신민회 입회는 엄격한 심사와 까다로운 절차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세 번의 비밀 면담을 통해 ‘국가를 위하여 피 흘릴 수 있다’는 다짐을 받아야 했다.

 

강보우(姜鳳羽)는 동지 17명과 ‘국가를 위한 헌신의 결의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함으로 입회가 허락되었다.

 

1910년 도산의 동지들은 외국으로 망명했다. 신민회는 남강이 맡았고,

105인 사건과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 신민회 사업과 정신을 이끌었다.

 

태극서관은 신민회 산하 조직으로 민족 계몽 운동을 위한 책을 배포하는 취지로

회원들의 비밀 집회 장소였다.

남강이 국내에 남은 것은 신민회의 자력주의와 교육주의를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자력을 발휘하는 길은 국민 자각으로 덕과 지와 힘으로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이다.

개인들이 신의를 지키고 협동함으로 단결해야 한다.

동지를 구할 때 믿을 만한 사람을 구했고 각도에서 인물을 구했다.

이는 지방색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남강은 신민회를 평양, 정주, 선천에서 발전시켰고 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신민회가 외국에서는 강했으나 국내에서는 약했다.

남강이 3년 동안 피나게 노력했으나 거의 실패였다.

그는 망명하는 지사들을 보내면서 한 가닥 매운 기운이 가슴에 서리었다.

 

신민회 운동이 그의 민족 운동이었다. 남강에게는 물건을 만들고 팔고 하는 데도

정성을 들이고 신용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

 

신교육이 빠를수록 힘이 강해진다. 남강에게는 바뀌는 시국이 이것을 도왔고,

자신의 조심스러운 작업으로 성공을 이끌었다.

그는 열정적인 인물로서 시작한 일에 정력을 다하였다.

 

남강은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기숙사에는 한 방에 네 사람씩 50-60명을 수용하였다.

오산학교는 목적이 민족 간부 양성이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영광을 바라고 시작했다.

 

남강은 민족정신, 민족애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맑은 천성과 고난 어린 생애와 격동하는 국정과 기독교 신앙이

그를 종교적인 고결한 정신으로 이끌었다.

오산학교의 그 푸른 물줄기는 설립자 남강에게서 흘러 내렸다.

 

남강은 별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글방에서 《사약》(史略), 《무제 시》(無題 詩), 《맹자》(孟子)를 읽었고

사십이 넘어 용동 글방에서 《경서》를 배웠다.

 

장사하면서 《이태리 건국 삼걸전》(三傑傳),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읽었다.

남강이 여준에게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배웠는데,

감옥에 들어가 신구약성경과 《천로역정》을 읽은 것을 합해서 10권 정도였다.

 

1910년 오산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한일합방 후 접한 새 사조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남강은 합방 직후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 설교를 들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 모세의 출애굽,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 내용은 민족의 현실이었다. 그의 설교 한마디 한마디가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민족의 심정을 드러내므로 남강에게 놀라운 감명을 주었다.

 

남강은 나라를 살리는 힘이 기독교에 있음을 깨달았다. 한일합방이 엄청난 슬픔이요,

억압당하는 것이었지만 기독교적으로는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남강은 기독교인이 되어 학교 곁에 교회당을 지었는데,

남자와 여자가 나누어 앉는 기역자 교회이다.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인 정주읍교회의 정기정 목사를 모셨다.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쳤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렸다.

 

남강은 선교사 S. L. Roberts(나부열)를 교장으로 추대했다.

남강은 여준 선생을 통해서 큰 힘을 얻었다.

그가 남강의 호를 지어 주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높은 얼을 심었다.

 

1910829일 한일합방이 되었다. 한반도는 통곡했고 남강도 울었다.

남강은 눈물을 거두고 새로운 계획을 연구했다.

 

9월 신학기에 학생들은 망국의 아픈 가슴으로 학교에 왔다.

개학 첫날 남강은 학생들과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언덕 위에서 동쪽을 향하게 했다.

마주 보고 서서 눈물만 흘렸다. 눈물은 뺨을 흘러 옷깃을 적시고 땅에 떨어졌다.

 

‘이 역사를 타개해야 한다.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마음에 새겼다.

황해도의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위해 모금하다가

평양역에서 1910년 12월에 체포되었다.

 

남강은 서울행 열차에서 심문을 받다가 수첩에서 안명근의 명함이 나와서

서울역에서 헌병대로 갔다. 남강은 서울 구치감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감방에 함께 있던 김용제는 남강이 어둠 속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으며,

심한 고문으로 몸에 성한 곳이 없었으나 동지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모범수였다. 1911년 8월 공판에서 17명에게 15년에서 5년 형이 언도되었고,

남강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교회 김 장로의 안내로 교회당 옆 조그만 숙사에서

낮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밤에는 등잔 아래서 성경 읽기와 기도로 보냈다.

 

그는 교회와 학교에서 연설 부탁을 받고 용동에서처럼 민족주의 고취와

민족성 개조를 역설했다. 남강은 아침에 일어나 비를 들고 뜰과 거리를 쓸어 본을 보였다.

 

그가 제주도에 있을 때 105인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날조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실명, 정신 이상, 난치병을 얻어 희생되었다.

 

이것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조작된 사건이었다.

남강이 이 사건의 주동자라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서북의 기독교인들을 타도하기 위한 조작극이었다.

 

수백 명이 가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했으나 남강은 끝까지 버티었다.

그의 건강과 담력, 거짓말을 안 한다는 그의 신념, 고매한 품격과 정신력 덕분이었다.

 

입을 열면 시련을 참고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취조 받을 때 고문이 극심해서 거짓 증언을 하지 않은 목사가 없을 정도였으나,

남강은 끝까지 바른 말을 하며 견디었다.

 

선교사들도 일본을 반대했다고 소환되었다. ‘환상적인 음모’를 날조하여

선교사들을 범인으로 매도하는 일제의 만행에 선교사들은 항변했다.

 

1912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 결과 이승훈,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임치정,

유동열을 주모자로 각각 10년 징역을 언도하였다.

 

그러나 검사의 기소에 반증을 들어 적이 꾸며낸 계교를 폭로했다.

선우훈은 그의 수기 《민족의 수난》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1)

 

서울 복심원 제2심에서 105인 중 99명이 무죄로 석방되고

이승훈, 양기탁, 안태국, 윤치호, 임치정 5명이 6년 형, 옥관빈에게 4년 형을 선고했다.

 

이것은 블레어 선교사의 말처럼 “일본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남강은 가출옥으로 나올 때까지 경성 감옥에 있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고 《천로역정》을 주었다.

성경 읽기와 기도가 중요한 일과로 계속되었다. 민족 운동에 대한 신념은 도산을 만남으로

굳어졌지만, 기독교 신앙은 한석진 목사를 만남으로 얻었고 감옥에서 굳게 다졌다.

 

▲남강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나를 감옥에 둔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은 1915년 2월 13일 형기가 끝나기 전에 모든 피의자를 석방하므로

선교사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선교사들의 시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교회를 약화시키는 한편,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

 

계속 성장하던 한국 교회가 1911년과 1912년 사이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교세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초신자들은 떠나고 세례 교인들은 남았다.

투옥된 이들은 동요가 없었다.

 

1915년 2월 남강이 출옥한 후 정기정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감격하여 ‘보은신복헌신외(報恩神僕獻身外)’라는 글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다.

그 해에 52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남강은 공부하면서 민족 독립 의지를 굳혔고,

여러 독립운동 동지들,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귀었다.

학교와 교회 일로 인해서 1년 후 중퇴했다. 오산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았다.

이때부터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그의 신앙이 불타올랐다.

 

▲1918년 국제 정세는 격변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노농 정부가 수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이 같은 정세 변화로 한국 독립을 성취하려는 국내외 민족주의자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18년 12월 오산학교 졸업생 서춘이 동경에서 돌아왔다.

그는 1912년 오산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그 후 만주에서 동경으로 갔다.

 

옛 스승 이광수를 만나 민족의 광복을 논의하였다.

남강은 서춘에게서 동경 유학생들의 움직임과 국제 사정을 들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조선의 독립 염원이 퍼지는데,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600명의 유학생들이 동경 신전구 소천정에 있는

조선 YMCA에서 최팔용의 사회로 독립운동 회의를 열어,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이를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그리고 각국의 대리 공사와 각 신문사에 우송하여

조선의 독립 의지를 전 일본에 천명했다.

 

▲1918년 12월 상해에서 선우혁은 독립 선언을 연락하러 왔다.

이때 남강은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줄 알았더니 이제 죽을 자리가 생겼구나”라고 했다.

 

1919년 2월은 남강의 일생에 가장 바쁜 달이었다.

2월 초에 선천에서 평북노회가 열렸는데 남강은 참석차 선천에 갔다.

그때 김도태의 연락을 받고 11일 아침 서울로 갔다.

거기서 기독교인 동지들을 규합할 것을 부탁받고 이튿날 아침 선천에 돌아왔다.

 

양전백 목사를 비롯하여 이명룡 장로, 유여대 목사, 김병조 목사에게

독립선언 계획을 알리고 찬성을 구했다. 네 사람은 승낙하고 모든 일을 남강에게 일임하였다.

 

남강은 이어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 손정도 목사, 신흥식 목사,

그 밖에 몇 장로들을 만났는데, 자기들은 종교인이라고 난색을 보였다.

 

남강이 책상을 치면서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백성들이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 있을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남강의 말이 끝나자 길선주 목사와 신흥식 목사는 찬성하고 서울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서울에서 함태영과 이갑성을 만나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만일 천도교가 주저하면 장로교와 감리교가 단결하여 거사하기로 했다.

 

천도교의 최린과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운동 자금 5천 원을 조달하기로 하였다.

20일 밤 약속 장소에 기독교 대표들이 모였다. 천도교와 합동할 것을 말하였다.

 

21일 오후 2시 함태영의 집에서 함태영, 박희도, 신홍식, 오기선과 같이 회합을 가졌고

저녁 7시 이갑성의 집에서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 회의가 열렸다.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을 기독교 대표로 하고 모든 일을 일임했다.

독립선언서 문안 작성은 천도교의 최남선에게 맡겼다.

 

▲마지막으로 33인이 서명하는 자리에서 남강이 밖에 잠시 나갔다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선언서 서명 순서에 대한 다툼이었다.

 

남강은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말했다. 남강의 말로 순서 이야기는 끝났다.

 

33인에 함태영과 안세환이 빠졌다. 함태영은 동지들이 체포된 후 가족들을 돌보는 일과

상해에 연락하는 책임을 졌다. 안세환은 일본에 가기 위하여 서명하지 않았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이 왔다. 서울 거리는 고종의 장례로 복잡했다.

학생들은 정오를 알리는 시보를 신호로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불교 대표 한용운이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동이 만세를 불렀다.

수만 군중 속에서 정지용이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군중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학생 대표인 김원벽, 강기덕을 선두로 서울 장안을 휩쓸었다.

태극기를 만들고 방방곡곡에 독립선언서를 보내는 일을 기독교 청년들이 맡았다.

 

일본인들이 주동자들을 재판하면서 내란죄로 판결했다면 모두 사형당했을 것이나

보안법 위반으로 처리하여 형을 적게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는 3월 1일에 검거된 48인이 나왔다.

그들은 정각 8시 자동차에서 내려 법정에 들어오는데,

집에서 들인 옷들을 입고 머리에는 요수를 쓰고, 손에는 철갑이 채워졌고,

그 위로 굵은 밧줄이 건너갔다.

 

독립선언서 대표인 손병희가 병으로 출정하지 못해서 최린이 설명했다.

“처음에 일본이 동양의 한, 일, 청 3국이 굳게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하여

우리도 그 말을 믿고 서로 도와 나가기로 약속했고, 또 실상 우리는 일본을 도왔다.

 

그랬는데 그 뒤 일본은 영일 동맹을 빌어 옛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 정부와 백성을 속여 강제로 한일합방을 단행했다.

이민족의 억제에 눌리기 10년, 2천만이 하나로 일어나

민족의 자유와 세계의 공도를 위하여 침략자의 쇠사슬을 끊기에 이른 것이다.”

 

입천(立川) 판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3일 남강의 차례가 왔다.

남강은 단정한 자세로 일어나 높고 울리는 목소리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자유를 빼앗겼다. …… 우리는 최후의 1인, 1각까지 적의 칼에 쓰러질지라도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독립은 한국의 영광뿐 아니라

튼튼한 이웃을 옆에 둔 일본 자신의 행복도 된다”라고 했다.

 

다른 독립투사들도 독립의 존귀함을 말하고 한일합방이 역사에 큰 죄악임을 역설하였다.

남강은 감옥에서 믿음으로 일관했다.

“2,700여 페이지의 구약성경을 10번이나 읽었고,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에서 큰 감명과 위로를 받았다.

 

신약성경을 40독 하였으며, 기독교 서적을 7만 페이지나 읽었으니

내가 평생에 처음 되는 공부를 하였소. 장래 나의 할 일은 나의 몸을 하나님께 바쳐

교회를 위하여 일할 터이니 나의 일할 교회는 일반 세상 목사나 장로들의 교회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이 이제로부터 조선 민족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그 뜻을 받아

동포의 교육과 사업을 발달시키려 하오”라고 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오산학교가 일본 경찰들에게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애타 했다. 출옥 후 1923년 봄 학교 건축을 기공하여 가을에 준공하였다.

 

남강은 민족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년을 복역했다.

그 해 일본을 시찰하고 와서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그의 인격과 지조와 열정과 천재적 직관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덕스럽고 밝고 힘 있는 백성이 되어야 나라가 흥한다”라고 역설했다.

 

▲1928년부터 오산학교 동문들이 은사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추진한 동상 제막식이

1930년 5월 3일 오산학교 교정에서 있었다.

이 동상은 남강이 철저한 조선 사람이라는 것, 민족 고난의 십자가를 그 몸에 졌다는 것,

그리고 믿음과 헌신의 정신으로 살았다는 것을 나타냈다.

 

1930년 5월 8일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에게 훈화하고

집에 돌아와 자면회 사람들에게 이야기했고 이튿날 운명했다.

 

5월 9일 오전 4시, 67세였다. 남강이 죽으면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으로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고 유언했으나 일본에게 거절당하고, 사회장으로 오산에 안장되었다.

 

남강은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오산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인을 양성하고자 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 목사와 장로가 많았다.

그는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였으며 기도하며 전도하는 삶을 살았다.

 

옥중 생활은 그에게 기도하는 성스러운 일과를 가르쳤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걸레로 감방을 깨끗이 훔쳤고 변기는 혼자 맡아서 들어내고 닦았다.

 

몸과 마음이 괴롭고 피곤했으나 주의 은혜 안에서 기쁜 시간을 가졌다.

그는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를 자주 불렀다.

 

전후 9년 동안 감옥에 있었으나 기상이 약해지지 않았다.

남강의 기도는 백성들과 감옥에 있는 동지들을 위함이었다.

그는 빛이 감방 창살로 들어올 때 그리스도의 성상이 동쪽 하늘에 뵈는 것 같았고,

머리 위에서 자기를 위로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3.1운동의 정신은 두 가지였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서

독립선언을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무저항 투쟁’이었다.

이것은 모두 기독교 신앙인의 자세였다. 당시 한국 민족은 2천만 명인데,

기독교인은 20만 명으로 1%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20만 명을 총동원했다.

 

이 운동은 한 차례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종로, 을지로, 광화문으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막아도 헤치고 나아갔다. 체포되고 감옥에 가고 33인의 한 사람으로

현장에 없었으나 종로경찰서에 자진 출두한 길선주 목사와 같은 이도 있었다.

 

그 시위는 서울을 넘어서 지방으로 퍼졌다. 남강은 민족 교육론을 주장했고,

자본을 이룩해서 국민이 잘사는 나라로 만들자고 했다.

가르치고 열심히 일하는 민족이 되자고 외쳤다. 그는 훌륭한 애국자였으며,

물산장려운동으로 여러 곳에서 강연하는 데 열정을 다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범적이었고 교육자로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창밖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것을 들으며 자기도 배웠다.

오산학교의 존재 가치는 전 민족을 위한 인재 양성의 기관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구원의 감격이며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불가능이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고난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난 없는 승리는 없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다.

 

남강은 학생 하나하나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투사했고, 예수님을 닮으라고 역설했다.

오산학교 교정을 걸어가는 선생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모든 학생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사랑으로 교육했으며, 정신을 강하게 했고, 삶으로 모범을 보였다. 인재를 훌륭하게 양성해야

민족과 국가를 세울 수 있다. 나라를 세우는 것은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서 온다.

 

▲남강의 신앙은 민족의 광복 그리고 민족 교육이었다.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의 품격을 높이고 백성을 무지와 미신에서 끌어내고

부지런하고 덕스럽게 살도록 하였다.

그의 걱정은 겨레의 성품이 하나님에게 창조된 모습에서 떠난 일이었다.

이것을 회복해야만 민족의 광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남강의 신앙은 광복과 교육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족 운동은 세상일이고, 영혼 운동을 중시하여 민족에게서 떠날 때

남강은 괴로워하였다.

 

한일합방 전후에 강했던 애국심과 3.1운동의 민족적 정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전향이나 사회주의가 부상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강은 민족을 위한 결심과 헌신의 부족이라고 단정했다.

이 결심과 헌신이 흔들리는 것은 바른 신앙이 되지 못한 때문이었다.

 

남강이 말년에 술과 담배를 하니까 이찬갑이 책망했다. 무교회(무교단)주의자들과도 친숙해졌다.

민족적 신앙에 대한 신념이 이들 간의 교분을 돈독하게 했다.

애국심에 기초한 신앙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때 남강은 청년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빵에 주려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주려 있다”라고 하였다.

 

▲1928년 봄에 함석헌이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왔다.

함석헌은 1923년 동경에 갔는데 거기서 정상훈, 김교신, 양인성과 사귀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고,

그는 “한국에 함석헌 군과 같은 청년이 있는 한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함석헌과 김교신은 신앙 잡지 <성서 조선>을 내기 위하여 명치학원을 마친 정상훈에게 맡겨

연 4회 발간하였다. 이들의 신앙 운동은 무교회(무교단)주의였는데

함석헌이 이를 드러내지 않고 교사로 와서 오산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였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양인성은 선천 신성학교에서,

김교신은 송도고보와 양정학교에서 같은 일을 하였다.

 

남강이 <성서 조선>지를 읽고 신앙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지금 필요한 것이 신앙의 개혁이거든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깨우쳐야 하는데

요새 교회는 그렇지가 못해.”

 

남강은 <성서 조선>지의 신앙 개혁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오산교회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서운하게 생각했으나 발을 끊지는 않았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드렸다. 그러나 그 신앙의 물결 속에 있으면서도

신앙에 목마른 자들에게 다시 불을 붙일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석헌은 청년 지도를 그만두고 집에서 작은 집회를 열었다.

예배가 아니라 성경 연구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순서, 가정적 분위기,

지도자의 성경 강해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찬갑이 남강을 ‘신앙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무교회(무교단)주의적 경향을 말한 것이다.

그는 교회 중심에서 성경 중심으로 옮겨졌다. 무교회(무교단)주의자들의 성경 공부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봉사가 있고, 경건한 신앙이 있고, 고난이 있고,

성령을 통한 사귐이 있다고 여겼다. 1907년 창공에 높이 올린 오산의 정신이

민족정신과 신앙이 사라지려는 때 작은 집회에 의하여 새로운 불꽃이 불타오르는 듯 느꼈다.

 

남강은 이 집회에서 학생들과 같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때의 구경꾼들이 물러간 뒤 이 집회는 학생 외에 함석헌과 남강, 재천 셋뿐이었다.

 

▲남강은 김교신과 함석헌의 글을 즐겨 읽었다.

그들의 글에서 풍기는 한국 냄새와 소박한 복음 신앙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교회의 목사들과 성가신 의식 그리고 교파 간의 싸움을 싫어했다.

 

남강은 <성서 조선>지를 등잔 밑에서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신앙의 약화가 민족성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민족은 교육으로 높여야 하고 교육은 신앙으로 밝혀야 한다.

 

남강은 기성 교회와 YMCA 운동이 할 일을 못했다고 생각하였으며

사립학교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남강은 <성서 조선>에서 새로운 빛을 보았다. 무거운 납덩이에 눌린 조국을 보면서

이것을 들치고 올라올 푸른 싹을 <성서 조선>지 신앙 운동에 걸어 보기로 하였던 것 같다.

 

그가 무교회(무교단)주의에 빠지게 된 것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목사와 장로들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 약해지므로 일본 사람들에게 기가 죽고,

전향하여 독립운동을 거두고, 나중에는 신사참배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조국과 신앙의 관계에서 고민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생활을 우선으로 했고, 민족 운동가들은 민족을 우선으로 삼았다.

이 갈등이 교회 지도자와 선교사들에게 많은 고민을 주었다.

 

그래서 남강과 교회 지도자들이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남강은 함석헌의 작은 모임에서 민족을 우선으로 하는 성경 공부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가 오산학교를 세운 뜻은 민족 독립이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신앙인 양성을 위함이었다.

 

공립학교는 민족 교육을 역행하였다. 민립 대학을 세울 뜻도 민족 독립이었다.

그의 사상은 오직 민족 독립이었다. 기독교 신앙도 민족 독립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이때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유영모, 함석헌, 김교신이었다. 이들은 민족적 신앙을 외쳤다.

무교회(무교단)주의를 제창했다. 그들이 선교사를 싫어한 것은 우치무라 간조에게 배웠다.

 

▲함석헌의 한국 역사 해석은 학생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유명해졌다.

당시 교회적 상황이 그러했고, <성서 한국>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민족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고,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마음에 합했으며,

그들이 애국자였다고 남강은 인정했다.

 

남강의 170cm의 체구에는 민족의 광복, 신민회 사업, 105인 사건, 그리고 3.1독립선언과 고난에

대한 감투 정신이 있었다. 그가 동상 제막식에서 단위에 올라가 이 말을 남기고 하단하였다.

 

“내가 오늘까지 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아는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이후도 그럴 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하여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다.”

 

조선의 구원이 그의 신앙의 핵심이었다. 남강은 몸이 호리호리하고 체구가 단정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자세가 바르고 어깨 모양이 예뻐서 두루마기를 입고 섰을 때는

귀골(貴骨)이었다. 그의 천성이 대줄기같이 바른 것처럼 바른 자세를 가졌다.

이것은 어려서부터의 자세였다.

 

남강이 심한 고문과 오랜 옥고를 치르면서도 병이 없었던 것은

그의 강건한 정신과 체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강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일정하에서 질서 정연하게 거행된 민족정신의 제전이었다.

 

조만식 장로는 조사에서 “남강은 그 죽은 뼈다귀까지 민족에게 바쳤다”라고 했다.

남강의 일생은 고난 어린 헌신의 일생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삶을 회상하면서 남강이 자기들 사이에 있었음을 기뻐하였다.

 

.........................................

 

주1) 선우훈은 그의 수기 《민족의 수난》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태국은 증거 3건을 제시하였다. 1. 김일준의 공술 중에 명치 43년 12월 26일 내가 평양에서 하룻밤 자고 27일에 정주에서 동지 60명을 인솔하고 아침 6시 차로 선천으로 들어갔다 했는데, 그때 나는 서울에 있어 유동열이 서대문 감옥에서 26일 만기 출옥되었으므로 그날 저녁 명월관 지점에서 양기탁, 이승훈 등 7명이 위안회를 열고 요리값으로 27원의 영수증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런 사실이 있는가, 없는가 조사할 것. 2. 이튿날 27일, 이승훈이 평양 마산동 자기 회사로 내려가므로 대동문 안에 사는 윤성운에게 전보하기를 ‘남강하거출영태국’이란 전보를 광화문 우편국에서 내 손으로 타전한 사실이 있으니 광화문 우편국과 평양 우편국에서 조사하여 전보문을 가져올 것. 3. 정주에서 27일 아침 6시에 60명이 차를 타고 선천으로 갔다 하였으니, 과연 그때 그만한 인원이 기차를 탔는가, 철도국 서기를 불러 기차표를 조사할 것.”

 

안태국은 계속 진술하기를 “서울에 있는 안태국이 평양이나 선천에서 지휘했다는 김일주의 공술은 전부가 허구임에 틀림없다”라고 여러 가지 허위적 사실을 폭로하였다. 모든 사건이 허위라는 이유로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는데, 지방법원의 판결이 옳다고 하여 기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