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7 새벽 / 네가 옛적부터 몸을 굽혀 - YouTube
◈네가 옛적부터 몸을 굽혀 렘2:20~37
우리는 (렘2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재적 고통, 현실적 고통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그 고통의 이유, 왜 그런 고통이 있는지에 대한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렘2-2강, 렘2:20~2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상태가 된 원인,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4가지의 생생한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1. 주인의 멍에를 꺾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짐승 같은 이스라엘
2:20절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인의 멍에를 꺾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가축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가축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그 멍에를 메고서 주인과 함께 걸어가야 되는데,
그 멍에를 꺾어버린 악한 짐승 같은 모습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2. 귀한 포도나무 종자가, 악한 포도나무 가지가 됨
21절에 보니까,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백성들의 특징이
새롭게 된 본성, 참 종자,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그런 새 본성을 버리고, 악한 열매를 맺는 들포도가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들의 영적 상태가 그렇게 타락해 버렸다는 거죠.
▲3. 표백제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죄의 얼룩을 가진 이스라엘
22절에도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죄악이 내 앞에서 그대로 있다'
마치 아주 더러운 얼룩이 있는데, 아무리 씻어도 어떠한 표백제나 어떠한 비누로 써도
지워지지 않은 얼룩이 묻은 옷과 같은 상태...
죄악이라는 그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배어 있는 얼룩진 옷과 같은 상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발정기의 들암나귀 같이, 우상숭배에 헐떡이는 이스라엘
24절에는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마치 광야에 있는 들암나귀가 발정기가 되어서, 그 성욕이 일어나는 그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우상숭배의 욕구가 강하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4가지 모습으로,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지금 영적으로 뭔가에 중독된 상태처럼
매우 위중하고 매우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도 고칠 수 없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사람이 처음부터 중독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중독이 되고 나면, 거기에서 헤어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위중한 상태가 되죠.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뭔가에 중독된 듯한, 정말 위험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요?
본문에서 3가지로 살펴보면서, 영적인 교훈들을 얻으려고 합니다. (지, 정, 의 차례로 설명합니다.)
▲1. 첫 번째는, 이들이 진리를 버림으로써, 지성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멀어짐으로써 지성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서 살게 하십니까?
빛 가운데 살게 하세요.
즉 진리 가운데 살게 하세요.
즉 말씀 가운데 살게 하세요. 말씀 안에 살게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리, 율법을 주시고요.
반짝반짝 빛나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씀의 빛 안에서, 그 빛 가운데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조치해 놓으셨어요.
그래서 제사장들을 세우셔서 예배, 제사를 가르치게 하셨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레위인)들도 세우시고,
관리들도 세우셔서, 율법이 실천적으로 사회에서 적용되도록... 조치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서 벗어나면, 찾아오는 게 선지자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율법, 그 율법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라고 선지자도 보내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사장, 레위인, 관리들,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해놓은 조치였어요.
그런데 제사장들은, '여호와가 어디 계시냐' 말하지도 않아요.
율법을 다루는 자(레위인)들은, 나 God 를 알지도 못해요.
율법을 사회에서 시행해서 다스려야 할 관리들도, 나 God 에게 반역해요.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해요. 2:8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에서 벗어나 버렸단 말입니다.
진리를 버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멀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빛에서 멀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요?
어둠이 찾아오는 거죠. 어두우면 왜곡되는 거예요. 제대로 못 보는 거예요.
그런데 진리를 버림으로써, 진리와 멀어짐으로써,
우리의 지성이 어두워졌고, 왜곡되어 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에 무지하다고, 멀어졌다고
인간의 지성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는 건 아닙니다.
진리와 멀어진 사람도, 세상적인 이치에 대해서는 밝을 수 있어요.
이익을 보는 데 있어서 참 밝고요. 경제에도 밝고요. 합리적인 생각에도 밝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영적인 것에는 무지하단 말입니다.
영적인 것은 어두워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세상적으로는 매우 밝은데,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은 아는데,
그런데 영적으로 생각할 줄은 모른단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둡단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와 멀어져서 지금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지성이 완전히 마비된 게 아니에요. 누군가를 볼 줄은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잘 볼 줄 아는데,
이들은 자신은 결코 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즉 남의 눈에 티는 잘 보는데,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진리와 멀어져 있는 사람'들은 말이 많아요.
'너는 이렇다, 저 사람은 저렇다, 교회는 어떻다, 사회는 이게 문제다...'
그런데 그 말이 일면 틀리지는 않아요. 잘 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죠? 다른 이들에게 있는 문제(티)는 너무 잘 보는데,
자기 자신에게 있는 문제(들보)는.. 전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멀어져 있는 사람은, 영적인 것에 대해 어두운데,
그 결과 자기 자신에 대해 어두워요.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23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그들이 지금 영적으로 더럽혀져 있어요.
어떤 세제나 표백제로 씻어도, 그 얼룩이 씻어지지 않을 정도로 더럽혀져 있는데,
그리고 지금 바알들을 따르고 있는데... *바알들 : 전국 각지에 있는 바알들이라서 복수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쾌락과 풍요와 이런 세상 신들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더럽지 않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5절도 보세요.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지금 이스라엘이 뻔뻔스럽게 거짓말 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곡되어 있는 거예요. 진짜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그들은 지금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나는 무죄 해! 나는 바알들을 따르지 않았어!' 이렇게 진짜 자기 자신을 믿고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진리를 멀리할 때, 말씀을 물리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목회자들도 그렇고요. 성도들도 그렇고요.
처음에 저는, 그가 거짓말 하는 줄 알았어요.
자기가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한대요.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한대요.
남을 험담하고, 흉보고, 디스하고 disrespect...
각 교회들마다 이런 상황들이 있을 거예요.
여러분 성도들도 모이면 목사 흉보잖아요.
'A 교회 목사는 어떻다, B 교회 목사는 어떻다.'
그런데 목사들끼리 모이면, 또 성도들을 흉볼 때도 있습니다.
'A 교회의 모 장로는 어떻다, B 교회의 모 집사는 어떻다...'
그런데 흉을 보면서, 마음이 아파하는게 아니라, 아프잖아요.
자기는 교회를 사랑한대요. 자기는 죄가 없대요. 자기는 잘못한 게 없대요.
그렇게 흉보는 사람은, 사실 자기 눈에 더 큰 들보가 있으면서도,
그걸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면서 왈가왈부 하는 거죠.
흉 보는 사람, 가십하는 사람, 디스하는 사람... 거의 다 그렇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보이는 사람은, 남의 눈에 티를 보고 가십 못합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스스로 속고 있어요. 진짜 자기는 무흠하다고 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영혼이 병든 이유는, 진리를 멀리함으로써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하고, 완전히 어둡고, 완전히 왜곡되어버린 거예요.
본문에는 그것이 제사장, 레위인, 관원들, 선지자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8
2:26절에도 비슷하게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은, 일차적으로 지도자들에게 있는 거죠. *제정일치 사회
△적용 / 제사장, 레위인은 삶으로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만 그를 구조해 주었습니다.
‘그 강도만난 사람이 생각할 때,
누구를 이웃이라 하겠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죠.
제사장이 그냥 지나간 것은
‘자기의 거룩한 스케줄이 있으니까’
이 사람이 악한 제사장이 아닙니다. 다만 그 기준이 항상 ‘자기자신’ 입니다.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기 스케줄에 따라서
남을 돕는 사람은... 선한 이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이었지만, 그 주체는 ‘자기자신’ 이었던 거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그 주체가 '자기자신' 이라면
주님이 그 일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기 일이니까요.
뒤이어 나타난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뭔가 자기 스케줄에 바빠서, 그도 강도만난 사람을 힐끗 보고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현대에는 '말씀을 행함으로 가르치는 분들'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그냥 강단에서 입술로 가르침의 수준을 뛰어넘어서,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
본문의 예레미야 시대에는, 지도자(제사장, 레위인, 관리, 왕들, 선지자)들이
거의 다 말씀, 즉 율법에 무관심하고, 무신경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2. 또 하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왜 그들이 이런 상태에 되었는가?
그 원인은 잘못된 사랑으로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즉 사랑하도록 창조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마음에 뭔가를 품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었어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에게, 마음과 감정을 두셔서,
뭔가를 품고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을까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사랑하고, 그분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 감정은 정말 중요해요.
하나님을 품고 그분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게 창조의 원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은 관리되어야 돼요.
언제나 마음을 지켜져야 돼요.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제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마땅히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에도 반응할 수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2:25절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이는 헛된 신들을 좇아가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즉 신이 헤어지고, 목이 탈 때까지... 이들 헛된 신들을 뒤쫓아 가보았자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발이 닳도록' 이란 말과 비슷한 표현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했으나,
백성의 반응이 가관입니다.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자기가 감정적으로 이방 신들에게 굴복된 것입니다.
마치 천하장사 삼손이, 들릴라 앞에서 꼼짝도 못하며 자기 비밀을 누설하듯이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을 사랑했다고 25절은 말씀합니다.
아마 이방 신들의 제사에 가면, 화려한 무대 공연이 있었나봐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확 끄는, 뭔가 매력적인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되는 그 이스라엘의 마음에,
쾌락도 사랑하고.. 뭐도 사랑하고.. 뭐도 사랑하게 된 거예요.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다가 또 환란을 당할 때는 '주여,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거죠.
당시 이스라엘의 문제는, 양다리 걸치는 거였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만, 또 뭔가를 겸하여 사랑하는 거예요. 둘 다 추구하는 거죠.
그러다가 징계를 당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제야 또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하면서, 우상을 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우상을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죠. 이게 사사기처럼 반복되는 패턴이 되죠.
우상을 섬기다가 → 징계를 당하고 → 여호와께 돌아왔다가 편해지면 → 또 우상에 빠지죠.
그래서 28절에 보니까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우상의 숫자가 아주 많다는 거예요.
문명의 편리한 기기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거예요.
우리가 스마트폰, 컴퓨터, TV도 이용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오락, 여행, 문화활동 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 그게 신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할 대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밤 중에 자다가 깰 때가 있어요.
밤에 1시나 2시, 3시에 깰 때가 있죠.
그러면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하거나 성경을 봅니다.
뭔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보냅니다.
조용하고 고요해서,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데 절호의 시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하는 사람은, 그 시간에 자기의 우상을 찾지요.
그게 스마트폰이든지, 그게 TV든지 뭐든지, 머릿속 상상의 날개를 펼치든지...
그래서 감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벽이나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 입술로 제일 먼저 고백하는 말이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한다고들 하죠.
'그래, 아무개야, 나도 너를 사랑해!' 이런 응답 response 을 받을 때까지!
자기 마음에 '그래, 아무개야, 나도 너를 사랑해!' 이게 만약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느껴질 때까지, 찬양이나 기도를 계속한다는 거죠.
뭔가 주님과 관계가 멀어졌으니까,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죠.
감성이 뛰어난 찬양인도자들이, 보통 이런 주님과의 교감을 늘 중요시하는데,
꼭 찬양인도자가 아니더라도,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그래, 아무개야, 나도 너를 사랑해!' 라는 주님의 사랑의 감정을
매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미국 목회자들의 '자기 감정 관리'에 있어서,
'감정 차단'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고 합니다.
뭔가 사건 사고가 생기기 전에, 먼저 감정이 동한다는 거죠.
감정이 동하면.. 나중에 그건 막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관리가 잘 되는 목회자들은,
자기 감정을 컨트롤하고, 관리하고, 다스리고..
감정의 영역에서 먼저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늘 '감정 체크'를 한다고 합니다.
먼저 마음을 빼앗기면, 그 다음부터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기 쉬우니까요.
*감정적 의존관계 https://rfcdrfcd.tistory.com/7914107
▲3.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 뭔가에 중독된 듯한
구제불능적인 상태가 되었는가?
그 세 번째는 <반복되는 행동으로 의지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20절에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이들은 옛적부터 계속해서 그냥 같은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숭배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지고
'이제 나는 순종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죠.
이렇게 계속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충격 요법을 주십니다.
우리가 계속 옛 본성을 따라서 자꾸 그렇게 하면, 그 습관을 안 깨트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충격요법을 주신단 말입니다.
그걸 깨트리시려고 징계를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때리신 거예요.
그 우상숭배 습관을 깨트리려고 징계를 하셨어요.
그런데도 그게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맞아가지고, 얻어 터져가지고, 정신 차리라고.. 그 습관 바꾸라고 하셨는데도,
그들은 때려도 안 되는 거예요. 의지가 너무 돌처럼 굳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대수술을 받았잖아요. 결국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나서야.. 그들은 우상숭배를 멈추었습니다.
그 전에는, 마치 발정난 들암나귀처럼.. 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24
사람이 자기 옛 습관을 깨트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그래서 의지가 병든 사람은, 죄를 따라서 옛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쉬워요.
그게 의지가 병들었다는 증거이에요.
즉 반복된 습관 때문에, 의지가 병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인간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인간의 삶의 90%가 습관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잖아요.
처음에는 어떤 행동이겠지만, 대부분 이제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그 사람의 삶을 사는 90 %이상 이제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어요.
그래서 나 스스로 뭔가를 행동하게 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의지를 들여서 행동을 해야 돼요.
내 의지가 연약하도록 계속 방치하면 안 됩니다.
행동은 반복이 되어서 습관이 됩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내 성품이 되고, 내 성품이 결국 내 인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지로,
나의 죄악된 본성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끊고, 억제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내 선한 의지가 발동되어서,
나를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도록.. 내 의지를 자꾸 관리하고,
내 행동이 습관이 되도록.. 훈련해 가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결국 뭘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본성을 따라서 행동하는 거예요.
내 안에 있었던 옛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심어주신 하나님의 생명, 예수 그리스의 생명, 새로운 본성,
즉 성령을 따라서 행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행동이 뭐가 되도록? 습관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2의 습관이, 제1의 습관을 깨트리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우리한테 반복을 시키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절기도 계속 1년 동안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말씀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리는 왜 자꾸 반복시키나?
왜냐하면 우리의 원래 죄악된 본성, 그것을 따라 행동하던 그 습관이
성령의 의지로, 성령의 행동으로, 그게 반복해서 습관이 되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기도 하는 분들을 보세요. 습관이 됐어요.
남을 도와주는 분들도.. 그게 습관이 되어서,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도와줘요.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능숙하게 되면, 운전이 습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운전을 하지만, 어떤 불편함이나 힘듦이 없습니다.
기어 넣고, 사이드 미러 보고, 액셀이나 브레이크 밟는 것이 습관이 된 거예요.
성도는, 변화된 두 번째 습관이, 첫 번째 옛 습관을 깨트려야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새벽기도도 잠깐 나왔다가 말면 안 되는 거예요.
습관이 될때까지 하는 게 좋습니다.
어떤 습관은, 바꾸는데 10년 넘게 걸리기도 합니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자기 습관을, 새 본성, 성품을 따라서
새로운 습관, 행동, 인격을 만드는 데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이 걸려요.
△지금 이 설교는 1 지성 → 2 감정 → 3 의지 ... 이런 순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1 지성 분야로만 신앙생활 해요.
그냥 말씀 듣고, 이해하고, 깨닫는 수준에서 끝내 버립니다.
그러면 실패하는 이스라엘처럼 되고 마는 거죠.
말 않듣는 가축/나쁜 포도나무/표백제로 안 빠지는 옷/발정난 들암나귀.. 처럼 된다는 거죠.
오늘날 의지를 사용하는 신앙생활이 무시되는, 희한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자기 의지를 사용해야 되는 거예요.
기도도 오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기도의 습관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습관이 된 사람은, 기본이 30분이고, 1시간도 거뜬합니다.
여러분, 하루 1시간 기도하는게 습관이 된 사람은, 엄청난 영적인 자산이 되는 거예요.
5년 후에, 10년 후에, 그와 그의 가정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요... 놀랍게 변화됩니다.
(꼭 부자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결국 이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심각한 영적인 상태에 다다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인격이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지성이 병들고, 마음과 감정이 병들고, 의지가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렇게 병 들어버린 겁니까?
그건 우리의 육체가 병드는 것과 원리와 같아요. 우리의 육체가 왜 병듭니까?
바이러스가 침투할 때 싸우지 않거나,
바이러스가 침투했는데 싸우다가 졌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는 거예요.
질병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뭔가가 침투하는데 그것과 싸우지 않거나,
그것과 싸웠는데 저버렸다... 그러면 이제 질병에 걸리는 거예요.
이들이 영적인 상태가 된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들은 싸워야 했어요.
이들은 진리 가운데 있도록 싸워야 했고,
여러분 빛 가운데 있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그 진리의 빛 안에 살도록 싸워야 했어요.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 했어요.
그리고요. 여러분 세상에 사랑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돼요.
내가 결혼을 했다면, 나 이외의 다른 여자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나를 잡아 끄는 우상을 내 마음에 들이지 않도록
싸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또는 그렇게 싸우다가 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반복되는 습관을 고치려고 싸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내게 있는 이 본성, 40년, 50년을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데
새로운 본성이 들어왔다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 갑자기 무너집니까?
이렇게 쌓아놨던 이 습관을 깨트리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야 되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습관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서 싸워야 되는 거예요.
이 영적 싸움에서 나의 지, 정, 의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승리하도록... 이 아침에 우리가 기도하겠습니다.
...............................
◑절별 해석
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높은 산 위에서와...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유다의 행음은 영적으로 이방종교의 신에게 제사라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론 이교의 제사 의식에 포함된 혼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간 것은 우주의 신으로 여겨지던 바알이나
다른 가나안의 제신(諸神)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함이었다.
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본절은 이사야 5장의 소위 '포도원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비유이다.
여기서 '귀한 포도나무'란 예루살렘과 지중해 사이의 '와디 알-사랄'에서 자라는 극상품의
붉은 포도를 말한다(사5:2). 하나님은 좋은 종자를 선택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더러운 냄새가 나는 이상한 야생 포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잿물로...비누를 쓸지라도' 유다의 범죄에 대한 세번째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들의 죄악은 어떠한 세제를 사용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그 뿌리가 아주 깊다는 내용이다.
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가나안 전국 곳곳에서 바알 제사가 수행되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선지자는 바알을 좇은 일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주장에 반박하여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한다.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
힌놈의 골짜기에 대한 언급으로 보인다. 거기서 사람들은 암몬 족속의 우상인 몰렉에게
자기 자녀들을 제사한 바 있다. 한편 왕하 23장에 따르면,
요시야 당시의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산당 제사나 몰렉에게 바쳤던 인신 제사 등이 철폐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내용으로 볼 때 그 종교 개혁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우상 숭배가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암낙타' 이는 성욕(性慾)이 발한 암낙타가 수컷을 찾아 이리 저리 날뛰는 것을 가리키며,
유다가 우상 숭배에 집착하여 억제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한다.
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새번역) ‘그런 암컷을 찾아 다니는 수컷은
어느 것이나 힘들이지 않고서도 발정기가 된 암컷을 만나게 된다.’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일어나므로'
이는 암나귀가 길에서 수컷의 냄새를 찾아내어 달려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랍 속담에는 '암나귀는 수컷의 오줌 냄새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을 야생 암나귀로 묘사하고 있는 이 내용은
바알을 갈망하는 이스라엘의 음란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헐떡거림 같았도다' 성욕이 동할 때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암나귀가 그 입과 코를 크게 벌리고 헐떡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짐승들은 일정한 시기에만 성욕을 발하지만,
헛된 우상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의 갈망은 한도 끝도 없었다.
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네 발을 제어하여...목을 갈하게 말라'
이는 헛된 신들을 좇아가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즉 신이 헤어지고 목이 탈 때까지 이들 헛된 신들을 뒤쫓아 가보았자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마약 중독자이나 알코올 중독자처럼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유다는 결국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과 같이 신도 신지 못하고
목이 갈한 상태로 바벨론에 끌려가고야 만다.
26 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도적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같이'
예레미야는 택함받은 백성이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리면서도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수치'라는 용어로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있다(3:24; 호9:10).
한편 8절에서 이스라엘을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 책임으로 경고를 받은
네 그룹의 지도층이 제시된 바있는데, 예레미야는 여기서 한번 더 그들을 경책한다.
27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예레미야는 나무와 돌을 예로 들어서 우상 숭배 관행을 비웃고 있다.
여기서 '나무'라고 하는 것은 아세라 목상 또는 가나안 여신을 상징하는 나무 막대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또한 '돌'이라고 하는 것은 가나안 남신을 상징하는 돌기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틴 발굴에서 이 돌기둥들을 찾아낸 바 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이는 이스라엘이 참변을 당할 때야 비로소 가나안의 신들이 허탄하며
그것을 의지했던 것이 헛되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28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뇨'
예레미야는 유다의 미련한 행위를 비웃으면서 백성들이 자기들 손으로 만든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해보라고 경멸조로 말한다.
이것들은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사40:19~20, 44:9-20).
29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와 대항함(다툼)은 어찌 됨이냐'
여기에는 법정에서 사용되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재개하려고 하나
여호와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죄를 다시 공격하신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자신의 범과를 반성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본문의 이스라엘의 불평과 똑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30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대군주가 봉신의 잘못을 책망하기 위해 오게 되면, 봉신은 몸가짐을 가다듬고 조심하기 마련인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방문조차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교정(矯正)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인 선지자들을 내쫓고 죽이려고 하였다.
'사나운 사자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이 구절은 비유라기 보다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므낫세 치하에서 선지자들을 포함한 많은 무죄한 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을 지적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예레미야 생전에도 여호야김은 우리야라는 선지자를 살해한 바 있다(26:20-23).
31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이스라엘의 반역적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와께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냉대한 일이 있는지 반문하신다.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주께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만한 말은그 당시 언약 백성의 전체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들의 그런 무지하고도 완고한 태도는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여호와의 의도를 정면으로 무시한 것이었다.
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유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베푸셨던 모든 은혜와 이적들을 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이스라엘 선지자들과 구약의 기자들이 거듭 지적하는 주제였다(신8:11 등).
한편 여호와께서 과거에 큰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불렀던 것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이며 또 그들이 누구인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서도 이를 중요한 목적으로 두었으며, 그들의 과거사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해주시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언제나 새롭게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여호와의 언약을 잊고 육신의 정욕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했던 기간이 오래 되었음을 말한다.
앞서 므낫세는 5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다를 통치했는데 그 기간 동안 유다는
우상 숭배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그의 손자인 요시야 왕의 개혁으로도 완전히 정화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33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이스라엘의 바른 행위는 그녀의 참된 남편인 여호와를 위해 정조를 지키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정부(情夫) 곧 이방의 허탄한 우상을 찾아 헤맸다.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이스라엘이 악한 짓을 하는 데 아주 능숙해 있어서
도리어 악한 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여기서 ‘악한 여자’는 경험 많은 창녀를 가리킨다. (새번역)
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았은 아합의 행위(왕상21:16)와
예루살렘 거리를 무죄한 자의 피로 범람케한 므낫세의 행위(왕하21:16)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담 구명을 뚫음’은 도적의 침입을 뜻한다.
율법에는 도적이 집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현장에서 쳐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출22:2~3). 그러나 이들의 범죄는
현장범에 대한 살인이 아니라, 직언과 선의의 책망에 대한 보복살인이었다.
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떠났다'
유다 백성의 죄질의 심각성은 그들의 영적 무감각과 그로 인한 뻔뻔스러움으로 인해
한층 더해졌다. 그들은 34절에 언급된 바와 같은 끔찍스러운 죄를 범하고서도
도리어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공의의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자들이었다(요일 1:8,10).
NIV와 RSV는 34절과 본절의 연결을 강조하기 위해 Yet in spite of all this,
곧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36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네 길을 바꾸어'
(공동번역) ‘손바닥 뒤집듯이 여기 붙고 저기 붙고 하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새번역)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다니, 너는 어쩌면 그렇게 지조도 없느냐?’
이스라엘은 변덕스럽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손을 내밀고 추파를 던졌으나
정작 신뢰할 만하고 또 진실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지적하고 있다.
'앗수르로 인하여...애굽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앗수르나 애굽에 의지하려고 하나,
그들은 변덕스럽고 의지할 만한 자들이 못되며,
오히려 유다에 수치와 굴욕 그리고 절망만 안겨다 줄 것이다.
앗수르는 이미 북왕국에 수치를 안겨다 준 바있으며, (약 1백년 전에)
당시에는 유다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정치적 중립 상태를 견지했던 요시야시대 초기로 본다.
이 구절이 말하는 내용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치 않을 때는 침울한 재앙과 저주가 임한다는 것이다.
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치 못할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배하시는 이상, 유다가 어떤 나라를 신뢰하든 간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시면 그들 나라들은 유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나라들은 반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선택하여 자기 백성을 돕기로 결정하면
이스라엘은 복을 받을 수 있다(사44:28-45:7).
그리고 본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전체적으로 이를 정리하자면,
본장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예레미야 사역 초기의 설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때
본장의 메시지가 전파된 때는 대체적으로 요시야의 개혁이 점차 무르익어 갈 때이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은 B.C.622년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에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개혁은 예레미야의사역 전인 B.C.629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대하 34:3-7).
따라서 예레미야는, 그 전총이 모세 시대로 소급되는 언약 사상으로부터
강한 동기를 부여받았다. 이 언약 사상은 예레미야 사역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