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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불순물 중 최다함량 잠17:1~28 녹취록 스크랩
“한마디로 혈연으로 구성된 가정에서조차 혈연보다 더 중시되어야 할 것은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 아래 글 중에서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내 마음의 불순물 중 최다함량’
저는 군복무를 카투사로 미군부대에서 했습니다.
헬기를 정비하는 보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헬리 비행대대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습니다.
A중대에서 헬기를 정비하기 위해서 꼬리날개 부분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속에 펜치(공구)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펜치의 뾰족한 부분에 의해서,
헬기 뒷날개를 돌리는 축이 갈려져서,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축이 닳아서 끊어진다면, 헬기는 방향을 조정 못해서 추락하고 마는 것이죠.
정비사가 상사에게 알리고, 대대장 귀에까지 들어가서
비행대대 전체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건이었냐면, 예를 들어 의사가 수술을 하다가
메스를 환자의 몸 안에 넣어둔 채로, 봉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얘기를 드린 이유는,
우리 마음과 영혼안에도, 이렇게 불순물이 들어올 수 있고,
그러면 우리 마음과 영혼은, 큰 데미지를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리 마음에, 불순물이 들어올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러한 불순물이 마음에 들어옴으로써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데
모든 인간관계가 깨져버리게 됩니다.
헬기의 꼬리날개에 펜치가 들어감으로써 추락할 뻔했던 것과 같습니다.
비행기는 불시착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헬기는 공중에서 고장 나는 순간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헬기에 비유하자면, 내 마음에 '이물질'이 들어오는 순간
모든 인간관계는 추락하게 됩니다. *‘이물질’이 키워드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에 '이물질'이 들어올 때에
다툼과 불화와 갈등이 생겨나서, 인간관계가 파괴될 것이라고 합니다.
▲3절을 보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도가니나 풀무’는 광석을 통째로 집어넣고 끓여서
은과 금 등을 정제해내는 도구입니다.
불순물과 섞여있는 은과 금에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데
마치 그 모습이 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정제하시듯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연단의 과제가 불순물, 이물질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을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불순물이, 마음에 섞인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도 가르쳐주고 있는데,
마음에 불순물이 섞인 증상을 드러냄으로써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다면 하나님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하신 용광로의 역할을 하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에 바르게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 용광로’를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음에 이물질, 불순물이 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어떤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불순물이 포함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가족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족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처럼
혈연은 엄청난 구속력을 가진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불순물이 있다면, 가족이 화목할 수 없습니다.
이와 상통하는 말씀이 잠15:17절에도 나타납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정이라는 관계에서 최고의 상태는 화목함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함을 재물의 풍족함이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난하다고 해서 화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유함이 화목을 보장하지도 않으며, 가난함이 불화를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나 가정을 성립하게 하는 혈연도, 결코 화목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혈연의 구속력조차 화목함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대체 가정의 화목은 무엇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해답은 바로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이유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라고 하였고
12절을 보면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가족 혹은 직장이나 친구 중에라도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은
차라리 새끼를 빼앗겨서 분기탱천한 암곰을 만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혈연으로 구성된 가정에서조차 혈연보다 더 중시되어야 할 것은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종이 지혜롭다면
그를 아들의 상전으로 삼아서라도 지혜를 따르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를 자식으로 여겨 재산을 나누어주라고까지 합니다.
가장이라면 이처럼 혈연에 앞서, 지혜를 중시해야만, 가정에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 중에 어리석음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바로 마음의 불순물 때문입니다.
렘17:9절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나타나는 결과가 인간관계의 파괴입니다.
만약 내가 지혜롭고,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경우에는 어떨까요?
그 관계는 깨지지 않습니다.
내가 그 어리석은 사람에게 합당한 지혜로움으로 대처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은,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내 원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게 지혜가 있다면, 어리석은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관계가 깨질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족 관계에서는 어떨까요?
마음에 불순물이 섞인 상태에서 하는 말과 판단과 생각은.. 모두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불화가 생겨납니다. 가정의 화목은 재물의 유무 등의 외부의 원인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관계는 가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가정을 예로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읽어보면, 다툼이나 이간질 등의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에
증상을 통해서 마음의 불순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콩깍지가 씌워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여인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인도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반해서 그와 결혼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부부관계를 깨지게 하는 불순물이 드러납니다.
상대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고, 행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행복하려고 결혼하지, 불행하려고 결혼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런 행복과 기쁨을 기대하지 않으려면 왜 결혼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분명히 그보다 지혜가 우선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행복과 기쁨을 누리려 해야됩니다.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깨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재물의 유무 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혜가 있다면
마른 떡 한 조각을 놓고도 화목할 수 있지만,
지혜가 없다면 고기가 집에 가득해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해 행복과 기쁨을 누리려 한다면
그게 마음의 불순물이 됩니다. (지혜를 통해 행복과 기쁨을 누리려 해야 됩니다.)
사람을 관계하고 만날 때마다, 상대에 대해 갖는 괜한 기대감이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심지어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서로에게 갖는 기대감이, 불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 또는 예수님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뭘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래서 실망하고 싸우는 것이죠.
기대가 컸는데, 내 기대만큼 안 채워지니까요.)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러한 기대감은
실제로는 결코 마음에 허용될 수 없는 불순물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부패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마음이야 말로
부패하고 불순물이 섞인 마음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기대할 때에 그것이 불순물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기가 막히는 노릇인데,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이것을 이상하다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상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상은 불순물이 되어서 헬기를 추락시키는 펜치처럼, 뱃속에 들은 메스처럼,
인간관계를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해라, 상대방을 용납하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상대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내는 해피엔딩은.. 그건 영화죠.
정작 현실의 삶에서는 한 순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 이후의 장면을 더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리고 말죠.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남녀가 결혼하며 행복하게 끝나는 영화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3년 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결혼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긴 것 자체가, 이미 마음의 불순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불순물 제거 작업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35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정의 불화를 경계하였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은
오늘 잠언서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그 불화의 원인입니다.
혈연은 지혜와 비교할 때에 우선 될 수가 없는 가치입니다.
지혜는 곧 누구를 대하든 번제단에서 내 판단을 죽이고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태도이고,
그렇게 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판단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세상으로 향하게 해서
하나님이 아닌 대상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할 때에
그것들은 마음에 ‘이물질, 불순물’이 됩니다.
이 욕망, 욕심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불순물로 인해서, 인간관계는 깨어져 나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부부관계가 안 좋다고 여기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무엇인가를 고치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부부간에 불화가 있다면, 먼저 서로 자아를 버려야합니다.
자녀와의 관계가 힘들다면, 자녀와의 관계를 잘해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자녀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긴 이유는,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욕망이죠. 그 이물질, 불순물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3:17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의 정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귀결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17: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담아야 될 마음에, 자녀를 담아서 기뻐하려 했으니, 자녀가 불순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에게 속아서 원죄가 체질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기쁨의 대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원수에 대해서는 원수를 제거함으로써 기뻐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원수가 자꾸만 늘어만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5: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원수를 위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수를 마음에 붙잡고 미워하는 것도 기쁨을 얻기 위한 불순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불순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인간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인간관계로부터 마음의 불순물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는 마음이 바로 마음의 불순물이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서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모든 관계에 대해 죽을 때에
우리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성격은 변합니다. 기쁨과 만족을 구하려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상대방에게 드러내고 표현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넉넉히 그에게 나누어주는 인생이 됩니다. 그에게 뭘 바라는 게 아니라요.
가족은 기쁨을 얻기 위한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난 기쁨을 드러내는, 나눠주는 대상입니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설령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을 자들과 관계할 때에도,
그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내 기쁨과 만족을 표현함으로써, 즉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관계가 좋아지죠.
잠16:7절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관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우리 마음에서 불순물은 빠져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상대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함이 마음에 가장 큰 불순물입니다.
십자가로 이 불순물을 제거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진 순수한 마음이 유지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표현하며
오늘 하루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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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채굴꾼처럼
미국 기업인 메리 케이 애시는 직원을 대할 때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대우를 받고 싶은가?”를 늘 고민했다.
누군가 직원들을 대하는 자신만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금 채굴꾼의 마음으로 직원들을 대해요.
황금 채굴꾼이 약 0.028킬로의 금을 얻으려면 흙을 얼마나 퍼내야 하는지 아세요?
수 톤이에요.
그러나 황금 채굴꾼은 수 톤의 흙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의 마음의 눈은 오직 0.028킬로의 황금에 집중되죠.
그래서 황금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에 집중해요.
황금 채굴꾼으로 비유하면, 금보다 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격이지요.
그러다 보니 금 같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없죠.
그러나 인간관계의 달인은, 단점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장점에만 관심이 있죠.
모든 사람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니,
어떤 사람과도 금 같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지요.”
나는 내 이웃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흙을 보는 것이 아닌, 금을 바라 볼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
그렇지 않고, 자꾸 이웃의 단점을 쳐다보는게 습관이 되다보면
미국인이 쓰는 말로 lack of social 즉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 되고 마는 거죠.
결국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는 셈입니다.
▲폴 트루니에, 2가지 힘에 관한 통찰
유명한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강자와 약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중대한 문제는 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두세요. 사람이 어렵고 약할 때는 그런대로 사람 같아요.
그러나 어느 사이에 힘을 가지게 되는 순간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그는 힘은 ‘심리학적 힘’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적 힘이라는 것은 성공을 토대로 한 힘입니다.
돈을 벌었으니 돈이 힘이고,
공부를 했으니 명예가 힘이고, 지식이 힘이고,
높이 올라가면 완력이 힘입니다만
이 힘이 작용하는 순간... 인간성이 무너집니다. 더 이상 존경을 못 받습니다.
힘이 작용하는 순간 인간관계가 다 망가집니다.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다만 망가진 다음에야 조금 깨달을 수도 있는데... 벌써 늦었어요.
반면에 지도자가 추구해야 하는 영적인 힘이란,
희생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그것들만이 창조적 능력을 나타냅니다.
자발적인 존경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