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02086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렘5:1~13 2008년
※다소 신학적인 해석이지만, 맞는 말입니다. 보통은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해석하지요.
서론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내기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의인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공의라고 하는 것은 주로 통치자의 덕목이고,
진리를 구하는 것은 주로 배우는 학생들의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든 학생이든, 신분계급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의인 한 사람만 찾으면 예루살렘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치고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기를 좋아하신 거 같은데 저도 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테니스를 쳐도 꼭 자장면 내기를 합니다. 그래야 경기의 긴장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예레미야와 하시는 내기는 재미 수준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생사가 달린 긴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내기는 예레미야 5장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창18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에 관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시겠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악인을 멸망시키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만
악인들 가운데 의인들이 섞여 있어도 한꺼번에 같이 멸하시는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까?’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것도 그렇겠다. 그러면 네가 한번 내기를 해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이 성을 사하시겠습니까?’하자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오십 명이 있기가 어려워서 재협상을 합니다. 그래서 의인 50에서 45, 45에서 40,
40에서 30, 30에서 20, 20에서 10으로 5번 협상을 한 결과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불과 유황으로 멸망치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깨끗이 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성은 결국 유황과 불비를 맞고 멸망당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의인 한 사람으로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열 명 보다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1. 의인 한 사람을 찾는 과정
렘5장은 하나님의 제안대로 예루살렘 성에서 예레미야가 의인 한 사람을 찾는 과정입니다.
▲1. 예레미야는 먼저 일반 시민 혹은 평민 혹은 서민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서
의인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본문 4절에 ‘이 무리는 비천하고(poor) 우준한(foolish) 것 뿐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서민 혹은 평민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먼저 찾아간 것입니다.
왜냐면 아마도 서민들 가운데 숨어있는 의인들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서민들 중에서 의인을 찾을 수가 없었고
도리어 사람을 선동하는 악인들이 있었습니다.
5:26절에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군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악인들이 하는 짓의 목적은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2절에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찌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3절에는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였다는 것은 요즘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알지 못하며 받지 아니하고 싫어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No’, 또 말씀하셔도 ‘No’, 한 대 때려도 ‘No’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No’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아이들 중에도 심성이 비뚤어져 이거 하라하면 ‘싫어’,
저거 하라하면 ‘싫어’,
한 대 때려도 ‘싫어’라고 하는 완고하고 완악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속으로 ‘내가 저런 말씀쯤에 넘어갈 줄 아느냐? 어림없다’고
생각하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5:27~28절에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서민들이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쳐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서민들 중에 의인 단 한 명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4절 후반에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2. 이제 예레미야는 이 백성은 서민이라 배우지 못해 하나님의 법을 몰라무지하다며,
공부를 많이 한 유식한 사람을 찾아가 봅니다.
사람이 대한민국 헌법 5조가 뭔지, 국제법이 어떻게 되는지,
경제학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모르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알아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민들은 ‘몰랐습니다’라고 하니 예레미야가 ‘몰라서 그렇구나.
그러면 공부 많이 한 사람을 찾아가 보자.’고 해서 두 번째로 귀인들을 찾아가 봅니다.
본문 5절에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지도자(지도층, 부유하고 유식한 자)들은, 공부를 많이 해서 하나님의 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멍에, 결박으로 여겼습니다.
멍에로 여겨서 끊어버리고 결박을 내가 헤쳐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보고 자꾸 교회에 나오라 하느냐? 멍에다.
왜 나보고 미얀마, 중국 구호헌금을 내라고 하느냐 멍에다. 결박을 끊어버리자.
그리고 왜 나보고 기도하라 하느냐? 멍에다. 결박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수요예배와 새벽예배에도 나가는 걸 보면서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그런 멍에를 계속 지고 나갈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멍에가 아닙니다. 사실은 죄를 짓고, 술로 병들고, 빚지고, 바람피워 가정에
문제 생기는 것이 멍에지,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성령 충만 받아 기쁨이 넘치는 것이 왜 멍에입니까?
마11:30절에서 예수님이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에도 멍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멍에보다는 압도적으로 가벼운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도층들은 소득이 좋아 배불리 먹는데 배가 부르니 허튼 짓을 합니다.
본문 7절 후반에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지도층들이 창기의 집에 모입니다. 요즘말로 비밀요정에 허다히 모인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의식에, 이런 은밀한 성적 일탈이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8절에는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먹고 살만 하니 하나님의 법은 멍에, 결박으로 여겨 끊어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되
사람 수준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인 수 말 수준으로 추구합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7a절에서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How can I forgive you)?’라고 질문하시고,
9절에서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고 너무나 명확한 답변에 대한 강한 의미 전달입니다.
이런 걸 수사학적 질문(rhetorical question)이라고 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사하지 않고
반드시 너를 벌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를 말하는 겁니다.
▲3. 이처럼 예레미야는 서민과 귀인들 가운데 의인을 못 찾아 이제는 법조인을 찾아갑니다.
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정의실현을 목적으로 사니 의인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5:28절에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지금 판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판사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안 하므로 돈이 없고 힘이 없는 고아는 패소합니다.
빈민은 가난하니 변호사의 도움을 못 받아 패소하고 부자들은 모두 승소하게 해주는 악한 짓을 했습니다.
뇌물을 받고 왜곡된 판결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조인들 가운데 의인 한 명을 못 얻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목사님, 신부님 등 종교인을 찾아갔습니다.
5:30~31절에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고 기록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생명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인데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사명은 백성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고
백성끼리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는건데
오히려 이간질하고 백성들을 갈취하고 착취해서 자기 배를 채웠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선지자는 좋은 자리야, 제사장은 수지맞는 자리야.’라며
자식들에게 직업으로 권유하는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참으로 기괴하고 놀랍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인 중에도 의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아니고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에서 단 한 명의 의인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전7: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기록되었고,
시143:2절에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롬3:10~12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너나 나나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5장에서 가르치는 결론은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Total Depravity of Mankind)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5장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2. 인간의 전적타락은 신앙의 제1진리이다.
건전한 기독교는 교리와 신앙의 제1출발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 타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면 그 다음부터 모든 신앙과 신학은 다 비뚤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아담 때부터 타락된 본성을 이어온 타락한 존재라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타락교리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란 모든 인간이 악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악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무신론자, 불신자들도 모두다 양심이 있습니다. 그들도 인간의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국가나 인류를 위해서 기부하고 희생하며, 열사와 의사
그리고 이순신 장군 같은 충무공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오사마 빈 라덴, 히틀러, 김정일 같이 악하진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악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는 얘기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기준에서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국가를 위해 헌신도 희생도 노력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도덕 선생님, 윤리 선생님, 공자, 맹자, 순자님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빌딩으로 비유하자면 63빌딩 같은 분이신데
거기에 비해 보통 사람은 1층도 안되고 그냥 짓다만 오두막집 같습니다.
63빌딩 꼭대기에서 헐어진 1층짜리 오두막집을 보면 참 우습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63빌딩 보다 훨씬 높은 1950m 한라산 꼭대기에서 보면
63빌딩이나 1층짜리 오두막집이나 비슷합니다.
또한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63빌딩이나 1층짜리 오두막집이나
다 그 수준이 그 수준이지 하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인천항에서 수영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경기를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10km 가다가 죽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들어가자마자 죽을 겁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못가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의 수준은 그 수준이 그 수준이라는 말입니다.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00점이 되어야 합격인데 99점을 맞았다면 떨어지기는 0점 맞은 거와 마찬가지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타락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의롭고 불의한 것은 있어도 하나님 수준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럴만한 영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타락은 인간의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 of Mankind)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련한 한 모든 인간은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의 영적인 기관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첫째, 눈입니다. 사람은 영적으로 거듭나 구원받기 전에는 육신의 눈은 떴어도
영적인 눈은 멀었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Cannot See).
요3: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둘째, 머리입니다. 전혀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Cannot Understand).
고전2: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명문대를 나와 성경을 수십 번 읽었다고 해도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기 전에는 성경 단 한 구절도 못 깨닫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교회에 안 나가가고 예수는 안 믿지만 성경은 많이 읽어서
기독교인 보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이해하지 못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지 말아야 됩니다.
셋째, 귀입니다. 영적인 진리를 전혀 듣지 못합니다(Cannot Hear).
요8:43절에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듣지를 못해서 못 깨닫는 것입니다.
넷째, 입입니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Cannot Say). 고전12:3b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섯째, 다리입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올 수가 없습니다(Cannot Come).
요6: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섯째, 팔입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Cannot Receive).
요14:17a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눈멀고 귀도 안들리고 말할 수도 없으며 머리로도 전혀 이해 못하고
팔 다리도 못 움직이는 인간을 죽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으면 뭐 하나라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엡2: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거듭나기 이전의 인간은 죽은 존재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악령을 따릅니다.
엡2: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악령은 귀신들로 그 대장을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무당, 점쟁이, 굿하는 자들, 칼 타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귀신, 악령을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 존재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에서 전적 무능력이 나왔고 전적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타락한 사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인간이 이어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고 내가 전적 타락한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전적타락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전적타락하면 전적멸망(Total Destruction)이 옵니다.
본문 6절에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자와 이리와 표범을 한꺼번에 만났습니다.
오른쪽에는 사자, 왼쪽에는 이리, 앞에는 표범이 있습니다.
이 세 짐승을 만나면 살아남지 못하고 죽습니다.
사자가 머리를 먹고, 이리가 가운데 내장을 먹고, 표범이 다리를 먹습니다.
이렇게 된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 사망이라, 멸망이라고 합니다.
전적타락은 전적무능력을 낳고, 전적 무능력은 전적멸망을 낳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것은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둘째 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습니다. 육신의 몸은 죽습니다. 그런데 죽는 걸로 끝이 아닙니다.
불못, 지옥에 떨어지는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아니어도 전적타락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살아도 불의한 자요 죽으면 전적 멸망, 지옥, 불 못에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속으로 ‘그런 말로 나를 유혹할 줄 알아? 난 아니야.’라는 분이 계시다면
이런 완악한 마음을 버리십시오. 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3. 의인 한 사람은 구원의 표적이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렇게 전적타락해서 전적멸망 할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꼭 한 구절씩은 숨통을 터놓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숨통은 터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훼파하되 다 훼파하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훼파하되 가지만 꺾어버리고 뿌리는 남겨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18절에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멸망하는게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멸망시키지는 않으시고
남은 자를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택하셔서 남은 자를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제자인 바룩도 본질상 의인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여
남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남은자는 더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시는 자들은 의인 한 사람(남은 자)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몸을 입고 존재한 사람 가운데 의인이라 칭함받은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예루살렘 성에는 한 명도 없었지만
600여 년 후에 한 분의 발이 예루살렘 성에 서신 것입니다.
딱 한 분 의인, 사람들이 ‘그 분은 진실로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했던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롬5: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 한 사람이 하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하고
그 반역한 기질을 우리에게 이어줘서 우리는 결국모두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역사상 존재하는 의인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었던 죄인이 이 한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멸망을 받지 아니하리라 해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의인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의를 우리에게 옷으로 덧입혀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발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입니다. 이것은 개신교가 발견한 위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의인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고려대학교 법학과 72학번인데 1972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헌법을 잘 모르는데 헌법을 바꾸니 법을 공부할 게 없어
서클에 들어가 데모하다 남산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때 데모했던 사람들은 의인인가? 데모해서 의인이 되는가?’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데모한다고 의인이 되지 않습니다. 데모를 하든 안하든 우리는 다 동일한 죄인입니다.
저는 의인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여러 해 지나 발견한 것은
‘의인은 데모해서 되는 건 아니구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사는 길은 예수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한 사람 의인, 유일한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의인되어
이 땅에서도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참된 의인입니다.
결론
예레미야 5장은 지나간 유다백성의 죄악 이야기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전적멸망의 심판이 앞에 놓여있는 모든 인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너무 신학적 해석 같은데, 그래도 맞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그대로 가지고 살면 전적멸망이 옵니다.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오로지 참 된 의인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믿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는 의인이 되어 죽어서도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영원 불못,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하나님 나라,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
영원토록 지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내세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세에서도 의롭게 사는 유일한 소망은 오로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읽고 깨닫고
말씀 따라 살아가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눅2:34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현세와 내세에 인간이 흥하느냐, 패하느냐 하는
유일한 표적이요 기준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현세와 내세에 의로운 삶을 살다 흥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현세와 내세에 죄악을 짓다가 영원 형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패하는 길을 버리시고,
단호하게 흥하는 편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