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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4 30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2) (youtube.com)
◈아덴에서 바울의 전도 2 행17:22~34
※설교자들은 '아덴에서 바울의 전도가 실패했다, 열매가 거의 없었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합니다.
◑2. 아덴에서 바울이 전도(설교)한 결과 .. 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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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 내용
지금 바울은 아덴에서 사역하는 중입니다.
이 아덴이란 도시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을 가리켜 '범사의 종교심이 많도다' 라고 말합니다. 17:22
아덴은 종교성이 강한 도시였죠.
그 당시 문헌에 의하면 사람의 숫자보다, 우상의 수가 더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아덴은 우상 천지였습니다.
심지어 23절 한번 보시겠어요?
'바울은 아덴을 두루 다니면서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위하는 것들'은 그들이 섬기던 다양한 신상들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신(상)들 가운데 바울의 눈에 띈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들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습니다.
그 정도로 아덴 사람들은 우상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아레오바고 였습니다.
여기가 오늘날 실제로 아테네에 있는 아레오바고인데요.
아레오바고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진을 보시면 언덕으로 되어 있죠.
바울은 이 언덕에 올라서서 설교를 했을 겁니다.
특별히 여기 보시면 동판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동판에 보면 실제로 이런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이곳에서 철학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거죠.
그러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들이 섬겨야 할 참된 신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구신가? 바울은 하나님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1. 첫 번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17: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먼저 바울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과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가 24b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덴 사람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전 안에 신상을 가두었습니다.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죠. (아래 사진)
이 신전 안에는 아테나 라는 전쟁의 여신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테나 라는 전쟁의 여신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테네 라는 도시의 이름이죠.
이게 아테나 여신상인데요.
이 여신상을 파르테논 신전 안에 가두고 섬겼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신상을 신전 안에다가 가두었을까요?
신전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신을 가둔 이유는,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신에게 나아가 필요한 도움을 받겠다는 심보입니다.
여기에 우상 숭배의 본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 중에 니케 라는 신이 있습니다.
오늘날 나이키 브랜드가 니케에서 따온 이름이죠.
니케는 승리의 여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니케 신상을 보면, 이 여신이 날개가 없습니다. 원래는 날개가 있거든요.
아덴의 사람들이 날개를 자른 겁니다. 날개를 자르고 신전 안에 가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니케 신의 날개를 잘랐겠어요?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자른 겁니다.
아테네로부터 떠날 수 없도록, 아테네만 지키도록. 날개 없는 모습으로 만든 겁니다.
자기들이 신을 통제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신마저도 컨트롤을 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걸, 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신마저도 인간을 섬기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간의 타락한 종교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게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신전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얼레고 달래서, 뭔가를 타낼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는 분이시지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통제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상과 다른 또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17: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여기 보면 바울이, 두 가지 동사를 대조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에서 '받다'라는 동사와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에서 '주다'라는 동사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사람의 손으로 성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은
전부 다 이런 개념입니다. '사람이 신을 위해 뭔가를 드려야 합니다.
뭔가 정성을 다해서 신에게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신이 감동해서, 뭔가 내가 원하는 걸 해준다'는 개념입니다.
이게 이 세상 종교의 보편적인 메커니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온 우주 만물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그분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입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 무엇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충족하신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호흡과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생명 없는 우상들이 전혀 흉내낼 수 없는,
생명과 호흡을 인간에게 주실 뿐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드리지 않아도, 값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먼저 공급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 같이, 섬김을 받는 우상과는 다릅니다.
여러분, 이 메커니즘의 전환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많은 성도들마저도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드려서, 타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드리는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면에서 방향전환이 선명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타내려고 뭔가를 바치는 신앙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1) '헌금'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먼저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면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상과는 다릅니다. 사람에 의해 통제되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상처럼 마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성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조금도 의존적인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2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거죠.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하루도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먼저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한 혈통'은 누구죠? 바로 첫사람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첫사람 아담이라는 한 조상으로부터 만드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후손인 거죠.
그 아담의 후손들이 온 땅에 흩어져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흩어진 아담의 후손들에게 연대를 정하셨습니다.
'연대'는 시기 혹은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라와 제국들의 시간과 기간을 정하셨습니다.
어느 제국은 어느 만큼 있다가 사라지고,
또 어떤 제국은 얼마만큼 있다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를
역사 속에서 다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주의 경계도 정하셨습니다.
이 지역은 어느 족속이 살아가고, 저 지역은 어느 나라가 살아가는 경계를
하나님이 다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경계도, 하나님이 다 정해주셨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죠?
역사를 다스리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인류를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까?
그 답이 2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과 땅의 주관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비와 해와 공기와 같은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당신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자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의존적인 존재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나무나 돌에다 신을 새기고 신을 섬겼습니다.
그게 바로 본문의 아덴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몰랐던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번째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달력에 심판날을 표시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반드시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직접 임명하신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정하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심판날에 하나님이 재판관으로 임명한 사람의 이름은
마호메트도 아니고 부처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호메트도 부처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땅의 재판관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대상에는, 본문의 아덴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헛된 우상에서 돌이켜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설교의 결과가 본문 마지막 34절에 나옵니다.
◑2. 아덴에서 바울이 전도(설교)한 결과
17: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라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여러분 바울이 설교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몇 사람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굉장히 적은 숫자, 지극히 소수만이 몇 사람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다른 사역지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꽤 많은 학자들은, 아덴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실패'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숫자에 초점을 둔 인간적인 관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숫자로 사역의 성공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도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대규모의 열매를 거두는 선지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양적으로 큰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의 선지자'인 줄 아십니까?
눈물 흘릴 일밖에는 할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도, 이스라엘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말고도, 여러분이 아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설교를 듣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분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강퍅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도리어 핍박했던 거죠. 그 결과 이스라엘이 망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실패한 선지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실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자리로 부름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부름을 받았을 때 처음부터, 이렇게 실패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그들은 실패한 사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도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앞에서 자랑하던 사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주여,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주여,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도 행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성공한 사역자들이죠.
오늘날로 치면, 그들은 유명한 부흥 강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편에서는,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물량적인 수치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바울의 아덴에서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실패가 아닙니다.
비록 소수의 몇 사람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할지라도,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 몇 사람만을 구원하기 위해
바울을 아덴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3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34절에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글 성경에는 이게 잘 드러나지 않는데요.
'가까이 했다'라는 말이 원문으로 보면 수동태입니다. 주2)
이 몇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바울에게 나아간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바울에게 붙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믿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바울을 아덴으로 보내시고
바울을 통해 그들을 믿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덴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실패가 아닙니다.
몇 사람, 소수의 사람을 위해, 바울은 아덴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실패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룬 성공적인 사역자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열매가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반드시 하나님이 하시기로 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행하시기 위해, 우리를 그 자리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신앙의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니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부르신 그 신앙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3. 또 하나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 ▣우상화
바울은, 우상을 섬기는 아덴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런데 이 회개의 촉구는, 오늘날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 역시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우상'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라는 말을 들으면, 신상 앞에서 절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 책에서,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우상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상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상이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이 만든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나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무엇이든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무엇이든 당신이 그것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게 곧 우상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있어질 거야..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저것만 있으면 내가 행복하고, 나는 내 삶에 더 안정감을 누릴 거야'
그게 바로 우리의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에게는 돈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돈을 바라보며,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돈만 있으면 내 삶은 더 의미있어질 거야.
내 삶은 더 행복해지고, 나는 더 보호를 받게 될 거야'
돈에서 자기 삶의 안정감을 찾는 거죠. 그게 바로 돈이 우상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는 권력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쾌락이, 누군가에게는 성공이
누군가에게는 인기와 명예가, 또 누군가에게는 자녀가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상으로 섬기는 것들은 대체로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돈은,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 돈을 섬긴다면 우상입니다.
돈 자체가 궁극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면, 우상 숭배가 됩니다.
여러분 권력도 마찬가지죠. 권력도 우리의 삶에서 필요합니다.
질서를 세우는 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게 되면
그 권력을 숭배하면 우상이 되는 거죠. 여러분 이게 우상의 함정입니다.
우리가 우상으로 삼은 것들은, 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힐 때, 그게 우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안에는 '불안'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여러분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분리된 인간은, 당연히 불안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리 불안'에서 나오는 게 우상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여러분 사실 걱정의 산물입니다.
불안해서 우상을 만들고, 불안해서 우상을 섬기고,
불안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언제나 우리의 삶 가운데 불안을 파고듭니다.
우리의 불안한 요소를, 우상을 통해 통제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우상을 만드는(추구하는) 이유입니다.
우상을 만들어서, 불안한 자기 인생을, 우상을 통해 통제하고 싶은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농사를 지으려고 씨를 뿌렸는데,
언제 홍수가 나서 농사를 망칠지 불안합니다.
또 언제 가뭄이 와서 작물이 마를지 불안합니다.
그런데 날씨를 통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기를 주장하는 신을 만들어서 경배하는 겁니다.
해의 신을 만들고, 비의 신을 만들어서 경배하는 겁니다.
그렇게 신을 통해서, 불안한 날씨를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을 만드는 사람의 심리적 기저에는, 불안이 깔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의 아덴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습니다.
왜 '알지도 못하는 신'까지 섬겼을까요?
그렇게 수많은 신을 섬기고도, 그들은 불안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란, 결국 결핍과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지 아십니까?
불안한 겁니다. 내일의 삶이 불안한 겁니다.
하나님을 떠났으니, 내일의 삶을 내가 준비해야 한다고 여기니까.. 불안한 겁니다.
무서운 겁니다. 그 불안한 삶을 지켜주는 게, 눈에 보이는 돈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그 밖에 모든 우상들도, 하나님을 떠난 결핍과 불안의 자리에서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상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 부분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5:8절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 우상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우상처럼 헛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우상처럼, 허망하고 결국에는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인생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도 촉구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서 돌이켜, 영원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온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무엇이 부족하여 성김을 받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채워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더 이상 통장 잔고를 보며 불안하거나, 안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헛된 우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그것(우상)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우상으로부터 돌이키라는 신호입니다.
그것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던 우리를,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부르는 겁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 빈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우길 원하십니다.
그때 여러분은 아무것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내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한다면... 아무 집착이 없다는 증거요,
내 마음이 뭔가 불만족스럽다면... 내가 집착하는 우상이 있다는 증거죠.
믿음과 신앙은 한 번 믿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믿은 이후로 계속 성숙해가야 하는데..
그 성숙은.. ‘내 구세주 주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단계로
끊임없이 자라가는 성숙입니다! 우상으로 인한 만족이 아니라,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리로, 끊임없이 자라가는 성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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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헌금'에 대하여
제가 신대원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기도원에도 제가 참 자주 가서 금식기도도 많이 했는데요.
그때 이제 헌금 시간이 있었습니다.
헌금 시간에 어떤 집사님이 헌금 봉투에 기도 제목을 써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 헌금봉투를 본 기도원 원장이 대놓고 그분을 책망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여섯 개인데, 헌금은 2만 원만 했다는 이유였어요.
기도 제목이 6개면, 하나에 만원으로 계산하면 6만원이죠.
적어도 6만원은 해야지... 이렇게 적게 드리면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시겠냐면서
정말 성질을 내면서 그분을 혼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건 샤머니즘이죠.
우리가 응답을 받은 기도의 제목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구하지 않은 것들도,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거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삼위 하나님의 전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먼저 찾아와 주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뭘 해드리고 싶은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뭔가를 드려야지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먼저 구원해 주신 은혜에.. 먼저 베풀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서
반응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헌신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왜 헌금을 하십니까? 헌금을 드린 만큼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인가요?
헌금은 그런 자판기가 아닙니다. 속된 말로 '돈 놓고 돈 먹기'가 아닙니다.
내가 이번 주일에 만 원을 헌금하면, 하나님이 2만 원으로 보답해 주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건 보편적인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죠. 샤머니즘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확인하시고
우리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 삶 가운데 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셨던
그 한 주간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감사의 고백이지만
그것조차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자진해서 더 드리고 싶은 겁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
헌금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예배시간에 헌금기도할 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건 축복의 기도가 아니죠. 이 헌금을 드림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어떤 공로나 수단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임을 고백합니다.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헌금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2) 행17: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가까이하여' : 콜레센테스, 콜라오(가까이하다)의 수동태 분사
to glue, to glue together, c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