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9 새벽 / 누가 주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가? - YouTube
◈누가 주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가? 렘6:1~30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주의 백성들을, 예레미야서를 통해 살펴보면서
주의 백성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왜 감당하기 힘든 고통 가운데 빠지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렘6장 전체를 통해서도, 우리는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린 주의 백성들을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주의 백성들을 들여다보면서
오늘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러면 누가 주의 백성에게 고통을 가지고 오는가?'
'주의 백성은 누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가?' 그것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어떤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어제 5장에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그러면 실제적으로 누가 그러한 고통을 내게 가져다 주는가를
본문 6장에서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요약하면, 주의 백성은 누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가 하면
-바벨론
-하나님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1. 이스라엘을 괴롭힌 첫 번째는, 바벨론
예레미야는 부름을 받던 그 순간
'북쪽으로 부터 기울어져 있던 끓는 가마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1:13
예레미야가 부름을 받으면서 벌써 무엇을 보았는가 하면
북쪽으로 부터 기울어져서 위태위태한, 그래서 지금 넘쳐흐를 것 같은 끓는 가마,
그러면 환상이 아주 무섭겠지요.
근데 그 끓는 가마가 내개 쏟아진다면 얼마나 큰 고통이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이것이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을 것이고
'북으로 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가 무엇인지
본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세요.
6: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재앙과 큰 파멸이 어디에서 온다고요?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1
언제나 성경에서 북쪽은 심판이 오는 방향이거든요.
'엿보아 온다'는 '어른거리며 보인다'는 뜻입니다.
22절에 하나님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6:2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북으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 우리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줄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땅 끝에서부터 일어나는 한 민족' 이렇게 볼 때 '바벨론'이 되는 거죠.
왜냐면 바벨론은 당시에 '일어나는, 커지던' 나라였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 바벨론이 일어나서
당시 가장 강력했던 앗수르를 무찌르고
그 이후에 이제 '이스라엘에 쏟아지는 진노의 끓는 가마'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나를) 고통스럽게 하시는구나'
라고 가르쳐 주고 있어요.
바벨론은 어떤 의미입니까?
6:22~23절에 보면, 바벨론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바벨론이 어떤 자인가요?
그는 나와 같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으며,
나와 같이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잔인하고 사랑이 없으며')
나 같은 존재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바벨론을 보내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 바벨론의 모습을 통해서, 그와 같이 비슷한 내 모습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바벨론을 통해서 자기 모습을 깨닫고, 회개하라고요!
그래서 22~23절의 바벨론의 모습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기 모습을 깨달으라는 거죠.
▲이와 같이 만약 오늘날에도, 나에게 바벨론 같은 존재가 있어서 나를 괴롭힌다면,
하나님이 바벨론을 내게 붙여주셔서, 내가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면,
그 바벨론의 모습을 통해서, 아직 회개하지 않은 내 모습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저 더러운 죄인들, 저 죽일 놈들' 할게 아니라
바벨론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존재들이에요.
바벨론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들이 에요. 잔인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은 나 같은 사람이에요.
'나 같은 자,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내가 환란을 당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내게 보내서, 나를 회개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은 '나 같은 자'이기도 하지만,
사실 나보다 좀 더 악한 자입니다. 나보다 단수가 좀 더 높은 악인이죠.
그래야 내가 고통을 당하지,
나보다 덜 악한 죄인, 더 약한 죄인이라면,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죠.
고통은 언제나 강자에게 당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 원리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때도 보면,
나보다 훨씬 더 거룩한 사람을 내게 붙여주시는 게 아니라,
나보다 조금 더 거룩한 사람, 나보다 한 단계 조금 더 영적인 사람을
내 앞에 두셔서, 나를 차츰 차츰 거룩하게 만들어 가세요. 그를 보고 배우게 하세요.
만약 나보다 훨씬 더 거룩한 사람을 내게 붙여주신다면,
내가 그를 본받아 살 엄두를 내지 않게 돼죠. 지레 겁먹고 포기해 버립니다.
'나 하고는 어나더 레벨 another level, 어나더 크라스다' 하고 아예 단념합니다.
나하고 조금 차이가 나야, 우리가 따라갈 생각을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나보다 훨씬 악한 죄인이나 악인을 내게 붙여주신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교정 correction'에 있기 때문에
나보다 조금 더 악한 죄인을 붙여주셔서, 내 악한 모습을, 그를 통해 보게 하시고,
나를 회개와 교정으로 인도하신다는 거죠. 그게 본문에서는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의 백성들을 이렇게 다루어 오셨습니다.
야곱을 한 번 보십시오. 사실 하나님은 그가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창세 전부터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고,
하나님의 축복은 사실 야곱의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그걸 얻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그런 식으로 속이는 자의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고통이 찾아와요. 근데 그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라반이에요.
라반은 야곱보다 한 단계 위의 사기꾼, 속이는 자이에요.
그러니까 그를 바라보면서, 야곱은 '뭐 이런 사기꾼이 다 있어?' 하다가도,
가만히 보니까, 바로 자기 모습을 라반을 통해 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회개하라는 거죠.
근데 라반은 야곱보다 한 수 높은 사기꾼이에요.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혼의 문제를 놓고서, 라반은 사기를 쳤어요.
야곱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나중에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으니까 다행이지만,
야곱은 처음에 엄청나게 실망하고, 좌절에 빠졌을 것입니다.
'사기결혼 당한 심정, 신부 바꿔치기 당한 심정' ... 이런 거죠.
그리고 나서도 라반은 계속 사기를 쳐요.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꿨어요.
그래서 야곱이 누구에게 고통을 당했나? 바로 '자기 같은 자'예요.
자기보다 좀 더 악한 자에게 고통을 당했어요. (이스라엘-바벨론 관계도 마찬가지죠)
△사사기 시대에 주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왕이 없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 갔어요.
그때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보다 좀 더 악한 자들을 세우셨어요.
그래서 블레셋을 일으키십니다.
왜 내 인생에 블레셋이 일어납니까?
왜 내 인생에 아말렉이 일어납니까?
내 인생에 또 계속해서 미디안이 일어나요. 가나안 족속 들이 일어나요.
왜 그럴까요?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내 인생 가운데, 나를 바꾸시기 위하여, 나를 고치시기 위하여,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대적들을 일으켜서 내게 고통을 가져다 주시는데,
그 고통이 누구에게서 오는가 살펴보니까,
나 같은 자 (엇비슷 한 자)... 근데 나보다 좀 더 악한 자...
그들을 통해서 내가 고통을 당하게 함으로써, 나를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거죠.
저 핍박하는 자를 통해서, 똑같은 내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거죠.
그러니 주의 백성들이 주를 떠났을 때,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때
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벨론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표면적인 핍박자는 바벨론이지만,
그 이면에, 궁극적인 나의 핍박자가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괴롭힌 분은.. 하나님
누가 하나님을 떠난, 진노의 대상이 된 주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가요?
궁극적인 원인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 그렇죠?
'끓는 가마'라고 표현 했으니까, 얼마나 이스라엘(우리)에게 고통을 줄까요?
그리고 화상은 특별히 후유증이 깁니다. '와 이거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근데 그게 바벨론 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계시의 점진성과 비슷하네요)
앗수르도 무너뜨린 바벨론!
그런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내게 고통을 주는 그 바벨론을 누가 지휘하고 있느냐?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죠. 그게 충격입니다.
6: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바벨론 군대를 지휘하고,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는 지휘관이 누군가 보니까
6절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바벨론 군대에게 명령을 내리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6
'목책을 만들라'는, '예루살렘을 점령할 흙 언덕을 쌓아라'는 뜻입니다.
6: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따듯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를 지휘하십니다.
'포도를 따듯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포도를 따서 광주리에 담듯이, 이스라엘을 포로를 잡아가라는 거예요.
포도를 딸 적에, 먹을 만한 것을 남김 없이 다 따지 않습니까. 남겨두지 않죠.
그처럼 '말갛게' 포도따듯이, 이스라엘을 추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2절, 21절도 보실까요?
6:12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이 와서 전쟁한 이후에, 다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 라는 것을 보게 돼요.
아마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자신들을 쫓아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모세가 경고한 바이기도 하였죠. 신28:30이하.
6: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장애물'이 뭔지는, 우리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걸 설치한 분은, 누군지 본문에 나와 있어요. 하나님이십니다.
그 결과, 그들 이스라엘은 이 장애물에 의해
아비와 아들들 그리고 이웃과 친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걸려 멸망하게 된다는 거죠.
북쪽에서 바벨론이 와서,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줄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보니까 지휘관이 누군가 하니까... 하나님이시다 라는 거예요.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은 만군(군대)의 여호와이다' 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군대 총사령관
내가 하나님을 대적할 때, 내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 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예수 믿고 교회만 다니면
'나는 하나님 편,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도 그랬다는 거죠.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성전 제사도 드렸어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고, 하나님의 돌아오라는 명령을 계속 무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아니라, 그들의 대적이 되어버리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내가 성실할 때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아내가 불성실하고 밖으로 나돌 때, 남편의 사랑은.. 애증으로 바뀐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무시무시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혹시 오늘 나는 '하나님의 대적'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벨론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닌가?' 그걸 보시면 됩니다.
◑3. 결국은 나 자신이, 나에게 고통을 줍니다
이제 좀 더 깊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짜 누가 나에게 고통을 주는가?' 그것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실은 결국 누가 나에게 고통을 줍니까?
그런 바로 나 자신이에요.
오늘 본분이 그것을 내게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에게 진짜 고통을 가져다 주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누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요?
'나 자신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7
6:7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예루살렘이 악을 계속 만들어낸다는 뜻에서 샘에 비유되었죠.
그리고 만연해 있는 사회악은, 결국 심각한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켰는데
본절에서는 이것이 질병과 살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병에는 위대한 의사의 진료와 치료가 요청되지만
유다는 여호와의 훈계를 저버리고,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샘이 막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그 악을 계속 솟구쳐 내고 있는 이스라엘(나)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제거하고, 제어하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마치 샘이 계속 솟구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죄와 악을 들어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예요.
13절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3
왜 고통이 찾아왔는가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전부 다 탐심을 부리며, 우상숭배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고,
거짓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내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나 때문에, 내게 고통이 찾아온다.. 라고 말해요.
그러면서도 15절을 보니까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죄 짓는 게 한 번이 무섭죠. 그런데 이게 굳은 살 박히듯이
죄 짓는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마음에 굳은 살이 박혀서,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 부끄러워할 줄 몰라요.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들이 거꾸러 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결국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요?
악을 제어하지 않고, 악을 제거하지 않는 내가,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내가
그것(재앙)을 가지고 온다... 라고 본문은 말씀하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뭘 말씀하세요?
6:8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
하나님께서 그래서 훈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한다' :8
왜 바벨론이 치러 오는가요?
왜 그 바벨론 군대를 하나님이 지휘하시는지요?
왜 하나님이 나의 대적이 되셨는지요?
내가 훈계를 받지 않고, 황폐해져 버린 상태로 계속 그대로 있을 때!
그래서 16절도 읽을까요?
6: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결국은 돌이키라는 거예요.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알아보고 거기로 가라'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의 원인이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자가 결국 너 때문이다.
네가 그래서 길을 돌이켜 '옛 길, 선한 길, 하나님이 주신 길, 율법 대로 살아가는 길,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 그 길로 돌아서라, 네 자신을 고쳐라!' 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내 죄로 인한 고통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바벨론에서부터 벗어나고, 바벨론을 제거하기 위해서 애를 써요.
내게 계속 고통을 주는 그 사람, 즉 라반을 제거하려고 하고,
블레셋을 제거하려고 하지, 나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꾸 바벨론을 고치려고 해요. 바벨론 고칠 것이 아니고
바벨론 아래에서 나를 고쳐야 되는 거예요.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나를 고쳐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서 '너를 고치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자꾸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그 사람을 제거해 주시든지, 그 사람을 치시든지, 그 사람을 바꾸시든지...
그렇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해요.
근데 좀 더 영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아 이건 저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저 사람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구나'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기가 가고 있는 그 잘못된 길에서 속히 돌이킵니다.
그러면 바벨론이 스스로 물러가는 거죠.
성도들이 그런 얘기 많이 합니다.
자기가 직장에서 고통을 당하고, 뭐 배우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자식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데... 근데 자세히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나 아닌가요?'
근데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나보다 좀 더 악하니까
'나는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근데 바벨론(내게 고통주는 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스라엘(나 하나님의 백성)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회개하기 보다는, 바벨론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데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쳐라. 고통의 원인이 너에게 있다.'
왜 저 사람을 통해서 내가 계속 고통을 당할까요?
그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자신 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고쳐지면, 하나님은 바벨론을 제거 하실 거예요.
블레셋을 데리고 가실 거예요.
내가 바벨론 아래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면
바벨론으로부터 나오게 될 거란 말입니다...
◑절별 해석 ....................................
<개요>
3장부터 유다의 범죄와 처벌을 논하고 있는데, 본 장은 그 최종적 진술에 해당합니다.
본 장은 4-5장을 지배했던 임박한 심판에 대한 주제가 여전히 중심 주제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여전히 경고를 무시하므로 멸망을 자초하게 되고
역사적 교훈거리로 등장하게 됩니다.
1~8절 : 바벨론의 침입
9~21절 : 유다의 죄에 대한 탄핵
22~30절 : 심판 날의 참상
6: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1~8절까지는 북방의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이다.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베냐민 지파는 예레미야가 소속해 있는 지파이며
그의 고향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적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선지자는 경고의 나팔을 울릴 것을 촉구하면서 무장하고
전쟁을 대비하라고 말한다. ‘나팔을 불고 깃발을 들라’
베냐민 자손들이 호명된 것은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드고아는 아모스의 고향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벧학게렘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도상에 위치해 있었는데,
여기서는 봉화불을 올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6:2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시온이 아리따운 소녀에 비유되었다.
하나님은 딸 시온을 이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로 여겨왔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수치와 불명예가 뒤따를 것이다.
6:3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여호와로부터 심판받게 될 예루살렘이
여기서는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해오는 적군 목자들의 목축지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이곳을 지배하며 자기 군사들을 먹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각자 지역을 분할하여 장막을 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장시간에 걸쳐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것임을 암시한다.
6:4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준비하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쉬'는 '봉헌하다', '성결하게 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바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떤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그늘이 길었구나'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이 주로 아침에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정오에는 햇빛이 내리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이 전쟁을 개시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시간인 정오에 전쟁하러 올라가자고 한 것은
적군들이 정오라 할지라도 결코 공격을 늦추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또한 적들은 날이 기울어진 것을 아쉬워한다. 이는 밤이 되어도 계속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6:5 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우리가 밤으로 올라가서' 전쟁 때라도 저녁이 되면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침략해 들어온 적들은 밤에도 공격을 감행하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적군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을 낮에는 기회를 놓쳤지만 밤에는 기회를 잡자는 의미로 보고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는 것으로도 해석한다.
6: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나무를 베어서... 목책을 만들라'
이는 앞으로 일어날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을 지키고자 노력할 것이며,
북방의 대적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을 부수려고 할 것이다.
'목책'(솔레라)이란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쌓아올린 거대한 공성퇴를 말한다.
6:7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예루살렘이 악을 계속 만들어낸다는 뜻에서 샘에 비유되었다.
그리고 만연해 있는 사회악은 결국 심각한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켰는데
본절에서는 이것이 질병과 살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질병에는 위대한 의사의 진료와
치료가 요청되지만 유다는 여호와의 훈계를 저버리고,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6:8 예루살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유다가 여호와의 훈계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주께로 돌아선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는 암시이다.
이와같이 심판이 선고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기회를 찾고 계신다.
이는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간 아들의 귀향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과도 유사하다(눅15:11-32).
6:9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따듯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침략해 들어오는 갈대아인들에게 예루살렘 점령 이후 포로로 잡혀 가고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마저 잡아가라는 권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크게 뉘우쳐야 할 것인데,
이들조차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확할때 남김없이 거둬들이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두라고 명하셨으나(레19:10, 신24:21), 당시 유다인들은 탐욕에 이끌려
이러한 규례를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절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죄악들을
장차 받게될 심판과 연관시켜 언급하고 계신 셈이다.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완고하게 거부하였음을 가리킨다.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다'(아렐라)는 표현은 다소 생소하다.
다른 곳에서는 입술의 할례(출6:12,30)나 마음의 할례(레26:41)란 표현이 쓰이고 있다.
닫혀있는 귀에는 그 어떤 훈계나 가르침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6: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예레미먀의 전인격은 여호와의 계시를 온전히 수용하는 편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의 분노에 항의하거나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는 유다에 임할 심판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클라크(Clarke)는 이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유다에 임할 무섭고 끔찍한 심판의 광경을 예레미야에게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이 예언을 힘써 전하기 위해 뜨겁게 불타 올라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6:12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유다인들의 모든 소유가 타인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손을 그들에게 펴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자신들을 쫓아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모세가 경고한 바이기도 하였다(신28:30~).
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이 백성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탐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군다나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작은 자'와 '선지자'가 대구를 이루고 있고 '큰 자'가 '제사장'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지자가 제사장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모든 성직자를 다 포괄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탐욕은, 끝부분의 거짓과 대칭을 이루며, 이와 유사한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가 어떤 경우에는 '이득을 얻다'란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부당한 이익을 탐하다', '탐심에 빠지다'는 뜻으로 쓰였다.
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백성들의 상태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는데도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평강만을 외쳤다.
여호와와 백성 간의 언약 관계는 파괴되어 심판이 목전에 다달았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팔요한 것은 허황된 빈 말로써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였다.
‘가볍게’
심각한 상처에 대한 경각심 없이 이렇게 처치한다는 것은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부끄러워하였느냐...않았느니라'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을 속이고 사기치는 더러운 행위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얼굴을 붉히는 법도 알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민족 전체가 잠겨 있는 그 악행에 대해 완전히 감각을 잃고 말았다.
더욱이 그들은 단순히 무감각한 정도가 아니라 악을 향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와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저들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의식 준수만으로도 항구적인 평화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는지도모른다.
6: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조들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았던 것을 가리킨다(창4:4, 5:24, 6:8,9, 12:4등 참조).
그러나 당시 유다의 상황은 그들이 지난날 걸어온 행적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데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안식과 번영의 길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멸망과 죄악의 길을 택하였다.
6: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결코 자기 백성의 멸망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서의 '파숫군'이란 백성들이 반역과 불순종의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거나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6:18 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이제 하나님은 열방을 불러 그의 백성에게 내려지는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라고 하신다.
'무리'의 히브리어 '에다'는 구약에서 대체로 이스라엘 회중을 뜻하나
여기서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말을 '증인들'(Witnesses)이라 옮긴 NIV의 번역이 좋다.
말하자면, 만방에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마땅한 제사장 나라가 오히려 배도의 길을 걸음으로써,
오히려 이방 민족들이 증인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심판과 수치를 당케 되리라는 말씀이다.
6: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본절은 앞절에서 증인들을 소환한 후 유다 백성에게 내리는 선고문의 내용이다.
그리고 또한 처벌의 이유가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지적된다.
여기서 '법'(토라)이란 모세의 율법을 뜻하며
여호와의 율법이 여호와의 말씀과 평행을 이루며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8:8,9).
아마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바른 길을 제쳐 두고
단순히 형식적 종교의식을 통해서 언약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20절).
6:20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달게 여기지 않노라'
여기서 선지자는 앞절의 내용을 보충하면서 하나님은 순종이 결여된 향기로운 예물을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지적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사1:11-14, 암5:21,22, 미6:6-8).
유향은 그 당시 무역 중심지였던 서남부 아라비아의 시바에서 들어왔으며(겔27:22),
향품은 인도에서 들어왔던 것 같다.
이 구절은 성전의 모든 제사 체계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순종과 언약의 준수이지, 이에 대한 폐지가 아니었다.
즉, 믿음과 말씀, 순종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에게 짐이 될 뿐이다(삼상15:22, 사1:14).
6: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멸망하리라'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마련해둔 '장애물'은 본절에는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자초한 장애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대적의 침략을 뜻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이 거침에 의해 아비와 아들들 그리고 이웃과 친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걸려 멸망하게 된다.
6:2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본절에서부터 26절까지는 북방에서 침략해 들어올 적에 대한 묘사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부분은 운문체로 기록되고 있는데, 본절과 23절의 내용이 50:41, 42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바벨론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혹자는 이어지는 '땅 끝에서부터'라는 말에 근거하여 이 민족을 스구디아인으로 본다.
그러나 '땅 끝'이라는 말은 북방의 특정한 나라를 가리키는 지리적 언급이라기보다는
단지 매우 먼 거리를 나타내는 표현일 따름이다.
6:23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그들이 진군해 들어오는 소리를 흉흉거리는 바다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적의 군사 배치 목적은 시온을 멸망시키기 위함이었다.
6:24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그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손이 약하여졌고...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적의 침략으로 인한 백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어서 그들의 정신적 불안이 아이를 낳는 여인의 고통에 비유되었다.
완전 무장한 군인 앞에 아무런 저항의 수단이 없는 여인이 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처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23절의 '딸 시온'이라는 익숙한 용어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6:25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
'너희는...길로도 행치 말라' 유다에 임할 심판에는 아무런 보호 수단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밭이나 길로 달아난다는 것조차 무모한 도피가 될 것이다.
한편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니라’는 말의 원어는 '마골 밋사빕'으로서
급박한 위기 상황을 시사하는 암호와 같은 표현이다(20:10, 46:5, 49:29).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핍박했던 바스훌에게 이 말로 이름을 지어주셨다(20:3,10).
6:26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임이라
'굵은 베...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유다가 할 일은 이제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뒤집어 쓰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를 잃음같이 슬퍼하고 애통하게 될 것이다.
독자의 죽음은 후손이 끊겨버리는 것을 뜻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를 엄청난 재난으로 여겼다.
이제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 걸쳐 이런 재앙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6:27 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여기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의 호된 징계에도 불구하고
정화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의 패역함이 금속의 제련 과정에 비유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금속을 제련할 때는, 먼저 제련하고자 하는 금속을 납과 함께 풀무나
용광로에 넣은 후 뜨겁게 불을 지핀다.
그러면 납은 금속의 이물질을 품은 채 밑으로 가라앉는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는 예레미야를 '살피는 자'로 임명하셨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행위를 검토하고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본서 초반부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그는 열방들에 대한 '감독관'(1:10)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감정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6:28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그들은 놋과 철이며' 본절에서 30절까지는
예레미야가 살피는 자로서 여호와께 보고하는 내용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27절에 계속 이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27, 30절 등의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쨌든 본절은 유다인들을 가리켜 '심히 반역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패역한 자 중에 패역한 자'라는 뜻이다.
앞서 예레미야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도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5:1),
그것과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을 가리켜 '놋과 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의 임무가 은을 정제하는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예언의 불로써 은을 정제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불순물과 찌꺼기뿐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6:29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광석의 성분이 워낙 불순하였기 때문에,
광석속의 비(卑)금속들이 제거되지 않아 결국 제련 과정이 무위로 끝났다는 것이다(J.Bright).
이는 유다의 죄악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6:30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
'내어버린 은이라' 제련 관정은 바르게 진행되었지만, 상습적인 언약 파기자들은
앞에서는 이런 정제 과정이 아무런 효과를 낼 수가 없어, 결국 내버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제련 과정이 실패했다는 이 말 속에서 심판이 불가피해진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은을 제련할 때에는 원광석을 갖다가 불을 때 가열을 합니다.
그래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건데, 그냥은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납을 넣습니다.
그러면 납이 녹을 때에 불순물을 같이 빼내는 겁니다.
그래서 순은이 남게 되는 건데, 이것을 잘못 가열하게 되면
납덩어리만 싹 녹아내리고 불순물이 있는 원광석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유다백성들이 이렇게 됐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유다백성들의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것을 내어버렸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