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때문에 생긴 슬픔 롬9:1~5 2024.07.24.설교녹취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미신자들을 볼 때, 그들을 전도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느끼시는 아픔, 슬픔, 고통을 먼저 가져야 된다는 주제의 설교.
사도바울이 자기 동족을 향해, 그런 하나님의 아픔, 슬픔, 마음을 품었다는 전개
짧게 읽으실 분은 ◑적용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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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로마서 9~11장은 아주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이해하기도 힘들고,
해석하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주석가들의 해석이 굉장히 다양한데
크게 보면,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 과,
- '하나님의 선택' 이라는 굉장히 큰 두 주제가 서로 엉켜져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1~8장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명쾌하게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지를 배웠어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또 우리 안에 거듭났는데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 갈등이 있는데
그 갈등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대안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혔던 우리가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게 되었다... 하는 명쾌하고도 강력한 가르침이
롬1~8장까지의 내용이었어요.
그 다음에, 우리가 앞으로 이제 만나게 될 롬12장부터는
복음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져요.
12~15장도, 우리가 1~8장까지 만났던 가르침만큼 강력하고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9~11장 내용을 보면,
앞의 1~8장 하고도 잘 안 어울리는 것 같고,
뒤의 12~16장까지 이어지는 내용하고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읽다가 9~11장 내용을 만나면
굉장히 헷갈리기도 하고, 혼란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너무 해석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어쩌면 골치 아픈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려 하기도 하죠.
▲그런데 9~11장에 전개되고 있는 그 어려운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두 가지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어야 돼요.
-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변하지 않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봐야 하고,
-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돼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롬9~11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붙들어야 되고,
-'사도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면
우리가 9~11장까지 펼쳐지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민족이죠.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면,
'내가 너를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고,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아브라함이 복이 되는 것도 약속이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일어날 이스라엘이 복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3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들어지게 될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번식력이 왕성해서 거대한 민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너를 복주어 내가 너를 창대케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특별함,
'너를 통해서 온 열방을 축복하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특별함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거대한 민족 이스라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징계를 받잖아요.
나라를 잃어버리는 징계를 받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온 땅 가운데 흩어지게 되죠.
'그렇다면 그렇게 징계를 받고 하나님을 배반했던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는가?'
'그들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질문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여전히 특별한 민족 이스라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민족이었는지를, 이렇게 설명을 해주고 있어요.
롬9:4~5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들에게 부어진 특별한 은혜가 어떤 거였느냐?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어요. 양자가 되었다는 거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고,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라는 것은,
출애굽기를 보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 하잖아요.
구름 기둥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 '영광'을 히브리 말로 쉐키나라고 얘기해요.
그들은 하나님의 쉐키나가 함께하는 민족이었고,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었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민족이었고,
그들은 약속을 가지고 있었어요.
특별히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라고 하는 약속을 품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에게는 믿음의 조상이 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뿐만 아니라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등 이런 믿음의 조상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들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통로가 되어주었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메시아가, 유대인의 혈통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오실 것이다'라는
약속이 주어진 민족이었어요.
▲여러분, 이 땅에 어느 민족도 이스라엘이 누렸던 이 모든 은혜를
다 가진 민족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정말 모든 은혜를 누리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그 은혜로부터 다시 한번 멀어졌어요.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는데, 메시아를 거절하고 거부하므로
은혜로부터 멀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제 끝난 것인가?'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왜냐면 바울 당시의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교회였으니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무효가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죠.
더군다나 유대인들 중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대다수였으니까요.
△롬9장 10장 11장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너무 해석들이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어떤 극단적인 해석은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해요.
'이스라엘은 이제 끝났다. 그 자리를 교회가 대신 하는 것이다.' 들어보셨죠? *대체신학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은 끝났고,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정체성은 교회에게 넘어간 것이다' ... 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러나 제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볼게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화 된 것인가?
그들은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구약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언약과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다 폐기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사도 바울은
<폐기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어요.
이게 9~11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논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은 결코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
바울의 논지예요.
▲'왜냐면 언약의 백성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선택과 구별이라는 신비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설명을 해요.
9장에 어떤 내용이 등장하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이스마엘, 이삭이죠.
근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선택하시고, 이삭을 통해서 오는 씨앗이
너의 자손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이삭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죠. 야곱과 에서.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어요.
성경에서는 '내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다'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굉장히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태중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무엇인가 의로운 행동이나 믿음의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선택하지 않으셨는데
'그러면 너무 불공정한 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의 은혜는 이런 거예요.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선택하세요.
이삭과 맺으신 언약을 이스마엘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누릴 수 있는 거예요.
이삭을 통해서!
이삭에게 주어진 언약의 수혜자는, 이스마엘도 될 수 있단 말이에요.
자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어요.
근데 야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언약의 수혜는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에서까지 이어지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이삭을 통해서!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은 불공정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가요?
왜냐면 '하나님의 선택이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신비로운 선택의 은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불공정하다'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부터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은혜에 근거해서 주어졌기 때문이에요.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할 수 없다' 라는 것이 바울의 논지이에요.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큰 죄악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변함없는 것이고,
자격 없는 죄인들을 향해서 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해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은, 무효화 될 수 없다'는 거예요.
◑1. 사도바울의 마음의 슬픔
이렇게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9:1~3절까지 읽어 볼게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1~3
바울에게는 이스라엘 민족, 즉 자신의 동족들을 향한 슬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슬픔이고,
아픔이고, 고통이고, 눈물인 거예요.
자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은 잘 아시죠?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특출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핍박자가 복음을 전도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죠.
그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어떤 의도로 선택을 받은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행9:15
중략 주1)
그리고 그가 첫 선교사로 파송받아서, 소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죠.
사도행전을 읽어 보시면 여러분들이 아시죠.
근데 가는 곳마다 역사가 나타나요. 병자들이 낫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근데 반대하고 거부하는 유대인들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가 회심하자마자 다메섹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 라고 얘기할 때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으니까
그때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바구니에 담아서 성을 내려가게 했어요.
사울이 복음 전하러 가는 곳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면 역사도 일어나지만, 사도 바울을 미워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선동해서 사도 바울을 돌로 치기도 하고
돌에 맞아서 죽은 것처럼 생각했던 사도 바울을 성 밖에 갖다 버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벌떡 일어나서 탈출을 하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고난이 너무 많아요.
얼마나 많은 선동이 있었고, 그래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런 일들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어요?
그가 이방인을 향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왕과 권세자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람이고,
사도 바울이 전도하자 이방인들은 비교적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발의 티끌을 털면서
'내가 너희들이 거부하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을 향한다' 라고 하면서 행13:46
이방인을 향해서 나아가거든요. 그렇지만 이스라엘을 버린 게 아니에요.
어디를 가든지,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그들 유대인들의 친구, 이웃들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이방인에게로다' 하는 원칙이 있었던 거죠. 롬1:16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사도 바울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하면,
손에 먼지 털고 '이제 너하고 나하고는 끝이다!' 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사도 바울은 왜 자기를 그렇게 끝까지 죽이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다고 얘기할까요? 롬9:1~3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편지를 하면서
'내 육체에 가시가 있습니다. 이 가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단의 사자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추측을 하거든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안질이거나, 그의 성품이거나, 그가 경험했던 유혹과 시험이었을 것이다... 얘기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좇아다니면서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핍박이었다'
라고 추측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유대인이라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하면
아주 지긋지긋한 사람들인 거예요.
그런데도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7~28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동족, 내 민족, 나의 형제들, 그들이 예수를 알기를 원한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9:1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그가 선포했는데, 롬8:39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부터 내가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 하더라도,
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가 통이 큰 사람이라서, 그릇이 커서?
그렇지 않아요.
그에게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슬픔, 아버지의 고통, 아버지의 눈물을 심어 주셨기 때문'이에요. *주제
그래서 롬9~1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되는게 뭐라고요?
변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뭐냐?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슬픔,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고통,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
그 슬픔, 고통, 눈물이 사도 바울에게 임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거절당한 아버지만이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고통..
아들로부터 버림받은 아버지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그것을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대신 심어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서를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만나세요?
화내시는 하나님, 벌 주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을 보시나요?
여러분, 선지서를 보면서는 어떤 하나님을 봐야 되냐면,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향해 양팔을 벌리시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기다리시고, 그들 앞에 두 손을 벌리고 서 계시는.. 눈물 흘리고 계시는 아버지!
그 하나님을 봐야 됩니다.
자식을 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죠.
이 스토리의 주제는,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주2)
그걸 우리더라 알고 깨달으라는 거죠.
이 아버지의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 임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선교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고린도후서 11장에 설명을 하는데요.
'그가 수고도 많이 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셀 수 없이 매도 많이 맞고,
유대인들에게 39번 맞는 태형을 5번이나 맞고, 몽둥이로 맞고, 돌로 맞고...'
막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진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엄청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진짜 짓누르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
사도 바울은 그걸 '교회를 향한 염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인 거죠. 고후11:28
◑적용
사도 바울이 특별해서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 임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좇아다니는, 자기를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향한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것이고,
교회를 향한 고통과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 복음을 전한다'고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아 당연히 해야죠' 라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그걸 어떻게 해야 될지.. 굉장히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이 있습니까? 믿지 않는 배우자, 믿지 않는 부모님, 자녀들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친구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쳐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근데 전도를 하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향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배우는(갖는) 것입니다.
'전도 해야 된다' 라고 하는 의무감, 책임감,
'그들도 교회를 나와 함께 다녔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작은 소망,
이것으로는 5년 10년 15년 20년 30년 동안 계속 기도를 버텨내지 못합니다.
기도해도, 전도해도, 변하지 않는
나의 배우자, 나의 부모, 나의 자녀들, 나의 사랑하는 대상들을 위해서
끝까지 버티며 기도하려면,
그들을 향해 흘리시는 아버지의 눈물이 임해야 되고,
그들을 바라보시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내게 임해야 합니다. *주제
▲저는 18살 때 예수님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믿지 않는 제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18년 동안 기도했는데, 중간에 솔직히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기도하기 싫을 때도 있었고
의무감처럼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기도하는 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18년의 세월을 돌아보면,
아버지를 향한 저의 기도가 뜨거워지고 간절했던 건,
그 아버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제 마음이 된 후부터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만약에 여러분이, 정말로 주님 앞에 인도하고자 하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교회 같이 갈래?' 라고 물어보는 것보다,
더 먼저 있어야 되는 건,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임하여야 합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임해오면, 우리에게 어떤 증거가 생기는가요?
우리의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해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면,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즉 내가 초청했는데 거절을 당하거나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화를 내시고 할 때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일희일비 안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절하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인가?'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인가?'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신가?'
하나님은 우시고,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하나님은 고통스러워 하시고,
하나님은 양손을 벌리고 그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거예요.
◑2. 두 번째로, 사도 바울에게 이런 슬픔과 고통이 가득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롬9~11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은 어떤 복음이냐?
오직 예수만이 복음입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복음입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기쁜 소식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은, 오직 예수!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또 하나의 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길들 중에 하나의 길이라면,
바울이 말하는 슬픔과 고통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을 겁니다.
세상에는 많은 믿음의 종교가 있습니다. 많은 길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냐면
'나는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가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믿는 믿음으로, 그들이 바라보는 극락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거절했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슬픔, 아픔, 고통이
필요 없게 되겠죠.
사도 바울이, '내가 내 동족을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내 마음이 짓눌리고,
나는 고통스럽고 눈물을 흘립니다' 라고 왜 얘기를 하냐면
그에게 복음은 '오직 예수'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자 이런 얘기를 들으면, 여러분들이 마음이 뜨거워지나요?
아니면 '아 또 그 얘기구나..' 라는 생각이 드나요?
오늘 사도 바울이 붙들고 있는 복음,
'내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바로 그 복음,
그 복음이 여러분에게 어떤 것인지, 여러분은 스스로 돌아보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을 던져 보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나는 믿는가?'
'예수 복음이 유일한 생명의 소식이요, 유일한 기쁜 소식이라고 나는 믿고 있는가?'
'예수님만이 나의 믿음을 받으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주님이시다' 라고 나는 고백할 수 있는가?
'예수만이 진정한 복음이요, 진정한 복음은 오직 예수라고
나는 어떤 상황이든, 어떤 사람 앞에서든 고백할 수 있는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예수'라고 하는 복음을 고백하는 순간, 조롱과 비난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의 미움을 사게 되고, 혹은 '너는 교만하고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다'는 오해도 받게 되고,
교회를 향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도
'오직 예수'라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급박하게 세속화하고 있는 이 땅에서 '오직 예수'라고 하는 배타적인 복음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나의 민족을 향해서, 내가 사랑하는 대상들을 향해서
더 크게는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북한 땅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느낀다고 하는 슬픔, 짓눌리는 고통, 눈물,
그것을 왜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복음이 오직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하는 고백이
내 안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슬픔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북한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보십니까?
정치를 통해서 보십니까?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북한을 봐야 합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멈춘지 몇 년째입니까?
우리는 그 땅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을 붙들어야 되고,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슬픔을 붙들어야 되고,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눈물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온 마음으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심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슬픔, 아버지 고통이
여러분 가운데 심겨지는 주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확신이
우리 마음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은혜로운 주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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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된 부분
모든 사람이 다 그런 부름을 받은 게 아니고요,
이방 사람들, 당시 이방 사람들의 문화는 헬라 문화고, 그들의 언어는 헬라어고,
헬라 사상에 물들여져 있는 사람이니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환하면, 어떤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되냐면
헬라사상, 헬라 문화, 헬라 언어에 능통해야 되는데...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그러면
어느 여권을 가지고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보호받을 수 있는 거니까.
사도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가장 강력한 제국의 시민인 사람이었어요.
왕들과 권세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들이 봐도 신용이 있어야 되죠.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이라는 탁월한 학자에게 훈련을 받은 아주 지성적인 학자요,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열심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요,
그가 얘기한 바대로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제든지 구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다.. 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유대인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조건들보다 더욱 더 근본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그를 택하심, 은혜로 그를 부르심이었죠.
주2)
아버지 유산을 팔아서 먼 나라에 가서 창기와 탕진해 버린 작은 아들이 있었죠.
돼지를 먹이는 일을 감당하면서, 배고프고 힘드니까
'아버지 집에 가서 종살이나 해야 되겠다' 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멀리 거지처럼 누추한 몰골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뛰기 시작합니다.
'그게 뭐 대단하냐?' 우리한테는 대단하지 않죠.
근데 조선시대에는 남자들이 뛰지 않았잖아요.
고대 근동에서 남자들이 뛰지 않습니다. 그럼 아버지가 왜 뛰고 있는 것이냐?
고대 근동에는 어떤 사회법이 있냐면
이 작은 아들같이 사회에서 지탄이 되는 사람들은, 마을에 들어올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이 들어오면 마을의 분위기가 흐려져 버리니까,
이런 나쁜 사람을 추방할 수 있는 권리가 사회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못된 아들이 돌아올 때, 그가 다시 사회 안으로 들어와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작은 아들이 범한 죄악의 대상, 즉 아버지가 다가가서
다른 사람이 그를 추방하기 전에, '그를 용서한다; 라고 하면,
다시 그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이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왜 뛰느냐?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너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야?' 하고 내쫓기 전에
그 아들을 다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뛰고 있는 거예요.
부퉁켜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었죠.
잃어버린 아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오니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밭에 나가서 일하고 있던 큰아들이 돌아와서
평소 때는 조용하고 우울한 집안이었는데
아들이 떠난 다음에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음악 소리가 들리고 잔치 소리가 들린단 말이에요.
종들에게 물어보니까,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께서 살찐 송아지를 갖고 잔치를 배설하셨습니다.
큰아들은, 동생이 죽었던 것처럼 생각했는데
동생이 돌아왔으면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하지 못하고 바깥에서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해요.
아버지가 큰 아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는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시지 않으시고,
이제 모든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해 버린 그 작은 아들, 못된 아들이 돌아오니
살찐 송아지를 잡아주십니까?'
공정하지 않다늩 거죠. 불공평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너의 것이 아니더냐?'
여러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갔던 작은 아들만을 위해서 이 아버지가 눈물을 흘릴까요?
아니면 함께 있으면서, 함께 있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큰 아들을 향해서도 눈물을 흘릴까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던 사람만 아버지를 거부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옆에 있으면서 '아버지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잡아주는 인색한 아버지'라고
아버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사람도, 아버지를 거절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는, 아버지를 버린 아들이 아니고,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주신다.. 라고 하는 것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죠.
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해 버린 작은 아들은..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고,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지만, 집에 머물러 있지만,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거절하고 거부했던 아들은.. 이스라엘 같은 존재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런 구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아들을,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
'버리고 떠난 작은 아들을 위해서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축복도 누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 있던
큰 아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