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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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자랑할찌니 렘9:12-24 2008년
※본문 렘9장은, 렘7~10장까지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세 번째 설교가 계속됩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는 표현으로 구분을 삼기 때문이죠.
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4~
이것은 ‘예레미야의 소명’과 관계되므로, ‘예레미야의 설교’와 관계없고요.
예레미야의 설교는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1:11~ *첫 번째 설교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2:1~
3)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7:1~
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11:1~
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13:8~ *다섯 번째 설교
◑서론
렘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위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는 가장 유명한 구절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자랑할 것도 있고, 자랑하지 말아야 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랑(boasting)은 사람이 뭔가 긍지와 기쁨을 가지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자기가 학벌이 좋다는 걸, 돈이 많다는 걸,
사업이 성공했다는 걸, 인격이 훌륭하다는 걸, 업적이 많다는 걸,
자기 자식들이 잘됐다는 걸 자랑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간으로서 긍지와 기쁨을 가진 것들이 있기 때문에
자랑을 안 하고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9:23~24절 두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자랑에 대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자랑해야 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심판을 증거 하는 예레미야서에
왜 갑자기 하나님은 자랑에 대한 말씀을 주셨느냐?
이 23~24절이 도대체 렘9장의 전체 문맥과 맞는 얘기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1. 본문의 정황
위 9:23~24절은, 9장 전체의 맥락과 줄거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더욱 깊고 심오한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엉뚱한 말씀이 아닙니다. 유다백성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대단히 임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우상숭배 죄 때문에 바벨론을 보내서 심판하겠다.
그 심판은 확실한 것이고 그 심판은 대단히 강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15절에서 그 심판이 대단히 강력한 심판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5b절에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쑥과 독한 물은 동격
이 말씀에 나오는 쑥은, 쓴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독한 물은, 독 성분이 들어있는 도저히 못 마시는 물입니다.
사람이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살 수 없잖아요. 그런데 주어진 물이 ‘독 성분이 든 물’이라면,
그보다 더 큰 재앙은 없지요.
그러니까 반역자에게 내릴 법한 심판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16절에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열국 중에 그들을 헤치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포로로 헤치고 그 뒤를 쫓아 또 칼을 보내서 죽게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포로됨과 사망과 파괴,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동반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무서운 공포 전쟁 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이렇게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면
유다백성들의 정당한 반응은 뭐가 돼야 됩니까? 울어야 됩니다.
자신을 죽이겠다는데 울지 않거나, 웃고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자랑하고 있다'는 거죠. 지금이 자랑할 때입니까? 울 때입니다!
본문 17절에서 “곡하는 부녀를 불러와라.”
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고 말합니다.
눈꺼풀에서 떨어지는 물은 눈물입니다. 그러므로 눈물이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워낙 이스라엘의 눈에 눈물이 말랐으므로,
전문적인 애곡하는 여인들을 불러와서, 울게 하고, 너희들은 따라 울어라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패망이 코 앞인데, 안 울고 뭐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또 20b절에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자자손손 대대로 애곡(회개)하는 법을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이제 곧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고 예레미야가 예언하면.. 울어야 되는데,
울 줄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람은 슬픔이 있으면 울 줄 알아야 됩니다. 울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바꿔주십니다.
기도할 때 제일 빠른 기도는 우는 기도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응답이 속하다’고 했습니다.
울면 주께서도 빨리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울음치료법 rfcdrfcd.tistory.com/15975980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이렇게 무섭게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합니다.
13절에는 소극적인 이유가 나와 있고, 14절에는 적극적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유다백성을 심판하시느냐?
13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그들은 마땅히 해야 될걸 안했다 (sin of omission)는 말입니다.
부모가 애를 낳아 놓고서 애에게 젖을 안 먹이고 굶겨 죽이면 죄입니다.
이처럼 죄는 나쁜 짓 한 것도 죄지만, 해야 될 걸 안한 것도 죄입니다.
또 14절에는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우상숭배를 했다. 즉,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했다 (sin of commission)는 말입니다.
이처럼 죄(sin)는 저지른 것(commission)도 죄고 안한 것(omission)도 죄입니다.
유다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건 하고 또 하라는 건 안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심판하는 건 부당한 것이 아니요 정당한 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조금 있으면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망하게 된 이런 상황에서,
전혀 정신을 못 차리고, 도리어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다. 용맹스러운 용사가 있다.
또 전쟁이 나도 먹고 살만한 재물을 쌓아 놓았다”며
자랑해서는 안 될 때에, 지혜와 용맹과 재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9:23~24
렘8:8절에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라고 기록되었고,
앞서 7:4절에서 ‘아무리 외적이 쳐들어와도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전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이 있는데 누가 우리를 해칠 수가 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9:12절에서 ‘지혜가 있어 이 일을 깨달을만한 자가 누구냐
너희 중에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문맥에서 23절, 24절(자랑하지 말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동소이 하다는 거죠.
전혀 자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즉 죄인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쓸데 없이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련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자랑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9:23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여기에 사람이 자랑해서는 안 되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1. 첫째,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야 됩니다.
23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은 지혜나 지식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지혜나 지식이 나쁜 건 아니지만 위험성이 있습니다.
고전8:1절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지식이 있으면 사람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지혜나 지식과 함께 오기 쉬운 게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쌓이고 지식이 쌓이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언제나 기도해야 됩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높은 지식을 쌓아 학위를 갖고도
가정생활에 성공하지 못하고, 사업에도 성공하지 못하며, 인생에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만이라는 덫에 걸려서 그런 겁니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겸손하다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뭘 조금 안다고 교만해 지니까 거기서 패망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지혜와 지식를 업신여기십니다.
고전1:19~21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고전1:24절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지식은 근본이 없는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예수님이 창조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만물의 존재하는 것이 하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를 창조한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를 모르고 뭘 안다는 겁니까?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고 무슨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주신 구세주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알아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지혜의 근본입니다. 예수를 알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사람이
“나는 지혜롭다. 나는 지식이 있다.”하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모르면 모른다는 걸 알기나 해야 되는데, 자기가 모르는 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중요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고
이 세상 지혜나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둘째, 용맹을 자랑하지 말아야 됩니다.
23절에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용맹이란 용기와 힘을 말합니다.
왕년에 권투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상대방을 링 가운데 두고 자기는 사방으로 빙빙 돌다 상대방에게 잠깐 틈이 있으면
한 대 때리고 또 도망가고 한 때 때리고 또 도망가고 해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로 유명한 선수입니다.
이 선수하고 붙기만 하면 거의 모든 상대 선수는 KO 패를 당하고 *Knock Out
무하마드 알리는 KO 승을 거두는 아주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횃불을 붙이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왜냐면 그가 파킨스 병에 결려 덜덜 떨며 간신히 횃불을 들고 불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이제 저 인간은 나하고 붙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은 힘과 용맹을 자랑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면 그것도 시간 지나면 급속하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3. 셋째, 부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됩니다.
23절에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자는 보통 돈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돈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11:2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 안 믿고 내 지갑을 믿고 잔고를 믿는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네 글자로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왜 재물이라는 것이 의지할 게 못 됩니까?
잠27:24절에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했습니다.
재물은 영원하질 못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이 세상에 놓고 간 재물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죽을 때 많은 다이아몬드와 수정을 이 땅에 놓고 갈려니까 너무 억울해서
이거 좀 갖고 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셔서 천국에 다이아몬드와 수정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베드로가 “힘들게 왜 보도블록을 들고 다니냐?”고 그랬다는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천국의 보도블록이 모두 다이아몬드, 수정과 같은 걸로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있을 때가지나 가치가 있지, 그 후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재물은 영원성이 없습니다.
또 잠11:4절에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하나님이 “너 지옥이다.”하고 진노하시고 선포하실 때 재물을 들고 가서
“하나님, 이거 받으시고 나 좀 어떻게 천국으로 바꿔주시오.”라는 게 안 통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위력이 많습니다.
잠10:15절에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년이 간다고, 재물이 많은 사람은 망해도 성이 금방 망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재물은 큰 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성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데 조금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좋은 것이므로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벌어야 되지만
의지할 것이나 자랑할 것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 분 지식 자랑하지 마시고, 힘 있는 분 용맹 자랑하지 마시고,
돈 있는 분 돈 자랑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가 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고전 4:7절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모두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신 분께는 감사하지 않고
준 선물만 가지고 좋아하면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시겠느냐는 말입니다.
◑3. 자랑해야 할 것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자랑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24절에 보니 한 가지는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렘9:24절에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이 한 가지는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라’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랑을 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인간의 현세와 내세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주1)
요17:3절에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
그러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영생의 반대가 영벌입니다. 지옥에 가서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사람의 현세와 내세의 방향을 결정해 주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입니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아는 건 아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대통령을 잘 압니다.”하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뭘 부탁하려고 줄을 설 겁니다.
그런데 제가 대통령은 잘 알지만, 대통령은 저를 모릅니다.
이처럼 일방통행은 참된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때 하나님도 나를 아시게 됩니다.
다시 말해 쌍방통행의 지식이 됩니다.
요10: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양은 서로 압니다.
예수님도 저 사람은 내 양 즉, 내가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압니다.
알기 때문에 다른 데서 옳지 않은 말을 해도 ‘저건 내 주님의 음성이 아니야’ 라며
따라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이고 체험적이고 쌍방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고 일을 하고 기적도 많이 행하고
예언도 하고 교회도 크게 세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날에 예수님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 많이 했고 예언도 했으며 귀신도 내쫓았고 병자도 고쳤으며
기적도 많이 행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더니 “난 널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듣는 자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도 우리를 알아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주2)
◑결론
하나님은 가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이 땅에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애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하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또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인애를 강조하다가 공의를 희생시키면 안 됩니다.
판사가 흉악범을 잡아놓고서 너는 사형이지만 내가 용서해 주겠다고 하면
공의를 희생시켜 인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애와 사랑과 공의가 조화되어 나타난 곳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갚으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죄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서 용서하신 것입니다.
공의를 실현하시고 우리를 향한 영원무궁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14:7절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유일한 길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믿어진다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시고 마음의 구주로 받아들이시고
하나님이 성령을 마음에 부어 주시면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래야 그 사람은 인생의 현세 방향도 바로 잡히고 내세의 방향도 바로 잡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예수를 자랑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게 있다면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렘9:24절에 대한 사도바울의 해석이 고전1:29~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건, 주님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영어는 전치사 ‘in’을 쓰는데, 자랑의 대상을 말하는 겁니다.
“LET HIM WHO BOASTS, BOAST IN THE LORD”
이렇게 고전1:21절은, 본문 렘9:2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입술을 열어 자랑하려면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다.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변화됐다.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됐다.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과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됐다.
예수가 아니고서는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며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듣던지 안 듣던지 예수를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안 듣지만
예수님의 택한 양, 하나님의 택한 양들은 반드시 듣고 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예수를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제가 죽고 난 뒤에 비석을 세워 주신다면
비문에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자랑한 자라’는 글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와 용맹과 부가 많았던 자라’는 말이나
‘이 사람은 출세했던 자라’는 말은 다 쓸데없습니다.
여러분 비문에는 어떤 글귀가 쓰이기를 원하십니까?
‘부자로 많은 돈을 가지고 죽은 자라’ ‘출세 하다가 망신당하고 죽은 자라’
‘유명하기는 했으나 말년에 비참하게 살던 자라’ 이렇게 쓰이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자랑하던 자라’
이것이 여러분 생애를 특징짓는 표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한글 주석 - HANGL NOCR
본문 렘9장은, 렘7~10장까지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성전 (앞) 설교’입니다.
줄곧 언급된 바와 같이 유다의 현실적 무감각을 비판하고 그로 인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특별히 선지자의 거듭되는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역을 일삼는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독백 형식으로 묘사하면서
궁극적으로 배교한 유다의 최종상태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뿌리깊은 죄악상 (1-9절),
율법에 대한 불순종 (10-16절),
언약백성의 본질 (17-26절)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 여 주야로 울리로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예루살렘 멸망의 상황이 너무나도 비참하여서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다.
즉 유다 백성의 죄와 파멸을 바라보자니 슬픔이 극에 달해 이미 눈물 근원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또 다른 눈물 샘이 터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밤이고 낮이고 동포의 살육을 한탄하며 울 수가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런 심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9: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고대 근동에는 여관이나 유숙하는 집이 없었다.
다만 대상들이 유숙하는 공공 건물들이 더러 있었는데, 나그네들은 보통 여기서 유숙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가구나 음식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때로는 지붕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의 야수들의 침입 정도를 막아주는 벽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처럼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면 거기로 피신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백성에게 내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상과 같은 설명에서 보다시피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조로 내뱉은 말로 보는 것이 더 좋다.
9: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활을 당긴다고 하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해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거짓말이 여기에 비유되고 있다.
혀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본절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다(시64:3).
거짓 선지자들은 수없이 심판이나 파멸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혀를 잘못 놀려왔다.
백성들은 그들의 거짓을 참인 줄로 착각하고 그들을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칼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며 그들을 모조리 파괴하였던 것이다.
9: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이웃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속이기 때문이다.
속인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진리(에메트)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 유다 사회에 만연되었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불신 풍조를 반영해 준다.
9: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혀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을 격려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들은 거짓을 가르치고 타인을 모함하는 일에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켰다.
또한, 그들은 파멸을 얻고 지옥에 가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
9: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인간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보시며(삼상16:7), 그들의 악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의 처소가 속이는 일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은
그들이 악한 자들과 함께 악을 공공연히 자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척하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9:7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여기서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예화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이미 유다인들은 제련되지 않는 불량 금속에 비유된 바 있다(6:27-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녹여서 유용하게 만들어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가 표명된다. 택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를 엿보게 한다.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그들의 혀는 치명적인 화살과 같고 그들의 입은 속임과 사기로 가득 차 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웃들에 대해 겉으로는 다정하게 인사하면서도
그 내심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해할꼬 하는 생각뿐이다.
'해를 도모하는도다'라는 표현 중 '해'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브'는 맹수가 먹이를 노리며
숨어있는 것 혹은 복병이 상대의 접근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9:9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벌하지 아니하겠으며...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백성들의 이 같은 악행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백성들을 처벌할 것이며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나라'(고이)에 보복하실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고이'란 용어로 지칭한 것은, 이 용어가 이방 나라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매우 참혹하다.
즉 그들은 지금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용어를 선택한것은 그 당시 유다인들이 표리 부동하게도
여호와의 언약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인것 같다.
9:10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대가로 이 배도한 민족에게 닥치게 될 끔찍한 재앙으로 인해
예레미야의 감정은 극히 동요되고 있다.
새와 짐승마저 도망가고 없다는 표현 속에서 철저한 파괴와 황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죄와 전국토에 미치는 이 민족의 참변이 서로 결속되어 있다는 내용은
여러 선지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주제이다(암4장, 미6:10-16, 학1:9-11 등 참조).
9:11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예루살렘이 폐허 더미가 될 것에 대한 예언은 26:18에 인용된 바 미가의 예언과도 동일한 내용이다(미3:12).
또한 예루사렘은 승냥이의 굴이 될 운명으로 설명되고 있다.
'승냥이'(탄님)는 자칼(jackal)을 뜻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이리나 늑대등과 같은 짐승들인데,
이것들이 폐허가 된 도시에 굴을 만든다고 하는 설명은
예레미야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표현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10:22, 49:33, 51:37, 사13:22, 34:13 참조)
본절과는 대조적으로, 메시야의 날에는 시랑이 눕던 곳도 옥토로 변하게 되리라는 예언도 있다(사35:7).
9:12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
9: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이는 그들이...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처참히 멸망당하고 말 이유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불신자들의 눈으로 보면, 유다의 패망은 당시의 국내외적 정세에 따른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요 한 민족이나 개인의 흥망 성쇠를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는 이들은 본문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9:14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가나안 신화에는 엘 신이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배우자로서 아세라가 있었다.
바알은 바로 이 두 신들에게서 태어난 자식으로서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바알이 가나안 신들의 계열상 최고의 신이었다.
구약과 근동의 고대 문헌을 보면 이 바알이란 이름이 지역 신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지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바알-하솔, 바알-브올, 바알-시돈, 바알-레바논, 바알-하람 등이 있다.
바알이란 이름이 포함된 이러한 지명들은 바알이 그 지역의 수호신으로 인식되었음을 말한다.
우가리트의 종교 문서와 전설 등을 참조하면, 그 당시 수많은 종교 의식들이 바알 신과
결부되어 있었고 또 다산 제사가 성적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종교 행사들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던 것이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그런 활동에 가담하는 것에 대해 맹렬하게 경고하였다.
(왕상18:20-40, 호2:13,17, 습1:4)
여호와 외의 다른 신들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이것만으로도 심판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9: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그들은 가장 처절한 슬픔을 맛보게 될 것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음식과 음료 대신에 독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한편 '쑥'에 해당하는 '라아나'와 '독한'에 해당하는 원어 '로쉬'가
신29:18, 애3:19, 암6:12 등에서도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쓴 것과 독이 같은 맥락에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9:16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에 앞서 예언한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언약 파기의 결과라고 말하였으며(사1:4-9),
아모스는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암4:1-3).
그리고 신 28:36에 기록된 저주 목록 중에도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이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다 백성들은 본문과 같은 예언이 성취되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곡하는 부녀들은 대가를 받고 초상집에 가서 소리내어 울어주는 일을 하였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에도 근동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아일랜드에도 이 관습이 대단히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의 조상들이
동방에서 건너왔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한 첫 번째 애도는
갑작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터뜨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9: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예레미야는 이들 직업적인 애곡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일을 빨리 진행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상황이 그만큼 긴박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9:19 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그들이 우리 거처(주택)를 헐었음이로다'
70인역(LXX)은 이를 '우리는 우리 집들을 포기해야(내어버려야) 한다'고 옮겼으며,
어떤 주석가들은 레 18:25에 근거하여 이를 '우리의 처소가 우리를 내어던졌다'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맛소라 본문에 충실하지 못하다.
9:20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아울러 이 말에는 자자 손손 애곡이 이어지게 되리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9:21 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멸절하려 하느니라' 여기서는 사망이 의인화되어있다.
이 사망이 창문을 타고 요새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자기의 희생자들을 내어놓으라고 주장한다.
사망은 거리의 아이들과 공공 장소의 청년들을 멸절시키고 말 것이다.
한편, 사망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는 내용은 고대 근동의 가나안 신화에서도 발견된다.
9:22 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유다인들이 대량 학살당할 뿐 아니라 그 시선조차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질 것에 대한 비유이다.
분토(도멘)는 썩는 냄새를 풍기는 거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반절은 유다인들의 시체가 밭에 흩뿌려진 거름처럼 버려져서
온 땅이 악취로 가득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그리고 ‘거두지 못한 곡식단(아미드)은 추수를 하면서 여기저기 흘려놓은 곡식 이삭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반절은 이미 추수가 끝나 내팽개쳐진 채 돌볼사람이 없는 곡식단처럼,
유다인들의 시신 또한 미처 장사지내지 못하게 되는 치욕을 당할 것을 가리킨다(신21:22,23 참조).
9: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문맥의 흐름상 본절과 24절은 독립된 신탁의 말씀인 듯하다.
하나님은 모든 축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또는 그를 통하여 나오지 않는
지혜와 용맹 그리고 부(富)란 무의미하다.
부(富)란 것은 죽는 날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힘과 용맹도 사망에 대항할 수가 없다.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절 내에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 세개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인애'(헤세드), '공평'(미쉬파트). '정직'(체다카)이다.
이 세 단어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 함축된 의미를 다 드러내면서
적절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첫 번째 낱말인 '인애'에 해당하는 '헤세드'는 구약에서 약 245번 쓰이고 있다.
이 용어는 '진실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충실함', '다함없는 헌신', '자비' 등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활동은 그의 백성의 불성실함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진실하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공평'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의를 행하는 자를 격려하고 악을 범하는 자를 징계하는
'공의' 혹은 '정의'를 의미한다.
심판자로서 여호와는 행악자들의 활동을 제한하시고 그를 처벌하신다.
반면에 의인을 구원해 주시고 그를 위해 변호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압제받는 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러 그들사이에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었다(창16:5, 출5:21, 시26:1, 사2:4).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며,
이것은 그가 '미쉬파트'를 세우고자 하심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단어인 '정직'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흔히 '의'가 그의 백성 중에,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 중에 편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6:33).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메시야께서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9:6).
9: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다 벌하리니'
할례받은 자는 유다인들을 지칭하고 할례를 받지 못한 자란 이방인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똑같이 여호와의 공의의 심판 아래 있다.
마음의 할례가 없는 단순한 의식에 의한 육체적 할례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지는 않는다.
다음 절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서 할례받지 않는 자들이란
애굽의 주도로 결성된 반바벨론 동맹을 우선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과거 성경엔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새번역)
그들의 신전에서 머리털을 밀어버리는 관습을 가졌던 아랍의 어느 부족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히브리 율법은 이같은 행위를 금지하였다(레19:27). 바벨론 군대가 아랍인들을
원정한 바 있는 것으로 보아(49:28-33), 이들 역시 반바벨론 동맹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짙다.
.................................
주1)
하나님이 없다고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있어도 많다고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알라라고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느냐?
즉,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현세 삶의 방향과 내세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 인간사에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저는 예언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이 될런지? 그 사람이 어떤 여자와 결혼 할는지?
그 사람의 가치관이 무엇인지?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건지?
그 사람의 인생의 목표가 뭔지?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어디 갈는지?
저는 한 가지 대답만 들으면 다 예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니까
“나는 알라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회교도가 될 것이라고 저는 예언합니다. 알라는 원래 중동 지방 달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중동 사람들은 달 그림을 많이 가지고 다닙니다.
그 사람은 회교도 여자와 결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여자가 아니라
여러 여자와 결혼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루에 다섯 번씩 어디 가든지 메카를 향하여
절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많은 여자를 데리고 살려는 목표를 가질 것입니다.
왜냐면 회교의 천국은 여자를 많이 데리고 사는 곳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니까
“하나님이 있기는 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다면 그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그 사람은 무신론자와 결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 것입니다.
돈 벌며 살려 할 것이고, 권력을 추구하며 살려 할 것이고, 또 쾌락을 추구하며 살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가장 명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에게는 두 가지 지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현세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세의 방향도 결정됩니다.
주2)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요?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복음주의자인 제임스 패커(James Packer)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 이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렘9장에서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세 가지 동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hear)는 것입니다.
본문 20a절에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롬10: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하나님을 알고 믿고 싶다. 예수님을 알고 믿고 싶다’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교회 나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인생이 여기서 하나의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여러 성도들과 연관되어 있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으며
나는 영원과 연관되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휴가 때 인도네시아 발리 같은 좋은 휴양지의 최고 좋은 호텔에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과 단절되고 혼자 있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 인생은 연관되어 있고 나는 영혼과 연관되어 있으며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관되어 있어 외로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것만 해도 우리의 인생과 삶은 보통 삶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영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성도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배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라, 그래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Receive)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하며 안 받으면 소용없는 겁니다.
말씀을 들으면 받아들여야 됩니다. 제가 부산에 가서 여러해 전에 집회를 하는데
한 남자가 자기 부인한테 억지로 교회에 끌려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니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자꾸 손짓을 합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남편이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자꾸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고 그랬다는 겁니다.
이처럼 말씀을 들어도 안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겁니까?
말씀을 들으면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Obey)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받고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는 천국 갈 수 없고,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므로
우리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되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영혼을 지배하던 악령들을 다 내어 쫓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마음속에는 귀신, 악령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걸 내어 쫓고 성령이 들어오셔서
그 다음에 성령이 직접 기록하신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 믿지 않고서는 죄 사함 받을 사람이 없고 성경을 깨달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믿고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