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6 18 사도행전 강해 (71) /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 YouTube
*6분40초 경부터 녹취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행19:21~41
본문은 이제 에베소 사역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본문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동으로 인해, 결국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됩니다. 20:1
오늘은 그 소동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본문 해석
▲행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위 구절은, 바울의 앞으로의 선교 계획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지내면서, 이후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예루살렘, 로마로 가겠다고 계획합니다.
이후 3차선교여행의 여정, 그 이후로 사도행전의 끝까지
바울의 여정은 위 19:21절의 계획대로, 정확하게 진행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을까요?
앞서 바울은 3년 전에, 수리아 안디옥에서 3차선교여행을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특별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특별구제의 헌금을, 다른 교회들에게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 들에게 헌금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고전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낸 편지이죠. 그래서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요청한 게 있습니다.
기근에 허덕이는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구제헌금을, 고린도교회에 부탁합니다.
고전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내가 이를 때에'
바울이 고린도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갔지요. *3차선교여행 중에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여기서 '은혜'란 헌금을 뜻합니다. 그걸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이때 고린도교회의 대표가 바울과 동행하면서, 그 헌금을 편지와 함께
직접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만 연보를 부탁한 게 아닙니다.
고린도(아가야 지방) 위에 있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에게도 부탁을 했습니다. ↓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고전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바울은 이 구제 헌금을 거두기 위해서
먼저 두 사람을 마게도냐에 선발 대로 보냅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입니다.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그러니까 두 사람을 먼저 마게도냐에 보내놓고, 주1)
바울은 두 사람을 뒤따라가서, 앞서 모아진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한 각 교회 대표들의 명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고린도 → 마게도냐 → 드로아 → 예루살렘으로 동행해서 갑니다.
행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러니까 행19:21절은, 사도행전의 나머지 로드맵 과 같습니다.
앞으로 남은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21절의 노선을 따라 진행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여정은 로마에서 끝납니다. 행28:16
그래서 19:21절은, 요절처럼 기억하시면 좋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소동을 일으킨 주범은, 데메드리오 라는 은장색(은 세공업자)이었습니다.
▲19: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이 당시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기둥이 127개, 기둥의 높이는 18미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전의 넓이가, 오늘날 축구장 면적만 했다고 말합니다. 137M X 69M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거죠.
그 당시에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었습니다. *유네스코 엠블렘
그런데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가 컸던 신전이,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입니다.
그래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가 아데미 신전 입니다. *지금 터와 기둥 몇 개만 남음
아데미 여신을 모시는 신전인데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 라는 신이 있죠.
제우스 신에게는 아들 아폴로가 있었고, 딸이 바로 아데미 여신입니다. *라틴어로 다이애나
특별히 아데미 여신은 풍요의 여신입니다.
그래서 그 신상을 보면, 가슴에 24개의 주렁주렁 달린 유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산과 풍요를 주는 신입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의 소원은 부와 풍요입니다. 즉 아데미 여신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데닌 여신을 섬겼겠습니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데미 여신을 섬겼습니다.
에베소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인근 지역 사람들도 관광을 와서
아데미 여신을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아데미 여신의 작은 모형을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본문의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아데미 여신 상인회'에 회장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또한 아데미 신전의 작은 모형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사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기 집 벽에 홈을 파서, 거기에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여신 상을 모셔놓고,
섬기면서 거기에 자기 소원을 비는 거죠.
그러니까 집집마다 아데미 여신의 모형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사람(은장색)들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다 사 가는데요. 그러니까 떼돈을 벌었겠죠.
자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매출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때문에, 에베소 사람들이 주술책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주술을 하던 수많은 에베소 사람들이 주술을 끊었습니다. 19:19~20
'주술은 미신이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주인이다.
다른 신들은 다 가짜이다.' 하고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에베소가 섬기던 아데미 여신도 섬기지 않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데미 아이템'들이 더 이상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출이 반토막이 났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아데미 신상을 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가 동종 업계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데미 신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선동을 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9: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자 연설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였는데요.
1) '우리는 이 아데미 우상 사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 했다.' 25b
2) '바울의 가르침 때문에 우리가 쫄딱 망하게 생겼다.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 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닌다. :26
3) 바울이 우리의 영업만 망하는 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전의 위엄이 땅에 떨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27
'에베소 도시의 자랑인 아데미 여신이 무시를 당하게 생겼다. 이거 진짜 큰 일이다.
자 그러니 바울의 일행을 가만 두면 안 된다.'
이것이 데메드리오의 연설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핵심은 결국 돈 이야기입니다.
겉으로는 아데미 신전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데미 여신의 위엄은 핑계에 불가합니다.
속내는 더 이상 우상 판매업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동이 기가 막히게 먹힙니다.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연설을 들은 동종 업계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 차서 아데미 여신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이 구호는 당시의 종교 의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구호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결의를 다진 거죠.
'우리의 아데미 여신을 짓밟고 있는 바울의 일행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집회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멋도 모르고 군중심리로 동조하는 거죠.
그러니까 바울의 일행을 규탄하는 집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에베소 시민들도 점점 집회에 가담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렇게 온 도시가 삽시간에 큰 소동에 빠졌습니다.
자 그렇게 선동을 당한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신에 바울과 같이 다니는 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았습니다.
이들은 마게도냐 사람이었습니다. :29
아데미를 외치던 군중들을 '연극장'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여행채널에 자주 나오는, 그 유명한 에베소의 '원형 야외공연 극장' 입니다. *반원형
여기는 무려 2만5천명이나 수용 가능 하다고 합니다. 성지순례 때 꼭 들리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이제 바울의 일행 두 사람이, 성찬 사람들에 의해 둘러쌓여 있습니다.
▲19: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그때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연극장 안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말렸습니다.
아마 바울이 위험해질까봐 말렸던 것 같습니다.
▲19: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그런데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이 연극 장에 모인 군중들이요.
자기들이 왜 모였는지, 그 이유를 자신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이렇게 몰려가니까, 따라 들어오긴 했는데
연극장에 와서 보니까 정신이 드는 거죠. '내가 왜 여기 모여 있지?'
그래서 옆 사람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여기 왜 왔어요?' '나도 잘 몰라요.'
그러니까 서로가 왜 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 그렇게 서로 허둥지둥대는데, 이 사태를 악화 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 이었습니다.
▲19: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이 연극 장애에 모인 무리 중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렉산더 라는 사람을 내세워서 변명(변론)을 하려고 했습니다. :33
'우리 유대인들은, 바울과 한 편이 아니라'는 변명이었습니다.
바울을 보호하려는 변명이 아니라, 바울과 선을 그으려면 변명이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우리 유대인들은, 바울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들을, 붙잡힌 바울의 일행(가이오와 아리스다고)과 같은 부류로
오해하지 말라'는 변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비굴한 자세를 취한 거죠.
자 그런데 그것 때문에 사태가 더 악화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데미 여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 알렉산더가 변명을 하려고 앞으로 나오는 순간,
에베소 사람들이 전부 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에 기름을 끼얹은 거죠.
멋도 모르고 모였던 군중들도, 이제는 일사불란하게 하나가 되어서
아데미 여신을 외쳤습니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이 구호가 다시 연극장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19: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마치 '붉은 악마 supporters'가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처럼
에베소 시만들은 연극장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자 그것도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사태가 더 심각해진 것이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진짜 붙잡힌 바울의 일행이 큰일 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동을 한 방에 잠 재운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서기장'입니다.
▲19: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서기장은 에베소 도시의 최고 행정관이었습니다.
도시의 치안과 안보를 맡은 책임자 였습니다.
이 서기장이 나타나서, 에베소 사람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아주 차분하고 냉정하게 연설을 시작합니다.
그 연설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1) 먼저 에베소 시민들의 기분을 맞춰 줍니다. 그래야 진정이 되니까요.
에베소 사람들의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
'너희들이 섬기는 아데미 여신은 큰 아데미 신이다!'
본문에 '큰 아데미'라고 했죠. :35 '위대한 아데미' 라는 뜻입니다.
아데미 신의 위대성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2)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바로 에베소 사람' 라고 말합니다. :35
이 말은, '에베소 시민 여러분, 이 에베소 시가 위대한 여신 아르데미스의 신당과
제우스 신의 아들을 숭배하는 도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동번역)
.. the city of the Ephesians is a worshipper of the great goddess Diana,
and of the image(제우스의 아들 아폴론) which fell down from Jupiter? KJV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이 바로 큰 아데미 신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데미 여신은 (남동생 아폴론과 함께) 사람에게서 기원 한 것이 아니라,
제우스 신에게 기원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도시는, 바로 그 위대한 여신을 관리하는 신전지기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5
바울의 말처럼 아데미는 '손으로 (조각해서) 만든 신'이 아니라는 거죠. 19:26
그러니 '나 서기장 역시도 너희들 편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는 거죠.
그런데 서기장은 군중들의 편만 들어주지 않습니다.
바울 일행의 편도 함께 들어 주었는데요. :37
▲19: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 한 마디로 '너희들이 문제라고 잡아온 이 그리스도 인들은 잘못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들은 아데미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한 적이 없습니다.
또 하나, 아데미 여신을 모욕하거나 헐뜯은 적이 없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이렇게 붙 잡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우상숭배가 어리석다고 말은 했지만,
그게 아데미 신을 꼭 찝어서 말한 것은 아니었죠. 일반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억울하고 할 말이 있으면 정식 재판이 있지 않느냐?
총독 앞에서 할 수 있는 정식 재판이 있으니까, 그때 고소를 하라고 말합니다. :38
▲19: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총독이 아니면 (고소할 거리가 안 되면), 민회에 고소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민회'는 연극장에서 매달 열리는 시민회의를 말합니다.
▲19: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 그러므로 이 불법집회를 여기서 그만 해산하라고 말합니다.
이 집회는, 아무런 까닭 없이, 뚜렷한 이유 없이 열린 불법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에베소는, 로마로 부터 자치권을 얻어서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소동을 일으키는 도시에는, 자치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불법 집회 때문에, 만약 소동이 더 커지면,
로마당국에 찍힐 수 있다. 그러면 자치권을 뺏길 수 있다.
에베소 시가 누리던 자유와 권리와 특권을 박탈 당할 수 있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아마 이 서기관의 연설이, 군중들의 흥분했던 마음을 식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모임이 빠르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41
자 이렇게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서 바울의 에베소 사역 이야기도 끝이 납니다.
◑적용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태도입니다.
본문에 연극장에 붙잡힌 바울의 일행(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풀려난 이유가 3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은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데미 여신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하거나 헐뜯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반대로 그들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면,
그들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의 열정'이라는 이유로,
아데미 신전의 물건을 훼손했다면, 그들은 에베소에서 추방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로마 문헌에 따르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 하거나 신전을 훼손하는 것은, 심각한 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죽음 아니면 추방을 당했습니다.
추방을 당할 때는,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을 당했습니다.
바울 일행과 에베소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지만
아데미 신전을 목표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끔 뉴스를 보면, 폭력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찰에 가서 찬송을 부르거나 불상을 훼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십자가를 꽂고 왔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절이나 문화재에 방화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 앞에서 찬송가를 불러서 행사를 방해했다는 기사도 봅니다.
심지어 외국에 나가서도 이런 일들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교사원에 들어가서 기타 치며 찬송가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땅밟기'도 개인적으로 땅을 밟으면서,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것,
그렇게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타종교나 외국 종교를 일부러 거슬리게 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마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러분 우리는 햇불이나 화염병이 아닙니다.
화염병을 던져서 절을 불태우거나 불상을 훼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화염병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부응을 받았습니다.
빛은 그 자리에서 밝히는 겁니다. 무엇으로 밝히는 거죠?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입니다.
그걸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 윤리 도덕적인 삶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사람들 앞에 비추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저 사람은 분명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 사람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 같다.'
그래서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아무리 '교회를 다니라'고 말하지만,
부모의 '착한 행실'이 보이지 않으면, 거룩한 소동이 자녀들에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회에 나가라'고 얘기를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아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에서 점검하셔야 합니다.
예수의 증인은, 우리가 달라진 모습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난 이유는
바울이 과격한 방식으로 전도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소동이 일어난 이유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변화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아데미 여신이 가져다 주는 이 땅의 풍요와 번영을
신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와 기준이, 예전과 같이 풍요와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자 그러다 보니까 그들 때문에 우상 산업이 망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상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어떻게 해서라도 쫓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때문에,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에베소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던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변화된 삶!
그것이 에베소에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소동은 '거룩한 소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입술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로 전하기 전에, 우리의 존재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법과 모습이,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정말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 믿음이 내가 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변화 시켰는지...
그 믿음이 우리의 인격을 어떻게 변화, 성숙시키고 나가고 있는지가 증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대체 누구인가?'하고
우리의 믿음의 대상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세상은 거듭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19:23
'항간에는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오히려 로마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을 때, 기독교는 타락했습니다.
늘 기독교가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성도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가 가능 했을 때입니다. 마5:16
그래서 박영선 목사님은 <인격의 제자 훈련> 책에서 이런 멋진 말을 하셨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전도이다."
여러분, 참 멋있는 말씀이죠. 한편으로는 굉장히 부담되고 찔리는 말인데요.
'존재론적인 전도'를 말씀하신 거죠.
'저 사람은 다르구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움터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가 아니며,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다, 교회의 빛이다.’도 아닙니다.
여기서 ‘교회’란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 각자를 가리키며,
이차적으로 성도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각자의 미션(사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 도시에 가로등 (빛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는데
도시는 밤에 점점 더 어두워간다면, 말이 안 됩니다.
유능한 지도자는,
교회에서 모임을 적게 가지더라도,
가급적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모임을 많이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세상에서 아무 영향력도 발휘 못하게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한 지도자가 되는 셈입니다.
지금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점점 많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물 한 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 그 몫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 한 잔’은 누구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성만 있다면요!
♣119보다 빠른 이웃
산골 마을에서는 이웃보다 소중한 사람이 없습니다.
A 할아버지 집 아궁이 옆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났을 때
얼른 달려가 불을 끈 사람도,
갑자기 가을비 내릴 때, 길 위에 여기저기 널어 놓은 나락을 함께 덮은 사람도,
혼자 사는 B 할머니가 살아 계신지 틈만 나면 들여다보는 사람도,
사슴 농장 아주머니가 화상 입었을 때 아침마다 보건소에 모시고 간 사람도,
마을 어르신이 경운기 사고로 피 흘리며 쓰러졌을 때 병원에 모시고 간 사람도,
새터 할머니가 날이 갈수록 정신이 없어 가스레인지 불을 켜 놓고 산밭으로 나갔을 때
그 불을 끈 사람도.. 모두 가까운 이웃입니다.
경운기가 논두렁에 처박히면 자기 일처럼 끌어 올려 주는 사람도,
먹는 물이 나오지 않으면 연장을 들고 물탱크로 달려가는 사람도,
밤새 눈이 내리면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도,
이웃집 자녀가 혼인하면 며칠 내내 음식 준비를 같이 하는 사람도,
산밭에 일손이 필요할 때 아무 조건 없이 달려와 주는 사람도,
농산물 값이 폭락해 마음 둘 곳 없을 때 그 설움을 달래주는 사람도,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러졌을 때 가장 빨리 달려와 주는 사람도
모두 가까운 이웃입니다.
피붙이가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이웃만큼 소중하지는 않습니다.
119구조대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웃만큼 빠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산골 마을에서는 이웃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서정홍, ‘부끄럽지 않은 밥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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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사도행전을 통해 볼 때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2차선교여행 때,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교회로 돌아올 때,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동행했으며,
디모데와 동행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디모데는 고린도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에라스도는 고린도 시의 재무관입니다.
그러니 고린도에 머물며 교회를 돌보던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잠시 마게도냐 교회에 파견 식으로 먼저 보낸 것입니다.
아마 고린도에서 바울이 편지를 써서 그 일을 부탁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