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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3장 썩은 띠의 비유

LNCK 2024. 9. 2. 10:3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74575 

 

썩은 띠의 비유             렘13:1-11            2008년

 

※(요약)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베띠(허리띠)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베띠처럼 하나님께 꼭 붙어있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 내 이름내 명예내 영광이 되게 하시는데, :11

그 베띠가 하나님을 벗어나고 떠나자, 유브라데 강가에 버려져 썩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벨론 포로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서론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교회들에는 이상한 예배형태가 등장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대신 드라마와 연극으로 하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예배당에 링을 만들어 놓고

레슬링으로 설교를 대신 합니다. 그래서 두 선수가 레슬링을 하는데

담임목사님이 이기고 약한 선수가 집니다.

 

진 선수는 마귀를 상징하고 이긴 선수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을

듣기도 하고 화면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이처럼 언어보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행습이 예레미야 13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보다도 더 많은 상징적인 행동과 이미지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렘13장만 봐도 예레미야가 다섯 번이나 상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첫째로 썩은 베띠를 사서 차고 다니다 하나님께서 유브라데 물가에 집어 넣으라고 했더니

여러 날 후에 가보니까 썩었더라는 ‘썩은 베띠의 비유’입니다.   :1~11

 

둘째로 ‘병에 가득한 포도주의 비유’입니다.  :12~14

사람들이 병에 가득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서 서로 싸우다가 망하게 되었더라는 비유죠.

 

셋째로 교만한 자에게는 빛이 변하여 어두움이 된다는 ‘빛과 어두움의 비유’입니다. :15~17

 

넷째로 ‘왕후가 영광의 면류관을 벗어버리는 비유’입니다.  :18~19

유다의 왕과 왕후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왕과 왕후가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비유입니다.

 

다섯째 유다백성의 죄악은, 구스인이 피부색을 바꿀 수 없고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비유입니다.  :20~27

 

이렇게 많은 상징적인 이미지나 행동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레미야가 전한 이런 상징적인 행동이

오늘날 드라마나 연극 또는 레슬링을 통한 예배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베띠를 샀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유브라데 강가에 가서 묻었으며, 여호와의 말씀대로 썩은 것을 파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한 것이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예배를 인도하는 자는 이런 상징적인 행동이나

가시적인 수단을 써서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구미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엄숙하고도 비장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섯 가지 예레미야의 상징비유 가운데 첫 번째 썩은 베띠의 비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띠의 재료는 베입니다.

베띠는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벨트, 속옷 혹은 겉에 입는 반바지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가장 많이 번역된 것이 허리에 띠는 벨트라고 되었기 때문에

영어로 ‘linen belt'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가장 많이 번역된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겠습니다.

 

베띠는 ‘linen’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linen’은 삼베입니다.

오늘날도 이 삼베는 대단히 값비싼 의복의 재료입니다. 수의도 삼베로 만듭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삼베를 제사장이나 왕들이 입고 다녔습니다.

대단히 사치스럽고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했습니다.

 

베띠는 오늘날 허리띠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넓이가 넓고 가운데는 프로레슬링 챔피언 벨트처럼 금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벨트였습니다.

 

이런 베띠를 허리에 띠고 다니는 사람은 자기의 신분이 고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띠를 띠고 다니면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고 존경심을 이끌어 내는

명품이었던 것입니다.

 

◑1. 베띠의 변화과정

 

그러면 이 고귀한 명품 베띠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 본문 11절에 답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명예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 각자는, 주님의 백성과,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고자하는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이 베띠가 썩지 않을 때는 명품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사용하시며

많은 나라 가운데 택하여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베띠가 사람의 허리에 밀접하게 달라붙어야 됩니다.

허리띠를 꽉 메지 않고 느슨하게 하고 다니면, 바지같은 옷이 벗겨지게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허리띠는 아주 밀접하게 꽉 조여야 됩니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라고 되어 있는데

‘속함 같이’는 영어로 'cling to' 혹은 'stick to'를 씁니다.

‘딱 붙어있다’, ‘밀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창2: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연합하다’는 동사나 허리에 ‘속함 같다’는 동사나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허리띠가 밀착되어 있듯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깊고 강한 친밀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왜 친밀성을 유지해야 되느냐? 하나님을 좀 멀리 두고 살면 안 되냐?’라며

귀찮아 하시는 분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야 되는 이유가 본문 11절 후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 명예와 ()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니라

 

하나님은 유다백성으로 하여금 4가지가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밀접하게 지내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이름, 명예,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그 백성을 칭찬받고 명예 얻고 영광얻는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26:19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 praise 명예 name 영광 honour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사람은 누구하고 친하게 지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영광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건달하고 같이 지내면 말과 행동이 건달처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과 늘 같이 지내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끼리끼리 모인다, 모이는 사람끼리 닮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유유상종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허리띠를 띠듯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야

우리에게 하나님이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고 싶으시면 벨트가 몸에 가깝듯이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벨트(베띠)를 유브라데 강으로 옮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3~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유브라데는 오늘날의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는 무려 600km나 됩니다.

예레미야가 부지런히 걸어가면 세 달 정도 가야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유프라테스 강이 아니라 아마도 아나돗에서 가까운 유브라데라는

이름을 가진 샘물일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유브라데’라는 지명을 특히 강조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프라테스강은 앞으로 유다백성이 포로로 끌려갈 바벨론 왕국의 소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옮겨진 벨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600km나 떨어진 바벨론으로

유다백성을 옮기라는 상징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이 그처럼 영광과 존귀를 주시려고 하신 백성을

600km나 되는 먼 곳으로 옮겨버리셨느냐? 본문 9~10절에 이유가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 없음 같이 되리라’

 

여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교만입니다.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이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거절, 강퍅함, 다른 신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다 망하는 단어들입니다.

유다백성들이 교만함으로 칭예와 영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포로됨과 부패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프라데 강에 가서 바위틈 물가에 묻어둔 베띠는, 여러 날이 지나자 썩어 버렸습니다.

명품 벨트를 강 밑에, 바위 밑에, 물속에 묻어 두었더니

여러 날 지나니까 썩은 벨트가 되었습니다.

 

베띠의 장식물이 모두 다 부패하고 부식되었습니다. 삼베도 썩었습니다.

보기에도 흉하고 완전히 못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벨트를 차고 다니면 인사는 그만두고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썩은걸 차고 다니느냐? 냄새난다”고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벨트를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아니면 기념물로 가져갔는지

어떻게 했는지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못 쓰는 벨트를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벨트가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완전히 망했다는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유다백성들은 주전 539년 고레스 칙령을 받아서

스룹바벨의 인도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유다민족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징계 받고 정화되고 훈련되어

더 훌륭한 백성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베띠가 썩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본문 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하나님이 유다백성이 교만해 하는 것 즉, 자랑하는 것(boasting)을 썩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서 렘9:23절에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혜와 용맹 그리고 재물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자랑하는 모든 것을 옮겨 버려서 다 썩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베띠의 비유는 대단히 심각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면

하나님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얻게 하시겠지만,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고 자랑하고 교만하면

그 자랑하는 것을 다른 데로 옮겨 버리고 못쓰게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건 시간문제다, 시간만 지나면 못쓰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장난으로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랑하는 자는 세상 것 자랑하지 말고 명철하여

나 여호와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23~24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해야지 쓸데없는 세상 것을 자랑하면

교만이 되어 옮겨지고 못쓰게 하겠다는 심각한 말씀인 것입니다.

 

◑2. 베띠 비유의 교훈

 

그러면 이런 썩은 베띠의 비유는 누구를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냐?

이 말씀은 세 가지 부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경고입니다. 강력하고 심각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존귀한 명품 베띠처럼, 영광스럽고 하나님과 친밀해야 마땅합니다.

 

엡5: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아교로 붙인 것처럼 붙어살아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직장생활 한다고 떨어져 살지 마십시오.

집안 살림과 자녀 교육보다도 부부가 붙어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부부가 붙어살아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붙어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주고 이걸 사셨으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교회는 남편과 아내의 친밀함같이 친밀함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가까워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명예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부인합니다.

바른 교리를 거부합니다. 교리는 안 믿어도 된다고 합니다. 성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렘12:10절의 말씀대로 목자가 도리어 포도원을 훼파합니다.

이런 짓을 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베띠를 벗기고 옮기며 썩게 하십니다.

 

계2:5절에도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경고대로 결국은 옮겨져서 지금은 교회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동일한 경고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디가면 들을까?’라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 말고 다른 말씀 좀 내 귀로 들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다른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 말씀인 성경 66권을 읽으십시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주에 일본에 가서, 일본에 있는 선교사님과 한인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이 가서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영어캠프를 열어 줬습니다.

작년에는 이 캠프에 40명이 왔는데 이번에는 100여명이나 모였습니다.

이처럼 집회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본교회가 왜 대한민국보다 복음을 먼저 받아 그렇게 부흥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일본에 귀신이 많아 서가 아닙니다. 귀신은 대한민국에 더 많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신앙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일본의 신자들은 신앙심이 좋습니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부도덕해서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사람들은 매너가 매우 좋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좋은 점이 많고 배울 점도 많습니다. 음식점도 깨끗합니다.

음식가지고 장난을 안칩니다. 일본은 음식가지고 장난을 치면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정부가 그 기업을 망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일본이, 교회는 왜 대한민국에 압도적으로 뒤떨어져 있느냐?

이유가 간단합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일본 사람들이 독일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3B 즉, 바르트(Barth), 부르너(Bruner), 불트만(Bultmann),

이 세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을 들여와서 독일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들여왔는데 90% 가량의 일본교회가

이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망하게 됐습니다. 부흥이 안됐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일본사람들도 복음에 눈뜨기 시작했고 복음주의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일본도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고 바른 교리를 전파해야 되며 바른 도덕과 성결기준을 높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를 우리교회 표어처럼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 신자 개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고 교회회원이라고는 하지만

거듭난 경험도 없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급함도 없으며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의지도 하나님의 교회에 헌신하려고 하는 헌신의 의지도 없으며

헌금한번 해보려는 생각도 없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랑은 없고 세상 것 자랑하고 의지하며 살면

하나님은 그 자랑하는 것을 옮겨버리시고 못쓰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때에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와 명예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베띠처럼 하나님과 밀착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은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기 원한다.’고 하시면 하나님과 밀착되어 사십시오.

허리띠를 띨 때마다 ‘내가 하나님과 밀착되어 사는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모든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예수 안 믿고 지옥 갈 불신자라 할지라도, 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햄릿의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가(What a piece of work is a man)!'하고 감탄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불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야하는 존귀한 베띠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명품입니다. 명품은 여러 개를 만들지 않고 하나만 만듭니다.

요즘 학자들이 인간복제를 한다고 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개야 복제해도 개가 개지만 사람은 복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복제한다 해도 영혼이 복제가 안되기 때문에 동일한 인간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셔야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복제한다는 엉뚱한 짓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하나 지으신 존귀한 명품 같은 존재입니다.

이마가 벗겨진 분은 벗겨진 대로 머리가 빠진 분은 빠진 대로 명품입니다.

인간은 똑같은 존재가 없습니다. 못생긴 사람도 명품입니다. 못생긴 대로 개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 크고 어떤 사람은 입이 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품이 다 다릅니다.

우리는 신자든 불신자든 인간이라는 것만 가지고도 존귀한 베띠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을 썩은 베띠 같이 되게 하였습니다.

인간사회에 짐승도 안하는 저질적인 죄악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야 될 인간이 우상과 마귀를 예배합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옮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베띠처럼 썩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지옥이 그런 곳입니다.

망가지지 않는 인생이 되길 원한다면 예수님께 나오시고

예수님을 믿으시며 하나님과 밀착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오고 하나님과 밀착되어 살면 그 인생은 명예스럽고 축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

 

썩은 베띠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 헛된 것을 자랑하는 교만심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띠가 사람 몸에 붙어 있듯이 하나님께 붙어사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애가 하나님의영광과 존귀가 나타나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한글 주석 - HANGL NOCR

 

13: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이 구절은 여호야김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여고냐(B.C. 598)의 통치하에 전달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 즈음에 갈대아인 장군들은 예루살렘렘 근처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왕하 24:8-11).

 

그러나 예루살렘렘 포위 공격은 느부갓네살이 그 주력군을 이끌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던 것이며,

썩은 띠를 허리에 두르는 상징적 행위로써

그들에게 임할 파국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13: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란 일반인들의 허리띠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특히 제사장들이 에봇 위에 두르던 띠를 가리키는 듯하다(28:8).

이 띠는 에봇, 흉패, 관과 함께 거룩과 영화로움을 상징했다(28:40-4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유다를 상징한다 하겠다.

 

13: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지는 두 번째 지침이 하달되었다.

본 장에 들어있는 다섯 개의 경고들 중에서,

1-11절까지는 첫 번째 것으로서,

비유적 행위에 의한 메시지로 전달된다.

 

13: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13: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니라

 

이 지침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브라데'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라트'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아나돗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유브라데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

(46:2, 창2:14, 15:18, 신1:7, 11:24, 왕하23:29, 24:7).

 

이처럼 이 말이 유브라데 강을 의미하면서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수세대에 걸쳐 많은 주석가들은 예레미야가 왕복 500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두 번에 걸쳐 여행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4, 6절 참조).

 

첫 번째 여행은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를 피해 석 달 동안 은거 했을 때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두 번째 여행은 내버린 그 띠를 되찾으러 갈 때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나님이 그토록 먼 거리를 왕래하게 하셨던 것은

아마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페트라'를 아나돗 북동쪽 4마일에 위치한 '와디 파라'(Wadi Farah) 혹은

'에브랏'(베들레헴) 등으로 보거나, 아예 본문의 내용을 우화나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다.

 

13: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

13: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여호와의 세 번째 명령과 예레미야의 실행에 관한 내용이다.

물가에 숨겨둔 천이 썩었다는 것은 처음 숨기던 때와 그것을 찾으러 갔던 때

어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한다.

 

아무튼 유브라데의 진흙이 그 '띠'를 썩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은 어떤 특별한 상징을 나타낸다.

 

이는 유다인들의 현상황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썩은 띠처럼 비참하게 연명해 가야 할 것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

 

13: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유다인들의 치욕스럽고 비참한 상태에 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그들은 바위 틈에서 썩어짐과 같은 유배지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13: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유다의 예루살렘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교만'이나 '오만'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탁월함'이란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역본들중 70인역이나 벌게이트 역, 그리고 시리아역 등은 전자로 번역하였고,

아람어 탈굼역은 '힘'이라고 번역하여 후자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이 단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유다의 교만을 징벌하신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반면에, 이를 '힘', '영광', '탁월함' 등의 긍정적 의미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나(사 60:15)

그들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13: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3: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예레미야는 앞에서도 유다가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존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2:18).

이처럼 유다는 주변 열강들의 틈새에 끼여 때로는 이쪽을 또 때로는 저쪽을 의뢰하면서,

정녕 의뢰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을 저버리는 형태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외세 의존 정책은 이방 신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들어와서 악하고 부패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며, 하나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을 더욱 확장시켰다.

아마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본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13:12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모든 병(또는 가죽부대)이 포도주로 차리라’는 말은 그 당시 유행하던 속담이었던 것 같다.

무슨 뜻이냐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라는 뜻의 속담이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다 알고 있는 뻔한 소리를 한다고 보았다.

 

포도주는 성경에 이중적 의미로 나오는데,

하나님의 순종하는 백성에게는, 축복의 상징으로,

불순종하는 백성에게는.. 저주와 하나님의 분노와 술취함의 상징으로 나온다. 여기는 후자.

 

그러니 12절에, 하나님은 저주의 의미로 말씀하셨는데,  '진노의 포도주'

백성들은 축복의 의미로 알아들었다. '모든 일이 잘 될거야'하는 속담으로 알아들었다.

 

즉, 그들의 대답은 조소 섞인 투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라고 말할 것은 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아래 구절에서 교정해 준다.

그 참 의미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것이다.

 

13: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잔뜩 취하게 하고'

클라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너희들과 왕 그리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들 병들로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포도주는 너희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13:14 또 그들에게 각 사람이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하나님의 영광이 일단 유다에게서 떠난 이상,

이제 이 백성은 아무 쓸모가 없는 빈 항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선택하사 은혜를 주셨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특권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무책임한 이 백성이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들은 불순종과 방종, 또 교만과 배도로 인하여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결국 그들의 멸망은 갈대아인들의 주도 면밀한 침략 계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야기시킨 사건이다.

 

13: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너희는 들을지어다' 수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에 의해 전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였던

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백성에게 다시 한번 순종할 것을 호소한다.

 

본절에는 두 동사, 즉 '듣다'(솨마)와 '귀를 기울이다'(아잔)란 동사가 대칭적인 위치에 놓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두 가지 비유에 이어

임박한 심판에 관한 세 가지 경고를 싣고 있다.

그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15-17절은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자만심을 버릴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13:16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흑암'의 강도가 점차적으로 심해져가는 묘사를 통해 유다의 멸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사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여기서 '흑암'은 재앙의 전조적인 현상임과 아울러,

유다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어둠과 빛의 대립은 성경 전체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인데,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어둠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1) 중생하지 않은 자에게 내재한 자연적 어둠(엡 4:18).

(2) 의도적으로 빛을 거부하는 고의적 어둠(요 3:19, 20).

(3) 완고한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어둠.

 

13: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통곡하리라' 신약 성경은 교만을 인생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죄성들과 나란히 기술하고 있다(막 7:22).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온유나 겸손과 정반대된다(약4:6, 벧전5:5:).

 

바울에게 있어서 교만이란 타락한 이교 사회에서 오염되는 전형적인 산물로 여겨졌으며,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이다.

 

한편, 클라크는 본절을 '너희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제책이 없다.

그리고 파멸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제 나에게는 너희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은밀히 슬퍼하고 곡하는 것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13: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본절과 19절은 두 번째 경고의 말씀으로서, 왕과 왕후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주조를 이룬다.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이는 여고냐와 그의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고냐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친의 섭정을 받았던 것 같다.

그녀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의 어린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

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다의 왕후란 것이 공식적인 직책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왕후 역시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상 2:19에 의하면 왕좌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본절의 역사적 정황에 관해서는 왕하 24:8-12을 보라.

 

13:19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남방이란 원어로 '네게브'인데, 아마 유다 남쪽의 메마른

넓은 광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원어의 원래 뜻은 '건조하다'인데,

그 위치는 가사-브엘세바에 이르는 도상에 있었고 시내 반도 고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성읍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유입해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차단될 것이다.

 

반면에 클라크는 이를 유다의 남쪽까지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말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파괴될 것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13: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유다의 처벌이 그들의 죄에 대한

완고한 성향에 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임을 최종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내용이다.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예루살렘렘을 향하여 전달되고 있다.

'거기 살던 수많은 부유한 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양떼들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슬프게도 그들은 바벨론 군대 앞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 가버린 것이 아닌가?'

 

13: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너의 친구삼았던 자' '친구'에 해당하는 '알루핌'을 영역 성경 KJV는 '두령'(captains)으로

번역한 반면, 다른 성경들은 '친구'(friends)로 '각별한 동료'(special allies)로 각각 옮겼다.

 

실제로 이 단어는 '족장'(창 36:15) 혹은 '두목'(슥 9:7 )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한 벗'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잠 16:28, 미7:5).

여기서는 문맥상 후자의 뜻이 자연스럽겠다.

 

유다는 바벨론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기 전, 당시 중근동을 주름잡았던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과 동맹을 맺은 적이 있다(왕하 20:12-15). 그리고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애굽을 격파했을 때에도, 유다는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며 동맹을 맺은 바 있다(왕하 24:1).

 

13:22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자기 만족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자들의 물음이다. 그들은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구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파멸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이스라엘의 적이나 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질문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22:8,9, 애 2:15, 16, 겔 5:14, 15 등),

 

예레미야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언약 파기'란 말을 사용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22:9).

 

한편, 유다에 임한 심판이 본절 하반절에서 치마를 걷어올려 치부를 노출시키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는데 이는 곧 민족의 참사를 벌거벗고 강간당한 육체에다 비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치마가 들린다'는 말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성폭행 당한 것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쓰였다(레 20:17, 신 22:30, 사 47:3 등).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느뇨'

굳어질 대로 굳어지고 패역할 대로 패역하여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유다의 죄악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검은 피부가 원한다고 해서 흰 피부로 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 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이 유다의 죄악은 이제 변할 수 없는

제2의 천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죄악에 익숙해 있었으며, 습관화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취득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Cla rke).

 

13: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사막 바람' 이 바람은 광야에서 유다 남쪽으로 불어오는 폭풍우를 동반한 광풍이다.

 

13: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진 유다의 분깃이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며 몫이다.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거짓'이란 바알을 위시한 이방 신들 혹은 유다가 의뢰했던

이방 열강들을 지칭한다.

 

13:26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유다가 거짓 것에 골몰하고 집착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배신이며 영적 간음 행위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이제 여호와는 유다의 수치스러운 부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유다의 가증스러운 죄악을 지적하는 세 가지 어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언덕과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가증스러운 일들을 하여 왔다.

이 구절은 전체적 내용은 이교신들에 대한 종교 의식과

그 의식에 수반되는 부도덕한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

 

요시야는 B.C. 622년의 개혁 운동을 통하여 이런 악습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이내 예전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며,

요시야 이전의 아사 왕(왕상 15:9-15)이나 히스기야 왕(왕하 18:1-6)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외적인 개혁만으로는 결코 인간의 내부에 있는 부패한 심령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자발적이고도 전폭적인 회개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외적인 압력을 사용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없는 것이다.